대통령에게 비상대권(非常大權)을 許하라
대통령에게 비상대권(非常大權)을 許하라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6.04.12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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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 대통령제의 올바른 이해

대통령은 필요하면 국회 해산을 위한 개헌을 해야 한다. 

여당은 비상시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준비해야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元帥)이다.’ 

우리 헌법 제66조 1항에 나오는 내용이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정치철학은 매우 심대하고 장구해서 한 권의 책으로도 모두 담기 어려울 정도다. 

우선 ‘국가의 원수’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에 대통령은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Vetum Imperium)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가 아니라, 임기 내내 ‘국민들의 원수(怨讐)’라는 비판에 시달린다. 

국민들의 환호와 아쉬움의 박수 속에 퇴임한 대통령이 없다.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욕지거리가 다반사다. 김영삼 대통령(YS) 이후, 한국인들에게는 “대통령 찍은 손가락을 잘라내고 싶다”라는 말이 관례가 되어버린 지경이다. 이런 상황은 정상일까. 그리고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의 근본 원인에는 우리가 대통령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거나, 알고 있다 해도 오류로 인해 대통령제 운영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통령은 행정수반으로서 단지 행정 집행관(executor)의 우두머리라는 정도의 생각을 하며, 또 그런 관점이 민주주의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국회와 같은 의회가 민의(民意)를 대변하고, 입법부인 의회가 정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정치철학에 입각하고 있다. 

▲ 민주공화국의 원수인 대통령에겐 헌법질서 안에서 군주와 같은 권한이 주어져야 단일하고 분할되지 않은 주권의 행사가 가능해진다.

주권은 대리될 수는 있지만 대의되지 않는다 

“주권(主權)은 대의(代議)되지 못한다.” 

이 말은 루소가 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지만, 루소의 이 통찰은 두고두고 정치학자들을 괴롭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국가의 주권은 양도되지 않으며, 국민 개개인에게 분할되어 부여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주권의 양도 불가능과 단일성’이라고 한다. 

한 국가의 주권은 국민이라는 의제된 인격체 전체에 부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주권은 오로지 국가를 대표하는 1인에게만 그 행사의 위임이 부여된다. 다시 말해 의회는 국민 주권을 대의하지 못하며, 대의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국 보수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버크 역시 루소의 주장에 동의했다. 위정자는 자신을 선출한 유권자의 뜻과 관계없이, 유권자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내려야 한다. 따라서 주권은 대리될 수는 있지만, 대의되지 않는 것이다. 한 예를 보자. 

새누리당은 이번 20대 총선에서 최저임금을 현재 시간당 6300원에서 단계적으로 올려 2020년에는 9000원으로 올리기로 하는 공약을 발표했다. 당연히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환영하겠지만, 자영업자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국민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국민들이 만장일치의 뜻을 갖기 이전에는 그 누구도 국민의 뜻을 내세워 이를 대의하지 못한다. 

다수결의 원리가 있다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니다. 옳은 결정이 다수로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으며,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국민 다수가 원해도 보편적 당위에 의해 실행할 수 없는 원칙들이 존재한다.

루소는 이런 것을 ‘일반의지’라고 규정했다. 즉 국민의 99.9%가 찬성하더라도, 그 찬성이 ‘보편적 선(善)의 의지’안에 있지 않는 한, 주권의 최고 대리자는 이를 결정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책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국가의 정치공동체란 지금 살아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자와 태어날 자들을 포함한 만장일치의 규약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이 근대 민주주의 시민정부를 정당화하는 사회계약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런 정치질서의 원리를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헌법이 표방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라는 헌법 핵(核)에 반해서 사회주의나 전체주의를 선택할 수 없다. 설령 그런 제도에 찬성하는 국민이 과반수가 되더라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내전을 통해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수립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국회의원 전원이 헌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체제로 변경하는 헌법개정안을 제출하더라도 그것은 국민을 대표하는 공화국의 원수 1인에 의해 거부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공화제에서 의회가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 공화제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의회는 국민의 뜻을 대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공화제=군주제+의회제

이런 정치철학을 이해한다면 공화제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권력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민주공화제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합친 것이 아니라, 군주제와 의회제를 결합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의 원수인 대통령은 헌법질서 안에서는 군주와 같다. 그래야만 단일하고 분할되지 않는 주권의 행사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경험은 미국의 대통령제가 걸어 온 길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1776년 7월 4일, 13개의 북아메리카 영국 식민지들은 공동으로 독립을 선언한 후, ‘대륙회의’라는 회의체를 결성했다. 이 회의체에서 프레지던트(President)라는 직의 의장은 지금의 미국 대통령과 달리, 회의체의 결정을 집행하는 집행관에 불과했다. 

그 결과 13개 주의 대륙회의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비효율이 극에 달했다. 마치 강대국과 약소국들이 참여하는 유엔에서 사무총장의 역할과 같은 것이라 보면 맞을 것이다. 

영국과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대륙회의는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제헌의회를 열고, 의장인 조지 워싱턴을 초대 USA의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이때 대통령은 단지 과거의 집행관이 아니라, 의회로부터 독립되고 오로지 헌법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군주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의 공화제 모델은 당시 영국 입헌군주제를 참고했지만 결정적으로는 고대 로마의 공화제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그 형태는 군주(대통령)-귀족 원로원(상원)-민회(하원)였다. 

필라델피아 제헌의회의 USA 공화제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세계 최초로 고대 로마제국의 공화제가 헌법 안에서 부활되었기 때문이다. 제헌 군주 대통령과 함께 보수주의적 엘리트로 구성된 미국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 시민들로 구성된 하원의 임기는 2년으로 제한해 의회의 대통령 흔들기를 막았다.

또 상원은 하원의 입법안을 심사해서 통과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이는 대통령에 비해 의회의 권한에 더 많은 제약을 둔 제도였다. 

그 결과 미국의 대통령들은 가장 높은 도덕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1·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세계를 리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국력도 국력이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대통령의 리더십을 빼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통령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회 우월주의로 기울어져 갔다. 상원의 보수성은 사라지고, 상원과 하원의 구별 의미는 없어졌다. 그 결과 미국도 포퓰리즘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이미 20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을 통해 세밀하게 고찰한 바 있다. 그는 그리스 동맹 내에 있는 폴리스들의 다양한 정치체제를 관찰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군주정이 타락하면 참주정(독재)이 되고, 귀족정이 타락하면 과두정이 된다. 군주와 민회가 함께 존재하는 혼합정이 타락하면 민주정(Democracy)이 된다.’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공화제라고 불리는 혼합정이 타락하면 민주정이 된다고 했다. 즉 공화제에서 군주의 역할이 없이 의회 중심으로 가는 민주정은 타락한 정치제도라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의원내각제를 하는 나라들에게 왕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의회주의가 타락하지 않도록 지켜내는 마지막 보루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입헌군주 내각제를 하는 국가들의 경우, 왕과 수상은 만장일치로 서명이 이뤄져야 하며, 왕과 수상 가운데 의견이 다르면 한 쪽이 사퇴해야 한다.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등이 이런 제도를 갖고 있다. 즉 국왕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정치의 막후 조정을 담당한다. 그 역할은 초정파적이며,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하는 ‘왕실협회’ 명사들이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듯 의회 중심의 정치질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19세기 독일 보수주의 법 철학자 프리드리히 슈탈이 말한 것처럼 “살아 있는 제 권력들이 복종해야 하는 최고의 존엄”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당위성의 위계로 인한 통합이 가능해진다. 독일은 자연법 이념과 국가교회들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에게 비상대권 부여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을 행정부의 수반 정도로 그 권력을 제한하려 들어왔다. 심지어 대통령을 한 개인으로 여겨 명예훼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여기는 천박한 인식도 야권에서는 드러냈다. 그런 이들은 왜 프랑스의 ‘국가원수 모독 금지’라는 법이 130년 간 지속해 오다가 2013년에야 폐지되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법이 2013년에 폐지되었다고 해서 프랑스가 그 이전까지는 독재국가였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프랑스는 공화국에서 대통령이 어떤 위상을 갖는지, 정치철학적으로 잘 인식해 왔기에 ‘국가원수 모독죄’를 130년 간이나 지속시켜 왔던 것이다. 그들의 민주주의 철학이 우리 한국보다 못해서가 아니었다. 

국가의 원수, 즉 공화국의 대통령에게는 ‘완전한 명령권’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바로 근·현대 헌법철학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독일 법 철학자 칼 슈미트의 관점이다. 그는 국민주권의 문제로부터 “주권자란 비상시에 결단할 수 있는 자”라는 명쾌한 개념을 도출했다. 즉 주권자인 국민은 국가의 비상시에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국민이 개인이 아니기에 국민 각자의 결단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주권 위임 행사로서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단은 오로지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만이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에게 ‘완전한 명령권’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이를 대통령의 비상대권(非常大權)으로 헌법에 부여해 왔다. 

대통령의 비상대권은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현장에서 국민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 효력은 헌법에 미치기에 헌법을 초월한다. 이런 정치철학과 법철학은 1972년, 10월 유신의 결단이 이뤄지는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10월 유신의 문제는 그런 결단이 필요한 정도의 국내외 위기 상황이 있었는가로 그 정당성이 논해져야 한다. 

당연히 그러고도 남았다. 미·중 데탕트 분위기와 베트남 전쟁의 패색,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화에 따른 김일성의 전군(全軍) 현대화와 4대 군사노선의 완비를 통한 남침야욕의 노골화, 여기에 닉슨 독트린에 의한 미군 철수가 현실화 됐고, 2차 오일쇼크로 경제는 붕괴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야당이 보인 행태는 그 아무런 개혁도 수용하지 않으며 데모대 틈에 끼어 정권을 규탄하는 것이 모두였다. 국정은 완전히 파행되어 민주주의는 실패하고 있었다. 결단해야 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칼 슈미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 앞에서 “진보주의자들은 그 낭만성에 의해 끝없는 대화를 추구하다가 결단의 정치적 시점을 놓치며, 자유주의자들은 결단을 회피함으로써 역시 정치에 실패한다”고 그의 <정치신학>에서 주장했다. “주권자란 비상시에 결단할 수 있는 자”라는 그의 통찰은 공화제에서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에게 어떤 권한이 필요한지 선명하게 알려주는 깨우침이다. 

국민들은 비상시에 결정하지 못한다. 단일한 주권이 국민 개개인에게 분할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결정은 다수결로도 이뤄질 수 없다. 오로지 국민을 위해, 국민에게 가장 좋은 상태가 되는 조건으로 대통령이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국회 해산 위한 개헌해야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통진당 해산과 개성공단 철수라는 결단을 지켜봤다. 이제 그런 결단이 다시 한 번 일어나야 한다. 국가 위기가 이제 1~2년 안에 분명하게 현실화 될 것이기에 그렇다. 북한은 올해와 내년에 미·북 회담에서 자신들의 종전협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결정적인 대남 우위의 국지적 도발을 감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영토의 일부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할 수도 있다. 미·북 평화회담과 북한의 핵무기 실전 배치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위기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체감하는 그 위기감은 너무나 낮은 것이 문제다. 

따라서 대통령은 이 모든 개혁의 이니셔티브를 지녀야 한다. 필요하면 국회 해산을 위한 개헌도 해야 한다. 여당은 비상시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준비해 놔야 한다. 그런 리더십과 통치권에 의해 철옹성 같은 반체제적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해체되어야 한다. 종북 세력들과 이들을 두둔하는 반체제적 언론들에게도 결단은 내려져야 한다. 

정치공동체란 외부의 적과 내부의 동지를 구별해 결속한 동질적인 국민들을 말하는 것이지, 적을 이롭게 하고 반(反)헌정적 가치를 민주로 주장하는 이들을 포함하는 질서가 아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주권자는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행사가 다름 아닌 대통령에게 있으며, 주권을 대의하지 못하는 대리인들인 의회는 대통령의 정당한 통치권의 행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오직 강력한 대통령의 리더십만이 국가 위기 상황을 관리하고 돌파할 수 있다. 

대통령이 민주공화제에서는 ‘완전한 명령권(Vetum Imperium)’을 갖는 최고 존엄이자, ‘헌법안의 군주’라는 이유는 바로 국민 주권이 바로 이 대통령에게만 유일하게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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