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의 세 차례 방북(訪北)이 남긴 교훈
카터의 세 차례 방북(訪北)이 남긴 교훈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4.20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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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 교수의 심층추적] 親北 대통령 지미 카터 해부(下)

카터의 방북은 서투른 협상 능력으로 북한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보냄으로써 북한이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의 귀중한 시간을 벌게 해 줘. 결과적으로 그는 이적행위를 한 셈 

미국 39대 대통령이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지미 카터는 퇴임 후 더 바쁘게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한반도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북한을 1994년, 2010년 그리고 2011년 세 차례에 걸쳐 방문했다. 그런데 그의 방북이 한국을 위해 도움을 준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도움이 아니라 훼방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그 근본적 이유는 친북 성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카터의 이런 방북 행각의 자세한 내막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살려주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공헌한 인물로만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그는 2010년 3월 말 고려대에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기 중 카터가 의도한 것은 주한미군 철수를 협박하여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를 흔들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개선을 강요한 것이었다. 퇴임 후에는 ‘한반도 평화의 중재자’로 자청하면서 남북한 간의 대화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와 긴장완화 및 남북한 혹은 미북 간의 평화협정 체결이었다. 과연 그의 동기와 목적은 얼마나 정의롭고 공정했으며, 또 제대로 달성되었을까? 

김정은의 4차 핵실험이 성공적으로 단행되고, 심지어 미 본토까지 사정거리로 삼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 초기 수준이지만 상당한 진척을 이뤘다는 영국 BBC 방송 보도를 접하는 이 시점에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얼마나 한반도 평화 정착에 크게 기여했는지를 재검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카터의 세 차례 방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논란 거리로 남게 된 것은 그의 첫 번째 방북이었다. 1994년 그 당시는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로 핵 위기가 고조되어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1994년 초부터 필자는 미 조지타운대학 방문교수로 가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거의 매일 북한 핵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어 주요 언론의 단골 메뉴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와 미 군부는 극비리에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 폭격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핵 개발에 대한 물리적 타격을 더 늦출 경우 은폐 수단이 한층 교묘해지고 갱도 깊이가 깊어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군사적으로 타격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1994년 핵 위기 때의 1차 방북은 누구 작품인가? 

한반도의 전쟁 위기가 감도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때 혜성같이 나타난 카터 전 대통령은 방북을 자청했고, 클린턴 행정부는 처음에는 당황해했지만 이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훗날 클린턴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 의하면, 미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심도 있는 무력공격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1994년 3월 하순 북한의 심각한 핵 위기가 시작됐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3월 30일 언론에 말한 대로 나는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북한 사태는 그 후에도 악화돼 북한은 5월 사찰단의 활동을 막은 채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빼냈다.… 

6월 1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 방문 용의를 밝혔다. 나는 앨 고어 부통령 및 국가안보팀과 협의 후 시도해 볼 만하다고 결정했다. 그보다 3주 앞서 나는 보고서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양측이 입을 막대한 피해 규모에 관해 정신이 번쩍 드는 내용이었다.” 

페리 당시 국방장관은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피해가 막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클린턴 대통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상호 판단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이번 자서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카터의 방북은 그 자신이 원했던 것인가? 아니면 북한의 김일성이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의 위기를 포착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긴밀하게 미국의 친북 정치인을 찾아 나섰다가 카터와 연결된 것인가?  1994년 북핵 위기가 지난 13년 뒤에 발간된 카터의 자서전 <백악관을 넘어>에 의하면, 1990년부터 김일성이 카터의 방북을 권유한 것으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카터가 방북을 수락한 이유는 북핵 위기로 인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고 결국 “미 정부의 허가와 상관없이 방북하기로 결심했으며, 북쪽에 방북 초청의 유효성과 ‘위대한 수령’의 개인적 초청인지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 카터는 영변 핵시설 폭격론이 대두됐던 1994년 6월 15일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핵개발 동결 및 대북제재 중단을 합의했다. 북한의 핵 개발을 위한 시간 벌기 전술에 놀아남으로써 역사에 심각한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카터는 1994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북한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했다. 김일성은 카터에게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중단한다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하겠다”고 제의했다. 카터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1차 북핵 위기는 일단 진정되었다. 

당시 미국과 한국 내 언론에서는 카터가 김일성 북한 주석과 회담하고 남북 정상회담 약속을 이끌어내는 등 미북 협상의 물꼬를 튼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1994년 6월 15일에 있었던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과의 합의는 클린턴 행정부와 조율을 거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여 북핵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신중한 마음보다는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려는 명예욕이 앞섰기에 김일성과 약속을 성급하게 하고 만 것이다. 

원래 북한의 의도는 핵을 영원히 폐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원조 상황에 맞춰 ‘잠시 동결한다’는 전략이었다. 카터는 신중히 생각하지도 않고 이 카드에 헐레벌떡 동의하고 만 것이다. 

카터가 남북 정상회담 성사? 

카터-김일성 합의는 언제든지 북한이 구실을 삼아서 핵개발을 재시도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 것으로, 애초부터 첫 단추가 잘못 꿰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외교적 주도권을 커터에게 빼앗긴 채 엉거주춤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이것은 그해 7월 미북 고위급회담을 거쳐 10월 21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의 기초가 되었다. 

방북 사흘째인 6월 17일 대동강 강변에서 카터와 김일성의 뱃놀이 회담은 언론에 의해 남북관계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직접 만나겠다는 김일성 주석의 의사를 확인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합의의 돌파구를 연 것처럼 보였다. 의기양양하게, 그는 자서전에서 대동강 뱃놀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즉각 정상회담을 할 것을 요청했는데 김 주석은 선뜻 동의했다.” 

그는 또 한 달 뒤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으나 후계자 김정일은 아버지가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고 밝혔다. 그는 2009년 11월 23일 타이 <네이션>과의 회견에서 김일성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는 매우 총명하고 영리했다”며 “나는 그와 꽤 잘 통했다”고 회고했다. 

이 당시 방북에서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서 왜 그토록 행복에 젖은 얼굴 표정을 지었는지 의아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독자들은 1979년 6월 말 미국의 아시아 맹방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의 엄숙하고도 기세당당했던 카터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점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을 너무나 신뢰한 카터 

카터는 “김일성과의 약속을 정말 중요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터는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가 서방세계와는 달리 언제든지 약속을 깰 수 있는 체제라는 점을 간과했다. 

며칠 후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대신 핵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생산해내지 않는 새로운 원자로 건설과, 그에 따른 중유 공급을 약속받았다. 북한의 공격을 퇴치한다는 미국의 ‘작전계획 5027’은 가동 일보 직전에 취소됐다. 

카터의 자서전은 영변 폭격 중단에 대한 김영삼 당시 한국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99년 10월 19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회견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한을 공격하지 말도록 설득했다며 “내가 설득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과연 이 시점에서 볼 때, 북폭을 말린 것이 자랑스러운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전·현직 대통령 카터, 클린턴과 한국의 현직 대통령 김영삼 등 3인이 모두 선제 북폭을 반대하는 주역(主役)으로서 크게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우유부단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시간을 벌게 하고 핵 위기를 연장,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엇보다 카터가 자신의 권한 밖에 일임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국제적 대북제재로 인해 코너에 몰린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게 해주는 중요한 거간꾼 노릇을 함으로써 이로 인한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두 번째 카터의 방북은 2010년 1월 불법으로 북한에 들어간 미국인 곰즈(Aijalon Mahli Gomes) 씨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당시 30살인 곰즈가 불법으로 북한에 들어간 이유는 미국에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한국에서 약 2년 동안 영어 교사를 했다고 알려졌을 뿐이다. 

북한은 그에게 불법 입국 혐의로 8년 징역과 70만 달러 벌금형을 선고했고, 북한은 곰즈가 지난달 자살을 시도한 뒤 입원 중이라고 발표했다. 카터는 8월 25~27일 간 평양을 방문하여 곰즈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김정일이 카터와의 면담을 거절한 이유는 북핵 개발 포기에 대한 약속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터의 친북 행각, 미국에서도 거센 비판 받아 

카터의 방북기간 중 김정일은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카터와 김정일 간의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곰즈 석방 외에는 특별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박의춘 외무상,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과 만나 한반도 비핵화와 6자회담 재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으나 이후의 한반도 정세에는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카터는 귀국 후 2주 뒤 기자회견에서 “내가 만난 북한 지도부 인사들은 미국과 북한, 또 남북한 간의 영구적인 평화협정과 한반도의 비핵화를 가져올 수 있는 평화협정 관련 대화를 하길 간절히 원했다”고 전했다. 이번에도 카터는 자신의 대북 인식에 별다른 개선점을 보이지 않았다. 

2011년 4월 하순 카터는 마지막 방북을 시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4월 26~28일 전직 국가수반 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 방북단의 단장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디 엘더스 측은 이번 방문단은 비핵화를 포함해 한반도 긴장 완화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북한 내 심각한 인도주의적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방북한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4월 25일 연합뉴스와의 회견에서 북한에 가면 미국과 중국을 포함, 한반도 전체의 관련 당사자 간에 신뢰와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는 문제와 비핵화, 인권 문제를 얘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터는 평양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북 지원과 직접 대화를 호소했다. 

한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행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미국과 한국 내에서 연이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카터의 행보를 지켜본 미 언론은 그의 친북 행보가 북한의 민주화나 인권 개선에 대해 공헌한 바가 전혀 없다는 점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북한자유주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수잔 솔티 미국 디펜스포럼 대표는 4월 27일 기자와 만나 “전직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북한의 인권 상황을 철저히 외면한 채 북한 정권을 달래려고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나를 비롯한 미국 (북한 자유주간 참여) 대표단은 카터의 방북을 만장일치로 비판한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나쁜 일(mischief)’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에 대한 인권 개선 거론은 카터로서는 엄두조차 낼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 이유는 만약 카터가 북한 인권을 거론한다면 아예 그를 초청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카터가 북한의 식량 부족 문제를 이명박 정부 탓으로 돌림으로써 북한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북한 식량 문제의 근본 원인이 남한의 식량 지원 중단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의 실패한 경제정책과 구호 식량을 전용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진정으로 몰랐던 것인가? 실제로 그는 북한의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것인가? 

카터의 방북은 이적행위였다 

결국 세 차례에 걸쳐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의 방북은 서투른 협상 능력으로 북한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보냄으로써 미국의 대북 의도를 오판하게 하여 핵개발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게 해 줬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적행위를 한 셈이다. 

카터의 친북 행보에 얽힌 두 가지 교훈은 ①미국 내 친북세력이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정치, 언론 및 학계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②이런 인물이 또 다시 백악관에 입성하면 한미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온다는 점이다. 

모쪼록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공화당의 트럼프 대선 후보가 만약 백악관에 가게 된다면 제발 카터와 같은 ‘불행한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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