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500권 발간이 목표
책 500권 발간이 목표
  • 이근미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4.22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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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만난 사람]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펴낸 작가 고정욱

장애인 고충 알리는 책 250권 써서 400만 부 판매. 1년에 영화 200편 이상 보고 각종 심사, 자문회의, 사외 이사, 방송 출연 등 세상과 접하며 현실 감각 유지 

글 이근미 소설가·미래한국 편집위원
사진 이윤기 포토그래퍼 

지난 3월, 250번째 책 <인문학 따라쓰기>를 출간해 국내에서 가장 책을 많이 발간한 고정욱 작가는 여러 면에서 기록을 세웠다. 250권 가운데 150권은 동화이며 주인공이 모두 장애인이다. 나머지 100권은 소설, 수필집, 자기계발서 등 다양하다. 공저와 편저, 엮음이 20여 권 포함되어 있다. 

그는 한꺼번에 20여 권의 책을 진행하는, 컨베이어벨트 식 저술을 하는 걸로 유명하다. 지금도 20권의 책을 동시에 만들고 있다는데 ‘구상, 초고, 1교, 2교’ 등으로 구별하여 매일 글을 쓰고 고치고 송고하느라 바쁘다.

그는 문화일보 단편소설 당선 2년 만인 1994년에 장편소설 <원균>을 출간했다. 20만 부가 팔려 인세로 서울 강남에 집을 산 후 몇 편의 소설을 더 냈으나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1997년 모 출판사에서 어린이 동화 선집을 내려고 하니 좋은 작품을 선별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그 일을 위해 1년 동안 2000여 권의 동화를 읽었다. 

“비슷한 기획의 책이 먼저 나오는 바람에 선집 출판은 중지됐어요. 대신 나는 동화를 어떻게 쓰는지, 어떤 동화가 재미있는지, 감을 잡았죠. 얼마 후 우리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데 영 마음에 안 들어요. 불평하지 말고 내가 쓰자, 그래서 동화를 쓰게 되었지요.” 

첫 장편 동화 70만 권 팔려 

첫 장편동화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 70만 권 나가면서 고정욱이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장애인 형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동생이 겪는 갈등을 담은 책이다. 

이어 <안내견 탄실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가 각각 30만 부씩 나갔다. 2004년에 MBC 독서캠페인 방송 ‘느낌표’에 <가방 들어주는 아이>가 선정되면서 100만 부 넘게 팔렸다. 250권 가운데 10만 권, 20만 권 나간 책도 많고 1만 권을 넘은 건 셀 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그의 책이 400만 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창작동화 시장이 막 꽃피던 시절에 동화에 입문해서 운이 좋았죠. 밀리언 셀러는 하늘이 정해준다고 생각해요.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초기에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방송을 타면서 불티나게 팔렸고 지금도 잘 나가고 있어요.” 

2007년에 출판시장이 꺾이기 시작하여 2010년부터 판매율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게 출판가의 체감온도다. 해가 갈수록 상황이 더 나빠지면서 문을 닫은 출판사가 부지기수다. 자연히 출판사들이 출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고, 결국 책을 내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고정욱 작가 역시 2010년부터 책 판매가 줄어드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그는 흥행 신화를 계속 이어갔다. 2009년부터 시작한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가 20만 권 넘게 나가면서 요즘 ‘잘 나가는 청소년소설 작가’ 대열에 올랐다. 

“2009년에 출판사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를 쓰자고 하더군요. 구상을 하는데 청소년 소설로 쓰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보도 넣고 교훈도 넣고 연애 이야기도 넣어 요즘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도록 쓰고 있죠. 

나이 들어도 언제나 동심 

소설가에서 동화작가로, 청소년 소설 작가로 변신하면서 계속 베스트 셀러를 내는 비결을 묻자 그는 두 가지를 꼽았다. 

“내적으로 여전히 동심을 갖고 있어요. 나이 들어도 천진난만하고 철없고 장난꾸러기 같은 면이 있고 또 하나는 학교로 강연을 다니면서 요즘 아이들과 대화하고 관찰하는 게 큰 재산이에요.” 

정말 중요한 요인은 융합과 복합을 통해 목적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는 그는 생각나면 바로 메모하고, 필요한 걸 융합시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작가에게 주는 최고의 문학상은 독자들이 많이 사주는 거예요. 내 이야기는 메시지가 확실해요. 내가 태어났을 때보다 내가 떠났을 때 더 나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 속에 ‘장애인 주차구역에 차대지 마라, 엘리베이터 만들어라,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아라, 소풍에 데리고 가라’고 썼다. 이제 대부분의 초등학교에 엘리베이터와 장애인과 함께 공부하는 특수학급이 있다며 많은 것이 개선되었음을 느낀다고 했다. 

성균관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기 위해 여러 차례 지원했지만 “우리 학교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우리는 건강한 선생을 원한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후배 장애인들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하며 그는 책에 사인을 할 때도 ‘장애인의 친구가 되세요’라고 적는다. 

그는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못 걷게 되었다. 다섯 살 때 ‘왜 나만 기어 다닐까. 왜 내 다리는 힘이 없을까?’라는 고민으로 우울했다는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처지를 인정하자. 울어봐야 나만 손해다. 안 되는 거 갖고 울지 말자.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자”로 마음을 바꿨다. 그럼에도 자신이 장애인이 된 것에 대한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장애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친할머니가 “얘는 학교 보낼 필요 없다. 도장 파는 기술을 가르쳐라. 그래야 먹고 산다. 정욱아 도장 파는 연습해라” 고 말하고, 옆집 아주머니는 “시골에서 중학교만 졸업한 여자를 민며느리로 사와서 정욱이 장가보내라”고 했다. 

장애인들을 위하여 

또 “이런 애는 외국에 가서 살아야 한다. 홀트에 맡기라”고 코앞에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성균관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소설가가 되었으며, 연애결혼을 하여 자녀 셋을 낳았다. 그는 부모님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대령으로 예편했다. 

“저에게 사랑을 듬뿍 주시면서 책임과 의무에 대해 확실히 가르치셨어요. 공부 못하면 야단치고, 대신 내가 잘 하는 일은 지원해주셨죠. 중학교 때 내가 그림을 잘 그리자 덕수궁에서 열린 피카소 전시회에 데려가셨어요. 개학하고 미술 선생님이 피카소 전시회 본 사람 있냐고 할 때 나만 손들었죠. 어릴 때부터 자존감을 느낄 수 있게 부모님이 보살펴주신 것이 감사해요.” 

강연하러 가서 아이들이 웅성웅성 떠들 때 “여기서 화장실까지 걸어갈 수 없는 사람 있어요? 선생님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1센티미터도 못 걸어봤어요”라고 말하면 일시에 조용해진다. 웃기고 울리다 종래에는 청중을 먹먹하게 만드는 그는 섭외 1순위 강사다.

2003년부터 도서관과 각 급 학교, 기관 등지에서 요청이 오기 시작해 점점 횟수가 늘어나더니 몇 년 전부터 1년에 300회 강연을 하는 초특급 강사로 떠올랐다. 인터뷰 도중에도 강연을 요청하는 전화가 두 차례 걸려왔다. 

“청중들에게 장애인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많이 알리죠. 제가 살아온 얘기도 하고. 얼마 전에 ‘우리 아내가 흠 있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매 맞으면서 시집왔다’고 하자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장애가 무슨 흠이에요?’라고 말해 제가 울었어요. 그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해서 안아줬죠.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에 일조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강연을 듣고 그에게 메일로 상담을 요청하는 청년들이 많다고 한다. 때로는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는데 “원하는 게 뭔지, 그 일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를 꼭 물어본다.

그에게 멘토링을 요청하는 성인들도 많다는데 “소명을 깨닫고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라”는 것이 그가 던지는 해법이다. 옛날 테두리에 갇혀 있지 말고 SNS를 활용해 소비자와 직접 소통하라는 그의 권유를 실천해 사업이 활기를 띠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많이 쓰고 많이 듣는 게 비결 

그는 마흔이 넘은 어느 날 자신이 장애인이 된 연유를 깨달았다고 한다.  

“내 책이 잘 팔리고 강연하면 애들도 선생님들도 울어요. 감동적이라며 다른 곳에 소개까지 해주는 겁니다. 내가 뭐길래 이런 대접을 받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문제없는 가정에서 자라 잘 생긴 데다(웃음), 공부도 잘했고, 이것저것 재능이 많은 너 같은 놈도 한 놈 있어야 글과 말로 세상에 장애의 아픔을 알릴 거 아니냐’는 말이 들리는 거예요. 그제야 장애인을 위해 조금이나마 공헌을 했다면 내 인생은 그걸로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해졌어요.” 

강연이 끝나면 90도 각도로 인사하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고 ‘장애인들을 차별하지 않을 게요’라는 팬 레터를 보내주는 이들 덕분에 그는 힘이 난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내 십자가는 남들보다 무겁지만 지고 올라가보니 금 십자가였어요. 그걸 모르고 버릴 뻔했어요.” 

그는 소명을 깨달으면서 인세 일부를 꾸준히 기부해 이미 2억5000만 원을 어려운 이들과 나눴다. 앞으로도 인세 기부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한다. 

책이 많이 팔린 비결을 묻자 “많이 써야 얻어 걸린다”며 250권 중에서 15% 정도가 효자였다고 전했다. 책이 나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알려야 한다며 자신의 차에 붙인 광고 포스터를 가리켰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기기와 첨단 기능을 나오는 즉시 익힙니다. 1년에 영화를 200편 이상 보고 각종 심사, 자문회의, 사외 이사, 방송 출연 등 요청이 오는 일을 기꺼이 하면서 세상과 계속 접해 현실 감각을 유지하는 거죠.” 

20권의 책을 동시에 진행하는 데다 매일 강연을 다니는 그는 운전을 하면서도 이야기를 휴대폰에 녹음한다. 녹음을 하면 바로 문자로 변환되는 기능을 활용하여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금주와 금연에다 체중이 늘지 않도록 수시로 운동을 하는 등 자기 관리에도 철저하다. 

그는 500권 발간이 목표라며 이제 겨우 반환점을 찍었다고 했다. 또한 100개 국에서 자신의 책을 낼 꿈도 꾸고 있다. 이미 미국, 일본, 중국, 대만, 태국에서 2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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