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링컨을 배워라
박근혜 대통령 링컨을 배워라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6.04.2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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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 20대 총선과 民意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위기 상황이 오면 결단해야 한다. 

대통령은 헌법의 제정 권력을 가진 주권자인 국민을 보호해야 하기에,

그 비상한 결단은 헌법을 초월한다 

선거로 뽑힌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뜻을 대의할 수 있을까. 

황당한 질문인 것 같지만, 저명한 정치철학자 세이빈은 그의 <서양정치철학사>에서 ‘루소는 이 질문으로 많은 정치철학자들에게 근심을 안겨줬다’고 썼다. 

‘주권은 대의될 수 없다’는 루소의 발견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정치인이자, 정치사상가였던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다시 확인됐다. 버크는 ‘선출된 입법의 대리자는 유권자의 뜻과 독립된 자’라고 했다. 

이 문제를 명백하게 한 이는 고전주의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상대주의적 통치론을 비판하며 ‘군주란 백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주권이 대의되지 않는 이유에는 통치자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 국민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20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언론들이 ‘국민의 뜻’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국민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수의 여론을 국민의 뜻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풀린다.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중요 정책과 입법안 마다 여론조사를 하고 선호도를 조사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의사는 ‘국민 의지’가 아니다. 일단 국민이라는 개념이 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분할되거나 양도되지 않는 한 국가의 주권을 가진 단일한 인격의 의제개념이다. 즉 국민의 자격을 가진 자는 개별적으로 법률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개별적인 통치주권의 행사는 불가능하다. 이는 오로지 위임을 통해서 가능하며, 이때 주권은 대리될 수 있지만, 대의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은 ‘우리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해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최선의 정치를 해달라는 위임이다. 따라서 ‘주권자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결단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현대 헌법철학에 이정표를 세운 ‘정치신학’의 칼 슈미트의 주장이다. 

고대 그리스나 이스라엘에서 위정자를 선거가 아닌 추첨으로 뽑은 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 고대인들도 자유와 평등을 원했으며, 한 정치공동체에서 주권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지배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비뽑기로 위정자가 된 이들은 자신이 뛰어나서거나, 자기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인민들이 있어서가 아니기에 오히려 신중하고 소신껏 국가 정무를 할 수가 있었다. 

단 이들의 도덕성이 문제였는데, 추첨은 신의 은총(Caritas)과 호명(呼名)에 의한 것이므로 신에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민회의 선거제를 통해 이러한 정신이 타락하게 된다. 폴리스들의 말기에 민회에 선출되려는 이들의 포퓰리즘은 극에 달했다. 

20대 국회에서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니, 대통령 역시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국민의 주권을 대의하지 못하는 의원들을 뽑는 선거로 ‘국민의 뜻’을 내세우는 것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더민주)과 국민의당의 공약이 모두 국민의 뜻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새누리당의 공약은 모두 국민의 뜻이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유권자들의 의원 선출은 지역주의와 정당 내 분파주의로 인해 그 주권의 행사가 온전히 국민 의사라고 보기 어렵다. 국회의원들이 각 지역에서 내건 지역공약이 국민의 일반의지인가? 그럼에도 어떻게 대통령이 국민 의사를 확인하라는 것인가. 

누가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은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도 개인의 해석일 뿐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갖는 의지는 일반의지(volonte generale)라는 것으로서, 개인을 초월한다. 누구도 국민의 뜻을 주권 행사의 결과가 아닌 것으로 말할 수 없으며, 그 내용도 주권 행사로 결정된 내용에 한해서만 말할 수 있다.

300인의 입법 대리인을 뽑는 선거의 국민주권 행사 결과는 그렇게 300인이 뽑혔다는 것 외에 아무런 국민 의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국민이 정권의 오만함을 심판했다는 주장은 그래서 국민이 야당을 대안으로 생각한다는 주장인지 모호하다. 누가 확실하게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국민의 의사는 새로운 20대 국회에서 이 300인의 입법 대리인들과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주권의 최고 위임 통치자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것뿐이다. 

확실하게 인식해야 하는 사실은 300명의 입법 대리인들은 국민주권을 대표하는 이들이 아니며, 이들에게는 국민 의사를 대의할 의무도 없다는 점이다. 이들도 국민들에게 ‘최선이 되는’ 결정을 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 정치철학의 필요성을 요구한다.

▲ 의회가 표결한 의사를 최종 결정하는 권한은 주권의 최고위임 결정자인 대통령에게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가위기 상황에선 보편적 선을 위한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모두 ‘국민에게 최선’인 것을 결정하려면 먼저 그러한 정책과 법안이 선(善)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선이 아닌 것이 최선(最善)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선을 향한 결정은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선의 기상이 드러내는 가치, 즉 진리에 착근해야 한다. 

진리는 보편성의 원리를 띠기에 우리는 합리적 이성과 보편적 도덕률을 통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지혜가 포함되어 공론(公論)의 장에서 즐거이 보편성에 복종하는 태도, 즉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Veritas vos liberabit)는 믿음을 지녀야만 민주주의는 타락하지 않는다. 

그러한 공론의 장에서 민주주의 타협이란, 특수성이 보편성에 그 정당성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지,그 반대가 아니다. 타협에도 되는 것이 있고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점을 정치인들은 쉽게 망각한다. 

빵은 둘로 나눠도 여전히 먹을 수 있는 빵이지만, 아기를 둘로 나눌 수는 없다. 의회가 ‘빵을 둘로 나누자’는 법안을 낸다면 대통령은 이를 수용할 수 있지만, ‘아기를 둘로 나누자’는 법안에 대해서는 거부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직접 국정개혁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지지를 모아야 한다. 대통령은 의회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라,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 따라서 국회에 대통령이 끌려 다녀야 할 이유는 없다.

만일 의회가 필요한 입법을 제 때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명령으로 필요한 국정의 규범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대통령은 오로지 국민에게 최선의 길만 내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국민들에게 맡겨야 한다. 만일 국회가 이를 거부한다면 국민이 나설 것이다. 

주권이 있는 국가의 정치공동체(Polity)는 개인을 초월한다. 정치공동체는 만장일치의 단일한 가치를 전제로 형성되며, 이로부터 칼 슈미트가 간파한 것처럼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부터 동지적 연대가 이뤄진 공동체의 가치질서가 바로 정치적 질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동질적인 국민들이 이질적인 사안들을 다루는 방법과 절차를 말한다. 이것이 의회의 ‘합의주의(consensualism)’라는 본질이다. 의회는 합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며, 합의가 이뤄지지 못하면 표결이라는 방식으로 그 의사를 확인한다. 그것은 결정이 아니다. 이에 대한 최종 심사의 권한은 주권의 최고위임 결정자인 대통령에게 있다. 이것이 민주공화제의 정치철학이다. 

국가가 위기를 맞을 경우, 주권자는 결단해야 

국가가 위기를 맞을 경우, 주권자는 결단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그러한 국민의 결단은 언제나 주권이 위임된 최고 통치자의 결단을 통해 이뤄진다. 대통령은 헌법이 천명한 국가의 원수로서, 그렇게 해야 할 권한과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노예제도 금지가 위헌(違憲)이었던 1854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을 링컨 대통령이 ‘선(善)에로의 결단’으로 돌파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858년, 링컨은 일리노이 주 공화당 상원후보 직을 수락하면서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한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이른바 ‘분열된 집(divided house)’이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해질 것이고,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한다.” 

미국 헌법이 노예제를 합법화하고 있었지만, 미국 국민들은  노예제로 인해 국론이 분열됐다. 연방은 위기를 맞았고, 문제는 해결되어야 했다. 1860년 대통령이 된 링컨은 노예제 문제를 정치적으로 결단하지 못할 경우, 미국은 더 이상 한 국가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링컨은 “노예제를 각 주의 자치에 맡기자”는 민주당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신(神)이 주신 질서가 있다. 그것을 위반하는 그 어떤 결정에도 반대한다.” 

결국 링컨은 노예제 폐지를 선언한다. 헌정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위헌적 결단을 내려버린 것이다. 이후, 링컨은 이에 반대하는 언론들과 집회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남부의 주들이 연방을 탈퇴하고 미국은 내전에 돌입했다. 링컨의 결단이 헌정 파괴였으니, 남부 주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미국의 정치질서는 새로운 ‘적과 동지’의 구별이 필요했다.  

대통령은 국가의 위기에서 그러한 초헌법적 결단을 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링컨은 선(善)을 선택하려는 목적으로 악(惡)을 지지한 헌법을 파괴한 독재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구도 링컨을 독재자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보편적 선(善)의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초월주의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국가위기 상황이 온다면 결단해야 한다. 대통령은 헌법의 제정 권력을 가진 주권자인 국민을 보호해야 하기에, 그 비상한 결단은 헌법을 초월한다. 주권의 최고 위임자의 비상결단은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이 선(善)을 향한 의지였는지, 그리고 결과가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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