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하면 죽는다”
“지키지 못하면 죽는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4.2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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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베트남 패망(1975년 4월 30일)

박정희 대통령, 사이공 함락 전날 특별담화 통해 “정부도 650만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끝까지 수도 서울 사수(死守), 대통령도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사수” 선언

1975년 4월 30일 오전. 월남의 수도 사이공((現 호치민 시)을 포위하고 있던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6개 방면에서 시내로 진격을 개시했다. 오전 11시 30분, 소련제 T-55 전차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의 철제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월맹 깃발을 게양했다.

사이공 시내 곳곳에는 백기와 베트콩 깃발이 내걸렸다. 평소 반미 시위에 열중했던 사이공 시민들은 그제야 이것이 본격적인 월맹군의 침략이란 사실을 알고 미국 대사관으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두옹 반 민 월남 대통령은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대표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무조건 항복하여 월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사이공을 점령한 공산군은 헌법을 폐지하고 경찰과 군인들의 무기를 회수했다.

▲ 월남 패망 전날인 1975년 4월 29일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탄손누트 공항이 포격을 당하고, 교민들이 철수선을 타고 사이공을 빠져나오던 4월 29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날 박정희는 “만약에 북한 공산 집단이 전쟁을 도발해 온다면, 전 시민이 이 자리에 남아서 사수해야 합니다. 정부도 650만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끝까지 수도를 사수할 것입니다. 대통령도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사수를 할 것입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4월 30일 월맹 공산군 탱크가 독립궁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월맹 깃발을 올리고 있던 시각, 박정희는 중앙청에서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월남 패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월남이 무조건 항복하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했을 줄 압니다. 그동안 월남에서 반(反)정부 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지금 피난길을 걸으면서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산군은 처음에는 티우 대통령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더니 후임인 후옹 대통령도 물러나라고 했고, 그런 뒤 민 대통령이 들어서자 그와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월남의 반정부 인사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지금 피난길을 걷고 있으면서 그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공산 치하에서 그 반정부 인사들이 지금까지 했던 인권과 자유를 달라는 그 주장을 계속할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지켜봅시다.”

파리 휴전회담

5년여의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역사적인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여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이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키신저는 이것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한편 월맹에서는 인질 형식으로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이것도 믿지 못해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파리 휴전협정은 총 12개국(4+4+4)이 참여하여 휴전을 약속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미국은 월남을 달래기 위해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즉 미군이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군력과 공군력을 투입하여 북폭(北爆)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부칠 때는 협상 테이블에 앉고, 유리할 때는 전투를 계속한다. 당시 월맹이 휴전협상 테이블로 나온 이유는 미군의 강력한 폭격과 경제봉쇄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도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전략은 변한 것이 없었다.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명백한 엉터리였다. 월남 내의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휴전을 체결함으로써 월남 정부는 총 인구의 90.5%를 지배했고,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지역, 나머지 4.5%는 공산 측 지배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베트남 휴전협정 내용 보고 크게 우려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1972년 10월 16일, 유양수 주베트남 대사가 긴급히 서울로 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협정 초안에 북월맹군의 철수 규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침략군인 북월맹군은 그대로 베트남에 남아 있으면서 외국군만 철수하게 되고 국제 감시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은 전쟁터에서 얻지 못한 것을 협상 테이블에서 얻으려 하고 있다. 이 협정안 그대로 휴전하게 되면 베트남은 1년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트콩은 1968년 대대적인 ‘구정 공세’를 통해 주도권을 쥐었다. 대규모 공세를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린 월남의 일부 좌경 지식인과 전직 관료들은 사이공에서 이른바 ‘월남 민족·민주·평화세력연합’을 결성하여 반정부 운동에 나섰다.

이로써 농촌이라는 한정된 지역에만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베트콩이 도시 지역에 활동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고, 1969년에는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미국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베트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말았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공산 간첩으로 침투하여 월남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부월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때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 후면 상세히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

1967년 9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차점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를 비롯하여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좋았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앞세워 정부 공격

이 와중에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승려 등이 ‘구국평화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의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대규모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했다. 여기에 종교인 대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운동가, 인권단체 등 거의 모든 단체들이 총집결하여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외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좌익 운동단체들이 수많은 언론사를 설립하고 월남 좌경화 공작을 전개했다.

이들은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 즉 정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앞세워 반정부 시위를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월남 정부는 곳곳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설쳐대는 공산세력들의 반정부 시위와 선전 선동전으로 인해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월남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가 벌어질 때마다 국론 분열과 반정부 운동이 극렬해졌다. 그들은 반공 우파 인사인 티우의 당선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극렬시위에 나섰다. 1973년 파리 휴전협정 이후 베트콩의 공세가 가열되자 월남 정부는 학생들을 징집할 수 있는 병역법 제정에 나섰다. 학생들은 “우리는 군에 갈 수 없다”면서 시위를 벌였다.

언론도 좌경화되어 공산당 선전선동의 도구로 이용됐다. 베트콩 대표였던 고 아 단이란 여성은 “파리 휴전협정에 의하면 공산주의를 선전할 수 있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데, 티우 정부가 이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월남 정부가 언론의 이적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법률안을 제정하자 좌익 언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언론 탄압”이라고 맞불작전을 전개했다.

1975년 9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선을 앞두고 분열하여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 등 혼란상을 연출했다. 이 와중에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외치는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840명이 암살을 당했다.

월맹 지도부, 대남 총공세 결정

대남 적화의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월맹 지도부는 1974년 12월부터 1975년 1월 8일까지 북월맹의 수도 하노이에서 노동당 정치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월맹 측은 국제정세 분석을 통해 미국은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월맹이 남침해도 월남에 대한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했다.

첫째, 1975년과 1976년까지 2년 이내에 전 국토를 무력 해방시킨다. 둘째, 우기(雨期) 전인 4월 하순에 총공세를 개시한다. 병력은 5개 군단 15개 사단 27만 명을 투입한다.

이 결정에 따라 1975년 1월 8일, 월맹군 병력의 배치가 개시되었다. 남침 총공세를 현장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극비리에 하노이를 떠나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 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했다.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 월남에서 총공세를 감행하여 프레이크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기습 점령했다. 3월 16일에는 고도(古都) 후에를 월맹군이 점령하자 월남 정부군은 중부 고원지대를 포기했다.

창졸간에 월맹군에게 기습을 당한 티우 대통령은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러자 ‘구국평화회복 및 반부패운동세력’의 지도자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중부 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반독재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월남 정부군은 지리멸렬하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도주하거나 공산군에게 투항했다. 3월 26일에는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5개 사단은 사이공을 향해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쾌속 진격했다. 4월 8일에는 월남 공군 조종사가 공산군을 폭격하기 위해 이륙했으나 기수를 돌려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하고 재야 정치인 두옹 반 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을 때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도 모두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어던진 다음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주했다.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했고, 군화도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샌들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다. 이런 거지 군대가 최신무기로 무장한 월남 군대를 단 50일 만에 붕괴시킨 것이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을 비롯하여 공무원과 사회 지도층 인사,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종교인, 학생, 민주 인사들까지 모조리 체포되어 인간 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었다. 베트콩으로 활동했던 월남 사람들도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하여 제거했다. 이 와중에 26만 명이 학살되었고, 350만 명이 수용소에서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월남 패망일, 박정희의 일기

월남이 패망한 날 밤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비장한 일기를 남겼다.


‘월남공화국이 공산군에게 무조건 항복.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한때 우리 젊은이들이 파병되어 월남 국민들의 자유 수호를 위하여 8년간이나 싸워서 그들을 도왔다. 연 파병 수 30만 명. 이제 그 나라는 멸망하고 월남공화국이란 이름은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하기 짝이 없다.
자기 나라를 자기들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의와 힘이 없는 나라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엄연하고도 냉혹한 현실과 진리를 우리는 보았다. 남이 도와주려니 하고 그것만을 믿고 나라 지키겠다는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망국의 비애를 겪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 눈으로 보았다.
조국과 민족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하한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결의와 힘을 배양하지 않으면 망국하고 난 연후에 아무리 후회해 보았자 후회막급일 것이다. 충무공의 말씀대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다.
이 강산은 조상들이 과거 수천 년 동안 영고성쇠를 다 겪으면서 지켜오며 이룩한 조상의 나라이다. 조국이다. 우리가 살다가 이 땅에 묻혀야 하고 길이길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지켜가도록 해야 할 소중한 땅이다.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지켜가야 한다.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서는 결코 안 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결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 전문은 미래한국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1975년 4월 29일)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gbn=DH&mediaid=1225&mediadtl=7170&quality=W

<국가안보와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1975년 4월 29일)

작금, 시국에 관한 나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국민 여러분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고자 합니다. 신문 지상이나 방송을 통해 매일같이 보도되고 있는 인도지나 사태를 보고 국민 여러분들도 매우 착잡한 심경에 빠져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특히 월남은 과거 우리 청년들이 그곳에 가서 피 흘려 가며 지켜준 땅이기 때문에 공산 수중으로 하나하나 넘어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 있는 우리의 심정은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크메르 공화국(캄보디아)은 드디어 지난 4월 17일 고군분투하던 정부군이 끝내 공산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세계 지도에서 크메르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월남도 지난 3월 초순 공산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이후 공산군보다 몇 배나 더 우세한 정부군이 있었지만 초기에 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데 실패하자 계속 후퇴하여 불과 한 말 남짓 만에 월남 공화국의 전 국토 3분의 2를 공산군에게 빼앗기고, 지금은 수도 사이공이 완전 포위되어서 사태는 매우 절박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 보도로는 사이공에 공산군이 상당수 침투했다고 합니다. 지난 4월 21일에는 드디어 티우 대통령의 하야가 있었고, 후옹 부통령이 계승했다가 또다시 민 장군에게 대통령 직이 인계되고, 지금 새 정부를 수립해서 공산군과 협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월남은 군사적 패배에 겹쳐서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혼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불과 열흘 사이에 대통령이 2명이나 경질되고, 조각도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월남 정부가 앞으로 월남 국민과 더불어 여하한 희생이라도 무릅쓰고 감내하면서 수도 사이공을 끝까지 사수해서 현재의 이 전세를 역전시키고, 이 어려운 국면을 다시 타개하고, 나아가서는 공산 측과 협상의 문호를 델 수 있는 일대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는 전망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로서는 아무도 예측을 불허합니다.

금년 봄에 들어와서 인도지나 반도의 정세는 급전직하로 급변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인도지나 반도는 지리적으로는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만, 그러나 인도지나 반도의 정세를 우리는 결코 ‘강 건너의 불’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인도지나 반도의 사태는 우리에게 지극히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즉 첫째의 교훈은, 공산주의자들과 맺은 평화 협정이다, 조약이다, 또는 긴장 완화다, 화해다 운운하는 것은 그들과 우리와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힘의 균형이 일단 깨지고, 우리에게 어떤 약점이 생기거나 또는 우리가 약하다고 그들이 보았을 때에는 지금까지 체결한 협정이니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휴지처럼 내동댕이치고 당장 무력이나 폭력을 가지고 덤벼드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기본 전술입니다. 공산주의자들과 휴전을 한다, 협정을 맺는다, 또는 대화를 한다고 할 때에는 우리는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런 데 응해 올 때에는, 그들이 힘으로서는 이쪽을 넘어뜨릴 수 없으니까 어떤 새로운 음모를 꾸며서 이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번 월남 사태도 73년 1월 소위 ‘월남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는데, 지난 2년 동안 공산 측은 오늘의 이러한 무력 침공, 즉 무력을 가지고 월남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월남측은 이에 대해서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의 교훈은, 자기 나라의 국가 안보를 남에게 의존하던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는 확실히 명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 나라는 자기 힘으로 지키겠다는 굳건한 결의와 또 지킬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방의 지원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지키겠다는 결의와 능력을 갖지 못할 때에는 남의 도움도 빌 수가 없다고 하는 냉혹한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인식을 해야 될 줄 압니다.

다음 세 번째의 교훈은, 국론이 분열되고 국내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에는, 일단 유사시에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크메르와 월남의 예를 보더라도 이 두 나라의 정부군이 공산군보다 약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병력이나 장비 면에 있어서는 공산군보다도 더 우세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패배했느냐 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국론이 통일되지 않고, 국민의 총화 단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정치 불안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즉 집안 싸움만 하다가 패전을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점을 특별히 타산지석으로 삼고, 또 교훈으로 명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면, 인도지나 반도 사태가 한반도 및 우리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도지나 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쓰고 있는 ‘인민해방전쟁’이나 ‘폭력혁명전략’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쓰고 있는 소위 ‘남조선 해방’이니 ‘남조선 혁명전략’이니 하는 것과 똑같은 아시아 국제 공산주의 전략의 일환이고, 또 그 공동 전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장 호전적이고 악명 높은 북한 공산 집단이 오늘의 인도지나 사태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그들은 어떤 흉계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해방 후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이것만을 연구해 왔고 이러한 음모만을 꾸며 왔던 그들이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지나 사태와 정세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크게 용기를 얻고 고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한반도에서도 소위 ‘인민해방전쟁’이니 ‘남조선 혁명’이니 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중공을 방문한 김일성은 북경에서 의기양양하여 큰 소리를 많이 쳤습니다. 그가 중공을 방문한 목적이라든지, 중공 수뇌들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것이다, 무슨 음모를 꾸몄을 것이다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김일성은 북경에 가서 “남조선 혁명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것이고, 전쟁이 나면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지극히 도전적인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년 연초에 나는 수차 이런 말을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 즉, 북한 공산집단은 금년을 소위 ‘남조선 적화통일’의 결정적인 해로 정해 놓고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할 만한 여려 가지 자료와 증거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써 여러 차례 “해방 30주년이요 노동당 창당 30주년인 금년을 혁명의 빛나는 승리의 해로 만들자”하고 되풀이 공언해 왔습니다.

또한, 우리의 이와 같은 판단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한두 가지 든다면, 국민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난번에 휴전선 안에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침을 위해 들고 들어온 땅굴 사건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2개를 발견하고 나머지를 탐색하고 있는 중인데, 아직도 아마 10여 개는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땅굴의 완공 시기가 언제냐 하는 것을 조사해 보니까 바로 금년 여름입니다. 그들은 1971년 가을에 착공해서 늦어도 금년 가을 전에 이것을 완공할 목표로 뚫고 내려왔던 것입니다.

또한, 북한에서는 지금 ‘6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데, 원 계획대로 한다면 내년에 끝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것을 1년 앞당겨 금년 10월 이전에 완공하라는 북한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지금 북한은 ‘속도전’이니 하여 야단법석을 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올봄부터 고등학교 이상의 모든 학생들이 학업을 전폐하고 ‘6개년 계획 1년 앞당기기 운동’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휴교를 하고 놀고 있는 동안에 공산 치하에 있는 북한 학생들은 학업까지 중단하고 ‘6개년 계획 1년 앞당기기 운동’의 노동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밖에 군사적인 분야라든지 사회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우리의 판단을 뒷받침할 만한 여러 가지 증거를 많이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금년, 즉 1975년에다 ‘타이밍’을 맞추었겠느냐, 시간적인 촛점을 맞추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도 여러 가지 이유와 판단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구헌법대로 한다면 1975년은 선거의 해입니다. ‘10월 유신’에 의해 유신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헌법이 바뀌었습니다만, 만약에 유신 헌법이 생기지 않고 구헌법대로 한다면 금년 봄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하는 해입니다. 아마 지금쯤 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고, 다음 달에 가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선거의 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사회 혼란, 정국 불안, 행정의 공백을 가져옵니다. 선거 때뿐 아니라 선거 전 6개월 혹은 1년 전부터 선거 바람이 불어 사회가 시끄럽고 혼란하고, 또 행정의 공백을 거듭하는 양상을 띠다가 선거 때가 되면 이것이 절정에 도달해서 그야말로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로 시끄러워지는 것이 우리나라의 선거 풍조입니다.

선거가 끝나면 조용해지느냐 하면 끝나고 나서도 때로는 반 년, 때로는 1년 동안 후유증으로 해서 시끄럽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처럼 매 4년마다 하는 선거를 중심으로 전후 1년 내지 2년 동안 여러 가지 사회 혼란, 정치 불안, 행정 공백으로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지난 71년도의 선거를 보고 이와 같은 시기에다가 타이밍을 맞춘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또 우연히도 소위 정권 수립 30주년, 노동당 창당 30주년, 해방 30주년 하고 일치가 되니까 여기에 타이밍을 맞춘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그들이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에 뜻밖에도 그들로 하여금 크게 용기와 자신을 얻게 하고 고무시켜 준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지나 사태인 것입니다. 그들은 인도지나 사태를 보고 이 시기가 ‘남조선 혁명’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일성이 이런 정세를 보고 있다가 안절부절 못해서 중공에 뛰어간 것 같습니다.

이상 여러 가지 일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고 판단해 볼 때, 금년은 북한 공산 집단이 불장난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을 우리가 감안해 볼 때, 나는 북한이 남침을 할 것이다 안할 것이다, 남침 위협이 있다 없다 운운 하는 정세 분석이나 토론을 할 시기는 벌써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 공산 집단이 전쟁을 도발해 왔을 때 즉각 이를 저지하고, 초전에 있어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서 그들이 늘 입버릇처럼 뇌까리고 있는 소위 ‘남조선 혁명’ 운운 하는 허황된 꿈을 이 기회에 철저히 분쇄해 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을 위한 우리들의 불퇴전의 결의와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행동 방책을 모색하고 검토해야 할 단계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공연히 갑론을박하고 앉아서 시간을 허송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국군과 주한 미군은 이런 사태에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고,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하한 적의 공격도 능히 이를 저지하고 격멸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들은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가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 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 굳건한 결의와 각오와 반드시 이겨야 되고 또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이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확실히 서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국민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전쟁은 군이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와 군과 또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힘을 한데 뭉쳐 총력으로 대결해야만 전쟁에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총력전이요 총력안보 체제입니다. 따라서, 군인뿐만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전사라는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총을 들고 있는 군인만이 전사가 아닙니다. 정치인도 언론인도 종교인도 공무원도 교수, 학생, 농민, 상공인, 모든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근로자 또 가정 주부 여러분들까지도 모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전사라는 굳은 결의와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똑똑히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맡은 책임에 대해서는 가장 성실히 이행하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또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면 여하한 희생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한데 뭉쳐 싸운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국민 중에 한 사람도 이 대열에서 이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요결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한 치의 땅도 적에게 양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도 분단된 이 나라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이것을 극복해 나가면서 피땀 흘려 건설해 놓은 이 조국을, 그리고 우리 조상의 뼈가 묻혀 있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손들에게 길이 길이 물려주어야 할 이 땅을 왜 우리가 공산당한테 양보를 해야 합니까.

왜 공산당한테 뺏겨야 합니까. 우리는 공산당들에게 조금도 해롭게 한 일이 없습니다. 해방 이후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피해만 당해 왔습니다. 더 이상 이유 없이 피해를 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만약에 앞으로 북한 공산 집단이 전쟁을 도발해 온다면, 우리가 사는 수도 서울은 절대로 철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전 시민이 이 자리에 남아서 사수해야 합니다. 정부도 650만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끝까지 수도를 사수할 것입니다. 대통령도 시민 여러분들과 같이 사수를 할 것입니다.

전방은 우리 군인들이 일보도 양보하지 않고 우리 국토를 수호할 것이고, 서울은 우리 시민들이 사수해야 할 것이고, 후방은 후방에 사는 우리 국민들이 제각기 내 고장, 내 마을, 내 가정을 사수해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고 내 고장을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고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어제가 바로 충무공 탄생 430주년이 됩니다만은, 임진왜란 때 이 순신 장군께서는 그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필사즉생(必死則生)’이요 ‘필생즉사’(必生則死)‘라. 이것은 명량해전 때 다 부서진 배 12척 거느리고 수백 척이 되는 왜적의 함대와 맞서서 싸울 때 장군께서 부하 장병들을 독려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즉, 반드시 죽겠다 하는 필사의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 반드시 살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살 궁리만 하고 싸우면 이기지도 못하고, 또 살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사즉생’이요 ‘필생즉사’입니다.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전부 힘을 뭉쳐서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우리 모두가 살지만, 그렇지 못하고 모두 제각기 살기만 원하고 힘을 합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기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할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겁부터 먼저 집어먹고 나만 살겠다고 보따리를 싸가지고 얌체 없는 행위를 하는 국민들이 만약에 있다면, 이 전쟁에는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살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비국민적이고 반국가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민족의 이름으로 단호히 규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를 해롭게 하고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 행위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국론을 분열시키거나 국민 총화를 해치는 행위를 하거나 또는 흔히 이런 때가 되면 있기 쉬운 유언비어 같은 것을 유포시켜서 민심을 현혹케 하는 행위도 결국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국민들은 여하한 경우라도 나라를 지키고 내 가정을 지키고 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와 각오가 돼 있다고 확신합니다. 만약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어떠한 오판에서 무모하게도 또다시 남침을 해온다면, 그 결과는 오직 그들의 자멸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고로 위대한 국민은 국난을 당해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일수록 더 굳게 단결해서 더 용기를 내고 애국 애족의 희생적 정신을 발휘해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국가를 수호한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의 이 중대한 시국을 에누리 없이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사태를 지나치게 과장할 필요도 없는 동시에 또 이것을 너무 과소평가 하거나 안이한 생각을 해서도 절대로 안 되겠습니다.

사실 그대로 시국을 똑바로 인식을 해야만, 우리가 앞으로 여기에 임하는 데 대한 결의가 생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게 되고 또 신념이 생길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여하한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조금도 동요해서는 안 됩니다. 동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굳게 단결해서 조국과 나 자신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태도와 각오를 가지고 임한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60만 국군과 주한 미군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군대보다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우수한 군대라는 것을 나는 자부합니다.

또, 우리는 잘 훈련되고 조직된 애국심이 투철한 270만의 향토 예비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반공 정신으로 굳건히 무장된 3천 500만의 애국심에 불타는 우리 국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국민 여러분들은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을 가지고도 왜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겠는가, 지키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있다면 우리의 각오와 결의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국민 여러분들은 정부와 군을 믿어 주시기 바라고, 또 우리 정부는 슬기롭고 용감한 국민 여러분들을 믿고 우리가 일치 단결해서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의연한 자세로써 모든 사태에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제각기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일에 대해서 보다 더 충실하고 책임 있게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이것만이 국난 극복을 위해 우리 국민들이 가져야 할 자세요, 또 우리들이 나갈 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행운과 건투를 빕니다.

1975년 4월 29일

대통령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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