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일주일만 빨리 항복했다면…
일본이 일주일만 빨리 항복했다면…
  • 류형석 세무사
  • 승인 2016.05.0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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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자료실] 사료(史料)로 보는 38선 분할

“소련은 대일전 참전 기회를 잃었을 것이고, 조선의 38선 분할의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 (<조선종전 기록>의 저자 모리타 요시오) 

38선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의 남북 분계선으로 태어나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사라진 위도상의 선이다.

▲ 대우그룹 대표이사 역임·서울대 법대 겸임교수 역임

북위 38도선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서 각기 다른 체제의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고, 6·25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게 되었다. 이 38선은 북한군의 남침과 함께 사라져 휴전선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38선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휴전선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 특히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8월 9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은 함경북도로 진격하여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미군도 한반도에 병력을 진출시켜야 했는데, 이 무렵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미군은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더욱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있어 한반도에까지 진격시킬 형편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계속 남진하고 있는 소련군을 그대로 두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게 점령될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취한 조치가 38선 획정이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하여 미·소 양군의 진주 경계선으로 삼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련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선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국가원수 스탈린은 미국이 경계선을 그토록 남쪽에 정한 것에 놀랐고, 미국은 스탈린이 그 경계선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에 놀랐다. 김일성은 38선은 미제가 남조선을 차지하기 위하여 정한 선이라고 했다. 

한반도의 운명 가른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38선이 그어진 책임은 일본에 있다. 한반도가 일본 대신에 분할됐다는 의미다. <조선종전 기록>의 저자이고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한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어전회의는 (1945년) 8월 9일 밤이었지만 만약에 그것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이었다면 소련은 참전의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조선의 38선 분할의 비극은 생기지 않았다. 

반면에 9일 밤 회의에서 초토결전(焦土決戰)의 강경론이 이겼더라면 소련군의 기갑부대가 조선을 남하해 남부 사할린·북해도·오우(奧羽)까지 진출함으로써 일본은 미·소로 분단될 뻔했다. 미군이 인명손상을 피해 상륙작전을 하지 않는 동안 벌어졌을 일이다. 실로 8월 9일 밤 천황의 재단(裁斷)은 일본을 이 운명에서 건졌으나, 조선이 일본을 대신해서 둘로 갈라지는 결과가 되었다.” 

포츠담선언이 일본에 전달된 것은 1945년 7월 26일이다. 이것은 연합국의 최후통첩이었다. 이 선언을 일본이 수락하지 않으면 8월 3일 이후 일본의 주요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본은 이 선언을 가볍게 여겨 묵살했다. 포츠담선언에 소련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들어 소련이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지키고 있다고 짐작한 것이다. 일본은 연합국에 항복하지 않고 소련을 통하여 명예롭게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중재의 길을 찾고 있었다. 

소련과의 중립조약은 1941년 4월 13일 체결되었고, 유효기간은 1946년 4월 8일까지다. 8개월이나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꾸물거리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고,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일본은 10여만 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8월 9일 중립을 지킬 것으로 믿었던 소련이 참전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하게 됐다. 모리타는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 일본은 연합국의 최후통첩인 포츠담 선언을 전달받은 지 보름여가 지난 8월 9일에야 수용했는데, 소련은 8월 15일까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분단을 야기했다. 사진은 독일 포츠담 체칠리엔호프 궁전에서 1945년 7월 17일부터 열린 미·영·소 세나라 정상의 포츠담 회담 모습.

조선의 영유를 고집한 일본 육군 

사실이 그러했다.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육군상은 4개 기본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본토에서 최후의 자살적 백병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일본의 최후 방어계획을 상기시키면서 연합군의 본토 침공을 물리칠 수 있는 산술적인 복안을 피력했다. 

235만 명의 병력과 400만 명의 추가병력을 소집해서 본토를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15∼60세의 남자와 17∼45세의 여자를 모두 동원하면 2800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에게 영웅적인 최후의 저항을 감행하도록 죽창과 몽둥이 등 원시적인 무기로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아나미 육군상이 내건 4개 기본조건은 다음과 같다. ▲천황제의 보존(國體保持) ▲헌법 불(不)개정 ▲조선과 대만의 계속 영유(領有) ▲기타는 아무래도 무관 등. 
1943년 11월 들어 일본은 태평양에서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일본 본토로 철수했고, 대본영은 사이판을 최전선으로 하여 태평양에서 총퇴각을 결정했다.

1944년 6월 15일 미국이 사이판을 공격했다. 일본의 소수 엘리트들은 사이판이 미군에 점령되면 일본은 패한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은 사이판에서 출격한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폭격 사정권 안에 둘 수 있고, 일본 전역에 대한 공습을 시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최후의 전선 사이판 전투는 1944년 7월 9일 끝났다. 이 전투의 사망자는 일본군 전사자 3만 명, 민간인 사망자 1만 명에 달했다. 일본은 475대의 전투기 중 440대가 격추되고, 연합함대가 대패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일본 군부는 이 때 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자살특공작전을 펼친다. 비행기 조종사를 동원한 가미카제(神風), 잠수부를 동원한 인간어뢰 등 인간을 폭탄으로 한 자살특공작전을 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도 목숨을 잃을 때가지 싸우는 최후의 옥쇄(玉碎)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미군기들이 대규모로 일본 본토를 공습했다.  위기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5월 7일 일본의 맹방 독일이 항복했고, 소련이 8~9월에 참전할 것이라는 참모본부의 판단이 나왔다. 

소련의 참전 방지가 난제로 대두되어 있던 이때 참모본부 제11과(전쟁지도)의 타네무라(種村佐孝) 과장대리가 ‘대(對) 미·영 전쟁 수행 상 일·소전(戰) 절대 회피를 위한 시책’이라는 건의문을 작성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청일전쟁 전의 태세로 돌아가… 만주, 요동반도, 남 화태(사할린), 대만, 유구(오키나와), 북(北)천도(千島·쿠릴)열도, 조선을 과감히 버려서라도 일·소전을 회피해야 한다.” 

이것은 조선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종전의 주장을 뒤엎은 최초의 파격적인 주장이었으나, 받아들여질 기미는 당시로서는 전혀 없었다. 일본은 사이판이 점령되었을 때 종전협정을 했어야 했다.

그 다음은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독일이 항복했을 때, 최소한 타네무라의 건의가 있었을 때 일본은 종전협정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 무조건 항복이라는 수모를 면하고 국체를 보존하는 선에서 유리한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1944년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본토결전, 일억(一億) 인구의 옥쇄라는 허황한 망상으로 스스로를 패망의 길로 몰아갔다. 결국 일본은 소련의 참전까지 이끈 후에야 무조건 항복을 했다. 본인(일본)만 망한 것이 아니라 한국까지 함께 망치고 말았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기 20일 전인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을 한 시점에서도 ‘일본은 최소한 1년 이상은 버틸 것’이라고 오판하여 “1946년 말까지 전쟁을 종결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작전계획의 제1단계로 1945년 11월 1일 규슈에 상륙하고 제2단계는 1946년 3월 1일 도쿄 부근 규주큐리하마(九十九里濱)에 상륙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 무지했던 미국, 일본 사정에 훤했던 소련 

트루먼 대통령은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사상될 수 있는 일본 본토 상륙작전 이전에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는 방안이 없는지에 대하여 고민했다. 그래서 소련이 빨리 참전해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에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요청을 수락해 대일 참전에 합의했다. 

소련은 독일이 항복한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가하여 남부 사할린과 쿠릴(千島)열도의 소련 영유(領有)를 비롯하여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대련항·여순항·남만주철도·동지나철도 등의 이권 또는 우선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복안을 가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미국이 1945년 7월 16일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다음날 포츠담에 가 있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 보고를 받았다. 7월 22일 포츠담회담에서 원자폭탄 사용 문제가 논의되었고, 처칠 영국 수상이 소련의 대일 참전이 필요 없게 됐다면서 전쟁을 조속히 종결하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되도록 빨리 사용할 것을 종용했다. 

트루먼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트루먼은 전후에 전개될 정치적·외교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오직 자국의 회생을 줄이겠다는 단견에서 소련을 대일전에 끌어들였다. 그런 까닭에 이후 소련에 막대한 대가를 지불했다. 동시에 한국의 비운이 배태(胚胎)됐다. 

반면 소련은 일본이 조만간 항복할 것이라는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이 소련을 상대로 종전을 위한 외교 교섭을 벌였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소련은 일본이 곧 항복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일본은 소련이 종전을 유리한 조건으로 중재해줄 중립국이라고 믿었다.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은 8월 9일 새벽 공군편대가 함경북도 나진·청진·웅기를 폭격했고, 육군은 두만강을 건너 경흥과 훈춘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쪽으로 진격했다. 

왜 소련군은 전쟁 당사국이 아닌 한반도로 진격했는가? 지리적으로 국경이 맞닿아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는 불편은 있지만, 소련 영토와 맞닿아 있는 사할린을 거쳐 일본의 북해도로 진격하는 것이 정도(正道)였다. 일본은 전쟁 당사국으로서 적국인데다가 실리가 훨씬 크고 전후 대미(對美) 전략에서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되새겨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는 남북이 분할되었고, 5년 후에는 남북 간의 6&#8231;25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일본은 경제를 부흥하는 기회를 잡는다.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군의 군수 조달을 일본이 맡음으로써 일본이 오늘날 세계경제 3대 대국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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