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를 정치가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리”(언론인 최석채)
“혁명가를 정치가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리”(언론인 최석채)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5.11 09:5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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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5·16 군사혁명(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혁명가였기에 혁명적 발상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조국 근대화를 정치가적인 ‘통치’가 아니라, 혁명가적인 ‘건설’로 쟁취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30분, 해병대가 선두에 서서 한강대교로 이동해 갔다. 한강대교 건너편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명에 의해 출동한 헌병대가 대교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봉쇄하는 바람에 혁명군이 대교 입구에서 멈춰 섰다. 박정희 장군이 지프에서 내려 앞으로 나갔다. 쌍방 간의 격렬한 총격전으로 인해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각하, 위험합니다. 앞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누군가가 뒤에서 외쳤지만 박정희는 전방으로 향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장군이 박정희에게 “상황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총알이 콩 볶듯 튀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배짱 좋게 담배를 피워 물며 말했다.

“여보 김 장군, 그대로 밀어!”

새벽 4시 10분 경 해병대가 바리케이드를 점령하면서 한강 저지선이 뚫렸고, 늘어섰던 차량 대열이 용산 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새벽 5시, “은인자중하던 군부는…”으로 시작하는 혁명방송이 전파를 타고 전국 각지로 날아갔다.

오전 9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실시하는 포고령 제1호가 공포되었다. 이어 금융을 동결하는 포고령 제2호, 공항과 항만을 봉쇄하는 포고령 제3호가 연이어 공포되었다.

5·16 거사는 두 차례나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최초의 거사일은 1961년 4월 19일 시민혁명 1주기 때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 폭동진압 명령이 내려지면 자연스럽게 시내로 진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과 달리 조용하게 지나가는 바람에 무산됐다. 두 번째 거사일 5월 12일은 사전 정보 누설로 무산됐고, 마침내 5월 16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러나 주변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온 혁명군 병력은 불과 3600여 명에 불과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 모인 혁명장교들은 장도영 총장을 예의주시했다. 만약 장 총장이 혁명을 받아들이면 문제는 간단해지지만, 혁명을 반대하고 나서면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혁명동지들이 비상계엄 선포에 동의하라고 요구하자 장 총장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고 버텼다.

5월 16일 오전 10시 18분,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주한 미 대리대사는 미8군 공보처를 통해 장면 정부에 대한 지지와 군 내의 질서회복을 요망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매그루더 장군은 일부 군인들에 의해 자신의 권한이 침해당한 데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며 미군의 허가 없이 작전지역을 이탈한 혁명군의 원대복귀 촉구 성명을 계속 방송했다. 혁명군이 한강 다리를 건너오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주하여 연락을 끊고는 사흘간이나 숨어 있었다.

5월 18일, 혁명 성공하다

5월 18일 아침, 반(反)혁명 지도자 이한림 장군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혁명을 지지하는 야전군 12사단이 춘천 시내에 출동했다. 육군사관생도들이 혁명 지지 퍼레이드에 나서자 미국 측도 혁명을 묵시적으로 인정했다.

5월 18일, 자취를 감췄던 장면 총리가 은신처에서 나타나 중앙청에서 마지막 국무회의를 열었다. 국무회의는 5월 16일 선포된 계엄령을 추인하고 법적 절차에 의해 정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함으로써 5·16혁명은 성공하게 된다.

주한미군과 주한 미 대사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5·16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5월 18일 미 중앙정보국(CIA)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어떤 저항도 존재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무관심했으며, 장면 총리의 저항 포기, 장도영의 이중 행동, 윤보선 대통령의 타협적 태도와 이에 기인한 합헌적 정권 이양, 이에 따른 군사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그 이유로 꼽았다.

혁명과 더불어 탄생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12월 16일, 민간 정부에게 권한을 이양하기까지 2년 7개월 간 대한민국의 모든 행정 운영과 입법기능 등 실질적인 권부의 기능을 담당했다.

5월 말, 동아시아 문제 연구가로 주목을 받고 있던 미 버클리 대학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1959년,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콜론 보고서>(Colon Report)를 발표했는데, 이 중 일부 내용이 당시 지식층에게 인기가 있던 ‘사상계’ 잡지에 번역 소개되면서 한국의 학계와 지식층, 군부에 널리 알려졌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처럼 내우외환을 안고 있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에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을 할 필요도 있겠고, 과도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지도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스칼라피노는 <콜론 보고서>에서 ‘피치 못할 과도적 정치체제 단계’로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를 예견했는데, 자신의 주장이 현실화되자 직접 역사의 현장으로 날아왔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며 박정희 장군, 김종필 씨 등 혁명 지도부 인사들을 두루 인터뷰 했는데, 그는 “혁명군은 정권 다툼으로 절대 분열하지 말 것, 국가 근대화를 위한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조속하게 수립할 것, 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지도부가 청렴결백해야 하며 도덕적인 흠이 없어야 할 것, 부정부패가 혁명 실패의 지름길”이란 점을 역설했다.

‘국가 근대화’가 혁명의 철학

박정희, 그는 왜 목숨을 건 혁명을 감행했을까. 그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혁명 동지 이석제(총무처장관·감사원장 역임)의 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다. 박정희의 혁명관은 이렇다.

“우리는 정권이 탐나서 궐기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의 목표는 나라의 근본을 개혁하고 썩어빠진 병폐를 뜯어고치려고 일어서는 건데 혁명이면 어떻고 쿠데타면 어떤가. 그 동안의 정권이 해내지 못한 국가 발전을 달성하면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내려줄 거야.”

이것이 5·16 혁명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이었다. 혁명의 준비 과정에서 박정희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깊이 연구했다. 이석제도 일본 근대화의 결정적 장면이었던 메이지유신에 대해 공부를 할 만큼 했다고 자부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박정희가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한 전략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보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이석제는 박정희에 대해 “즉흥적으로 혁명에 나선 사람이 아니라 과거부터 수년간 철저한 이론과 논리를 바탕으로 성숙된 자기 나름의 혁명철학을 가지고 거대한 물줄기를 잡아 나간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혁명 직전 박정희는 이석제와의 대화에서 국가 근대화의 철학을 설명한 적이 있다. 이석제의 회고록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본다.

‘박정희 : “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됩니다. 우선 국민들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제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대화의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

이석제 : “각하, 국가의 근대화란 뭐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박정희 : “이론상으로는 복잡하고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쉽게 해석하자면 농업사회를 뜯어고쳐서 공업화를 추진한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요. 우리나라 인구가 3천만이 넘는데 좁은 국토에서 농사를 지어 언제 국민들 배불리 밥 먹이겠소. 농토에 매달린 농민들을 공장으로 끌어내서 소득을 높여 주는 국가 시스템을 잘 연구해 봅시다.”

이석제 : “공장 지을 돈이나 기술은 어디서 조달합니까?”

박정희 : “장사를 해도 남보다 다른 아이디어와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요, 거기에다 친절하고 정직하면 더 좋겠지요. 가진 게 없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우선 급한 대로 돈 있는 집에 가서 돈을 좀 빌려다가 장사를 해서 갚으면 될 게 아니오.”’

그는 정치인이 아니라 혁명가였다

박정희는 혁명의 대의명분을 ‘국가 근대화’로 정의했다. 무력 수단을 동원해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다음 구시대 정치인들이 이루지 못했던 국가 발전을 자기 손으로 확실하게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비장감이 서려 있었다.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빼앗은 인간이 목숨을 두려워하겠는가. 그의 사고는 국민을 배불리 먹이며, 강대국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주장대로 살 수 있는 나라, 오직 ‘부국강병의 조국건설’을 위해 존재했다. 군정 연장도, 혁명군의 원대복귀도 어쩌면 그에게는 하찮은 관심사였는지도 모른다. 침몰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건져 올리는 데 있어 절차와 과정을 따지는 것이 어쩌면 사치스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언론인 최석채는 생전에 박정희에 대해 이런 평을 발표한 바 있다.
“민주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키고 초법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혁명가에게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혁명가를 정치가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리다.”

박정희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에 도전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시민교육을 받은 인사가 아니라, 오직 힘과 무력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섬멸하는 교육에 길들여진 장군이자, 망해 가는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혁명가였다.

오직 혁명가였기에 3선 개헌과 10월 유신 같이 인기 없는 정치를 펼치며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다. 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사회간접시설의 대대적 확충 등은 혁명적 발상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했던 조국 근대화의 위업을 그는 정치가적인 ‘통치’가 아니라, 혁명가적인 ‘건설’로 쟁취한 것이다.

박정희는 근대화 자금 마련과 6·25의 보은을 위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다. 야당과 비판자들은 ‘미국의 용병(傭兵)’ 운운하며 욕을 하지만 젊은이들의 고귀한 피의 대가로 우리는 너무나 값진 소득을 얻었다. 베트남 특수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위상이 오늘날처럼 세계화되기까지는 더 긴 시간을 소비해야 했을 것이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5·16혁명공약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CYzyzE1a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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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2016-05-21 14:16:15
현재 월급쟁이의 절반은 비정규직입니다. 자신과 가족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어요. 매년 자살자가 1만2,3천명입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요. 97년 환난 이후 생긴 현상입니다. 10년간의 보수 정권은 이를 외면하였습니다. 국민이 심판하는 건 당연하죠. 역사교과서? 타당한 안건이나 이것이 핵심적인 과제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민생은 제쳐놓고 이런 문제에 몰두했어요.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김영규 2016-05-21 14:13:55
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됩니다. 우선 국민들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제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대화의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