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자신의 참혹한 미래를 모른다
아무도 자신의 참혹한 미래를 모른다
  • 김광진 영화감독
  • 승인 2016.05.16 03:0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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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특집] 동성애 고발 다큐 영화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 제작 후기

동성애자들 스스로 알 것이다. 외로움을 이겨보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술과 파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몸을 섞어보지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실의 소리는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동성애? 너 그거 건드리면 죽는다. 할리우드에서 건드리지 않는 게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낙태이고, 그 중 가장 피하는 나머지 하나가 바로 동성애야. 너 그거 건드리면 감독 인생 끝이야!” 

▲ 김광진 영화감독·미국 독립프로덕션 PD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흥분한 듯 목소리 톤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김 감독. 크리스천 소재로 다른 내용 많잖아. 따뜻한 이야기 많잖아. 감동 있는 것 그런 것 해. 동성애는 너무 위험해.” 

후회가 밀려왔다. 조언을 좀 얻을 생각에 미국 할리우드에서 나름 제작자로 자리 잡은 지인(知人)에게 연락을 했는데, 이렇게 방방 뛸지는 몰랐다. 
내가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린 것은 확실했다. 그는 무덤을 파는 짓이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 미국 방송국에서 예능 PD로 오랫동안 일했는데, 스태프 중엔 능력 있는 게이, 레즈비언이 많았다. 그들은 그렇게 태어난 줄 알았고 그들의 예술적 감각에 질투가 난 적도 있었다. 2013년 겨울 시작된 ‘불편한 동성애의 진실 프로젝트’는 그렇게 두려움과 막연함 속에서 시작되었다. 

동성애 미화(美化)의 진화 

캘리포니아 주(州)에서 발의된 ‘SB48’ 법안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동성애를 정상이라 가르치는 교육에 반대하여 아이를 등교시키지 않았던 한 미국인 가정의 가장(家長)이 학교로부터 고발당하여 체포되었다. 동성애자를 혐오했다는 죄명이었고 그는 감옥에 갔다. 

TV 속의 기자는 추궁하듯 그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고, 부인이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남편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미국이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신없이 살아오다 어느 날 잠시 숨을 고르려 고개를 돌려보니 동성애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한 모습으로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멀찍이 뛰어가 돌아보니 그것은 태산이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1970년대만 하더라도 동성애자들은 끊임없는 항쟁과 투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외치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백인 흑인 간의 인종차별처럼 말이다. 동성애는 죄악된 것이란 게 미국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할리우드의 영화예술 등을 통해 그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던 동성애자들이 친근감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유명 배우들이 여장 남자, 혹은 남장 여자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이들의 모습은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등장했고, 때로는 남성 동성애자들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애틋한(?) 모습들에 대중들은 동성애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 생각했고, 점점 친숙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보호해 주자라는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한 유명 동성애자인 김 모 영화감독이 바로 문화예술을 이용한 인식 변화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인터뷰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항쟁과 투쟁의 상징이었던 피켓과 메가폰을 버리고 대신 눈물과 애잔한 스토리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방법은 지금까지도 성공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한번 변화된 인식은 법도 바꾸고 교육도 바꾸고 이 세상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몇 개월간의 동성애 탐구는 그다지 진척이 없었다. 인터넷에선 과학적, 의학적으로 동성애의 유전적 출생에 관한 이론이 대세였고, 각종 연구들과 사례들이 끝도 없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을 써서 들여다보니 동성애 연구를 주도했던 학자 대부분이 동성애자였고, 그 논문들에 대해 많은 오류들이 지적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무리하게 부풀려진 통계들과, 계속해서 번복되는 연구 결과들은 그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부추겼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 데니스 저니건 이라는 미국의 복음성가 사역자를 만나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약할 때 강함 되시네’란 곡을 만든 그는 오랜 세월 동성애자였다. 자신의 성(性) 정체성으로 많은 세월을 괴로워 하다가 극적으로 동성애에서 탈출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살고 있는 오하이오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어제 하루 종일 동성애 상담을 하느라 너무도 피곤하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찬양 앨범처럼 낭랑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5세 때 공중 화장실에서 낯선 남자에게 당한 성 추행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고 말하면서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동성애자로 살고 있었지만 가족들에게조차 밝히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많은 파트너를 만날수록 커져만 가는 상실감은 그로 하여금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낳고 그야말로 대가족의 가장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만남을 통해 난 동성애는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누구도 동성애자로 태어나지 않았음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책으로 발간되어 많은 동성애자들에게 치유의 희망을 주고 있었다. 

▲ 우리 사회가 동성애의 정확한 실태에 대해 축소 왜곡, 침묵함으로써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이 정확하게 알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진실에 눈을 뜨다 

동성애를 나쁘다고만 하는 것 보다 동성애를 탈출한 사람들의 간증이 효과적일 것 같았다.  그래야만 무조건적인 혐오와 정죄(定罪)가 아닌, 그 삶에 깊게 빠져 살았던 사람들의 직접적인 인터뷰를 통해서 관객들이 보다 정확한 동성애의 실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로 돌아온 사람들을 ‘엑스 게이’(Ex-gay) 라고 호칭한다. 예전에 동성애자였단 뜻이다. 그런데 요즘 ‘엑스 엑스 게이’(Ex-ex-gay)의 뉴스가 많이 나온다. 즉 이성애자로 돌아왔다가 다시 동성애자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대부분이 육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다시 동성애자가 되는 케이스가 많았다. 내가 만났던 한 게이는 남성 간의 항문 성교는 이성과의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을 주기 때문에 소위 ‘몸이 당기는’ 현상을 참기 어렵다고 했다. 동성애를 끊었다고 간증한 얼마 후 다시 동성애자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고, 일부 탈(脫)동성애자들의 회복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검증된 탈(脫)동성애자들의 사례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고, 또 그들의 탈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수위에서 말해야 하는지도 어려운 문제였다.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려면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고, 실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과 함께 예방에 대한 교육 방안까지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를 제작하면서 3가지 사항을 주된 목적으로 갖고 만들었다. 첫째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은 동성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이야기하지 않고 밝히지 않았던 것뿐이지, 분명 많은 동성애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진실 된 동성애의 실체를 알려주고 싶었고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둘째는 바로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동성애에 대한 정확한 실태와 상황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동성애를 맞선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너무도 무지했다. 

셋째, 바로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너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 사회가 동성애의 정확한 실태에 대해 축소 왜곡 또는 삭제를 함으로써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이 정확하게 알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에이즈가 만성질환이라 믿고 있는 동성애자들이 많았고, 그 무서움을 모르기에 특히 어린 청소년들이 단돈 3만 원에 ‘바텀 알바’(항문 성관계 매춘)라는 일에 뛰어들고 있었다. 

2016년 1월 유튜브를 통해 처음 다큐멘터리를 공개한 후 지금까지 조회 수가 46만 건에 육박하고,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동성애의 그 무서운 실태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동성애 상담 증가라는 놀라운 열매를 맺고 있다. 

자신은 동성애자로 태어났다고 굳건하게 믿고 있던 한 고등학생은 이 영화를 보고 동성애의 말로가 이처럼 무서운 줄 몰랐다면서 동성애를 끊겠다고 했고, 한 의대생도 동성애로부터 회복되기 위해 지금 꾸준히 상담을 받고 있다. 

영상이 공개된 후 동성애 단체들이 가하는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영화 시사회를 했던 중앙대의 한 카페는 동성애 동아리로부터 보이콧을 당해 매출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동성애자들의 역차별이라는 사건으로 번져 대학가에서 동성애자들의 지나친 권리 추구와 이중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변화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기회가 됐다. 덕분에 이 영화의 시사회 상영을 요구하는 대학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던 대학생들이 영화와 강의가 끝나면 풀죽은 모습으로 “진짜로 동성애가 이렇게 무서운 건가요?”, “타고나는 것이 아니었나요?” 하고 충격 받은 얼굴로 질문을 해왔다. 한 여학생은 무슨 사연이 있는지 강의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던 적도 있었다. 

논산훈련소에서 5000명 가까운 병사들에게도 동성애 강의를 했다. 군대에서 상급자가 하급병사의 항문을 범하는 사건들이 쉬쉬하는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처음 당하는 것을 항문을 개통한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병사들이 군대에서 항문을 강제적으로 개통당하고 있었다. 한 고등학생은 자신을 에이즈 유발 바이러스인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감염자라고 밝힌 남성과 항문 성관계를 했다. 그 학생은 에이즈와 HIV를 구별하지 못했다. 

고통과 외로움

내가 이 영화와 강의를 통해서 한 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정죄가 아니었다. 그들을 돌로 때려죽이자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동성애에 대한 진실만 이야기해준 것뿐이었다. 동성애자들은 그 진실을 두려워했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고, 느끼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만났던 탈동성애자들은 호기심으로 동성애를 해본 사람들이 아니다. 평생을 동성애자로 살면서 심지어 에이즈에 걸리기도 했던 하드코어 동성애자들이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의 얼굴을 세상에 공개하면서까지 동성애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살았던 동성애는 지금의 동성애자들과 달랐던 것일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이들은 동성애를 탈출한 것일까? 

2년에 가까운 제작 기간을 거치면서, 또 수많은 동성애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본 것은 아무리 동성애가 아름답다 말하고 치장을 해도 그 말로는 고통과 외로움뿐이라는 것이었다. 동성애가 아무리 타고난 것이라고 노벨상 급 논문을 써도 그 마음은 죄책감과 우울함이란 것이었다. 

동성애자들 스스로 알 것이다. 외로움을 이겨보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술과 파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몸을 섞어보지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실의 소리는 감출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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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0-07-29 11:42:40
돈고충 OUT.

ㅇㅇㅇ 2016-08-09 14:59:43
동성애자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