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 운동의 대각성 일어나야
보수주의 운동의 대각성 일어나야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5.2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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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보수우파 정권 재창출 가능성

대한민국 보수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직장과 사회라는  비정치적 영역에서 일대 도덕적 각성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새누리당이 내부적으로 ‘자연 상태(State of nature)’에 접어들었다. 

정치철학에서 ‘자연 상태’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하다. 루소와 홉스, 그리고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설 사상가들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부딪치는 ‘무질서’를 극복하고자 정부를 세우며, 정치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봤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 대해 날카로운 인식을 가진 정치철학자는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자연 상태에 빠진 국가는 법의 힘으로 재정립할 수 없다’는 탁월한 성찰을 제공했다. 그러한 무질서를 타파하는 힘은 오로지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군주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마키아벨리를 비도덕적 정치철학자로 낙인찍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정치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공화제에서 최고 통치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물음에 답이 된다. 

마키아벨리 하면, <군주론>을 떠올리지만 사실 마키아벨리가 하고 싶었던 주장은 ‘우두머리(Capo)를 만드는 세력의 중요성’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민중의 심리적 경향(umore)에 대해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구”를 그 본질로 파악했다. 즉 민중은 ‘자유와 평등’을 원한다. 그것이 정치 수요에 대한 고대 이래로부터의 근본적인 요구다. 

▲ 차기 보수정권의 창출은 지도자를 만드는 정치 엘리트들의 로열티와 열정, 노력에 달려 있지만,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은 더 이상 가치동맹을 만들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세’라던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대선에서 3.6% 차로 신승했을 뿐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실패가 일어나는 원인이 민중의 배신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 쪽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즉, ‘지배받지 않으려는’ 민중들에 대해 ‘지배하려는’ 엘리트들의 ‘오만’이 권력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 

마키아벨리는 민중들이 정치 엘리트들의 ‘권력’ 그 자체를 오만하게 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부족하면 신뢰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훌륭한 지휘관(capitano)과 진정한 영광(vera gloria)이야말로 정치 엘리트가 민중으로부터 권력을 얻는 바탕이 된다고 역설한다. 

마키아벨리는 강하고 용감한 인물의 출현만으로 원시 군주정이 설립된다고 보지 않았다. 한 명의 강하고 용감한 인물 대신 마키아벨리가 주목하는 것은 우두머리를 선출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들을 더 잘 방어하기 위해, 그들 중에 더 힘이 넘치고 더 용감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고, 이후 그들은 그를 우두머리(capo)로 세우고, 그에게 복종했다”(폴리비오스의 <역사>) 

마키아벨리가 옳다면, 차기 보수정권의 창출은 우두머리(Capo)를 만드는 정치 엘리트들의 로열티와 열정, 그리고 노력에 있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잉태하는 ‘집단적 마리아’다. 그런 이들이 있어야 차기 미래권력의 담지자가 등장할 수 있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라는 우두머리를 만든 세력은 ‘뉴 라이트’라는 존재였다. 이들은 한때 운동권이었으나 전향한 그룹들이 주축이 됐다. 물론 급조된 가운데 그 정체성에 문제가 있었지만, 어찌됐든 뉴 라이트는 진보좌파 정치세력에게 길항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었다. 

대선에서 500만 표 차이로 야당 대선 후보를 이겼던 그 힘은 그러나 정작 집권 후, 개혁의 동력을 상실하면서 뉴 라이트의 존재감도 사라졌다. 이후 박근혜라는 ‘오래된 미래’의 주인공은 흔히 ‘친박(親朴)’과 ‘박사모’라는 그룹에 의해 그 지지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뉴 라이트가 가졌던 이념적 가치에 대한 지성이 박약했다. 박근혜라는 인물 하나로 모든 것이 통용되었고, 그것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하지만 지난 대선의 과정은 ‘대세’라던 박근혜 후보의 ‘열세화’ 과정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박근혜 후보는 3.6%라는 적은 차로 힘겹게, 막판 보수의 결집으로 승리했다. 

이 과정을 분석해 보면,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의 지형에서는 더 이상 ‘가치 동맹’에 입각한 정치 주도세력이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된다. 과거처럼 나이가 들면 보수가 된다는 공식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1980년대 민주화 세례를 받은 청년세대들이 이제 50줄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에서 정치 주도세력 등장은 불가능 

이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화되면서 청년 시절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인해 ‘위선적 진보’로 기우는 경향이 크다. 아래 세대로부터 자신은 보수가 아니며, 진보적이고 좌파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점을 어필해 세대 갈등을 피하려는 방어심리도 무시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전국에서 그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들의 위상은 로컬과 도시의 풀뿌리 영역에서 진보성향의 네트워크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대표적인 것이 경기도의 ‘따복마을 공동체’와 같은 지원정책이다. 서울시의 도시형 조합공동체는 그 영향력을 로컬 각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생활진보의 영역에 보수는 아예 그 흔적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진보-좌파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베이스와 기지를 생활정치 영역에서 공고히 하고 있는 반면, 보수 운동가들은 주류 정치세력의 주변을 맴돌며, 서로 밥그릇 싸움에 골몰하다가 자멸하는 행태를 보였다. 

크게 보자면 그동안 지방자치라는 것이 보수진영에게는 그저 마땅치 않은 분권주의로 인식되고 있을 때, 진보와 좌파 운동세력은 지방의 규제를 먹잇감으로 스스로 주민자치를 통해 그 영향력을 넓혀왔다. 지방에 기업들이 들어가기 어려우니, 자생적 질서로 집산주의와 조합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보수정치 세력의 기반이 대단히 축소될 것이며, 상대적으로 진보-좌파의 로컬 장악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고한다. 즉 향후 지방자치 선거에서 보수세력은 전국적 열세를 면치 못할 수밖에 없고, 이 동력이 결국 ‘지방자치, 지방분권’의 아젠다를 멀지 않은 시기에 대선의 이슈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보수 정치세력과 시민진영은 이러한 문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보수진영의 차기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는 장기적으로는 보수 세력의 주류성 약화와 시니어 계층의 진보화라는 맥락과 함께, 단기적으로는 미래 권력의 담지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지난 이명박 정권이 재창출한 박근혜 정권이 사실상 이전 정권과 아무런 이념적, 가치적 계승이 없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파워 게임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려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뿐, ‘보수주의적 가치’라는 구심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상황이 바로 ‘정치세력 안의 자연 상태’이다. 

▲ 좌파들의 현실 운영 능력은 절망적이고 자살적이다. 정치적 낭만주의, 그리고 ‘민족’이라는 이름의 포퓰리즘을 앞세워 핵무장을 한 적(敵)을 동지로 끌어안고 퍼주기를 하는 모습을 보라.

보수주의 가치란 무엇인가? 

이 자연 상태는 내적 동력으로는 해결되지 못하며, 반드시 외부적 충격에 의해 신질서의 수립으로 가야만 그 방향성이 등장하게 된다. 문제는 새누리당의 외곽, 즉 당원들과 보수 시민사회조차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사가들은 반기문 대망론을 통해 영남-충청 연합구도에 의한 승부수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러한 정치 공학 이전에, 보수주의 가치를 통한 대동단결의 구심력을 회복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다. 

문제는 그러한 보수주의 가치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점이다. 이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정신이 됐다. 

보수의 차기 정권 재창출이 정치 공학 차원에서 이뤄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창출된 보수정권은 대한민국을 정상화시킬 힘을 갖지 못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치-경제의 올바른 길,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헌정가치를 확신하고 그 길을 가지 않는 한, ‘진보가 집권하면 빨리 망하고, 보수가 집권하면 천천히 망하는’ 이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는 무엇이고, 시장경제는 또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행동규칙을 정립해야 한다. 이를테면 ‘경제 민주화’라든지, ‘사회적 경제’, 그리고 ‘흙수저, 헬조선’과 같은 계급주의적 세계관을 타파해 내야만 보수 정권 재창출도 의미를 갖게 된다. 

결국 세계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생명선이 된다는 것이지만, 정작 이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정치인들과 보수 지식인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 싸움은 매우 길고 험한 길을 가야 한다. 이제까지 대한민국 보수라는 정체성에서 ‘무엇이 보수주의의 미덕인가’를 고민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수주의 운동은 정치적 영역과 비정치적 영역으로 나뉜다. 먼저 정치적 영역에서는 대한민국의 발전사와 그 성공의 경로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현재를 자신의 해석 속으로 유인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사실은 역사 담론의 투쟁에서 패배하면 정치 공동체 내에서 비주류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진보-좌파의 현실 운영능력이 보수-우파보다 탁월하다면, 우리가 진보-좌파의 주류화를 걱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국정을 맡기면 된다. 하지만 그런가. 잘못된 세계관이 인도하는 정치질서는 모두를 파국으로 이끈다. 소경이 눈 뜬 이마저 구렁텅이로 이끌어 가는 상황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충분히 목도했다. 

“북한에서 절대 핵개발은 없다”던 김대중 정권과 “북핵은 북의 자위권”이라던 노무현 정권이었다. 한국의 진보는 결코 북의 야욕에 대항하지 못한다. 그들이 가진 정치적 낭만주의 때문이다. 

진보-좌파의 정치적 낭만주의 

동시에 그들의 잘못된 계급주의적 정치질서론은 대한민국 경제를 살릴 수 없다. 그 결과는 결국 시장과 기업에 대한 불신과 배척의 강화라는 포퓰리즘 악순환을 낳는다. 

진보-좌파는 현실에서 도덕적이지도 않지만, 능력에서도 열등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고질적인 정치적, 역사적 낭만성 때문이다. 이 문제는 비범한 정치 철학자 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가 남김없이 증명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보수주의는 무엇이 그렇게 잘났냐는 질문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먼저 보수와 보수주의를 구분해야 대답이 가능한 문제다. 한국의 보수 역시 무능하고 부도덕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패거리 문화와 엘리트주의는 보수를 지지하는 애국적 민중들과 조화를 상실해 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따뜻한 보수’라는 말로 위장한다. 하지만 한국 보수 엘리트들의 진정한 문제는 ‘공적(公的) 영역의 사유화’에 놓여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 조선산업의 구조적 불황에 대응했던 관치(官治) 금융들의 행태, 그리고 이를 감쌌던 정치권, 그리고 기회주의 보수 언론들이다. 

한국 보수 엘리트들은 민중들로부터 도덕적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재벌 오너들의 일탈, 정치 엘리트들의 이기주의, 목회자들의 탈선, 법조인들의 간악, 방산업체와 군 엘리트들의 비리, 사학재단의 부도덕, 메이저 언론사들의 자사(自社) 이기주의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보수주의는 이러한 사회 지도층에 대한 도덕성의 회복을 요구한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이용해서 권리남용과 탐욕(Avarice)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능력에 따른 개인들의 성취를 미덕으로 여기지만, 그 어떤 행위도 ‘도덕 감정의 연대’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신중함과 절제’의 미덕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일어나야 하는 보수주의 운동은 반공과 애국이 전부가 아니다. 생활 세계에서 도덕적 가치,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이 추구되는 굿 소사이어티(Good Society)의 발견과 유지가 핵심이다. 

이러한 도덕적, 정신적 가치의 르네상스가 정권 재창출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며, 보수 계층 내에서 이러한 정신적 르네상스가 없다면, 정권 재창출은 의미가 없다. 

대한민국 보수에게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직장과 사회라는 비정치적 영역에서 일대 도덕적 각성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정치적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자, 갈등을 넘어 통합을 주도하는 동력이다. 

보수는 이제 정치적 문제에서 비정치적 생활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진보와 좌파가 장악하고 있는 세계관의 영역에서 ‘신성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 앞으로 30년은 걸릴 것이고, 그러한 가운데 정권의 향배가 어디로 가든, 그런 문제가 본질이 아닌 것이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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