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기념곡 제정은 초법적(超法的) 발상
5·18 기념곡 제정은 초법적(超法的) 발상
  •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 승인 2016.05.25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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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분석]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순수한 민주화운동세력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소수의 짝퉁 민주화운동세력(혁명세력)을 위한 노래 

지난 5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여야 원내지도부와의 회동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문제에 대해 “국론분열이 생기지 않는 좋은 방안을 찾아볼 것을 국가보훈처에 지시하겠다”고 말했다. 5월 16일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 “기념식에서 합창 형식을 유지하고, 5·18 기념곡 지정은 어렵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를 놓고 야당은 “시작부터 협치(協治)를 깬 것”이라며 반발하고 집권여당 원내 지도부도 재고를 요청하는 등 여야가 합동작전을 펼치는 모습을 연출하고, 보수 언론마저 이에 가세하는 혼돈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20대 국회가 개원하면 국가보훈처장 해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반(反)하는 가요이므로 합창이나, 제창 및 기념곡 지정도 부적합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 배경 

이 사안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비춰 볼 때, 타협이나 협상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만약 정부가 이를 허용한다면,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스스로 훼손하고 부정하는 자해행위임을 지적한다. 기념식에서 합창을 허용한 부분을 제외하면, 국가보훈처가 헌법적 가치에 비춰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문제의 노래는 1980년 5월 광주사건에서 희생당한 30세의 청년 윤상원(일명: 윤개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이 노래를 작곡한 김종률(당시 학생가수·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은 2013년 5월 1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을 만든 직접적인 동기는 윤상원과 그의 야학 동지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라고 밝혔다. 윤상원과 박기순은 전남대 동문이었고,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야학운동의 동지였다. 

젊은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사망한(박기순 1978년 12월 사망) 두 젊은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 두 사람의 친구와 가족들이 두 사람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황석영 등 광주지역 문화예술 운동가들은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을 기리는 노래극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노래극에 들어가는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석영의 주장에 따르면 이 노래는 1983년 봄 자신과 극단 ‘광대’의 잔여 활동가들이 전개한 ‘자유 광주’ 방송 활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광주항쟁 과정에서 죽은 남녀를 주제로 한 넋풀이 극의 주제곡으로 만들어진 노래라고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나 그 주변 인사들의 회고에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윤상원도 광주사건에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므로, 이 노래가 직·간접적으로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문제의 노래의 작곡은 당시 황석영이 이끄는 문화운동 패의 일원이면서 전남대 학생으로 대학가요제 입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학생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김종률이 맡았다. 작사는 황석영이 맡았다. 황석영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 중의 일부 대목을 뽑아서 동석한 사람들과 협의하여 약간 수정해서 노랫말로 만들었다. 

문제의 노래는 1980년 5월 광주사건에서 희생당한 30세의 청년 윤상원의 넋을 달래고,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따라서 이 노래에서 말하는 ‘임’이란 윤상원을 의미하는 것이고, 노래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윤상원이란 인물을 조명해야 한다. 

윤상원은 1978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주택은행에 입사하여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이른바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입사 6개월 만에 사직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윤상원은 광주 청년·학생운동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김상윤이 운영하는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광주시 광천공단 내 한남플라스틱 공장에 일당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그 지역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이어 빈민청년운동에도 참여했다. 윤상원은 전남대 운동권 재학생들과 연계도 강화했고, 1979년 가을 무렵엔 광주 운동권의 비중 있는 인물의 하나로 부상했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윤상원은 혁명적 노동운동을 하다 5·18이 벌어지자 시민군 지도부를 장악해 무장 투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사진은 올해 5·18 기념식 장면. 황교안 국무총리(왼쪽 첫 번째)는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연합

윤상원은 누구인가? 

10·26 이후 정치·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자 전국 각지의 운동권들이 활동을 확대했으며, 윤상원도 혁명적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이태복과 1979년 12월 만나 혁명적 노동운동단체 결성에 참여했다.

1982년 당국에 적발된 ‘전국민주학생연맹 및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의 주범(主犯) 이태복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1979년 12월 초순부터 윤상원 등과 만나 노동자조직 구성을 위해 활동하고, 1980년 5월 3~5일 ‘전민노련’을 결성했다. 

윤상원은 전민노련 중앙위원이 되었다. 당국에 따르면, 이태복이 주도하고 윤상원이 참여한 전민노련은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집단으로서의 노동자 집단을 조직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다.  윤상원은 또 그 해 봄에 결성될 예정이었던 기성인 운동권의 결집체였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전남지부’의 사무국장으로 내정되었다. 

이른바 5·18 항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윤상원은 광주지역의 변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정부가 5·17 계엄확대 조치를 취하면서 운동권 인사들을 예비검속하자 광주지역 운동권 인사 및 운동권 학생 대부분은 검속을 피해 광주를 떠나 타지로 피신했다. 윤상원은 체포 경력이 없어 당국의 예비검속의 대상이 되지 않아 광주에 남아서 항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윤상원은 전남대생들의 가두시위가 개시된 시점부터 녹두서점에서 광주에 잔류한 운동권 인사들과 학생 시위를 확대할 대책을 강구하고, 화염병을 제작하여 시위 현장에 공급하고, 화염병 투척방법을 지도했다. 또한 들불야학 팀을 동원하여 투쟁과 관련된 선전·선동물을 제작하여 배포했다. 

윤상원은 5월 19일에는 가두투쟁에 직접 참가하여 진압군에게 돌멩이, 깡통수류탄, 화염병 등을 투척하고 공수부대원을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윤상원의 공수부대원 살해에 관해서는 항쟁기간 중 그를 추종하여 활동한 김효석이란 당시 고등학생이 증언하고 있다. 

윤상원은 5월 21일부터 전 민중의 무장봉기를 촉구하는 선동물을 제작 살포했다.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 5월 22일 오전부터 윤상원은 도청의 시민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도청 안에 있는 시민군 지휘부인 시민·학생수습위원회는 다수의 구성원들이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윤상원은 무장투쟁 촉구 궐기대회를 연일 개최했다. 동시에 도청 가까이에 있는 YWCA 빌딩에 들불야학 팀, 극단 ‘광대’ 팀, 기타 운동권 대학생들로 구성된 행동대를 조직하여 도청 진입을 준비했다.

윤상원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도청 접수를 추진하면서, 계엄군과의 투쟁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인들을 도청에 인질로 잡아두는 계획을 동지들과 은밀히 검토했다. 군부의 광주 진압을 위한 병력 투입은 미국의 승인 하에 이뤄질 것이므로 도청에 미국인을 인질로 잡아두고 있으면 계엄군이 함부로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미국인을 인질로 잡아두려는 윤상원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5월 25일 오후 윤상원과 그의 동지들은 도청 접수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날 오후 5시 경 도청의 학생수습위원회는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무기반납 문제를 토의하고 있었다. 위원장 김창길 주도 하에 무기반납에 동조하는 성원이 다수를 차지했고, 그에 반대하는 성원은 부위원장 김종배를 포함한 소수에 불과했다. 

윤상원은 도청으로 들어가 김창길을 비난하는 고함을 지르며 회의를 무산시켰다. 회의를 무산시킨 직후 YWCA빌딩에 모여 있던 운동권 청년들과 지도급 학생들을 도청으로 불러들여 김창길에게 위원장 사퇴 압력을 가했다. 김창길은 위원장직 사퇴 의사를 밝힌 후 그의 말에 동조하는 다수의 시민군들과 함께 도청에서 철수했다. 윤상원 일행은 일종의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도청 지하실의 다이너마이트 폭발계획 세워 

윤상원은 저녁 8시 경 YWCA로 가서 도청 진입을 위해 대기 중이던 청년 학생 100여 명을 인솔하여 도청에 진입했다. 도청에 진입한 윤상원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에서 무장투쟁 지속을 주장해온 김종배, 박남선 등 소수파 지도자들과 합세하여 청년학생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구성했다. 

위원장에는 김종배, 부위원장은 정상용과 허규정, 상황실장은 박남선이 맡고, 윤상원은 대변인을 맡았다. 이때부터 광주항쟁 지도부는 전문 운동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의 광주 진입작전이 개시되자 새로운 항쟁지도부는 진압군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 방침을 결의했다. 진압군이 진격해오면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을 무장시켜 저지하고, 저지에 실패하면 게릴라전으로 대항하며, 최후의 순간이 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하기로 결정했다. 

항쟁기간 중 도청 지하실에는 8톤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이리역 폭발사고의 10배 위력을 가진 분량)에 뇌관까지 설치된 상태였다. 윤상원 등이 계획대로 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켰더라면 광주 시내의 절반 이상을 쑥밭으로 만들고 수만 명의 광주 시민이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 김창길 등 온건파가 군의 폭약 전문가들과 협조하여 25일 밤과 26일 낮에 도청 지하실 다이너마이트에서 뇌관들을 제거함으로써 광주 시민 수만 명을 자기들의 자살에 동행시키려던 윤상원 등의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5월 26일 저녁 도청에서는 시민·학생 통합수습위원회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정원 30명 중 20여 명이 넘는 성원들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 김창길이 제시한 무기 반납론이 또 다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무기 반납에 반대하는 소수파가 회의장을 떠난 가운데, 잔류 성원들은 무기 반납이 의결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윤상원은 무기를 휴대한 박남선 상황실장(시민군 군사지휘 총책)을 앞세우고 동지들과 함께 회의장에 들어갔다. 박남선이 무기로 위협하는 가운데 윤상원은 무장투쟁 지속을 강조했다. 무기 반납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고 그들의 결의는 무효가 되었다. 

이처럼 무장 투쟁을 고수하는 데 앞장선 윤상원은 5월 27일 새벽 3시 경, 도청 무기고 앞에서 잔류 시민군 병사들에게 최후까지 저항할 것을 호소했고, 새벽 4시 경 공수대원의 사격에 복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첫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를 기리는 노래가 아니다. 이 노래는 이른바 광주항쟁에서 끝까지 투쟁한 윤상원의 투쟁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다. 넓게는 이른바 그들이 지향하는 혁명을 위해 윤상원과 같이 최후까지 투쟁하다 사망한 자들을 기리는 노래다.

이런 노래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것은 진정한 ‘광주민주운동 정신’을 훼손하고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이란 당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정신이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운동이 결코 아니다. 

둘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른바 운동권 세력(지하혁명세력 포함)들에 의해 애국가를 대신하여 불리는 대표적인 운동권 가요다. 실제로 운동권 세력들은 각종 행사나 비밀회합 시 국민의례를 거부하고 이른바 민중의례를 진행하며, 국기에 대한 경례나 애국가 제창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이는 그 동안 적발된 간첩사건 등 국가보안법 사건 및 이석기 내란선동사건이나 위헌 정당으로 해산된 통진당 사건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 구현하려는 가요라면, 결코 혁명세력들에 의해 불릴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북한에 의해 남조선 혁명을 선동하는 이른바 혁명가요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남한(적화) 혁명을 위한 인민봉기” 또는 “남조선 인민들의 반파쑈 민주화 투쟁사에 빛나는 장을 기록한 력사적 사변”으로 규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르고 있다. 또 5·18 관련자들을 애국열사릉에 가묘를 세워 안장하고 조국통일상 등을 수여한 바 있다. 

특히, 북한은 1991년 5·18을 소재로 한 ‘임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시나리오를 당시 불법 방북한 황석영과 리춘구(북한 작가)가 공동 집필하고, 음악은 재독 친북음악가 윤이상과 리종오(북한 음악가)가 담당했다. 이 영화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두 차례 배경 음악으로 삽입되어 있다. 

남한 혁명을 선동하는 혁명가요 

국내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사하고 제작을 주도했던 황석영이 불법 방북하여 5·18 관련 혁명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이 영화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경 음악으로 삽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 북한이 발간한 혁명가요집 <통일노래 100곡 모음집>(윤이상 음악연구소, 1990)에 국내 운동권 가요 24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제반 정황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에 의해 남한 혁명을 선동하는 혁명가요의 반열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수호하고 입법 활동을 통해 헌법적 가치를 구현해야 할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헌법정신을 훼손하고 부정하는 노래를 국가 기념곡으로 제정하자고 주장하는 행위는 한심한 차원을 넘어 반국가적 행위이며 대한민국의 수치다. 

백번 양보해서 행정절차 측면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의 국가 기념곡 지정은 법적 근거가 없는 초법적 발상이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5대 국경일과 46개 정부기념일 및 30개 개별 법률에 규정된 기념일에도 기념곡으로 지정된 노래는 한 편도 없다고 한다. 

노래 한 곡을 둘러싼 현재의 혼돈 국면은 이른바 5·18 광주민주화운동가에 대한 혼돈에서 비롯된다.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이란 당시 군사폭압체제에 항거한 광주 시민들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정신이다. 

그런데 당시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세력들 중에는 대다수의 순수한 민주화운동세력과 함께 광주사태라는 혁명적 국면에 편승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려는 소수의 짝퉁 민주화운동세력(혁명세력)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민주화운동세력이라 평가한 것이 현재의 혼돈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다수의 순수한 민주화운동세력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소수의 이른바 짝퉁 민주화운동세력(혁명세력)을 위한 노래다. 따라서 혁명선동가요를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것은 진정한 광주민주화운동 정신과 희생자들의 유지를 훼손하고 배신하는 것이며, 헌법적 가치에도 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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