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열등감 버려라”
“일본에 대한 열등감 버려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5.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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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오늘] 6·3사태(1964년 6월 3일)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박정희)

5·16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60년, 우리나라는 수출 3283만 달러, 수입 3억 4353만 달러로 무려 10 대 1의 무역 역조 국가였다. 무역수지 적자의 71.7%를 미국 원조로 메워야 하는, 경제적으로는 파산한 나라였다는 뜻이다.

1962년 군사정부는 50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을 계획했으나 실제로 들어온 액수는 6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외국 원조로 간신히 지탱하는 나라에 공장 지으라고 돈을 빌려줄 외국 금융기관이 있을 리 만무했다.

▲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인기에 연연했다면 박정희는 한일협상을 포기했을 것이다. 사진은 한일협정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배고픈 민중은 집권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당장 빵을 줄 수 없으면 허상의 빵, 꿈이라는 희망이라도 줘야 하는 것이 역사의 비정한 교훈이다.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확고하고 안정적이며 비전 있는 리더십, 둘째, 잘 짜인 경제발전계획, 셋째, 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유능한 정부 관료집단, 넷째, 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확보다.

선진국은 모든 인프라와 조건들이 갖춰져 있지만 한국은 위에서 열거한 거의 모든 조건들, 즉 자본·기술·에너지·경험·훈련된 인재·행정력·리더십 등이 총체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한 시절 이 나라를 식민 지배했던 일본과의 수교를 통한 경제개발 자금의 확보였다.

에르하르트, “미래 위해 일본과 수교하라”

그러나 당시는 해방된 지 20년도 안 되어 식민지 시절의 어두운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다. 절대다수의 국민들, 특히 야당 지도부와 지식인, 학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양반 지주 출신 그룹은 새파란 애송이 군인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하여 분기탱천해 있었다.

이 와중에 아무리 경제 개발이 시급하다 해도 구원(舊怨)이 쌓인 일본과 수교하여 또 다시 이 땅에 일장기가 휘날리면 한국은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전락하고 일본의 매판자본에 착취를 당해 경제 종속이 될 것이라며 우려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박정희에게 일본과의 수교를 제안한 사람은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이었다. 박정희가 1964년 12월 서독을 국빈 방문했을 때 에르하르트 수상은 한국이 분단국으로서 공산주의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경제 건설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그 도로를 달릴 자동차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 자동차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제철산업과 정유공장을 건립해야 한다는 점, 철도·도로·항만과 같은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해야 한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이러한 산업을 일으키는 데는 막대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국가 지도자는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을 봐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라”고 권유했다. 박정희는 독일 경제 기적의 현장을 돌아보며 “일본과 수교하라”는 에르하르트의 조언을 잊지 않았다. 이것이 서독 방문에서 얻은 큰 성과였다.

또 한 가지, 미국의 권유도 큰 작용을 했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반공전선의 구축을 위해 자유민주국가인 한일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를 적극 유도했다. 일본의 원조를 통해 한국을 근대화함으로써 한일 두 나라가 동북아에서 강력한 반공의 보루 역할을 수행도록 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이었다.

정권의 명운 걸고 일본과 수교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이 방미(訪美)하여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 케네디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적극 권유했다. 그리하여 이승만, 장면 정부를 거치며 지지부진하게 이어오다 일시 중단됐던 한일 수교를 위한 회담이 1962년 10월부터 재개됐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에는 반일(反日)감정이라는 국민정서가 결정적인 변수였다. 당시 국내 민심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 거의 적대적인 분위기였다. 사회 지도층 일각에서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일본과의 수교가 불가피하다고 봤으나 그것은 극소수 의견일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격렬한 배일(排日)감정에 대해 이성적으로 호소하여 국민을 설득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때문에 한일 수교는 박정희 정권의 명운이 걸린 일대 도박이었다.

이 와중에 재개된 회담도 양국의 확고한 입장 차로 인해 혼미를 거듭했다. 리더십에서 중요한 것은 결단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일본과의 경제협력 없이 신속한 경제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박정희는 하루빨리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민심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봤다.

당시엔 한국의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던 미국의 무상원조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때문에 식민 지배를 당했던 과거의 울분에서 우러나오는 민족감정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일본과 손을 잡고 자본과 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교착 상태에 빠진 회담에 일대 전기를 만들기 위해 박정희가 선택한 카드는 만 38세의 신참내기 외교관 이동원이었다. 1964년 7월 27일 박정희는 이동원을 외무장관에 임명하고 한일회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난 무조건 이 장관을 믿고 맡기니 소신껏 추진하시오. 되도록이면 빨리 내실 있게 매듭졌으면 하는 생각이오. 난 일본에서 청구권 자금을 들여오는 데는 관심 없소. 그보다는 우리 경제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얼마나 일본을 끌어들여 활용하느냐에 더 관심 있소. 그러니 한일회담도 일본을 끌어들이는 여건 쪽에 초점을 맞추시오.”

저돌적인 파이터 이동원을 외무장관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한일회담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36년간 식민지배의 성격에 대한 뚜렷한 견해차로 인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꼴이었다.

야당과 지식인, 대학 교수, 학생들은 국민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식민지 시대의 아픈 기억을 끝없이 자극했다. 1964년 4월 13일 서울 시내 대학생 4000여 명이 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4월 17일에는 효창구장에서 대규모 한일회담 반대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성난 군중들이 거리를 휩쓸었다. 시위대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제2의 매국노 이완용”이라고 비난하며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1964년 6월 3일 절정에 달했다.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지도나 인기에 연연했다면 박정희는 한일협상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박정희는 정치인으로서의 대중적 인기 대신 혁명가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제2의 5·16을 감행하는 심정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시위 진압에 나섰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언론은 검열을 받았고, 반정부운동 주모자들은 체포되었다.

수교 회담은 1965년 4월 기본조약에 합의했다.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요구했던 식민통치 배상 요구를 철회했고, 일본은 무상지원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1964년 한국의 수출 규모가 1억 달러를 처음으로 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일본으로부터의 무상지원금과 차관 액수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최소 34억 달러에서 최대 2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Mark Manyin, “Japan-North Korea Relations,” CRS Report for Congress, November 26, 2003, p. 9.)

일본과의 수교 연기했다면…

박정희는 4·19에 버금가는 야당과 시민과 학생들의 거센 시위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이라는 극약처방을 동원하여 한일 수교를 매듭지었다. 그는 국민의 반일감정을 일본을 따라잡는 에너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1965년 6월 23일 발표한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국민의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매국적이라고는 극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교섭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중략)…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사이비 행세 이것들입니다. 또 있습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 하는 권위주의, 명분주의, 그리고 언행 불일치주의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과감하게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가진 국민이 됩시다. 자신은 희망인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민족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일본과의 수교로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이 들어오고 일본의 앞선 기술과 경험이 유입되면서 한국의 산업 각 분야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 일본과의 협력 강화로 한미일 3각 해양동맹이라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학자들은 박정희 리더십을 ‘개발독재’라고 부르는데, 개발독재의 핵심은 빠른 의사결정과 경제 우선의 의사결정이다. 박정희는 ‘제2의 매국노 이완용’이란 비난을 감수해가며 일본과 수교하여 산업화 초기의 자금난에 숨통을 텄고, 국민들의 배일감정을 ‘일본 따라잡기’의 동력원으로 유도했다.

만약 박정희가 당시의 격렬했던 반대 여론에 굴복하여 일본과의 수교를 또 다시 연기했다면 1960~70년대의 산업화의 결실은 가능했을 것인가.

※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 전문 (1965년 6월 23일)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어제 일본 동경에서 한일양국의 전권대표 사이에는 양국 국교 정상화에 관한 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우리나라의 가장 어렵고도 커다란 외교 숙제였으며, 또한 내가 총선거 때에 공약으로 내건 바 있는 이 문제가 마침내 해결을 본 데 즈음하여,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평소의 소신의 일단을 밝혀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협조를 얻고자 합니다.

한 민족, 한 나라가 그의 운명을 개척하고 전진해 나가려면, 무엇보다도 국제정세와 세계조류에 적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국제정세를 도외시하고 세계대세에 역행하는 국가판단이 우리에게 어떠한 불행을 가져 오고야 말았는가는 바로 이조말엽에 우리 민족이 치른 뼈저린 경험이 실증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국제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적은 국제공산주의 세력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어느 누구에게도 다시 빼앗겨서는 안 되지만, 더우기 공산주의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손잡을 수 있고 벗이 될 수 있다면 누구하고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고 내일의 조국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감정을 참고 씻어버리는 것이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확고부동한 신념이올시다.

더구나 중공의 위협이 나날이 증대하여 가고 있고, 국제사회가 이른바 다원적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위치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반세기전에 우리가 겪은 민족의 수난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민족의 번영을 기약하는 현명한 판단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지난 수십 년 간 아니 수백 년 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그들은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한일 간의 국교를 정상화함에 있어서 나와 현 정부가 크게 배려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원통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호혜 평등, 협동, 전진의 앞날을 다짐하는 기본관계의 설정이었고, 다음으로는 대일평화조약에 규정된 청구권 문제, 한국 연안의 어족자원 보호와 100만 어민의 장래를 보장하는 어업협정 문제, 일본 땅에 버려진 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60만의 재일교포의 처우문제, 그리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돌려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 문제가 우리만의 희망과 주장대로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제반 여건과 선진 제국의 외교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국가이익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외교란 상대가 있는 것이고 또 일방적 강요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치와 조리를 따져 상호간에 납득을 해야 비로소 타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한일 간의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안전과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양국은 비단 지리적으로 가깝다든다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극동의 같은 자유국가로서 공동운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공동의 관계는 호혜평등의 관계요, 상호협력의 관계이며, 또한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한일 양국 간에 있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이 순간에 우리가 깊이 반성하고 깊이 다짐할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정신과 주체의식이 더욱 확고해야 하겠다는 것이며, 아세아에 있어서 반공의 상징적인 국가라는 자부와 긍지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국민의 일부 중에 한일 수교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저자세니, 또는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자초한다는 등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매국적이라고는 극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정부가 하는 교섭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도움도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본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 열등의식부터 우리는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우월감은 왜 가져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제부터는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민족국가가 새로이 부흥할 때는 반드시 민족전체에 넘쳐흐르는 자신과 용기와 긍지가 있어야 하고 적극성과 진취성이 충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근대화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는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 그리고 퇴영적인 소극주의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생산적인 사이비 행세 이것들입니다. 또 있습니다. 속은 텅텅 비고도 겉치레만 번지레 꾸미려 하는 권위주의, 명분주의, 그리고 언행 불일치주의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과감하게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가진 국민이 됩시다. 자신은 희망인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 민족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입니다. 응당한 노력을 지불함이 없이 공짜로 무엇이 되려니, 또는 무엇이 생기려니 하는 생각은 자신력을 완전히 상실한 비굴한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일부 국민들 중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면 우리는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이러한 열등의식은 버려야 하는 동시에, 이와 반대로 국교정상화가 되면 당장에 우리가 큰 덕을 볼 것이라는 천박한 생각도 우리에게는 절대금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마디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앞으로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느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의식이 어느 정도 건재하느냐,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바르고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굳으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고,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문화인이나를 할 것 없이 국리민복을 망각하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일이 있을진대,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제2의 을사조약이 된다는 것을 2,700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같이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밝혀 둘 말이 있습니다.

우리와 그대들 간에 이루어졌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선린으로써 다시 손을 마주잡게 된 것은 우리 양국국민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과들이 오늘의 일본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 선도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무 조인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침통한 표정과 착잡한 심정을 과거의 구원을 억지로 누르고, 다시 손을 잡는 한국 국민들의 이 심정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 넘기거나 결코 소홀히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두 나라 국민이 참다운 선린과 우방이 될 수 있고 없는 것은 이제부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체결된 협정문서의 조문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그대들이 한국이나 한국국민에 대한 자세와 성의 여하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대일 불신 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 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제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남은 절차는 국회의 비준입니다. 물론 국회는 국회대로 충분한 논의를 하겠지만 국민 여러분께서도 특별한 관심과 참여의식으로 이 문제의 마지막 매듭에 현명한 판단과 아낌없는 협조가 있을 것을 나는 확신해 마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한일협정 관련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j_VgoCD0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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