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황제기업, 금영의 몰락
노래방 황제기업, 금영의 몰락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6.05.31 02: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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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비즈] 노래방 기기 제조기업 금영의 흥망성쇠

반도체 칩에 노래 심는 기술로 일본 진출 성공, 컴퓨터 반주기로 신곡 보급, 인터넷 전용선을 이용한 신곡 업데이트로 노래방  기기 석권. 그러나 무리한 사업 다각화로 몰락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팍팍한 삶에서 노래방은 한국인들에게 오아시스였다. 퇴근 후 직장인들의 회식, 주부들의 친목 모임, 대학생들의 놀이문화에서 노래방은 언제나 국민 오락으로 사랑을 받았다. 동시에 IMF 외환위기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떠나야 했던 이들에게 노래방은 창업 아이템으로 생명줄이 되어주었고, 침체된 부동산을 살렸다.

노래방은 청소년들에게는 가수의 꿈을 키우는 연습장이 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한류(韓流) 오디션 스타들이 노래방을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노래방의 개척자이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주)금영은 올 3월, 노래방 사업을 포기하고 부산의 한 중소기업에 인수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금영의 몰락은 시장경제에는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기업은 그런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국민 경제에 부(富)를 낳는 인프라를 구축한다. 기업은 망해도 산업은 존재하며, 살아남은 기업은 그래서 더 강해진다. 

금영의 흥망성쇠 스토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선 금영의 노래방 사업이 벽돌 깨기 같은 소규모 문방구 게임기 회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2003년 일본에 진출해 성공을 거둔 최초의 한류기업이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가라오케의 원조국 일본에서 노래방 사업으로 말이다. 이렇듯 미스터리한 기업도 없다. 

일본 진출에 성공한 기업 

국내 최초의 공식 노래방은 1991년 5월 12일 해운대에 등장한 ‘하와이비치 노래연습장’이었다. 노래연습장은 오락실에 설치된 1.5평 부스의 ‘동전 노래방’이었는데 300원에 한 곡을 부를 수 있었다. 

이를 시작으로 노래연습장은 ‘음식과 주류의 반입이 금지된 노래반주기 서비스업’ 개념으로 한국 사회에 공식 등장하게 된다. 이때 노래반주기에 주목했던 사람이 문방구 게임기기를 제조하던 남경실업의 김승영 대표였다. 

1984년, 청소년용 전자오락기기를 제조·생산했던 김승영 대표는 정부의 청소년 비디오 게임기를 유해 상품으로 규제하는 바람에 사업을 접었다. 

일본의 비디오 게임기를 연구하던 김 대표는 1989년 일본의 가라오케(Karaoke)를 보고 종목을 전자부품 및 음향, 노래 반주기 사업으로 전환하여 회사를 법인으로 하고, 상호도 금영으로 바꿨다. 

성공의 판도라 상자는 일본의 가라오케 기기를 카피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 가라오케는 레이저 디스크에 곡을 담는 방식이었는데, 김 대표는 노래를 반도체 칩에 담았다. 이렇게 하면 훨씬 더 많은 곡을 담을 수 있고, 검색과 업데이트에 유리했다. 이 전략은 주효했다. 잠깐 반짝했던 일본식 디스크 가라오케는 전멸했고 (주)아싸와 (주)TJ미디어, (주)금영이 국내 시장을 놓고 격돌하게 됐다. 

김승영 대표는 후발기업이었다. 그는 아싸가 오케스트라 반주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MIDI라는 컴퓨터 반주기를 이용해 곡을 녹음했다. 이때 현실감이 오케스트라에 떨어지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코러스와 팡파르 기능을 넣었다. MIDI를 이용한 녹음은 단시간에 최신 곡들을 경쟁사보다 더 많이 녹음해 노래방에 공급할 수 있었다. 

당연히 노래방 사업자들로서는 신곡이 많은 업체를 선호하기 마련이다.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금영의 초기 팡파르는 노래 부르는 이의 박자, 음정 등을 컴퓨터가 계산해 점수를 줬는데, 이후에는 무작위로 점수를 주는 시스템으로 바꿨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취기가 오른 손님들이 점수가 안 나오자 노래반주기를 발로 걷어차 고장이 잦았기 때문. 

▲ 노래방 기기 회사 금영이 최신 기술로 일본에 진출하며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다.

후발주자로서의 한계 극복 

(주)아싸가 금영에 밀릴 무렵, 청년층을 타깃으로 한 태진(TJ)미디어의 질러노래방이 상승세를 탔다. 이후 노래방 손님들은 금영과 TJ미디어 충성자로 확연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금영의 김승영 대표는 이를 기발한 방법으로 돌파했다. 노래방에 신곡 업데이트를 직원이 방문해 처리해 주는 것이 아니라, 2000년대 초 급속히 확산된 인터넷 전용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처리했던 것. 세계 최초로 가라오케 노래방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금영이 일본에 진출해 가라오케 손님들 간에 노래 베팅을 하는 시스템으로 진화된다. 일본의 가라오케 문화는 손님들 간에 노래 시합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 금영의 온라인 노래반주기 시스템은 여기서 대박을 쳤다. 

금영이 일본에 진출한 2000년까지는 한국 기업이 일본에 진출한 전례가 많지 않았다. 일부 가라오케 전문기업이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산 OEM을 시도했으나 품질하자 문제와 콘텐츠 부재 등으로 사업을 포기하면서 금영은 2003년 일본 진출의 기회를 맞았다. 

금영은 먼저 일본 가라오케 기기 빅3 중 한 업체의 콘텐츠 개발에 참여하다가 2003년 ‘KY Japan’을 설립했다. 2006년에는 ‘UGANAVI KING’이라는 곡목 검색기를 출시했다. 지금은 일본 내 시장점유율 80%에 해당하는 기업에 지속적으로 자사의 제품을 납품하며, 93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김승영 대표가 이처럼 발 빠르게 시장에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노래와는 담을 쌓은 IT 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이후 노래방 시장은 급속하게 금영 측으로 기울었다. 노래방 반주기의 70%가 금영이었고, TJ미디어가 30%를 차지하게 된다. 금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발전된 기술을 개발하게 되는데, 바로 무선 마이크 시스템이었다. 

사업 다각화 실패로 몰락 

노래방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문제는 유선 마이크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무선 마이크 기술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금영은 노래방 무선 마이크 시스템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금영의 몰락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무리한 사업 다각화가 화근이었다. 금영은 2012년 휴대전화 부품 업체인 아이디에스와 음향·통신장비 업체인 르네코의 지분을 인수했다. 그러나 인수한 회사들이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 별도 재무제표 기준으로 2014년 말 금영의 부채 비율은 717%, 단기차입금은 416억 원에 달하게 된다. 

여기에 음원저작권협회에서 금영을 압박해 왔다. 노래방 음원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금영과의 음원이용계약을 해지했다. 불건전한 재무행위도 문제가 되어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재무 악화를 견디지 못한 금영은 올 3월, 알토란 같은 노래방 사업부를 셋톱박스를 만드는 부산의 한 중소기업에 매각했다. 

한때 노래방의 황제기업이었던 금영의 흥망성쇠는 시장에서 영원한 강자란 존재할 수 없으며,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고객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부산의 벽돌 깨기 문방구 게임 제조사에서 출발하여 일본 가라오케 시장을 석권했던 금영이었다. 하지만 금영은 자신에게 이윤을 남겨주는 소비자에게 끝까지 충성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금영은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중요한 기술과 인프라를 남겼다. 금영이 남긴 이 자산은 다른 기업에 의해 또 사용된다. 민간 기업의 흥망은 이렇듯 정부의 실패보다 가치가 있다. 정부는 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업보다 더 부도덕하고 더 위험한 것이다.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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