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
권력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6.0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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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겸임(1962년 6월 16일)

소수의 쿠데타 병력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박정희는 장도영을 무력화시키고 절대권력 장악

1961년 6월 16일은 쿠데타 지휘자 박정희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내각수반을 겸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 지도자에 오른 날이다. 사실 5·16은 250여 명의 장교와 3500여 명의 소수 병력이 일으킨 쿠데타라서 군 지휘부가 진압하기로 작심했다면 얼마든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은 자신이 직접 야전군으로 날아가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에게 쿠데타 진압을 요구했다. 아군끼리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순간, 윤보선 대통령은 비서를 1군사령부에 보내 “북에 공산당을 두고 아군끼리 싸우면 내일의 한국 운명을 장담할 수 없다”고 강력한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이한림 장군은 쿠데타 진압을 위한 병력 출동을 보류했다.

▲ 박정희는 혁명 성공 후 얼굴 마담 격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장도영 육참총장에게 맡겼으나, 장 총장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사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전국수사기관장회의를 주재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이 와중에 쿠데타군은 재빨리 이한림 장군을 체포하여 서울로 호송했고, 야전군 12사단이 춘천 시내로 출동하여 혁명군에 가담했다. 육군사관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혁명위원회 의장직 수락, 장면 내각의 사퇴 성명 등이 이어지면서 5월 18일 쿠데타는 성공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쿠데타 진행 과정에서 보인 장도영 총장의 양다리 걸치기 태도다. 그는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방치했고, 5월 16일 새벽에는 진압군을 출동시켜 극도의 혼란상을 연출했다. 박정희는 쿠데타군 병력 출동이 막히자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친필 서신을 써서 장도영 총장에게 보냈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러운 육군은 금 16일 3시를 기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습니다.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를 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민족을 구하고 명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민족적인 사명감에 일철(一徹)하여 결사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을 촌도(忖度)하시고 쾌히 승낙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로서 진두에서 지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를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여 민족사적 사명완수에 신명을 바칠 것을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 소관(小官)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 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여불비재배(余不備再拜) 5월 16일 소장, 박정희

편지를 전달 받은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은 범행이고 반동이오. 빨리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체포하겠다”고 외쳤다. 장 총장은 헌병대에 출동 명령을 내려 한강대교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한강을 건너오려는 쿠데타군에게 맹렬하게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여러 명의 병사가 부상을 당하는 등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갈 뻔했다.

‘얼굴마담’ 장도영이 권력 1인자로 부상

박정희 장군이 장도영 총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은 군심(軍心)의 수습 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은 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고금동서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자신에게 총을 겨눴던 장도영에게 파격적인 권력을 부여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9일 회의를 열어 혁명위의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장도영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각료명단을 발표했다. 장도영은 졸지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네 가지 요직을 겸직하면서 혁명정부의 1인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왜 정치적으로 중요한 네 가지 직책을 장도영에게 한꺼번에 맡겼을까. 이 점은 앞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 봐야 할 주제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장도영을 너무 안이하게 봤거나, 권력의 비정한 생리에 대해 잠시 망각했거나 둘 중의 하나 아니었을까.

물론, 박정희가 네 가지 직책을 앞세워 장도영을 설득했고, 장도영이 그 요청을 수락한 결과이긴 하지만, 밖으로 나타난 현상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권력의 추가 장도영으로 크게 기운 것으로 보이자 장 총장 아래로 육사 5기생들이 결집했고, 박정희 휘하에는 육사 8기생들이 모여들었다.

장도영의 독주가 계속되자 목숨 걸고 거사를 성공시킨 육사 8기생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장도영과 박정희의 권력 투쟁은 피할 수 없는 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병력 동원 권한을 가진 장도영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박정희는 장도영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장도영에게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직에서 사퇴할 것을 정중하게 건의했다. 병력 동원을 할 수 있는 군사적 권한을 배제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장도영은 일언지하에 박정희의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8기생 출신의 혁명주체들은 각군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장도영 총장과 육사 5기생들의 회합이나 움직임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예측불허의 국면으로 기울자 박정희는 비정한 권력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 무렵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에 상임위원회 설치안을 연구 검토하고 있었다. 상임위는 최고위원에 각 군 참모총장들이 합류하고 있었으나 바쁜 일정상 자주 만날 형편이 못되니까 상임위를 구성하여 국사(國事)를 검토하기 위한 일종의 ‘국무회의’ 성격의 조직이었다. 권력구조 상 상임위 의장은 당연히 최고회의 의장인 장도영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만약 상임위 의장 자리가 장도영에게 넘어가면 목숨 걸고 쿠데타를 하여 쟁취한 권력을 반혁명 입장에 섰던 장도영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만다. 따라서 비상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상임위 의장은 박정희가 차지해야만 했다.

“혁명이 아이들 장난입니까?”

장도영 거세 임무는 이석제가 맡았다. 이석제는 단독으로 장도영 총장을 찾아가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직을 사퇴하고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만 맡을 것을 정중히 건의했다. 당시 정황은 이석제의 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귀관이 무슨 권한으로 상관에게 자리를 내놓으라는 건가?”

“정말 못 내놓겠습니까?”

“절대 못 내놔. 귀관은 지금 혁명했다고 일개 육군 중령이 참모총장을 협박하는가!”

“혁명이 아이들 장난입니까. 우리가 계급 가지고 혁명한 줄 아십니까. 한강 다리 넘어올 때 혁명군은 이미 계급의 위계질서를 벗어났습니다.”

장장 4시간에 걸친 대화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직 사퇴를 거부했다. 남은 방법은 법률을 통한 해결책뿐이었다. 박정희와 혁명주체세력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 설치법률안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만들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에 상임위를 설치한다. 상임위 의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박정희)이 된다. 상임위원은 의장, 부의장, 그리고 각 분과위원장이 된다. 상임위를 통과한 모든 법안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장도영)이 결재하여야 한다.’

아울러 장도영으로부터 병력 동원의 근거가 되는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직위를 박탈하기 위해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했다. 이 법의 내용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내각수반 이외의 다른 직무를 겸직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이 법이 통과되면서 장도영이 가지고 있던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 직위가 날아갔다. 또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 설치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상임위 의장 직을 박정희 장군에게 넘겨줌으로써 장도영의 권력을 하루아침에 무력화시켰다.

새로 구성된 상임위 위원들은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한 혁명주체세력 일색으로 임명했고, 상임위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내각 통제, 소속기관의 지휘 감독권까지 부여했다.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는 일련의 법이 통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도영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상임위가 열릴 때마다 장도영은 출석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실에 나타나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 두리번거렸다. 애석하게도 상임위 의장석엔 박정희가 앉아 있었다. 장도영은 의자를 가져다 박정희 옆에 앉아서 회의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보곤 했다.

결국 장도영은 44일 만에 권좌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1961년 7월 3일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고, 내각수반에는 국방장관 송요찬을 임명했다. 이날 박정희는 “배수의 진을 친 우리들에게는 이제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전진이 있을 따름입니다”라는 취임사를 발표했다.

박정희 친정체제 완성하다

당시 미 정보기관은 혁명주체 장성들의 신상은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나 영관장교들에 대해서는 신상정보가 전혀 없었다. 미 정보팀은 혁명주체세력의 영관장교들에 대한 정보수집을 위해 베이징(北京)의 영국대사관과 접촉했다.

영국의 부탁을 받은 중국은 평양에 있는 자신들의 정보망을 동원해 북한이 수집한 남한 측 영관장교들의 신상명세서를 빼내 미국에 제공했다. 미 정보팀은 영관장교들 중 월남자들이 북한에 살 때의 성분과 교육 정도, 인간적인 개성과 사상문제, 성격이 공격형인지 방어형인지까지 세세하게 파악했다.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박정희는 일사불란하게 사회개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법조문을 들여다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모든 법조문이 일제시대의 것을 번역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식민 본국이 조선총독부의 관보에 실린 일본법과, 미군정 시절에 제정된 영어로 된 법률을 근거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 법사위에 명령을 내려 법률 제정 작업에 돌입했다. 우선 정부 각 부처에 법무관 제도를 신설하여 각 부처 관련법 중 일본법을 모두 폐기시키고 우리 실정에 맞는 법을 제정했고, 새로 제정된 법은 대한민국 관보에 게재해 시행했다. 약 1년에 걸쳐 수천 건의 법률이 새롭게 제정되어 시행에 들어갔다.

이때 제정된 법률들은 촉박한 일정에 쫓기며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법을 그대로 번역하거나, 상세하고 정교한 이론적 검토 없이 졸속으로 입법된 조항들도 더러 있었다. 1962년 6월 16일 송요찬 내각수반이 사임하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내각수반 직을 겸임하면서 명실상부한 박정희 친정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동정 관련 동영상을 시청사실 수 있습니다.

http://www.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448&mediadtl=9341&gbn=DT&qualit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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