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기본법, 절대 안 된다
사회적경제기본법, 절대 안 된다
  • 조동근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6.09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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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20대 국회에서 재연될 ‘사회적경제기본법’ 논란

‘사회적경제기본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간을 허무는 법. 20대 국회에서 재(再)입법 시도하지 말아야 할 최우선적 법률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19대 국회가 종료되고 20대 국회가 출범했다. 19대 국회는 사상 최악의 국회로 기록될 전망이다. 19대 국회가 남긴 민낯을 들여다보자. 

▲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시장경제제도연구소 이사장·전 한국하이에크 소사이어티 회장·전 한국재정정책학회 회장

19대 국회에 제출된 법안 1만7822건 중 가결된 법안은 7441건. 가결률은 41.8%로 역대 최저다. 1만 건이 넘는 법안은 회기 종료와 더불어 자동 폐기됐다. 19대 국회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놓고 대립하면서 2014년 5월 2일부터 9월 29일까지 151일간 국회가 공전됐다. 

뿐만 아니라 19대 국회의원 중 23명이 공직선거법 위반 등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는 17대 18명, 18대 21명보다 늘어난 숫자다. 19대 국회는 공무원, 기업인 등 3482명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증인 한사람 당 질의 및 진술시간은 평균 16분에 불과했다. 그리고 19대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39건의 징계안이 제출됐으나 단 한건도 의결되지 않았다. 무한갈등을 보이던 여야가 ‘제 식구 감싸기’엔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19대 국회는 ‘국회선진화법’으로 스스로를 중(重)무장했다. 국회의장의 법안 직권 상정을 엄격히 제한하고, 쟁점 법안은 단순 과반수가 아닌 ‘60% 이상’ 동의를 얻어야 통과되는 것으로 했다. 이는 소수 정파에게 사실상의 ‘비토권’을 부여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국정운영이 순조롭지 못한 것은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해서가 아니라 국회 권력이 무소불위였기 때문이다. 

19대 국회는 임기 개시 한 달이 지난 2012년 7월에 개원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2월에 임기를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3년여는 19대 국회와 정확하게 겹친다. 따라서 최근 3년간의 낮은 경제성과에 대해 박 대통령과 19대 국회 모두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저성장의 구조화’와 구조개혁 표류 

한국경제의 위기 상황은 저성장의 구조화와 구조개혁의 표류로 집약된다. 최근 10년간(2006~2015) 경제성장률은 3.55%로 김영삼 정부 7.82% 대비 반(半)토막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2013~2015) 경제성장률 평균은 2.93%로,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3.0% 이하로 떨어졌다. 

근래의 저(低)성장은 경기 순환적 저성장이 아니라 정책 실기(失機)와 실패로 인한 ‘구조적 저성장’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정책 실기와 실패로 구조조정은 표류했다. 

우리나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시행하지 않았다. 고용 유지의 관성에 이끌려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정책 후순위로 밀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위기 수습에 급급한 나머지 구조 개편은 뒷전이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구조조정과 구조 개편’은 아예 정책당국의 정책 사고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2011년 동(東)일본 대지진으로 체감(體感)하는 일본으로부터의 경쟁 압력이 줄어서일 수 있다. 맞수인 일본의 존재감을 잠시 망각한 듯하다. 또 중국의 고성장 덕분에 우리나라 중간재 수출이 호조를 띠자 이에 취해 중국이 추격하고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망각했을 수도 있다. 

구조조정의 표류로 좀비 기업이 늘어났다. 좀비 기업은 생산성이 낮아 다른 기업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은 기업이지만, 금융 및 정책 지원을 받아 연명하는 기업을 의미한다. ‘too big to fail’로 대변되는 ‘대마불사(大馬不死)’가 재벌의 생존 논리였다면, 좀비기업은 ‘too many to fail’을 자기방어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한마디로 ‘좀비불사(不死)’다. 

▲ 박근혜 정부 들어 나타난 구조조정 실패와 이에 따른 저(低)성장은 대통령 책임이라기보다는 포퓰리즘에 합하는 무소불위의 국회 권력 때문이다. 조선업계는 과거 구조조정의 실패로 위기에 내몰렸다. /연합

저성장과 구조개혁 표류의 근저 요인: 경제민주화와 사회적경제기본법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2015년 6월 30일)에 의하면 2014년 말 2만1700여 개 외부감사 대상 기업 중 3년 연속 영업이익이 이자 비용에 못 미치는 한계기업은 3295개다. 이는 총 외감기업의 15.2%로, 2009년말 12.8%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이다. 

모든 현상에는 근저 요인이 있기 마련이다. 느닷없이 ‘저성장의 구조화’가 들이닥친 것이 아니다. 구조 개편의 중요성을 몰라서도 아닐 것이다. 문제의 연원은 분명하다. 정치권의 인기영합에 따른 ‘경제의 정치화’가 근원적 오류(mother fallacy)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국민 행복론’의 추상에 탐닉하고 ‘경제 민주화’의 도식적 사고에 함몰되었다. 급기야 대한민국 경제체제의 정체성에 반(反)하는 입법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정책시계’는 멈췄고 도끼자루는 썩어 들어갔다. 

2014년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은 ‘사회적경제기본법’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아직 살아 있다. 언제든 재(再)발의될 수 있다.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치 지형에서 ‘협치’(協治)란 이름으로 여야가 합의하면 20대 국회를 통과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은 통상적인 법률이 아니다. 통과되면 시장경제체제의 근간을 허물 수도 있다. ‘다당제’일수록 각 정당의 정책 잔가지는 다르더라도 ‘국가 체제와 진로’에 대해서는 큰 틀에서 합의를 이뤄야 한다. 합의는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견지하고 지향하는 것이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의 재(再)입법이 불가한 이유는 간명하다.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이다. ‘사회적경제기본법’에서 유승민 의원이 내린 ‘사회적 경제’의 정의는 이렇다.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 따뜻한 일자리, 사람과 노동의 가치, 협력과 연대의 가치, 지역공동체의 복원,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선(善)한 정신과 의지 등이 소중한 ‘사회적 가치’이며 “사회적 경제는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추상 그 자체다. 그의 사회적 경제는 제러미 리프킨의 <유로피안 드림>(2004)을 떠올리게 한다. 국내에서도 출간된 이 책은, 노무현 전(前)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일독을 권했다는 입소문으로 유명해졌음은 익히 알려진 그대로다. 

‘유로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획일 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富)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경쟁보다는 협력을, 재산권보다는 보편적 인권을 강조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여지없이 저급한 것으로 격하되고 ‘유로피안 드림’은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지상 과제로 격상됐다. 

대단히 위험한 발상

<유로피언 드림>은 ‘선(善)과 악(惡)’의 작위적 대비에 의존하고 있다. 대중들이 반길 만한 가치를 중첩시킨 일종의 논리 배열의 트릭(trick)일 수 있다. 하지만 유로피안 드림은 이내 무색해지고 말았다. 이유는 간명하다. 미국 발(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제 부활과 유럽, 특히 남유럽의 경제위기가 그 답이다. 유승민은 그런 ‘유로피언 드림’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의 ‘제안 이유’는 마치 운동권의 출정식을 보는 듯하다. “양극화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내부로부터의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 공동체의 붕괴를 막는 것이 시대적 과제이기에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국 경제의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인 국가의 복지, 자유시장경제의 성장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필요에 따라 시장경제체제를 보완할 여지는 있지만, 사회적 경제가 새로운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은 ‘협력과 연대’를 전면에 내세우며, 자유시장 경제에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협력, 분업, 경쟁, 연대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원시공동체의 ‘대면(對面)사회’를 익명의 ‘개방사회’로 바꾼 것은 경쟁과 분업이다. 시장경제는 분업과 경쟁을 통해 협동과 연대를 꾀하는 체제다. 따라서 이 같은 가치들은 오히려 시장경제체제에서 효율적으로 추구된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 농어촌공동체회사 등” 사회적 경제 조직을 필요로 한다. 이 법안에 의하면 대통령 직속의 ‘사회적경제위원회’를 설치하고 실행조직으로 ‘사회적경제원’을 둬야 한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회적 경제 5개년 기본계획을 세우고, 정부는 사회적 경제조직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5%까지 우선 구매해야 하고, 발전기금도 조성해야 한다. 법안을 통해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지속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년도의 정책 발상이 그대로 묻어 있다. 

▲ 반(反)자본주의적인 허황된 꿈에서 비롯된 사회적경제기본법은 시장경제 체제의 근간을 흔들 뿐만 아니라, 일부 정치세력의 생계유지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사진은 최근 대중 강연을 통해 정치 행보를 하고 있는 유승민 의원./ 연합

시장은 실종되고 ‘통제와 계획’만 남을 것

사회적 경제 조직을 육성하면 양극화를 제어하고 체제 붕괴를 막을 수 있는가? 부정적이다. 정부가 후원한 사회적 기업이 자율성과 경쟁력을 갖출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악의 경우 일부 정치세력의 생계유지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사회적 가치’와 같은 합의하기 어려운 개념을 국가의 ‘자의성’을 배제해야 하는 행정법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협력과 연대를 전면에 내세우면 ‘자유와 창의’를 경제상의 기본질서로 한다는 헌법 119조 1항과 충돌한다.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 시장은 실종되고 ‘통제와 계획’이 그 자리를 메운다. 하이에크가 설파했듯이 자유와 계획은 양립할 수 없으며, 양립할 경우 계획으로 기울어진다. ‘사회적’이라는 용법은 큰 정부를 합리화시킬 뿐이다. 

국가를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무제한의 국고(國庫)와 무오류의 조언을 나눠줄 수 있다면, 누구도 그런 국가를 원하지 않을 리 없다. 민간 부문이 아닌 국가가 박애주의의 실천자가 된다면 모두들 입법을 통해 특혜를 받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추가하지 않고서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한 손으로 무엇인가를 빼앗아 다른 손으로 나눠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고는 약탈의 대상이 되고, 국가는 ‘만인(萬人)이 만인을 착취하는 거대한 허구’로 전락한다. 

19세기 자유주의자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일찍이 법이나 정치의 도움으로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합법적 약탈’로 명명했다. 규제는 합법적 약탈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법치’(rule of law)가 필요한 것이다. 법은 인격과 자유, 재산권을 보장하고 모든 것이 ‘정의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개인적 완력을 집단적 완력으로 대체한 것이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은 반(反)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협동조합주의의 결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적 경제 조직을 마치 곧 무너져 내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 완화, 노동시장 개혁, 혁신을 통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자리 창출이다.

사회적 연대가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만들 수는 없다. 지속 가능하려면 세금이 투입돼야 한다. 정부 지원이 끊기면 주저앉는 관치(官治) 사회적 경제가 오히려 국가적 낭비와 위기를 초래할 개연성이 높다. 

국가개입주의 내려놓아야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고 저성장이 구조화된 데는 정서법, 떼법, 특수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각종 처분법 등이 횡행하면서 근로 동기와 투자유인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비인격적·중립적 시장에서 풀어야 할 일을 투표(법)로 풀려 했기 때문이다. 

사회적경제기본법도 설계주의에 기초한 처분법이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은 국가를 전지전능한 집단으로 간주한 나머지 개인의 이해관계를 입법을 통해 불편부당하게 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20대 국회는 ‘사고의 반전’을 꾀해야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비인격적(impersonal)’인 시장이 ‘재량적’인 국가권력보다 더 효율적이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개입주의는 국회의 권력을 증대시키며, 부지불식간에 입법 만능주의를 부른다. 사회적경제기본법도 그 일환이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불편부당하게 조정하는 인위적 질서를 설계할 수 없다. 이제 국가개입주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는 것이기에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

시장은 자연적 질서에 의해 조직되는 자원배분기구로서 옳고 그름의 대상이 아니다. 시장이 만능일 수는 없지만, 시장과 싸우는 것이 정책일 수는 없다. 존재하지 않는 적(敵)을 공격하는 것만큼 허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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