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新고립주의로 회귀하나?
미국, 新고립주의로 회귀하나?
  • 남시욱 미래한국 고문
  • 승인 2016.06.13 01: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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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트럼프 돌풍과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

미국의 신고립주의 회귀 경향 경계하며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 조성되고 있어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미래한국 고문 

미국 공화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그의 외교정책 기본방향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Policy)라고 선언했다. 그는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오직 미국의 국가 이익이라는 분명한 렌즈를 통해 세계를 볼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그의 미국 우선주의를 ‘재포장된 고립주의’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널드 트럼프의 이상한 세계관’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 용어를 1930년대 고립주의자들로부터 트럼프가 출처도 밝히지 않고 인용했다고 비꼬았다. 

과연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고립주의인가. 트럼프는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막고,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민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멕시코 국경선에 높은 담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또 미국이 아랍 세계를 서구식 민주주의 사회로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이 미군 주둔 비용을 공정하게 지불하지 않으면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점들을 봐서는 그가 고립주의자임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트럼프는 김정은과 대화 용의를 밝히기에 앞서 그의 암살까지 거론하는 등 외국에 대한 무력 개입도 불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점에서 그는 ‘반절의 고립주의자’라 할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서민층을 주축으로 하는 다수 미국 유권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소수민족과 불법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분노하면서 트럼프의 고립주의 노선에 동조하고 있다.

▲ 미국은 1973년 월남에서 철수하면서 국제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기 시작했다. 트럼프의 외교정책은 이 시기 미국의 ‘신고립주의 외교노선’으로 회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은 베트남 미국대사관에서 미국인들이 탈출하는 장면.

조지 워싱턴에서 시작된 고립주의 전통 

지난 5월 미국의 미국 싱크 탱크인 퓨(Pew)리서치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인 57%가 “미국은 자기 나라 문제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다른 나라의 문제는 해당국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수치는 퓨리서치가 지금까지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것이다.  2013년에 52%이던 것이 3년 만에 5%포인트가 올랐다. 퓨리서치가 조사한 다른 문항은 차기 대통령이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 중 어느 쪽에 더 중점을 둬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70%의 절대 다수가 국내 정책이라고 답했다. 

미국의 고립주의(isolationism) 노선은 200년 이상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외교사학자들은 그 기원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1792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면서 발표한 고별사로 잡는다. 

그는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상호대립하고 있는 유럽 강대국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중립정책을 쓸 것을 당부했다. 1823년에는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유럽 대륙의 문제에 대한 불개입과, 그 대신 유럽 열강에 의한 미주 대륙 국가들에 대한 간섭, 특히 이들 국가들의 식민화를 반대한다는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고립주의 노선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미국의 국력이 신장되자 점차 제국주의적 외교노선을 취하면서부터였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치러 필리핀을 취득하고, 중국에 대해 문호개방정책을 요구하는 한편, 중남미 국가들과 범미연합을 창설하고 이들 국가의 내정에도 개입했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1917년에 결국 참전함으로써 국제주의(개입) 노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당시 대표적인 고립주의자는 야당인 공화당 소속의 두 거물, 즉 상원 원내대표 헨리 C. 롯지와 상원 외교위원장 윌리엄 E. 보라였다. 이들은 1918년 국제주의자인 민주당 소속 윌슨 대통령이 체결한 1차 세계대전의 강화조약, 즉 베르사유 평화조약에 대한 상원 비준을 거부하는 데 앞장섰다. 

이 조약에는 국제연맹의 창설 규정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조약의 비준 문제는 당시 미국 정계의 중요한 정치 쟁점이 되었다. 두 사람은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면 미 합중국의 주권이 제약되며 조지 워싱턴의 철학과 먼로 독트린에도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 비준안은 상원의 2차 투표에서 찬성 49표 대 반대 35표가 나와, 비준안 통과에 필요한 3분의 2 찬성에 7표 미달로 부결되었다. 상원의 비준 거부로 인해 미국은 윌슨이 앞장서서 창설한 국제연맹에 가입할 수 없었다.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노선은 1930년대 말 유럽에서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국제주의자들의 본격적인 도전을 받았다. 당시 세계적 규모로 팽창하던 파시즘의 공세 앞에서 유럽의 민주국가들이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하자 미국의 안보에도 심각한 위협이 우려되었다. 이로 인해 대외정책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국제주의자들은 ‘연합국을 도와 미국을 지키는 위원회’(Committee to Defend America by Aiding the Allies)를 결성하고, 고립주의자들은 ‘미국우선 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를 조직해서 서로 대항했다. 

국제주의자들은 루스벨트가 1930년대 중반에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반해 고립주의자들은 미국은 다른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말려들지 말고 미국 자신의 안전을 챙겨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약 2년 후인 1941년 1월 루스벨트 행정부는 그 동안 국제주의자들이 요구해온 무기 대여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영국·프랑스·소련 등 연합국에 식량·탄약·전차·선박·항공기 등 무기와 장비를 무상으로 대여해 줬다.

이 같은 획기적인 조치는 고립주의 노선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 대전환이었다. 미국은 얼마 후인 그해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작전이 일어나자 자동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국제주의와 신고립주의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은 공동으로 ‘대서양 헌장’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종전 1년 전인 1944년 8월 브레튼 우즈 회의에서 합의한 IMF(국제통화기금)와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로 대표되는 세계 경제질서와 10월 덤버튼 옥스 회의에서 유엔 창설로 대표되는 세계 정치질서로 구체화되었다. 

루스벨트의 후계자인 트루먼 대통령 역시 종전 직후 동서냉전이 시작되자 소련 봉쇄정책을 채택해 전후(戰後) 세계를 주도함으로써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이 거둔 최대의 외교적 성과는 소련 공산체제의 붕괴와 냉전에서의 최종적인 승리였다. 

미국은 1960년대에 들어 월남전에 개입했다가 국내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쳐 1973년 월맹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이 철수하자 월남은 곧바로 적화되었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국제문제에 대한 개입의 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이 시기 미국의 외교노선을 신고립주의(neo-isolationism)라고 부른다. 

그러나 2001년 국제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가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을 공격한 9·11 테러 사태를 일으키자 사정은 급변했다. 부시 행정부는 곧바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해 미국의 신고립주의는 깨졌다. 

이 시기에는 또 냉전 종결 이후 생겨난 힘의 공백 상태로 유럽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영토분쟁과 민족분쟁 및 종교분쟁이 증가하자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힘과, 이로 인한 독특한 지위 때문에 미국의 고립주의에 엄연한 한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어떤 학자는 아예 미국에게 진정한 고립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014년 5월 중동지역에 새로운 테러 조직인 IS(이슬람국가)가 등장해 이라크와 시리아를 휩쓸었다. 2015년에는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 대한 군사개입을 극력 자제하고 있던 오바마 행정부는 정치적 난경에 처해졌다.

공화당 등 보수세력은 오바마 외교가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퓨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로는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과대하게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 응답자가 52%에 달했다. 

그렇다면 대체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인가. 미국의 고립주의 외교노선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기, 즉 18세기 건국 초기로부터 19세기 말 사이에는 조지 워싱턴, 먼로 등의 기본노선이 지켜졌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제국주의적 외교노선을 포함한 과도한 해외 개입에 반대하는 국내파 내지 민주주의자들이 고립주의를 선호했다. 미국의 저명한 외교정책 이론가 월터 리드에 의하면,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의 외교노선을 추종하는 인물들이 미국 고립주의자들의 본류다. 

고립주의자인 제퍼슨의 외교노선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전하는 데 우선적 목표를 두고 미국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국가와 동맹관계를 맺어 국제분쟁에 말려들거나 전쟁에 개입하여 미국 자신의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에 빠질 것을 우려한다. ‘제퍼슨 파’의 이 같은 외교노선은 현재 민주당 좌파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월터 리프먼, 노엄 촘스키의 사상이 여기에 속한다. 

고립주의의 다른 계열은 포퓰리즘 경향이 강한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영향을 받은 ‘잭슨 파’다. 로널드 레이건과 부시 2세 등 우파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미국의 통상을 확대하고 영토를 넓혀 국가 위신을 증대시키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 이들은 외교정책에서 이념을 중시하는 윌슨 파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다. 

무엇이 국가 이익인가? 

세 번째 고립주의자 유형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의 외교노선이다. 그의 외교노선은 미국의 대외무역 역량 강화를 비롯한 국가 이익의 옹호를 핵심적인 정책 목표로 삼는다. 

현재는 미국의 이 같은 신고립주의 회귀 경향을 경계하면서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을 계속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포스트(WP)는 ‘고립주의는 선택지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5월 4일자 사설에서 “지금의 세계는 1945년 이후 미국의 장기적인 안보투자의 결과물”이라며 한국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WP는 “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된 독재국가였던 한국은 지금 민주국가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역동적인 경제대국의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WP는 이어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삼성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있다”면서 “한반도에 장기적인 미군의 주둔이 없었다면 이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국은 차기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국 사회의 이 같은 흐름에 충분히 대응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시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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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match 2016-12-23 12:01:44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는 2014년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