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게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
미국에게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6.14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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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멸망 가능성

한국이 지속적으로 미국의 글로벌 전략과 엇박자를 낼 경우 미국은 김정은과 평화협정 체결하여 한반도의 관리권을 북에 맡기는 방안 선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 1882년 조미 수교 이후 조선 지도부, 오매불망 미국이 한국의 ‘거중조정’ 역할 해줄 것으로 기대 
● 1950년 애치슨 선언의 진짜 의미는 모택동과 스탈린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미국의 대전략 
● 스탈린의 대모략에 의해 한국전쟁은 미국과 중공의 피 튀기는 대결장으로 변해 
● 1969년 닉슨 독트린은 중국과 손잡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 베트남 포기 선언한 것 
● 한국의 지도자들은 국제정치학, 국제전략론의 초보상식조차 결여
● 미국은 결코 한국의 안위를 위해 존재하는 천사(天使)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불과 4개월 만에 쟁쟁한 경쟁자 16명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그의 주한미군 주둔 비용 100% 전액 한국 부담, 핵 개발 용인 발언으로 이 나라의 지도층들이 충격을 받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는 김정일과 만나 대화하겠다는 발언까지 하고 있다.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여기에 맞서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이라는 격랑이 일고 있는 와중에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트럼프가 등장했다. 트럼프는 경선 과정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자”는 메시지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전국을 돌며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부추겼다. 

발 빠른 기업들은 애국심 마케팅을 시작했다. 코카콜라는 ‘나는 미국인이라 자랑스럽다’(I’m proud to be an American)는 문구와 성조기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을 새긴 제품을 출시했다. 버드와이저 맥주는 제품 이름을 아메리카로 바꾸고 자유의 여신상 도안을 넣은 제품을 판매 중이다. 

그 동안 한국은 안보의 절대적인 부분을 미국에 의지한 채 경제개발에 전력투구함으로써 빠른 시간 내에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동맹은 결코 공짜가 아니며, 미국이 언제까지나 한국의 안보를 책임져주기 위해 강림한 미네르바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다 알고 있어야 했다. 

▲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손잡기 위해 베트남전 종전과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한 바 있듯이 미국은 언제든 국익을 위해 한국을 버리고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다. 사진은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 주은래 총리와 만찬을 하는 장면.

조선, 미국을 짝사랑하다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미국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였다. 조선이 1882년 서방 국가 중 최초로 조선과 우호수호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수교 이후 양국은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상호 협조 관계가 아니라, 조선이 미국을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비정상적 관계였다. 

조약 체결 당사자인 미국의 슈펠트 제독은 조선은 대단히 가난하기 때문에 상업적 중요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수교했다. 그런데도 수교를 한 이유는 “조선 근해에서 난파된 미국 상선과 선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조선은 미국이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상국(上國)’, 즉 형님 나라라고 여겨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고종은 미국이 주변 열강들과는 달리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는 우호적이고 정의로운 나라로 인식하고, 미국의 도움을 얻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제1조는 조선과 미국 두 나라 사이에 영구적인 평화와 우호가 있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만약 제3국이 어느 한쪽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혹은 억압적인 행동을 할 경우 미국과 조선은 ‘그 사건을 통지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이 이루어지도록 거중조정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우의를 표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지도부는 ‘거중조정에 최선을 다한다’는 구절을 미국이 제국주의 포식자들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줄 새로운 ‘형님 나라’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조선 지도부의 이상론적 인식과는 달리 “수백 권에 달하는 국제법 서적도 서너 문의 대포와 겨루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우호조약도 얼마 되지 않는 화력 앞에 속수무책이다. 대포와 화약이 바로 법이다”라며 대단히 현실주의적인 주장을 하고 나섰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은 무관심, 즉 외교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우호적 중립’이었다. 미국은 조선에서 자신들이 반드시 쟁취해야 할 정도의 중대한 이권을 발견하지 못했다.

설령 중대한 이권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지킬 만한 힘이 없었다. 1900년대 초의 미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군사강국이 아니라 상해에 파견되어 있는 영국의 동양함대를 두려워해야 하는, 군사력이나 국력이 보잘 것 없는 나라였다. 

반면에 워싱턴의 주미 한국 공사관은 미국 일부 인사들과 극비리에 교섭하여 미국 은행으로부터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 세관의 관세를 담보로 200만 달러의 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 돈으로 미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청국이나 일본의 간섭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계획은 미국 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조선을 일본에 넘긴 미국 

미국은 조선에 대해서는 엄격한 중립 불간섭 정책을 유지했다. 때문에 조선에 파송된 일부 선교사들이 조선의 독립을 돕는 등의 정치 행위는 미국을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파워 게임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일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우려했다. 

미국 정부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헐버트 같은 주한 선교사가 조선 정부에 맞서 개화 활동을 벌이다 탄압 받는 인사들을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숨겨주거나 반(反)정부적 활동을 지원하거나, 왕비의 살해 현장을 목격한 고종을 보호하는 등의 정치활동을 금하는 훈령을 내렸다. 

미국도 서양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적 야심이 있는 국가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외교정책을 “말은 부드럽게 하고 몽둥이는 큰 것을 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00년 미국 부통령 재임 시절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를 저지하게 될 것이고, 이제까지 해온 것으로 보아 일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5년 7월 29일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 장관을 일본에 보내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와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가로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도록 묵인하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었다. 

태프트 장관과 함께 여객선 맨추리어 호를 타고 아시아 순방에 나섰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는 1905년 9월 19일, 귀국길에 잠시 조선을 방문하여 국빈 대접을 받았다. 

고종의 부인이었던 엄비(嚴妃)는 민간에서 3만 원의 거금을 빚으로 얻어 앨리스에게 줄 선물을 마련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넘겨주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9월 5일)된 지 2주일 후의 일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우르르 도망치는 쥐들처럼” 서울을 빠져나간 미국인들 

나라 밖에서 태풍이 몰아치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나라를 일본에 넘긴 그 대통령의 딸 일행을 위해 조선 지도부는 “황실을 방문한 어느 누구보다 극진한 대접”을 베풀었다. 

‘대한제국 침탈 비밀외교 100일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임페리얼 크루즈>의 저자 제임스 브래들리는 고종과 앨리스 일행와의 만남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은 앨리스와 식사를 마친 후 수행원으로 함께 온 네바다 주 출신 상원의원 프랜시스 뉴랜즈를 불러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조정 역할”을 발휘해 한국을 점차 거세지는 일본의 억압으로부터 구해달라는 요청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뉴랜즈는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적법하게 요청하라”며 비웃는 투로 답했다.’

앨리스가 서울에서 조선과 미국의 우호를 위해 축배를 든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5년 11월 28일 루스벨트는 서양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을 폐쇄했다. 월러드 스트레이트는 미국인들이 “침몰하는 배에서 우르르 도망치는 쥐들처럼” 서울에서 도망쳐 나갔다고 기록했다. 제임스 브래들리는 당시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한제국을 배신함으로써 루스벨트는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영토 확장 계획에 파란 불을 켜 줬다. 그리하여 수십 년 뒤에 또 다른 루스벨트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은 테디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행한 비밀협약의 결과로 빚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전쟁(일본과의 태평양전쟁을 뜻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제임스 브래들리는 루스벨트와 태프트가 2인 1조로 한 팀이 되어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에 아시아 침략의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후에 2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게 될 전쟁이 태평양에서 일어나도록 파란불을 켜줬다고 말한다. 루스벨트가 체결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말하자면 한국을 일본의 강점 하에 놓이도록 만든 사형 선고문이었다. 

1950년 애치슨 선언의 진짜 의미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3년여에 걸쳐 군정을 실시했던 미군이 1949년 6월 말 철수한 이유는 한국이 자신들의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가며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 나라’, 즉 미국의 국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는 미 군부의 공동전략조사위원회가 1947년 4월 27일 제출한 보고서에 수치로도 증명되어 나타난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안보의 견지에서 세계 여러 나라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측정한 결과 한국은 16개 나라와 지역 중에서 15등이었다. 

주한미군 철수 6개월 후인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날 애치슨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와 대만을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선언했다. 이어 애치슨은 “대만과 한국은 모두 미국의 방어권 밖에 있다. 다시 말해 미국 방위권 밖의 일에 대해서 미국은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애치슨 선언의 핵심 내용은 우리가 상식의 선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북한 침략의 초대장이라기보다는, 미국이 공산중국의 모택동(毛澤東)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과 모택동이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 체결을 위해 70여 일에 걸친 길고 지루한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미국은 모택동에게 스탈린의 야욕을 폭로하고, 소련보다 미국과 손잡고 협력하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바로 애치슨 선언이다. 미국은 애치슨 선언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떼어 놓으려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애치슨은 연설에서 먼저 중국의 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부터 시작하여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함으로써 한국과 대만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선언을 재확인했다. 다시 말하면 모택동이 소련을 포기하고 미국과 손을 잡는다면 남한이나 대만 정도는 공산세력에게 넘겨줄 용의도 있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 애치슨 선언이다.

그러나 미국의 구애작전은 일장춘몽으로 헛물을 켜고 말았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3월 4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장장 70여 일에 걸쳐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 애치슨 선언의 진짜 의미는 모택동과 스탈린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미국의 대전략이었다. 사진은 트루먼대통령(왼쪽)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

미국과 중국의 피 튀기는 대결장이 된 한국전쟁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인해 6·25가 터졌을 때 한반도에서 떠났던 미국은 재빨리 참전을 결정한다. 한국이 공산화되면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 도미노 현상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침 1주일이 지나지 않아 미 해공군은 물론 지상군까지 참전 결정을 하자 스탈린은 대모략을 구상한다. 즉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이용하여 미국과 중공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다음 두 나라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게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교묘한 술수로 인해 단기간에 끝장날 수도 있었던 김일성의 남한 해방은 계속 지연된다. 서울 점령 후 사흘 간 한강 도하가 지연된 사실, 방호산이 지휘하는 인민군 6사단이 미군이나 한국군이 전혀 없어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호남 지역을 우회하여 시간과 병력을 낭비한 사실, 전쟁 초기와 낙동강 전투 때 중공군이 개입하지 못하고 인천상륙 이후에나 출동한 사실 등은 한국에서 미·중 대결을 일으켜 발목을 잡기 위한 스탈린의 대모략이 연출한 드라마틱한 결과였다. 만약 중공군이 7월 초에 개입했다면 김일성은 8월 15일 무렵 부산 점령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전쟁 양상은 미국과 중공 간의 전쟁으로 변했고, 이제 출범한 지 1년도 안 되어 모든 것이 부족했던 중국은 막대한 국력을 소진해가며 미국과 힘겹게 싸워야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싸우도록 유도하여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저지했다. 또 전후(戰後) 오랫동안 미·중 양국이 적대관계가 되도록 하는 데도 성공했다. 한국전을 통해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에 재를 뿌리려는 스탈린의 전략적 목표는 훌륭하게 달성되었다.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에서 완전 고립되어 20여 년 이상을 ‘죽(竹)의 장막’ 속에서 자력갱생하느라 허덕여야 했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도 따지고 보면 한국전 개입이 몰고 온 ‘나비효과’로 인한 대재앙이었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은 무슨 뜻이었나? 

1964년 8월 베트남 통킹 만에서 미 7함대 소속 구축함 매덕스호와 터너조이호가 월맹군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존슨 미 대통령은 미군 전폭기들에게 월맹에 대한 보복 폭격을 명했다. 이때부터 월남전이 확전되면서 50여 만 명에 이르는 미군이 파병되는 등 깊은 수렁에 빠져든 미국은 1968년 1월 29일부터 2월 11일까지, 이른바 ‘구정 공세’로 큰 충격을 받았다. 

사실 베트콩의 구정 공세는 전술적으로는 미군의 완승이었다. 기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반격에 나선 미군과 월남군이 베트콩 전투원의 절반 가까운 3만 5000여 명을 사살하고 5800여 명을 생포하는 등 대부분의 베트콩 조직을 와해시킨, 성공한 군사작전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승리는 월맹 쪽이 차지했다. 미국 내에서 ‘반전(反戰)운동’을 촉발시킴으로써 미군 철수를 이끌어내 정치 심리적으로는 월맹이 승리한 것이다. 

언뜻 보면 미국의 월남전 종결은 월맹 및 베트콩과의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에 밀린 퇴각으로 보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 월남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더 이상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닉슨 독트린은 1950년의 애치슨 선언처럼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라는 큰 틀로 들여다봐야 그 진정한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월남전의 수렁에서 헤매던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일으킨 쿠데타를 분석한 결과 중대한 시사점을 얻게 되었다. 수하르토가 소련 편향의 수카르노 정권을 제거한 후 민족주의의 길로 나가는 모습을 예의주시한 것이다. 

수하르토의 사례를 보면서 미국은 월남전을 원점에서부터 검토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월남전 참전은 주변 국가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과, 중공의 남진을 막기 위한 예방전이었다. 

미군이 월남에서 철수하면 베트남은 공산화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통일된 공산 베트남이 중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중국과 맞서 싸우는 민족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냉전이 격화되면서 공산 진영은 중국과 소련이 내분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국은 1950년 초 애치슨 선언을 통해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고립시키려 했던 그 칼을 다시 빼 들었다. 키신저를 앞세워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분리시킨 다음 미·중이 손을 잡고 소련 공산 진영을 약화시키기 위한 글로벌 대전략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이다. 

중국과 손잡기 위해 주한미군 철수, 베트남전 포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중국이 미군과 대항하는 데 따르는 안보 불안을 해소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시 중국은 주한미군과 베트남의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남동해안에 55개 사단 대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닉슨 행정부는 중국의 군사력을 소련과의 싸움에 집중토록 하기 위해 월남전 종식, 대만해협을 경비하던 미 해군의 태평양 한복판으로의 재배치, 그리고 주한미군의 감축에 돌입했다.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은 월남에서 싸우다 말고 파리에서 엉터리 휴전회담을 체결하고 서둘러 철수했다. 1970년 7월 5일 닉슨 행정부는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6만 2000명의 주한미군 중 2만 명의 철수를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이미 지난 6개월 동안 주한미군을 빼내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에 2개 전투사단을 비롯한 5만 여 병력을 파병하여 미군을 돕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국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빼내가면서 “이제부터 너희 나라는 너희들 힘으로 지켜라”라고 나온 것이다. 

이런 도전에 대한 박정희의 응전은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10월 유신, 중화학공업으로 국산 무기 제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이었다. 10월 유신을 정권 야욕에 눈이 먼 독재자의 발악이니, ‘민주주의의 장례식’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치인이나 언론인, 국내 학자들의 우물 안 개구리 식 시각이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의 외교적 수사를 한 꺼풀 벗겨내면 그 본뜻은 “모택동이여, 중국 주변의 미군을 다 빼내 줄 터이니, 그리고 유엔에서 대만을 쫓아내고 그대의 나라를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인정할 테니 소련과의 대결에 집중하라”는 뜻이 행간에 숨어 있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한국의 미군 압력에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55개 사단을 북만주로 이동하여 소련과의 대치를 강화했다. 중국이 만주에 대병력을 집결시키자 충격을 받은 소련도 유럽에 배치했던 44개 사단을 시베리아 지역으로 돌려 중국에 맞섰다.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1년 3월 27일 주한미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미 7사단 병력 2만 명이 철수했다. 비무장지대의 서부 해안 전선 27㎞의 방어를 담당했던 미 7사단이 철수하면서 한국군이 비무장지대 전체를 방어하게 됐다. 1971년 2월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를 발표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고 중공이 유엔 의석과 안보리 상임위원회 자리를 차지했다. 

국제전략론의 초보상식조차 결여된 한국의 지도자들 

역사적 사례를 분석해 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주일미군이나 독일 주둔 미군은 단 한 번도 철군, 감축 이야기가 거론된 사례가 없다. 반면에 미국은 수시로 주한미군 철수를 시도했다. 1949년에 실제로 철수를 했고, 애치슨 선언으로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한국 포기 의사를 전 세계에 밝혔다. 

1969년 닉슨 독트린, 1979년 카터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등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단골 메뉴가 된 근본적 이유는 한국이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볼 때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이 걸려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기 미국 대선의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가 자신의 목표라기보다는 미군 주둔 관련 비용을 100% 한국이 부담하라는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최근 미국의 대전략은 중국 포위망 구성이다. 호주, 일본과의 동맹 강화, 인도의 핵개발에 따른 제재를 해제하고, 중국으로 진출했던 미국 기업의 공장을 인도로 이전하여 인도 경제 활성화, 오바마 대통령의 대(對) 베트남 살상용 무기 수출 금지 해제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약관화하다. 

한국이 위치한 동북아는 국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결코 만만치 않은 세계적인 대국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구도에서 한국의 안보를 담보하는 길은 누가 뭐래도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미국과의 동맹 강화가 생명선이다. 

그러나 미국의 생각은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한국에게 미국은 ‘절대 필요한 존재’지만,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이 그 정도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늘 문제다. 

따라서 이 땅의 국가 지도자들은 국익 상, 그리고 국가안보 상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면,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 할 만큼 국가의 위상과 가치를 높이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국력을 닦고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를 건설했어야 한다. 

대미 관계에서 역주행만 즐긴 역대 정권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시대 이후 등장한 역대 정부는 대미 전략에 있어 정반대의 길로 전력질주했다. 북방외교(노태우), “어떤 동맹국보다 민족 우선”(김영삼), “대북 현금지원 통해 미국 공격 가능한 핵·미사일 개발 자금 공급”(김대중), “동북아 균형자”(노무현)를 자처했다.

급기야 중국이 판을 벌인 가짜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여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독재자들들과 함께 중국군의 군사 퍼레이드를 사열(박근혜)했다. 

사실 한국은 역사상 단 한 번도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때문에 미국의 국익은 한국의 방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에서 적당히 휴전을 하고 떠나려는 미국을 붙잡고 “단독 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외교를 펼친 끝에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동맹이 이 나라의 안보를 지금까지 담보해 왔다. 

국가지도부가 나서서 미국과의 대립각 세우기에 앞장서고, 한미동맹을 스스로 걷어찰 경우 이 땅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최근 외교가 일각에서 일고 있는 미북 평화협정 논의는 월남의 사례를 보면 그 앞길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우리가 북한을 빨리 멸망시키지 못하고 경제에서도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해 국론분열이 가속화되면 한반도의 주도권은 핵폭탄과 로켓을 보유한 김정은에게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정일의 대미 협상 카드는 핵무기와 장거리 로켓이다. 김정은이 망하지 않고 수소폭탄까지 보유하는 날, 대중(對中) 포위전략을 구상 중인 미국은 실리적 판단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지리멸렬상을 보이는 리더십, 부패와 탐욕에 눈이 먼 지도층, 입법부와 정치권의 대다수가 친북좌경화 되어 주한미군 철수, 미제 타도를 외치는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보다는 김정은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한반도의 관리권을 북에 맡기는 방안을 선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조건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김정은이 영도하는 공산통일한국이 미국과 맞장 뜨기 위해 개발한 핵무기를 중국 견제용으로 사용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 포위 전략의 일환으로 원산항을 미 해군기지로 개방한다. 아무리 뜯어봐도 김정은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는 못될 것이니, 미국으로서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김정은이 한반도의 관리자 될 수도 

국제 여론의 환기를 위해 김정은에게 적당한 민족주의 표방, 체제 유지에 부담이 안 되는 선에서의 개혁개방, 인권 개선에의 성의 표시를 위해 정치범 수용소 일부를 공개하는 정도를 협상카드로 미국에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산통일한국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 붙잡아두기 위해 적당한 정도의 경제적 이권을 보장할 경우 김정은, 미국 공히 유쾌한 투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 시절 50만 대군을 파병하여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 방문의 교훈을 보라. ‘미·북 평화회담’이란 용어가 왜 나오고 있는지, 이 땅의 국가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보다 냉정하고 냉엄하게 국제 정세를 살펴보길 기대한다. 

‘새가 미치건 말건 나무는 관심 없다’고 프랑스 시인 앙리 미쇼는 외쳤다. 미국은 합리적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자국 국익 우선의 나라일 뿐, 결코 한국의 안위를 위해 존재하는 천사(天使)는 아니다. 한국이 미국의 국익에 절실한 영향을 주는 나라가 될 수 없을 때 한국이 망하건 말건 미국은 관심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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