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씨 (黃氏) 여성들 세상을 빛내다
황 씨 (黃氏) 여성들 세상을 빛내다
  • 이근미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6.17 07: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책] 황 씨 여성들의 활약상 소개한 <황씨여성보>

국내에서 황(黃) 씨는 64만 4294명으로 289개 성씨(姓氏) 중 16위. 인원은 비록 소수지만 황혜성(궁중요리 전문가), 황윤석(한국 최초의 여성판사), 황산성(변호사), 황종례(도예가), 황정순(영화배우) 황애덕(여성 독립운동가), 황온순(전쟁고아의 어머니) 등 다채로운 여성 인재가 배출되어 사회 곳곳을 밝히고 있다.

이근미  소설가·미래한국 편집위원 

호적에 껄끄러운 것은 기록하지 않고, 족보는 간소화하고, 항렬을 무시한 채 이름 짓는 일이 보편화 되고 있다. 한국사를 가르치지 않거나, 왜곡하여 전달하는 마당이니 집안 어른들의 발자취에 관심이 기울이지 않는 일쯤은 문제 축에도 못 드는 시대다. 족보에 대개 여성은 등재하지 않으니 여성들만 모이는 종친회나 여성 종친들의 자취를 기록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황 씨(黃氏) 여성들은 유별나다. 1980년에 ‘한국황씨여성회’를 결성하는가 하면 여성회 출범 35주년을 맞아 황 씨 여성들의 족보 격인 <황씨여성보>(黃氏女性報)까지 창간한 것. 

중국 후한 광무제 때 황제의 명을 받들어 베트남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경북 평해 앞바다에 표착한 황락(黃洛)이라는 사신이 있었다. 서기 28년 신라 유리왕 5년 때의 일이다. 황락은 베트남 행을 포기하고 신라에 뿌리를 내려 세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평해 황 씨, 장수 황 씨, 창원 황 씨의 시조가 되었다. 세 황 씨가 여러 분파로 갈라졌지만 모든 황 씨는 황락 할아버지의 자손이라고 생각한다. 

「성씨·본관별 가구 및 인구」 통계는 2000년 인구주택조사 때에 조사한 것이 가장 최근 자료인데 국내에서 황 씨는 20만 1121가구에 64만 4294명, 그 가운데 절반인 32만 1623만 명이 여성이다. 

황희 정승, 황인성·황교안 국무총리… 

숫자로 봤을 때 황 씨는 우리나라에서 16번째 성씨다. 국내 289개 성씨 가운데 16위라면 상당히 앞선 순위지만 김 씨(993만), 이 씨(679만), 박 씨(390만), 정 씨(220만), 최 씨(217만), 강 씨(117만)를 제외한 나머지 성씨의 인구는 100만 명 이하다. 황명순 회장은 많지 않은 황 씨 가운데 유별나게 많은 인재가 배출된 것이 <황씨여성보>의 창간 배경이라고 밝혔다. 

우선 남자 황 씨들의 활약상을 보자. 황 씨는 조선시대에 300여 명이 과거에 급제했고, 그 가운데 황희라는 명재상이 나왔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황 씨 국무총리는 25대 황인성(김영삼 정부), 44대 황교안(박근혜 정부) 현 국무총리 두 명이다. 

1993년 4월 황인성 국무총리 공직 취임 축하연에는 같은 황 씨들인 황낙주(국회부의장), 황명수(국회 국방위원장), 황산성(환경처 장관), 황길수(법제처장), 황병태(주중 한국대사)가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는데, 가히 황 씨 공화국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현 정권에서도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지난 1월,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물러난 황우여(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황찬현(감사원장) 등이 국사(國事)를 돌보고 있다. 

황명순 회장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종친회 활동에 자주 참여한 것이 한국황씨여성회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제가 맏딸이어서 아버지가 종친 모임에 늘 데리고 다니셨는데, 1970년대부터 사회 활동을 하는 황 씨 여성들을 뵈었어요. 자주 만나 여성들 간에 화목하게 지내고 단결하자는 얘기를 하다가 1980년에 모임을 만들었죠.” 

당시 사회 활동을 했던 황 씨 여성들은 황혜성(궁중음식기능보유자), 황온순(한국보육원장), 황종례(도예가), 황정순(영화배우) 등을 말한다. 

“작년이 광복 70주년인 데다 양성평등 원년이라 책을 내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성들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해나가야 하니까요. 앞서간 황 씨 여성들을 본받고,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황 씨 여성들의 발자취를 기록하여 후배들에게 전수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었죠. 무엇보다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황 씨 여성들이 많아서 회보 발간이 가능했습니다.” 

▲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 황윤석(위), 전쟁 고아의 어머니 황옥순(아래) 등 황 씨는 많은 여성 인재들을 배출하여 사회 곳곳을 밝히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황 씨 여성들 

<황씨여성보> 창간호에서 소개한 황 씨 여성은 9명. 고인이 된 여성독립운동가 황애덕, 전쟁고아의 어머니 황온순, 우리의 맛을 세상에 알린 황혜성, 한국 영화의 어머니 황정순,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 황윤석,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대 도예의 개척자 황종례, 새마을운동의 기수 황옥선, 사법·입법·행정 삼부를 섭렵한 황산성, 여성정책 전문가이자 19대 국회의원 황인자가 그들이다. 

<황씨여성보>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 황교안(국무총리), 황찬현(감사원장), 황우여(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황진하·황주홍·황영철(국회의원)의 축사가 담겨 있다. 

2장 ‘황 씨 여성의 역사를 읽다’에서는 5명을 소개한다. 첫 번째로 소개하는 ‘시대를 통찰했던 여성운동가’ 황애덕(1892-1971)은 평양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은 신여성이었다. 

황애덕은 숭의여학교 교사 시절 같은 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을 규합, 송죽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송죽회는 경성과 평양의 3·1 만세시위, 평남도청 폭발 지원활동을 했다.

황애덕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 유학을 가 일본에서도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송죽회를 결성했다.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외쳤다가 검거되었다. 풀려나서 국내로 몰래 들어와 3·1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에는 농촌계몽운동, 여성운동, 구호사업에 열성을 다했다. 6·25 전쟁 후에는 미국 12개 주를 돌며 구호품을 모아 고국에 보내고, 한미종합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기술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전쟁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황온순(1903-2004)은 광복 때부터 고아들을 보살폈다. 원불교에서 광복을 맞아 해외 귀환 동포들의 의식주를 돕는 사업을 전개했을 때 황온순이 이 일을 주도적으로 펼쳤다. 귀환동포사업 과정에서 많은 고아들을 돌보다가 직접 보화원을 설립했다. 

6·25 전쟁 때 서울대 중국어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외아들 강필국을 잃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고 위로하면서 제주도 임시수용소에 있는 전쟁 고아들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황온순은 제주도로 가서 제주농고 교사 일부를 빌려 고아들을 수용했다가 이후 한국보육원을 설립했다. 6·25 전쟁 당시 미 공군이 1000명의 고아를 제주도로 공수했고, 이 일은 1957년 유니버설영화사에서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황온순은 1970년 동대문구 휘경동의 대지와 임야를 기증하여 휘경학원을 설립하고, 휘경여중과 휘경여고를 개교했다. 

독립운동가, 궁중요리 전문가, 도예가, 영화배우… 

중요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황혜성(1920-2006)은 일본인 오다 쇼고 교장의 권유로 궁중요리의 길에 들어섰다. 숙명여전 가사과 조교수로 부임한 황혜성에게 조선 역사 연구가인 오다 교장이 “조선인이니 자기 것을 알아야 한다”며 창덕궁의 주방 상궁에게 가서 조선 궁중요리를 배우라고 권한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인 교장이 떠난 뒤에도 황혜성은 한희순 상궁에게 궁중요리를 열심히 배웠다. 6·25가 터져 피난살이를 하던 중 한 상궁의 가르침을 적어놓은 공책들을 다 잃어버리고 상궁과의 연락도 끊겼다. 

수소문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정릉 별장에서 64세가 된 한 상궁과 재회했고, 그때부터 다시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궁중음식 요리책 <이조 궁정요리 통고>를 출간했다. 이후에도 궁중음식 만드는 법, 수라상 차리는 법도를 꼼꼼하게 전수 받았지만 사회에서는 궁중요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궁중음식을 문화재로 제정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꾸준히 작성했지만 ‘음식 만드는 것이 어떻게 문화재가 되냐’는 비아냥만 들었다. 황혜성은 어딜 가든 한 상궁을 모시고 다녔고, 대학 강의에도 한 상궁을 특별초빙 했다.

TV요리 프로그램에도 한 상궁과 함께 출연하여 궁중음식을 소개했다. 드디어 1971년 한희순 상궁은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로 인간문화재가 되었고, 이듬해 한 상궁이 세상을 떠난 뒤 황혜성이 2대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한국 영화의 어머니 황정순(1925-2014)은 50년 동안 무대와 스크린, 브라운관을 종횡무진 누비며 배우로 살았다. 1940년에 데뷔하여 총 430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250편이 넘는 연극무대에 올랐다. 1986년 <88짝꿍>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황정순은 서울예술대학 설립에 힘썼으며 ‘황정순 장학회’를 설립하여 후배 양성을 도왔다.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 황윤석(1929-1961)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23세 때 제3회 사시에 합격, 1954년 9월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했다. 동생 황석연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로 임용되어 남매 판사로 이름을 알렸다. 한학(漢學)과 사학(史學)을 연구하여 문화훈장을 받은 학자 황의돈이 이들 남매의 아버지다. 

황윤석은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여성법률가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여성문제연구원 독서부장, 여성법률상담소 상담위원, 여성문제연구회 실행위원 등 다양한 여성 활동에 참여했다.

또 여러 매체에 ‘헌법의 평등정신에 기초한 남녀평등’을 주창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그녀가 사망하자 여성단체연합은 ‘윤석장학회’를 설립하여 그의 이름을 기렸다. 2013년에는 황윤석의 가족들이 고인을 기리는 ‘황윤석 기금’을 만들어 국내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태화복지재단에 기탁했다. 

황 씨 여성들, 한국을 빛내다 

제3장 ‘황 씨 여성의 현재를 보다’에 1번 타자로 등장한 인물은 도예가 황종례(1927년생)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한국 근현대 도예의 개척사가 되었다. 1960년 초기 유약 실험에 몰두, 불의 마력에 의해 생기는 미묘한 변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귀얄(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 만든 붓)로 도자기 표면에 백토를 발라 자연스러운 질감을 표현했다. 이것이 유명세를 탄 황종례의 귀얄기법이다. 

또 민예풍의 아기자기한 생활 도자기를 선보여 대중들이 쉽게 도예를 접하도록 했다. 국내외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국내 유명 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황종례의 도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아버지 황인춘이 개성의 청자공방에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견습공으로 일하도록 한 것을 본받아 황종례는 도예연구소를 설립, 생활도예운동을 펼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제주도 출신의 황옥선(1938생)은 새마을부녀회 제주시도 초대부녀회장으로 맹활약한 맹렬 여성이다. 30대와 40대를 새마을운동에 바쳐 큰 결실을 맺자 제주도교육위원회는 황옥선을  교육위원에 임명했다. 초등학교 교사가 시도 교육위원회 교육위원에 임명된 최초의 기록이다. 

교육위원이 된 이후 유아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한국유치원연합회 제주지회장을 맡아 유아교육법 제정에 앞장섰다. 7년간 서울을 100여 차례 오가면서 노력한 결과 2004년에 유아교육법이 제정되었고, 저소득층 어린이들이 무상으로 유아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현재 전원유치원과 어린이집, 요양원을 설립하여 어린이와 어르신들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황산성(1944생)은 사법·입법·행정 삼부를 섭렵한 유일한 여성으로 11대 국회(전국구)에 진출했고, 김영삼 정부 때 환경처 장관을 지냈다. 라디오와 TV를 통해 대중적 인기를 누린 변호사로도 유명하다. <여성, 그리고 오늘에 말한다> 등 여러 저서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3년간 공직생활을 한 황인자(1955생)는 여성정책 전문가다. 체신부, 행정자치부, 여성부 등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를 거치면서 1급 공무원에 오른 여성공직자이다. 공직을 떠난 후 자유선진당 창당에 참여했고, 19대 때 국회의원(비례대표)이 되어 안전행정위, 여성가족위에서 다양한 입법 활동을 했다. 

▲ 지난 4월 있었던 황씨여성보 창간호 출간기념회. 앞줄 가운데 한복을 입은 여성이 황명순 회장.

세계 황 씨 종친대회 매년 열려 

한국황씨여성회를 이끌고 있는 황명순 회장은 <황씨여성보> 창간호에 이어 2호 3호를 계속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황 씨 여성들을 계속 발굴해 그들의 발자취를 알릴 계획이라고 한다. 

황 씨가 중국 성씨인 만큼 세계황씨종친대회가 매년 열린다. 황명순 회장의 아버지 황수희 씨는 1990년에 세계황씨종친대회를 한국에 유치하여 여의도 63빌딩에서 개최했다. 이때 중국,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의 황 씨들이 대거 참석했다. 황수희 씨는 세계황씨종친회 한국황씨총회를 설립하는 등 황 씨 종친 모임에 큰 힘을 기울였다. 

1000여 평에 이르는 황명순 회장의 자택은 황 씨들의 모임이 자주 열리는 명소다. 이곳에서 1992년 황 씨 문중 전통회혼 예식이 열리기도 했다. 황 씨 모임이 열릴 때면 황혜성 궁중요리전문가가 황 씨들만을 위해 개발한 해달내 떡이 나온다. 또 황온순 여사가 작사한 해달내 종친가가 제창된다. 해달내는 ‘해와 달과 물’이라는 뜻인데, 가사의 일부는 이렇다. 

‘나아가자 일가들아 손에 손잡고, 산 넘고 바다건너 온 세상으로, 조상님의 음덕으로 태어난 우리, 자랑스런 황 씨 집안 해달내 가족’ 

<황씨여성보>는 1000권을 발간하여 전국 주요 도서관에 발송했다. 황명순 회장은 중국어로 번역하여 세계 황 씨 종친들에게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황 씨 여성들, 황신혜 황정음 같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예인 얘기도 앞으로 써야죠. 엄청나게 수가 많은 성씨들도 내지 못한 책을 황 씨 여성들이 발간하다니 대단하다, 부럽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황 씨 여성들이 강직하고 똑똑하고 재기발랄하며 단아하다”고 자랑하는 황명순 회장은 이 책을 받자마자 모두들 “황진이가 빠졌다”는 지적을 했다며 “그 분에 대해 발굴하고 연구해서 책을 내야지요”라며 웃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