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 미래한국
  • 승인 2016.06.20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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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심포지엄 개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지난 1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 국제회의장에서 ‘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심포지엄은 박정희 대통령 탄신10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을 위기 상황으로 진단하면서 박정희 시대의 성과와 교훈을 올바로 평가하자는 취지로 열렸다. 좌승희 재단 이사장이 ‘박정희 산업혁명, 세계최고의 동반성장’, 이춘근 이화여대 겸임교수가 ‘박정희의 부국강병책’, 김용삼 미래한국편집장이 ‘박정희의 부국강병책’ 등을 주제로 발표했다.

다음은 발제문 전문이다.

<제1 발제문>

박정희 산업혁명, 세계최고의 동반성장: 경험과 교훈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목차

1. 지난 반세기의 아이러니: 경제평등을 추구한 사회, 저성장·양극화에 직면

2. 경제발전의 일반이론: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

3. 세계 경제문제의 원인과 해법

4.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위한 이념

5. 한국경제의 성공과 실패: 최고의 동반성장경험에서 저성장·양극화로

5.1. 박정희 산업혁명의 성공역사

5.2. 한국경제 실패의 역사

6. 한국경제 실패를 극복하는 길

7. 결어: 위기의 한국경제,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1. 지난 반세기의 아이러니: 경제평등을 추구한 사회, 저성장·양극화에 직면

지금 세계경제는 물론 한국경제도 소위‘성장의 장기정체와 소득분배의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일부[Stiglitz (2012); Piketty (2014)]에서는 이를 자본주의 본질적 모순이라고 보고 자본주의 개혁을 외치고 있다. 한편 주류 경제학에서는 출산율저하에 따른 고령사회화와 IT혁명에 따른 기술격차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또한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정상상태라고 하기도 한다[Summers (2013); Krugman (2013)]. 그러나 필자는 이상의 주장들이 모두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저성장·양극화를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 때문이라고 사회주의적 주장을 하고 있으나 본고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오히려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는 평등주의 정치경제체제가 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고령사회화와 IT기술격차 때문이라는 주류경제학의 설명은 저출산을 초래하는 더 근본적인 제도적 원인이나 근로인구의 정체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해 크게 증가된 인적자본이 왜 더 높은 성장을 견인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IT화에 수반되는 구조조정을 막는 노조와 같은 더 근본적인 제도적 장애요인을 거론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동어반복(tautology)적인 기술(記述)에 머물고 있어 설득력이 없다.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은 경제발전을 설명하기를 포기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것이 지금의‘저성장·양극화’문제에 대해‘신 정상(new normal)’이라고 밖에 답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국 등 세계경제가 부딪친 이 난국을 이해하고 풀기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의 자본주의 경제발전이론이 불가피하다. 이런 필요성에서 필자는 그 동안 대안적 이론으로 경제발전의 일반이론(A General 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 이하 "일반이론"으로 약칭)을 제시해 왔다 [졸저: 2006, 2008, 2012; Jwa: 2015, 2016]. 이 이론에 따르면 지금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의 결과도 아니고 새로운 정상상태도 아니다. 전후 60여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의 모든 국가가 성장은 물론 소득분배의 개선을 최고의 정책목표로 추진하였다. 사회주의 체제는 망할 때까지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였고 자본주의국가는 수정자본주의의 기치아래 완전고용과 소득재분배를 통해 모두 행복한 경제적으로 보다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였다. 오늘날의 서구 사회민주주의국가는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 평등이념을 실현하겠다고 노력중이다. 전후 신생 후진국들도 일부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하였지만 오늘날 대부분 선진국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수입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보면 인류는 지난 반세기이상을 경제평등을 최우선의 가치로 추구한 것이다. 경제평등을 추구한 경제가 이제 모두 경제적 불평등과 저성장에 직면하는 아이러니에 봉착한 것이다. 일반이론은‘모두 같아지지는 않지만 동반성장하는 자본주의 경제’에 경제평등의 이념적, 제도적, 정책적 제약이 가해지면 경제는 바로 저성장과 양극화로 반격한다고 설명한다.

한국경제 또한 세계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성공과 실패가 너무나 집약적이고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최고의 동반성장을 구가한 개발연대 박정희 산업혁명이후 선진국 진입한다하여 균형발전의 기치아래 개발연대 청산에 매달렸으나 오늘날 선진국은 고사하고‘저성장과 양극화’라는 원치도, 기대하지도 않은 실패에 직면하였다. 더구나 이 경험은 60년이라는 단 두 세대만의 집약적 경험이다. 박정희 산업혁명의 성공은 어디서 왔고 오늘날의 실패는 어디서 왔는가?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교훈은 무엇인가? 본고는 바로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2. 경제발전의 일반이론: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

2.1. 자본주의 복잡경제의 발전: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의 산물

경제발전은 열린 복잡계 경제시스템이 외부와의 비선형적 상호작용으로 시너지 창출을 통해 고차원으로 창발(emerge)하는 현상이다. 서로 다른 세포가 만나 고차원의 조직을 만들어내고 이 조직들이 서로 만나 더 고차원의 복잡한 조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결국 세포덩어리가 인간이라는 최고의 고등동물로 창발하는 생명현상이나 아마존강유역의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키는 복잡계 창발현상이, 바로 농경사회에서 복잡다기한 고부가가치 산업사회와 지식기반 창조사회로 발전하는 경제발전현상의 전형적 현상에 다름 아니다. 경제발전은 신고전파 성장론처럼 마차를 만드는 경제가 10개의 마차에서 100개의 마차를 생산하는 선형적 변화가아니라, 기차,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을 만드는 고차원으로의 비선행적 질적 변화와 복잡성의 증가를 수반하는 창발을 의미한다. 주류 경제학이 추구하는‘균형’을 파괴하는 수확체증현상이 바로 경제발전의 보편적 현상이다. 따라서 균형이론에 바탕을 둔 주류 경제학은 비선형적 창발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은 발전이 멈춘 채 일만 오천년 가까이 말사스 함정이라는 궁핍의 균형 속에 갇혔던 농경사회 경제학이다. 오늘날의 창조적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엔 역 부족이다.

그럼 경제발전을 이끄는 창발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필자는 경제창발의 전제는‘나쁜 성과보다 좋은 성과를 더 보상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경제적 차별화 인센티브원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차별화란‘다른 것을 다르게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한다.’는 의미이며, 우리가 항상 거부해야 할 정치적, 사회적 차별과는 다르다. 서로 다름을 바탕으로 보상을 차별화함으로써 모두를 동기부여 하여 새로운 질서창출에 나서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원리는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2,000년도 더 전에 중국의 법가(法家)들이‘신상필벌’을 국가운영철학으로 주장하였고 진나라 중국통일의 기틀이 되었다.(최윤재 2000). 최근 공자의 논어(論語)의‘화이부동 동이부화(和而不同, 同而不和)’와 좌구명(左丘明)의 국어(國語)의‘화실생물, 동즉불계(和實生物, 同則不繼)’라는‘서로 다름 속의 조화만이 만물을 생성할 수 있다.’는 사상을 중국철학의 진수라고 강조하는 중국현대철학자 탕이지에(탕일개:湯一介)의 주장은 너무나 자본주의복잡경제 친화적이다. 서양도 이미 오랫동안‘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설파해왔고[Smiles 1859], 신상필벌을‘정의의 율법(Dispensation of justice)’이라 해석하고 있음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상필벌이 바로 정의의 실천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경제학에서도 행동경제학자들[Tversky, and Kahneman (1981); Gneezy, and List(2013)이 인센티브의 차별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산(山)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신상필벌의 필벌(必罰)이 신상(信賞)보다도 더 강력한 인센티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좋은 성과에 상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쁜 성과에 대해서 벌을 내리는 것이 더 강력한 동기부여작용을 한다는 의미이다. 경영학에서도 이미 성과에 따른 보상의 차별화가 기업성공전략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우수한 성과에 대해 보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쁜 성과를 퇴출시키는 전략이 보다 강력한 성과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Welch (2005)]. 신상필벌의 차별화는 인류가 오랜 세월 생존경쟁의 진화압력 속에서 터득한 생존을 위한 삶의 이치이며 진리인 셈이다.

2.2 시장의 기능에 대한 재해석: 시장은 경제적 차별화 장치

시장이란 바로 신상필벌의 차별화기능을 통해 성과와 보상을 일치시킴으로써 성장·발전의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이다. 시장의 소비자도, 은행도, 주식시장의 투자자도, 기업도, 근로자도 모두 가장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거래대상이나 상대만을 택해 자신이 보유한 자원으로 지원한다. 바로 이러한 신상필벌의 선택원리가 동기부여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끈다. 그래서 시장은 신상은 물론 필벌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하며 이를 무기로 서로를 동기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아담 스미스의“보이지 않은 손 기능”도 하이에크의 “자생적질서의 발견기능”도 경제학교과서의 “자원배분기능”도 모두 “차별화기능”을 거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음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시장거래는 거래조건에 대한 거래당사자간의 수평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 합의를 이루기 위한 협상(흥정)이 필요하며 정보가 불완전한 거래자들은 항상 양의 거래(흥정)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이 거래비용 때문에 시장은 성과와 보상을 일치시키는 차별화에 실패하며 혼자서는 발전을 만들어낼 수 없다. 후술 하는 바와 같이 양의 거래 비용 때문에 성과가 재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외부효과와 무임승차현상이 일상화되고 시장실패 현상이 만연한다. 이런 시장의 약점을 해결하기위해 등장한 것이 오늘날 현대식 주식회사 기업제도이다.

2.3 현대적 기업: 경제적 차별화를 통한 자본주의경제의 창조자

기업은 CEO의 명령 하에-구성원의 동의 없이도-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원리에 따라 내부자원을 배분하는 수직적 위계질서장치로서 내부자원의 성과를 시장보다 더 정확하게 감시·파악할 수 있고 또한 내부자원배분에 협상이 필요 없기 때문에 거래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은 시장보다도 더 효율적인 자원배분과 발전의 견인차이다. 19세기 자본주의경제의 산물인 현대식 주식회사 기업제도는 자본의 규모와 위험부담능력 면에서, 마차를 생산하던 농경사회의 대장간기업에서 기차,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을 만드는 복잡계 조직으로 창발하여 자본주의경제를 고차원의 창조시스템으로 전환시켰다. 현대적 기업은 주류 기업이론[Coase (1932)]의 주장처럼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감당하지 못하는 위험부담을 통해 시장의 영역을 보다 확대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이끄는 기관차역할을 한다. 필자는 자본주의경제는 소위 보이지 않은 손이 이끄는 시장경제라기보다, 현대식 주식회사 기업이라는 보이는 손이 이끄는 경제라고 주장한다. 농경사회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진화는 보통 생각하듯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농경사회 대장간기업에서 창발한 주식회사라는 현대식 기업에 의해 주도되었다. 인류는 자가소비보다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하면서 적어도 일만 오천년 이상을 시장이라는 교환경제 속에서 살아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체제 속의 우리 모두는 농토를 떠나 주식회사기업에 생계를 의탁하고 살아가고 있으며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모두 국민총생산중의 농업의 비중이 대체로 한자리수 미만인 나라를 의미하게 되었다. 아무리 선진 경제라 해도 기업을 제거하면 모두 농경사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식 기업을 국유화했던 사회주의체제는 결국 모두 농경사회로 역주행하면서 몰락하였다.

그러나 현대식 기업조직만으로도 발전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시장이 있고 기업이 있어도 모든 경제가 다 고도 산업사회·지식기반경제로 창발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시장의 불완전성과 양의 거래비용으로 인한 무임승차와 이로 인한 시장의 차별화 실패현상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일류 기업은 항상 후발 기업의 무임승차에 노출되며 그래서 일류 기업의 성장은 그리 용이한 일도 일상적인 일도 아니다.

2.4. 자본주의 경제에 내제된 실패가능성: 무임승차에 다른 발전의 동력상실

‘일반이론’은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속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칼 마르크스는 앞선 자의 착취 때문에 경제적 불평등이 생기며 이를 자본주의경제의 모순이라 하고 흥하는 이웃이 있으면 내가 망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반이론은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속성은 흥하는 이웃의 성공노하우를 따라 배우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과정은 많은 경우 선발자에 무임승차하는 과정이다. 이는 바로 흥하는 이웃이 그렇지 않은 이웃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흥하는 이웃이 착취당해서 발전의 노하우가 퍼져야 발전이 가능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내가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세상은 모두가 남의 스승이 되면서 서로 시너지를 창출하여 동반성장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발전은 흥하는 이웃이 더 많이 생기는 과정이다. 흥하는 이웃이 있어 내가 망한다고 흥하는 이웃을 청산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몰락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의 기업은 계급투쟁을 통한 노동자 착취의 수단이 아니라 구성원 서로간의 비선형적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마차경제를 우주선경제로 창발시키는 독특한 창조 장치이다. 새로운 이론은 칼 마르크스가 세상을 거꾸로 봤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경제발전도 기업의 성장도 성공하는 선발자의 성공노하우를 무임승차하여 따라 배우는 과정이다. 여기서 무임승차가 방치되면 버스회사가 망하듯이, 역사는 문명도 경제도 기업도 일등이 영원하지 않음을 웅변하고 있다. 이런 무임승차가 방치되는 것은 거래조건을 규정하기 힘든 성공노하우(시너지 혹은 발전의 문화DNA)라는 재화의 특성 때문에 거래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 시장은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실패로 우수한 기업을 키워내는데 실패한다는 의미이다. 기업이 시장의 개인 경제주체들에 대한 취약한 차별화기능을 시장거래의 내부화라는 전술로 해결하려하지만 이젠 자신마저 무임승차에 노출되면서 기업만의 힘으로 경제발전을 일으키기도 어려워진다. 기업의 성공노하우가 무임승차되면서 훌륭한 기업은 쉽게 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간 시장과 기업만으로는 경제발전이 실패한다는 의미이다.

2.5. 정부, 경제적 차별화로 시장경쟁과 기업의 성장 동기를 살려내야

이제 마지막 보루가 정부라는 조직이다. 정부는 시장중심의 경제이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항상 악(惡)이 아니다. 성공한 경제는 반드시 선(善)의 정부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발전 친화적 선의 정부란 바로 신상필벌의 원리에 따라 시장과 기업의 본래의 기능인‘좋은 성과를 보상하는 차별화기능’을 보강할 수 있는 정부이다. 시장과 기업은 애를 써서 신상필벌의 차별화원리를 실천하려하는데-물론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정부는 나서서 반대로 성과를 경시하는 반차별화, 평등주의적 개입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장과 기업은 모두 작동을 멈추고 경제는 저성장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정부는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 전략과 정책으로 과거의 전통과 문화 속에, 때로는 반자본주의적 이념과 제도 속에 갇혀 잠자는 민간시장을 깨워 일으켜 개인과 기업의 성장 동기를 살려냄으로써, 창발의 힘을 증폭(amplify)시킬 수 있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정부는 법 앞의 평등을 철저히 보장해야 한다.

2.6. 경제발전의 일반이론 요약

이제‘일반이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시장과 기업과 정부가 3위 일체가 되어‘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기능을 실천할 때라야만 경제발전이 가능하다.‘경제발전의 일반이론’이라는 이름은 바로 기존의 여러 갈래의 이론들이 선택적으로 보던 시장과 기업과 정부의 경제발전역할을 통합하여 모두가 다 경제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나아가 이들 3자가 모두 경제적 차별화기능을 수행할 경우에만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밝혔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이 3자 중 어느 하나라도 경제적 차별화 대열에서 이탈하면 경제발전은 요원해진다. 경제발전은 이 3자의 경제적 차별화기능의 교집합 하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희귀한 현상인 것이다.([그림1] 참조.) 그래서 일명, 시장, 기업, 정부의 삼위일체 경제발전론이라 칭할 수 있다. 이 이론의 대명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경제적 차별화는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경제평등주의는 경제정체의 충분조건이다.’ 전술한 공자의‘화이부동 동이부화’, 좌구명의“화실생물 동즉불계”의 경제학적 표현인 셈이다.

2.7. 주류 경제학과 칼 마르크스와 ‘일반이론’의 경제세계관

시장중심의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은 시장을 모든 경제주체에게 공평하고 평평한 운동장으로 본다. 완전경쟁 모형은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니르바나(nirvana) 균형을 보장한다. 이 세계관하에서는 경제발전은 아주 기본적인 요소공급만 충족되면-사실상 요소공급도 시장에 의해 저절로 충족 된다-저절로 일어나는 아주 일반적 현상이다. 이런 세계관 하에서는 시장의 자연적인 힘에 의한 균형상대가격체계에 대한 어떠한 외부적 교란도 모두 왜곡으로 보며 따라서 발전 혹은 성장 역행적이다. 물론 시장실패로 인해 균형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단지 예외적인 현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세계관 하에서는 정부의 개입은 불필요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으며 아주 예외적인 경우만 필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기업은 시장대체현상이지 시장 확대 및 창출 주체로 보지 않는다. 기업이라는 조직은 없고 생산자 혹은 공급자만 있는 시장균형모형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시장은 현실 시장의 게임규칙인 제도가 사상된 진공속의 시장이다.

한편 칼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이념은 시장을 자본가에게 유리하고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본다. 마르크스의 자본에 의한 노동착취이론이 바로 이런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경제를 강자와 약자간의 계급투쟁의 장으로 보고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착취의 결과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본다. 특히 자본주의적 기업을 자본과 노동의 계급투쟁과 이에 따른 불평등의 모순을 재생산하는 원천으로 보고 사회주의화를 위한 제일의 청상대상으로 본다. 기업과 자본가를 청산하는 것이 시장을 공평하고 평평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본다.

불행하게도 시장중심세계관도, 계급투쟁세계관도 모두 현실의 시장과는 거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경험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전자는 경제적 자유만 보장되면 시장이 저절로 발전을 가져오는 것처럼, 후자는 자본가와 기업만 청산하면 평등한 발전이 되는 것처럼 시사하지만 어느 것도 경제발전의 보편적 역사와 잘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20세기 후반이후의 사회주의 몰락과 최근의 최첨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속의 저성장과 양극화현상 등이 이들 세계관의 타당성을 반증한다할 것이다.

이상의 균형을 전제로 하는 주류 경제학과 불평등을 전제로 보는 마르크스의 경제세계관은 사실상 자본주의경제를 주어진 자원을 주어진 목적에 배분하는 배분경제학(allocation economics)적 차원에서 본 제로섬게임적 관점을 반영한다. 자본주의경제의 시너지 창출을 통한 복잡경제의 창발, 혹은 새로운 재화와 자원의 창조기능, 혹은 발전기능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새로운 창발과 발전, 혹은 포지티브섬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판이하게 다르다.‘경제발전의 일반이론’은 기존의 시장세계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현실 시장의 신상필벌의 차별화기능과 성공노하우의 무임승차를 통한 경제발전현상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인식에서 출발하는 시장관은‘시장은 경제적으로 스스로 도와 성공하는 선발자, 즉 창조자가 이들에게 무임승차하는 후발자, 즉 복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본다. 따라서 경제발전은 항상 실패할 운명이며, 기업과 정부라는 조직이 신상필벌의 차별화기능을 통해 스스로 돕는 주체들에 상응하는 대접을 함으로써 이들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것이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칼 마르크스는 운동장의 기울기를 현실 세상의 이치와는 거꾸로 본 셈으로 결코 경제발전친화적일 수 없으며, 무임승차, 즉 외부경제효과를 배제한 평평한 시장균형하의 주류경제학은 아예 경제발전현상을 다룰 수 없는 배분경제학에 머물러 있다. 주류경제학이 그리는 시장은 주어진 자원의 최적배분은 설명하지만 새로운 자원의 창조는 설명하기 어렵다.

3. 세계 경제문제의 원인과 해법

3.1. 세계 성장정체와 양극화의 원인: 경제평등주의

‘일반이론’에 따르면‘성과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은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성과를 무시한 경제적 평등의 추구는 경제정체의 충분조건이다.’발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성과의 차이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은 칼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모순도 아니고 오히려 이 세상을 보다 나은 번영된 세상으로 이끄는 동기부여 장치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오늘날의 성장정체와 양극화현상은 바로 전후 반세기 넘는 세월동안 경제적 성과를 무시한 반 신상필벌의 평등주의 경제정책체제가, 개인과 기업과 사회로부터 성장과 발전의 유인을 앗아간 때문이다. 성과를 중시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이다. 성장의 유인을 잃고 경제하향평준화로 가는 사회는 중산층이 소멸되면서 불가피하게 양극화에 직면한다. 그래서 경제적 평등의 보장은 동반성장의 안티테제이다. 공자의 동이부화(同而不和)와 좌구명의 동즉불계(同則不繼)의 경구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3.2. 동반성장 친화적 정치경제체제: 시장차별화 민주주의

‘일반이론’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명제를 제시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무소불위의 하느님이 되었다.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 독제체제가 추구하던 경제평등도 민주주의로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발흥을 가져오고 있다. 경제민주화라는 사회주의 이념도 민주주의로 하면 잘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한국 내에 만연하고 있음과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과 경제번영의 전제인 경제적 차등은 항상 충돌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일인일표라는 민주주의의 포퓰리즘성은 항상 정치적 평등을 넘어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평등민주주의(수정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포퓰리즘 등등)의 온상이 되어왔다.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는 모두 경제평등을 추구하는 평등민주주의로 전락하여 자본주의 복잡경제의 창발을 억제하는 정치경제체제로 전락한 것이다. 성과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하는 평등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의 정체는 물론 경제하향평준화를 통해 소위 소득 양극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전후 60여년을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 세계경제가, 그리고 개발연대이후 지난 30여년을 경제·사회·지역 균형발전과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 한국경제가 부딪치고 있는 저성장과 양극화의 원인이다.

결국 오늘날의 경제문제는 평등민주주의의 발호 속에 경제평등의 함정에 빠진 경제가 작동을 멈추고 저성장과 양극화로 반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5천만은 물론 세계 70억 인류의 경제적 번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경제평등민주주의 정치경제체제를 과감히 탈출하여 시장경제의 신상필벌의 차별화기능을 회복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다. 이런 정치경제체제를 시장차별화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민주정치가 시장경제의 신상필벌의 차별화기능을 허용 혹은 오히려 보완 강화함으로써 국민들의 성장의 유인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해야 지금의 경제난국을 탈출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4.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위한 이념

4.1. 상공농사(商工農士)의 실사구시적 이념

소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이념은 오랜 세월의 농경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된 인류의 이념이다. 문과(文科)적 지식인을 필두로 부가가치창출의 주역인 농민이 그 뒤를 잇고, 과학기술자와 상공인은 가장 하층계급으로 여겨졌다. 농경사회는 마차와 여타 농기구를 만들어내는 풀무기술과 대장간이면 충분한 자급자족 경제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과학기술이나 상업활동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경제란 주식회사라는 기업이 새로운 과학적 기술과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경제적으로 고차원의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함으로써 마차경제에서 자동차, 비행기, 심지어 우주선경제로 창발한 창조경제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즉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지식기반사회로의 발전은 반드시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업활동의 신장을 그 전제로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기업인과 기업활동 그리고 과학기술인이 존경받지 못하는 사농공상의 농경사회는 경제발전 친화적이지 않으며, 역으로 자본주의경제의 도약은 바로 실사구시적으로 기업인과 과학자기술자를 존경하고 제대로 우대하는 사회만이 누릴 수 있는 희귀한 현상이다. 선진국들의 산업혁명기는 물론 후발자들의 도약과정은 바로 상공농사나 혹은 직업적으로 평등한 새로운 사회이념의 태동과 전파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상업인과 기술자들을 우대하거나 적어도 직업의 귀천이 없는 사회이념 속에서라야 자본주의가 꽃필 수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문명사의 일대 변화중 하나는, 아마 미국경제가 태양이 지지 않는다는 그 막강 영국경제를 추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일은 그 전 세기 막강 중국을 영국이라는 섬나라가 추월하여 서양의 세기를 열은 사건 만큼이나 큰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영국은 17세기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소위 “현대식 유한책임 주식회사”제도를 발명하여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세계경제를 제패하였다. 인도와 아프리카 식민을 주도한 동인도회사 또한 국가권력을 부여받은 주식회사였다. 르네상스이후 과학기술의 혁신과 창의적 아이디어들을 대량생산방식을 이용하여 값어치 있는 재화와 서비스로 전환시킨 주식회사기업제도가 영국으로 하여금 산업혁명을 통해 중국을 추월하고 서구의 시대를 열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를 바탕으로 과학기술의 발전과 주식회사기업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긴 했지만 여전히 문화적으로는 사농공상의 농경사회 계급적 이념 속의 귀족사회였다. 주식회사제도를 발명했으나 상류층의 인재들은 여전히 기업을 일으키고 기업의 일원으로 삶의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도 정치가나 관료, 학자 등 소위 고매한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영국 등 서구의 소위 기존질서에서 이탈하여 신대륙으로 이주한 상대적으로 하층직업출신의“새로운 아메리카인”들은 모국과는 전혀 다른 개척자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창출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1776년에 독립한 미국이라는 사회는 영국 등 다른 서구 선진국들과는 달리 농경사회의 전통적 계급이념인‘사농공상’의 이념적 바탕이 없이 바로 산업혁명단계로 진입하여 처음부터 다른 문명에 비해 훨씬 더 자본주의적인 이념이라 할 수 있는‘상공농사(商工農士)’의 이념에 가깝거나 계급이념이 희석된 보다 평등한 이념적 사회로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한때 남부를 중심으로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짧은 기간 동안 농경사회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시작부터 자본주의 산업사회이념에 가까운 이념을 바탕으로 출발한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자본주의적 기업을 일으켜 대기업으로 키워내고 그 조직의 일원으로서 부를 일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인생의 삶의 가치로 여기는 새로운 이념을 창출하였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실사구시적, 기업 친화적 세계관을 창출하여 영국 모국이 발명한 기업제도를 최상으로 활용하여 짧은 기간에 영국을 추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기업가나 기업가적 삶을 인생의 수단으로 간주하였지만 미국사회는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신대륙문화를 창출하여 강력한 기업생태계를 창출함으로써 세계경제를 일세기이상이나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류대학을 박차고 나가 창업하는 것을 아무도 폄하하지 않고 졸업생들이 얼마나 많은 창업을 하였는지를 자랑으로 여기는 대학문화가 미국의 강력한 기업생태계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경제는 경제학이 대책 없이 주장하는 ‘보이지 않은 손’이 아니라‘보이는 손’인 기업이 이끄는 경제라고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바로 역동적인 기업과 기업가들이 이끄는 경제이다. 이들이 폄하되는 사회는 어떤 방법으로도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동북아에서도 일본의 명치유신이 그러하고 한국의 개발연대 한강의 기적, 즉 박정희 산업혁명이 그러하고 중국의 지난 30년의 등소평 기적이 그러하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봉건제의 산물인 사농공상의 최상층이었던 사무라이계급이 무너지고 이들이 주판을 든 사무라이로 변신하여 산업보국(産業報國)의 새 이념을 체화한 새로운 기업가그룹을 형성하면서 일본의 근대화가 가능하였다. 한편 한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박정희는 성공하는 기업과 기업인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함으로써 오천년도 더 되는 세월, 사농공상의 계급이념 속에서 짓눌렸던 한민족의 기업가적 창조의 본능을 살려내어 오늘날 세계를 호령하는 세계적인 한국기업들을 만들어내었다. 나아가 모든 기업을 국유화했던 사회주의체제의 몰락 속에서 다른 체제전환국들은 거의 모두 기업이라는 조직의 재건에 실패하여 농경사회로 역주행 하였으나 중국의 등소평은 일본과 한국의 기업주도성장경험을 잘 살려 선부론(先富論)이라는 부를 쌓는 자를 우대하는 반 사농공상의 이념을 앞세우고 국영기업에 신속하게 자본주의적 경영을 도입하여 지난 30여 년간 기업주도 산업혁명을 이뤄내었다. 자본주의경제의 창발은 산업혁명이든, 지식경제든, 창조경제든 사농공상의 계급이념을 탈피하여 상공(商工)업을 통한 부의 창출자들이 대접받는 보다 실사구시적 이념을 창출하고 이에 부합하게 기업과 기업가를 존중하고 과학과 기술을 보다 숭상하는 제도와 정책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4.2. 새로운 이념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이념은 사회의 게임의 규칙인 경제제도의 원천이다. 이념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비공식적 제도일 뿐만 아니라,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정당의 정치 및 입법 활동을 통해 헌법, 법률, 더 나아가면 행정부의 명령, 규제 등 공식적인 제도의 내용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일국의 경제활동의 전체적인 인센티브구조를 형성하는 경제게임의 규칙을 결정하게 된다. 국민경제의 성공과 실패는 얼마나 부의 창출행위를 우대하는, 즉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에 부응하는 사회이념을 창출하고 이를 공식적 법제도 속에 담아내어 국가의 제도로 정착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제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든 제도를 엄격하게 실천하여 국민들의 행동이 바뀌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집행의지가 없으면 제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경제발전의 관건은 어떻게‘경제발전 친화적 이념’을 창출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경제학도 정치학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신제도경제학은 제도의 경로의존성이 새로운 제도도입과 변화에 장애가 된다는 경험적 사실은 적절히 지적해왔지만 제도변화의 원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이념을 포함한 제도변화에 성공했던 사례들을 통해서보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가리더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점이다. 국가리더가 신상필벌의 차별화원리를 인지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입법과정을 통해서나 정책을 통해 경기규칙으로 제도화해내고 이를 꾸준히 상당기간을 집행함으로써 국민들의 경제적 행동과 궁극적으로는 생각, 즉 이념마저도 바꾸어 낼 수 있었다.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면서 행동이 바뀌고 점차 생각의 바탕, 즉 이념도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발전친화적인 신상필벌의 차별화이념을 체화한 강력한 설득의 리더만이 경제적 도약을 이끌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한국의 박정희, 싱가포르의 이광요, 중국의 등소평, 영국의 대처 등이 그러하였다. 특히 한국의 새마을 운동은 스스로 돕는 마을만 지원하는 신상필벌의 경기규칙을 제도화 및 정책화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을 자조하는 국민으로 바꿀 수 있었던 의식개혁 성공사례라 할 수 있다.

5. 한국경제의 성공과 실패: 최고의 동반성장경험에서 저성장·양극화로

5.1. 박정희산업혁명의 성공역사

5.1.1. 성과: 인류역사상 최고의 동반성장

한국경제는 지난 60-70년대에 걸친 박정희 산업혁명시대와 80년대 5공화국시대에 걸쳐 30여 년간 인류역사상 최고의 동반성장을 실현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급성장하기 시작한 한국경제는 1980년대 후반까지 30여 년 간 연평균 9% 가까운 잠재성장률을 시현하였으나, 90년대 이후 30여 년 동안은 성장이 서서히 계속 둔화되어 오늘날 2-3%대의 잠재성장률에 그치고 있다.([그림2] 참조.) 한편 비슷한 기간 중 세계 40개국에 대한 성장과 분배에 대한 세계은행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국은 기간중 평균성장률이 최고일 뿐만 아니라 분배 또한 가장 양호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한국이 세계 최고의 동반성장을 시현하였다는 의미이다.(World Bank, 1993; [그림3] 참조.) 여기서 논의 기간을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포함하는 30여년을 잡은 이유는 이 기간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성장 추세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제5공화국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위해, 박정희시대가 경제사회불균형을 초래한 정의롭지 못한 시대였다는 주장 하에 박정희 정책패러다임과는 반대되는 경제제도와 정책을 다수 도입하여 그 후 시차를 두고 나타난 9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추세하락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나아가 80년대의 고성장은 해외여건의 호조속에 사실상 박정희 시대의 역동적 성장추세에 무임승차한 시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60-80년대 30여 년 간의 세계 최고의 동반성장 경험은 20년 가까운 박정희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시대 한국은‘성과에 따른 신상필벌의 차별적 지원정책’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시장의 동기부여기능을 보완, 강화하여 성장의 유인을 극대화함으로써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개선한 유사 이래 최고의 동반성장을 시현하였다. 성공하는 기업을 지원하고 앞장세워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육성하고 수출우수기업을 지원하고 앞장세워 수출기적을 이루어내고 또한 역량 있는 기업만을 지원하고 앞세워 중화학 공업화에 성공하였다. 자조정신으로 성과를 내는 마을만 지원함으로써 잠자던 농촌을 깨워 시장경쟁에 몰입시키면서 새마을 운동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모든 개인과 기업과 마을이 정부의‘성과 있는 국민과 기업만을 지원한다는 신상필벌의 차별적 인센티브구조’속에서 역동적인 성공경쟁을 벌이면서 동반성장을 이뤄냈다.

결국‘일반이론’의 핵심원리인 경제적 차별화원리를 정책적으로 실천하여 수출증진과 중화학공업이라는 유치(幼稚)산업육성에 성공하면서 2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중소·중견기업들을 세계적 대기업으로 육성시켜 기업성장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산업혁명에 성공하였다. 나아가 경제적 차별화원리를‘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깃발아래 새마을운동에도 적용함으로써 5천년동안 하늘 탓만하던 잠자던 보릿고개농촌의 의식을‘하면 된다.’는 자조정신으로 충만한 자본주의 시장이념으로 바꿔내어 도시와 농촌의 동반성장에도 성공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사회의식개혁운동으로 출발한 운동을 경제적 차별화전략으로 경제발전운동으로 바꿔내어 자조정신의 창발과 소득증대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낸 희귀한 성공사례였다. 오늘날 지속가능성유지에 실패하고 있는 전 세계의 재분배복지정책이나 사회정책 그리고 경제역량강화정책 (Economic empowerment policy)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적 대안이 바로 새마을 운동의 성과에 따른 차별적 지원정책에 있음을 전 세계가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수출육성정책으로 성장하는 수출제조 기업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독려 하에 제약 없이 수출수익을 국내에 투자함으로써 수출지원 때문에 상대적으로 역차별 당하던 내수를 복원시켜 중소기업 및 서비스업과 농업 등에 대한 유발수요를 창출하고, 일자리창출을 주도하면서, 내·외수, 대·중소기업, 제조업·서비스업, 제조업·농업 간의 동반성장의 선순환구조가 형성되고 동시에 중산층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수출육성정책이 바로 동반성장의 선순환구조를 견인하였다.

5.1.2. 박정희산업혁명의 이념적, 정책적 바탕

5.1.2.1. 실사구시적 이념(實事求是的 理念)의 실현

한국은 오랜 농경사회문화 속에서 형성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적 계급이념 때문에 1960년대 말까지도 자본주의경제로의 이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방 후 제일공화국이 미국으로부터 선진자본주의와 민주주의제도를 직수입하여 사유재산권의 보호 하에 농지개혁, 교육개혁,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물론 6.25라는 전란의 영향도 있긴 했겠지만, 한국의 농경사회는 1960년대 까지도 여전히 잠자고 있었다. 전래의‘하늘만 쳐다보고 보릿고개마저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는 이념적 경로의존성속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논리는 쉽게 체화될 수 없었다.

근대화 산업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출발한 박정희 정부는 수출을 통한 산업화자금 확보와 동시에 유치산업육성을 위해 상공업과 기업가들을 우대하고,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우대하는 철저한 자본주의경제 친화적 제도와 정책을 추진하였다. 세금탈루 기업인들을 경제발전에의 헌신과 추후 납부조건으로 석방하여 기업가들의 산업보국이념을 장려하고 이공계대학과 기술고등학교를 적극 육성하고, 해외 우수한국인과학자들을 적극 유치하였다. 전경련의 설립을 독려하여 우수기업인들의 산업발전에의 참여를 이끌고, KIST, KDI를 설립하여 과학기술과 경제정책기술을 향상시키고, 문과 중심이었던 대학정원을 이공계 중심으로 바꾸고, 공업고등학교 등 전국에 수많은 실업계고등학교를 설립한 교육정책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철저한 실사구시적 이념의 소유자였다. 당시 전 세계를 풍미한 소위 균형발전이라는 경제발전론의 패러다임에 억매이지 않고 실사구시적으로 산업혁명을 위해 필요한 정책들을 추구하였다. 전후 세계는 당시 발흥하고 있던 사회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경제발전론도 하나같이 이념적으로 접근하여 균형발전이 가능한지여부와는 전혀 관계없이 너도 나도 균형을 추구하였고, 그 동안 성공사례가 거의 없음에도 이런 전통은 아직도 전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산업혁명은 수출 진흥과 산업육성으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수출과 내수,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을 이뤘지만, 그 과정은 실사구시적인 실현가능성과 경제적 우선순위에 입각한 철저한 경제적 접근이었다. 사회주의적 평등이나 균형이념이 아니라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원리의 실천을 통해 결국 세계최고의 동반성장을 이뤘다. 오늘날 한국을 풍미하는 동반성장의 깃발아래 사회주의이념인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박정희 산업혁명을 음미해봐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박정희 산업혁명은 사농공상의 직업적 계급이념을 타파하여 산업혁명에 필요한 실사구시적인 보다 평등한 직업이념을 창출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오천년 동안의 질곡인 사농공상의 계급적 천시 속에 짓눌렸던 과학자와 기술인, 기업인, 상공인들의 창조성을 북돋아 깨워냄으로써 당대는 물론 인류역사에 최고의 동반성장과 창조경제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5.1.2.2. 박정희 산업혁명의 성공패러다임: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와 정치의 경제화

5.1.2.2.1.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 정책

‘일반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박정희 산업혁명은 정부가 신상필벌의 원칙하에 정부 주도로‘관치에 의한 경제적 차별화’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 것이 경제도약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경제제도(경기규칙, 유인구조)와 정책을 ‘스스로 도와 성공하는 국민에게 유리하게’만들어 지속적으로 집행함으로써 국민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꿔 모두를 스스로 돕는 자로 변신시킬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좋은 성과를 우대 격려함으로써 국민들에게 경제발전의 동기를 부여하고 경쟁을 촉진하여 시장의 경쟁기능을 강화함으로써 경제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경제적 차별화 원리에 따라 기업 육성전략을 창의적으로 추진하여, 짧은 기간 동안에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중화학공업을 일으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집권 기간 내내 ‘신상필벌’의 원칙을 경제정책이나 인재등용은 물론 사회정책에까지 적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시장의 기능을 앞서 꿰뚫어 보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항상‘낮은 성과보다도 좋은 성과에 보상해야 한다.’고 경제인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직접 실천하였다. 물론 이런 주장이나 원칙고수가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 원칙을 지켰다. 새마을운동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국무위원들, 공화당 당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성과 있는 마을만 지원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5.1.2.2.2. 정치의 경제화 전략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정치의 포퓰리즘화가 과도한 경제평등주의와 균형발전 이념으로 흘러 시장의 신상필벌 기능을 와해시킬 수 있음을 간파하여 항상 경제정책 결정에 정치의 영향을 차단하려고 노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경제정책 결정에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하는 전략을 오래전에 필자는‘정치의 경제화’라 명명한 바 있다.

예컨대 혁명 초기 정치적인 명분이 농후한 이유로 검거된 십 수 명의 탈세 기업인들을 경제개발 참여와 추후 추징금 납부조건으로 석방한 경제우선의 실용적 결단이나 이미 언급한 새마을운동의 지원방식에 있어 정치적 이유로 균등지원을 주장한 국무회의와 정치권의 결정을 배격하고 철저하게 성과에 따른 차별적 지원을 결정한 사례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5.16 혁명의 배경 중 하나가 당시 민주정치의 국가운영 역량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또 한 번의 일인일표 민주정치의 부정 사례인 유신체제를 선포함에 있어서도 그 비민주성을 인지하면서도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경제를 도약시키고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정치권의 영향력 배제가 불가피’함을 강조했었다는 증언들을 통해서 그의‘정치의 경제화’의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비판받고 있으나 바로 이것이 경제적 차별화 정책의 정치적 왜곡을 막는 데 기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권위주의 리더십이‘높은 성과에 더 많은 보상’을 필요로 하는 경제적 차별화 원리를‘낮은 성과에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평등주의적 포퓰리즘 정치로부터 방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박정희 경제정책 패러다임을 ‘정치의 경제화를 통한 경제적 차별화 정책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5.1.2.3. 박정희 산업혁명의 이단성에 대한 평가

이제 경제발전의‘일반이론’과 박정희 패러다임의 성공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박정희 산업혁명의 이단성에 대해 평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한국사회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특성을 주류경제학이 반대하는 정부 주도의 적극적 산업정책, 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과 경제 불균형, 지역 불균형, 정치적 권위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박정희 패러다임을 이단적이라고 비판하고 배우기보다 청산대상이라 폄하해왔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시장 중심주의 이념이나 균형발전 이념, 현대 자유민주주의 이념 등에 비춰 이단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새로운 일반이론이나 이미 선진화된 나라들의 19세기 산업혁명기의 선례나 중국 등 오늘날의 떠오르는 신생 경제도약 국가들의 경우를 종합해서 볼 때 박정희 산업혁명 혹은 한강의 기적은 전혀 특별하지도 않으며 예외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육성정책 노력 없이, 대기업의 성장과 경제력 집중이 없이, 하향 평준화된 전(前)자본주의 농경사회보다 더한 소득 불평등과 지역 간 불균형 없이 경제적 도약을 이룬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교과서적인 시장중심적 경제패러다임만으로 성공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치경제 체제와 관련해서도 지금의 모든 선진국들은 산업혁명기 불완전한 민주제도와 경제적 자유 하에서 식민지와 노예 착취제도를 바탕으로 경제도약에 성공했다. 반면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식 민주정치와 시장경제를 수입한 신생 독립국들이나 체제 전환국들의 경우에는 아직도 가시적 경제도약을 이룬 예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왜 일본, 한국, 중국, 싱가포르 등 후발자로서 경제도약에 성공한 나라들은 모두 비슷하게 탈교과서적 방법과 결과로 성공해 왔는가? 그래서 한강의 기적을 이끈 박정희 패러다임은 교과서나 주류 이념에 비춰 이단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경험적으로 보면 오히려 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민주주의, 시장경제, 균형성장이라는 이념적 틀 속에 갇힌 주류 정치·경제패러다임이 문제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5.2. 한국경제 실패의 역사

5.2.1. 1980년대 후반이후 경제운영의 성과: 저성장·양극화

5.2.1.1. 경제의 정치화와 평등주의 정책기조 고착

박정희 사후 한국은 1980년대 중·후반이후, ‘개발연대는 비민주적 정치하에 경제학적으로 이단적인 정책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소위 경제불균형을 심화시켰다.’고 단정하고 개발연대와 반대로 하는 것이 선진경제를 이루는 길이라 믿고, 빠른 속도로 경제평등민주주의 정치경제체제로 이행하였다. 개발연대가 경제불균형을 심화시켰다는 주장은 앞에서 보인대로 사실상 사실에 안 맞는 주장이지만 대한민국 전체가 지금까지도 이를 사실인 것처럼 믿는 희한한 일이 그 동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경제적 도약에는 성공했으나 자원배분의 왜곡이 심했다.’는 식의 인식이 보편적인데 그럼 자원배분의 왜곡 속에 어떻게 경제적 기적이 가능했는가 하는 반문은 없어 보인다. 한국은 물론 세계 경제학계가 풀어야할 난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제5공화국 정부의 정의사회구현에서부터 시작된 반 박정희식 경제정책은 정치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급속도로 정치화되고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 시장원리에 반하는 평등주의 경제정책체제가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경제, 사회 제도는 사회정의와 균형발전이라는 이념적 깃발 하에 성과를 오히려 역차별 하거나 폄하하는 반신상필벌의 역차별 인센티브구조로 빠르게 바뀌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성장하는 대기업에 대한 무조건적 규제, 중소기업에 대한 신상필벌에 역행하는 평등지원, 수도권규제, 전투적 노조의 등장, 중등교육평준화, 심지어 대학 평준화, 지역균형발전과 행정수도이전 등 성과와 수월성을 폄하하는 경제사회적 평등주의 정책들이 봇물을 이루게 되었다.

필자는 1980년대 중후반이후의 경제정책패러다임을 박정희 산업혁명시대와는 반대로‘경제의 정치화’와 반신상필벌의‘경제평등주의’정책체제라 불러왔다.

5.2.1.2. 경제역동성하락과 저성장추세의 고착

신상필벌에 충실해야할 경제정책들이 모두 1/n 평등지원정책으로 변질되고 성과를 경시하는 민주적 평등이념에 경도된 보상체계가 전 사회를 풍미하면서 역동적이던 한국사회의 성장유인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대기업규제와 중소기업보호육성정책으로 균형된 기업생태계를 추구해 왔지만 결과는 80년대 후반이후 대기업의 숫자가 급격히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도 성장지수(100+규모상승중소기업비중-규모하락중소기업비중)가 급격히 100이하로 떨어져 중소기업의 성장유인마저도 급격히 사라지면서 전체기업생태계의 하향평준화가 심화되어왔다는 점이다.([그림 4], [그림 5], [그림 6] 참조.) 기업의 성장유인이 사라진 경제가 창발 할 수 없다는 명제는 바로 “일반이론”의 핵심명제이다. 이 결과가 바로 앞의 [그림2]의 경제성장 둔화로 나타난 것이다. 기업과 전체경제의 성장둔화문제는 다음절에서 더 상세히 논할 것이다.

5.2.1.3. 각종 양극화의 심화

나아가 90년대 이후에는 내수를 희생하면서 수출은 지원하지만 반대기업정서와 전투적 노조활동, 대기업투자규제와 수도권규제 등에 따른 국내 투자환경의 악화로 수출제조 대기업들이 국내투자를 기피하면서 수출수익이 과도하게 해외투자로 유출되어 내수가 회복될 기회를 잃게 되었다. 나아가 내수회복 기회가 상실되면서 일자리 창출이 안 되고, 중소기업과 내수, 서비스업 등에 대한 수요가 정체되면서, 내·외수, 제조업·서비스업, 대·중소기업 간의 양극화라는 악순환구조가 고착되게 된 것이다. 이는‘경제력집중을 해소하여 기업생태계를 균형발전시킨다.’는 평등민주주의의 대기업규제정책패러다임이 빚은 결과이다.

개발연대이후 30년여 년 동안 역차별 인센티브구조 속에서 성장의 유인을 잃은 한국경제는 원치도 목적하지도 않았던 반동반성장의 장기성장정체와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그림2] 와 [그림7] 참조). 현재의 반차별화 인센티브구조를 그냥 유지한다면 조만간 0%성장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그림2] 참조). 한국은 이미 거의 30년 전부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궤적을 따라가기 시작한 셈이다. 오늘날의 잠재성장률이 과거 50년대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2.2. 한국경제 저성장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일반이론”은 자본주의경제는‘기업경제’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경제를 읽는다면 지난 30년 동안 잠재성장율이 지속적으로 추락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본축적이나 인적자본 확충이나 기술혁신이 과거 개발연대보다 못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자본조달의 용이성이 크게 신장되고 교육투자의 증가로 교육수준이 획기적으로 증가되는 등 그동안 물적, 인적 자본의 확충이라는 생상요소 측면의 성장은 괄목할만하지 않았던가? 그럼 총요소생산성(TFP)의 증가가 미흡해서인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다면 아마도 이는 잘 모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TFP의 추정이야말로 이현령비현령이니 그만큼 모르는 게 많다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동안 과학기술과 R&D에 대한 투자가 GDP 대비 거의 세계제일의 수준이라 하는데 정말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전통적인 생산함수 모형은 자본, 노동, 기술이 주어지면 시장이 생산한다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모형은 ‘시장생산함수’라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환원주의적 사고로 생산주체인 기업을 각 요소로 분해하여 그 시너지창출기능을 제거한 모형이다. 생산의 주체인 기업은 없고 요소만 있으니 기업이라는 사회적기술의 창발기능을 찾을 길이 없게 된다. 그러나 기업경제관점은 전일적인 복잡계 관점으로 기업은 모든 생산요소들을 조합하여 그 선형적 합보다 질적으로 더 큰 질서를 창출하는 장치이며 거의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질서를 만들어내는 기업들이 존재할 수 있는 창발의 주체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산함수는 개별 요소가 아니라 기업이 보유하는 생산적 자원의 총합의 함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모형은 시장생산함수에 대비하여‘기업생산함수’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GDP는 기업이 보유하는 총 생산적 자원의 함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접근의 또 다른 이점은 시장생산함수의 경우 부딪치는, 케임브리지 자본논쟁이 시사하는 바와 같은 각종의 요소측정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시장생산함수가 부딪치는 자본의 측정은 물론 노동이나 인적자원, 기술혁신수준의 측정과 같은 난제를 다 회피할 수 있다. 기업이 보유하는 이들 자원의 총체적 합이 바로 대차대조표상의 총자산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 총자산을 설명변수로 할 경우 “기업생산성”을 즉각 추정할 수 있다.

졸고(Jwa, 2016)와 졸저[Jwa 2016; 좌승희·이태규 2016]의 세계 기업생산함수의 추정결과에 의하면, 10%의 일인당 기업자산 증가는 추정방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4-6%의 일인당 GDP의 증가를 가져옴과 동시에 0.15의 소득 GINI의 감소를 가져오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국에 대한 시계열 분석결과[좌승희·이병욱 2016]에 의하면 한국은 기업생산성이 세계평균보다 높아 GDP의 기업자산에 대한 탄력성은 거의 1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1%의 일인당 기업자산 증가가 1%의 일인당 GDP의 증가를 가져온다는 의미이다. [그림8]에 의하면 한국은 지난 30년간 기업자산증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최근 2-3%대로 추락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동안 한국경제의 장기 성장잠재력하락을 조장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럼 기업자산증가율이 그렇게 장기정체를 보여 왔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평등주의 기업정책 패러다임’이 그 원인임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장황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다만 지난 30년의 균형발전과 경제민주화 정책패러다임이 박정희 산업혁명기와는 정반대로 기업성장의 유인을 차단하여 앉은뱅이 기업생태계를 조장하는‘성장보다는 현실안주가 더 유리한’인센티브구조를 고착화시켰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기업생태계의 경제제도 즉, 경기규칙은 어떤 창의적인 기업가가 도전해도 난공불락인 성장의 벽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이나 관료라는 권력자가 되어, 그동안 소위 을로서 맺힌 한과 설움을 풀고 모든 사람위에 군림하고자하는 군상들과 이에 더하여 이들에 줄을 서서 더 큰 기득권층을 구성하는 거대한 지식인 사회까지 모두 비생산적 지대추구에 몰두하는 사회가 되었다. 박정희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그 동안 잠간 가라앉았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이념이 급속도로 재생되고 있다. 어디를 가도 정치인이 갑이요 관료나 전직관료가 갑인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이 대열에 끼고자 줄을 서고 있다. 이 사회에 자조(自助)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은 점차 2등 3등 국민이 되어가고 있다.

개발연대이후 한국은 박정희시대 청산이라는 이름하에 대기업들을 단지 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규제하고 중소기업들은 작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획일적으로 지원하여 오히려 성장하는 기업과 기업인들을 역차별 함으로써 앉은뱅이 기업생태계를 만들어내었다. 과학기술교육과 실업교육을 경시하여 이제 대학의 문과가 과반이상의 정원을 점하여 과잉공급문제에 봉착하고 덩달아 실업교육은 거의 몰락하였다. 자칭 지식인이라는 정치인들과 관료사회는 법과 정책으로 기업(가)과 과학·기술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으며, 사회는 과학기술인과 기업가들보다도 소위 정치인, 관료와 훈고학자(訓詁學者) 등, 창조와는 거리가 멀고, 부의 창출이 아니라 그 소비에 몰두하는 비생산적 계급을 더 우대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젊은이들이 공무원시험에 줄을 설 수밖에 없고 너도나도 정치권과 관에 줄을 서는 이 시대가 조선조의 몰락을 가져온 사농공상의 계급사회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주장에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까? 기업을 일으키고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국가번영에 기여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 되는 실사구시적 국부창출의 사회이념이 확고해지도록 국가가 제도적, 정책적 뒷받침을 해야 젊은이들의 창업, 중소기업의 성장, 대기업의 세계적 기업으로의 도약과 일자리 창출을 통해 동반성장을 재현해 낼 수 있다. 성공하는 기업과 기업인을 폄하하는데 혈안이면서 성장의욕에 충만한 기업가와 기업이 활개치는 선진 한국경제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불과하다.

6. 한국경제 실패를 극복하는 길

6.1. 평등민주주의 덫에 빠진 정치를 개혁해야: 정치의 경제화가 절실하다.

성장의 유인은 사라지고 재분배만을 외치는 사회에서 동반성장은 연목구어에 다름 아니다. 저성장·양극화에 빠진 한국경제를 살려내는 길은 평등을 내걸고 한국경제의 동반성장을 막고 있는 정치권이 대오각성하여 그동안의 반 신상필벌의 경제평등주의정책체제를 과감히 탈피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뜻있는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이 시장차별화민주주의를 내걸고 돌연변이처럼 진화·변신하여 평등민주주주의 덫에 빠진 지금의 정치권의 주류이념을 바꿔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6.2. 공공정책기능의 정상화: 경제(발전)정책을 살려내고 사회정책도 발전정책기능을 강화해야

정부의 공공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경제(발전)정책, 다른 하나는 사회정책이다. 그 동안 경제학의 상식은 경제정책을 경제성장발전을 위한 정책으로 사회정책은 저소득계층에 대한 복지정책이나 보편교육정책 등 소위 사회적 약자들의 경제사회적 역량강화를 위한 정책으로 분류해왔으며 이에 따라 경제정책은 경제적 효율을 강조해온 반면 사회정책은 사회적 형평을 강조하여왔다. 일반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정책은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원리에 따라 성과에 기초해서 차별적으로, 사회정책은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1/N로 공평하게 공공자원을 배분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상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지난 60년의 평등민주주의추세 속에서 얻은 교훈은 과도한 사회정책적 지출이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경제정책마저도 형평의 논리에 따라 집행됨으로써 사회정책화 되어 성장의 지체와 불평등의 심화까지 초래함으로써 정치경제체제자체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80년대 말 정치민주화이후 사회정책이 강화됨과 동시에 경제정책은 과거의 차별적 지원정책이 소위 경제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급속도로 사회정책화 되었다. 개발연대이후 중소기업육성정책, 김대중정부의 벤처육성정책, 노무현정부의 10대 동력산업육성정책, 이명박정부의 녹색성장정책 등의 산업정책들이 모두 신상필벌의 차별화원리와는 거리가 있는 형평과 균형의 이념에 따라 지원됨으로써 급속도록 정치화되면서 사회정책화되어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런 추세는 물론 정치민주화에 따라 표를 의식한 정치권과 정부가 민주적 평등과 형평, 균형의 이념을 명분으로 내세워 경제정책을 왜곡 변질시킨 결과라 할 것이다.

“일반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 두 가지 시급한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경제정책을 제자리로 돌려 놓아야한다. 정치화되어 사회정책으로 변질된 중기지원정책, 산업정책, 지역개발정책, 과학기술 및 R&D정책 등 경제발전정책을 철저하게 지원성과에 따른 차별적 지원정책으로 정상화시켜 경제내의 성장유인을 살려내야 한다. 나아가 그 동안 형평, 평등 만에 기초한 1/N 지원으로 도덕적 해이를 초래하여 오히려 실패하는 국민들을 양산해온 지금의 평등주의적 교육지원정책, 재분배복지정책 등을 인센티브를 차별화한 지원정책으로 개혁해야한다.

오늘날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민주주의 이념인 평등을 실현한다고 무차별적으로 도입 강화되고 있는 소위 형평논리에 기초한 취약계층의 사회역량강화정책 (social empowerment policy)도 인센티브가 차별화된 지원정책을 통해 사회정책은 물론 경제발전정책으로서 일석이조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정책을 지속 혹은 확대하더라도 그 방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하여 신상필벌의 차별화원리에 따라 지원함으로써 정책대상자의 성장발전의 동기를 이끌어내어 성장을 유도함으로써 이를 통해 사회정책의 지속가능성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 의식개혁운동으로 출발하였으나 인센티브를 지원성과에 연동하여 차별화함으로써 경제발전정책화 할 수 있었던 경험이 큰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3.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 차별화 없이 창조경제는 없다.

자본주의경제는 복잡계의 창발, 즉 창조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다. 창조는 무엇보다도 수월성추구에서 나온다. 따라서 정책성공의 요체는 어떻게 관련분야에 수월성추구의 동기를 극대화할 것이냐이다. 답은 물론 성과에 따른 신상필벌의 차별화 전략에 있다. 따라서 창조경제의 전제는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의 차별화와 이를 통한 동기부여와 경쟁촉진에 있다.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원리가 모든 산업정책에 적용되어야 하며 창업기업이든 기존 기업이든 기업지원은 물론 대학의 교육과 연구지원, 과학과 R&D분야지원, 소프트웨어부문지원에까지 적용, 강화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이들 모든 분야가 그 동안 수월성추구유인을 죽여 온 평등지원과 평등배분 제도와 이념에서 벗어나 수월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진취적 창조동기로 충만해야 창조경제의 성공이 가능할 것이다.

나아가 창조경제육성정책이야 말로 바로 기업육성정책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창조적 아이디어와 과학적 발견이라도 이를 부가가치로 전환할 수 있는 창조적 기업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개발연대야 말로 성공적인 기업육성정책을 통해 창조경제가 꽃핀 시대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적으로도 몇 안 되는 성공사례인, 모두가 실패한다고 했던, 수입대체·유치산업보호육성정책인 중화학공업화의 성공도 바로 성과에 따른 엄격한 차별적 기업지원정책의 결과였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엄격한 신상필벌의 차별적 자원정책을 통해 농경사회 마차경제에서 자동차경제까지 창조경제를 일으킨 개발연대 창조경제에서 배워야 한다. 이제 비행기, 우주선 창조경제로의 창발 또한 같은 원리를 따라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발연대 박정희 산업혁명은 그래서 아직도 진행형인 살아있는 창조경제학이다.

6.4. 기업정책개혁과제

6.4.1. 기업정책의 새패러다임

기업이 경제력을 남용할 능력(ability to abuse economic power)과 이를 실제로 남용할 유인(incentive to abuse economic power)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원리임에도 이를 혼돈하는 기업정책이 너무나 남용되고 있다. 경제력은 강한 능력 있는 기업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러나 이 힘은 또한 항상 남용될 소지가 있다. 자본주의경제의 성장ㆍ발전을 이끌 수 있는 기업정책의 요체는 성장유인은 극대화하되 성장하는 우수기업들의 경제력남용의 유인을 극소화하는데 있다. 경제학은 실제 및 잠재적 경쟁자의 존재가 가장 강력한 경제력남용유인의 견제창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모든 영역, 지역에 크기에 관계없이 진입의 문을 활짝 열어 적극적으로 실제 및 잠재적 경쟁압력을 극대화하는 개방적 경쟁촉진 정책이 기업성장과 경제력남용억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정책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30여 년 동안 이와는 정반대로 대기업의 문어발 투자규제라는 미명하에 대기업에 대한 지역, 크기, 분야에 따른 역차별적 투자규제정책으로 아예 기업의 성장자체를 차단하여 오랫동안 경제성장정체와 양극화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정책은 대기업 간 상호진입마저 억제함으로써 국내 독과점을 오히려 조장하여 경제력남용유인을 억제하는 데도 실패하였다.

6.4.2. 중소기업의 성장유인을 극대화하는 중소기업육성정책이 필요하다.

중소기업의 성장을 유도하려면 중소기업육성정책을 1/N의 사회정책적 지원정책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경제발전정책으로 전환해야한다. 성과가 우수한 중소기업이 중견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금융지원제도와 정부지원정책을 경제적 차별화원리에 맞도록 개혁해야한다. 중소기업부문에 M&A를 활성화시켜 좀비기업들을 흡수하여 강한 중소기업이 빠른 성장으로 생태계를 이끌도록, 그래서 중견,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대기업부문에 경쟁압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

6.4.3. 대기업의 국내독점화를 조장하는 국내투자규제를 철폐해야 한다

그 동안 대기업간 상호진입을 억제하는 대기업에 대한 문어발 투자규제는 성장유인을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기존기업들의 국내 독점력만 보호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이제 한국의 대기업생태계는 피나는 경쟁도 없고 성장의 유인도 사라진 정부규제가 보호해주는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물론 수출부문의 경우는 국제경쟁의 압력에 노출되어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압력을 받고 있지만 여기에 중소기업부문이 반 신상필벌의 지원제도 속에 안주하면서 성장의 유인이 사라지다보니 대기업규제에도 불구하고 경제력집중완화에는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중소기업육성정책을 차별적 성과중심 지원정책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대기업에 대해서도 상호간의 투자에 대한 규제를 획기적으로 자유화함으로써 기업부문에 경쟁과 성장유인을 살려내고 이를 통해 경제력 남용유인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6.5. 노사관계의 새패러다임: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오늘날의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념에 따라 형성되었다. “일반이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변화, 발전원리는 흥하는 이웃이 있어 내가 망한다는 계급투쟁이념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하는 비선형적 시너지를 통한 창발의 메커니즘이라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경제의 동반성장을 위한 노사관계는 그 근본에서부터 재검토되어야 한다. 서로 투쟁의 대상이아니라 시너지창출상대로서, 기업창발의 파트너라는 관점에서 다시 써야한다.

우선 노조는 기업이 계급투쟁의 장이 아니라 토지를 대체한 근로자의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기업 또한 근로자가 기업의창발의 원천임을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기업 없이 근로자도 없고, 근로자 없이 기업도 없다는 상식을 깊이 재인식해야한다. 그리고 사회 모두는 기업은 자본주의경제 동반성장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노사관계가 불안하고서 세계일류기업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실사구시적인 세계관에서 출발해야 노사관계가 동반성장 친화적으로 재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사관계는 그 계급투쟁적, 전투적 성격의 역사적 연원이 어디에 있던 지속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더 이상 노조를 전투적인 조직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노사 모두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6.6. 교육과 과학기술정책, 수월성추구가 생명이다.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교육이 인간의 역량을 높이는 보편적 사회정책기능과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핵심요소로서의 발전의 기능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는 아직도 암중모색중이다. 본고의 경제발전의 원리에 의하면 교육도 그냥 사회정책의 일환으로만 접근해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오늘날의 평준화교육이념이 추구하는 인적자원의 수월성을 희생하는 보편적 교육의 확대만으로는 교육이 경제의 성장,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 어렵고 따라서 지속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공교육의 수월성교육포기가 사교육시장을 창궐하게하고 결국 사교육시장에서 배제되는 취약계층 자녀들의 빈곤의 대물림을 고착화시키는 현재의 평준화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이념 하에 보편적 교육의 확대에 치중하고 있는 전 세계교육이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이다. 전 국민이 다 대졸자가 되어도 경제성장은 하락하는 현상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교육이 경제의 성장발전에 기여함으로써 교육투자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위해서는 교육기회의 지속적 확대와 더불어 교육의 수월성추구를 보다 강화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기회확대를 위한 투자를 확대 유지하되 동시에 수월성교육을 강화하기위한 신상필벌의 원리를 공교육현장에 재도입, 강화해야 한다.

대학교육이나 과학기술분야야 말로 수월성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분야이다. 그러나 이 분야마저도 민주적 평등의 이념 때문에 수월성추구가 백안시되고 있다. 우수한 학자, 과학자, 기술자가 보다 더 대접받는 사회가 되어야 수월성추구의 동기가 부여되고 그래서 소위 노벨상급 인재도 나오는 법이다. 고등 교육이나 과학기술 투자는 평등보다 수월성이 더 강조되어한다. 이분야야 말로 투자에 있어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 시장원리가 철저히 적용되어야 할 분야이다.

6.7. 지역균형발전정책의 새패러다임: 이웃 마을이 흥해야 우리 마을도 흥한다

지역균형발전은 다 같아져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다 다르게 그러나 동반성장한다는 의미이다. 60-70년대 지역균형발전의 이념 하에 대도시성장규제정책을 하던 영국, 불란서,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다 도시성장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경직적 균형발전정책은 전경제의 하향평준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늦게 균형발전이념을 따라간 한국은 1982년 도입한 수도권규제정책을 아직도 금과옥조처럼 지키고 있다. 이에 더하여 최근 10여 년간은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행정수도 이전 등으로 오히려 지역균형정책을 강화하여 그 동안의 경제성장정체현상을 오히려 심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개발연대 비교우위에 따른 지역산업단지 육성정책처럼 하루 빨리 각 지역이 비교우위에 따라 차별화된 지역발전정책으로 서로 다르지만 동반성장하는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교우위지역에의 경제력집적이 바로 시너지와 적하효과의 원천임을 잊지 말고 하루 빨리 수도권 규제를 철폐하고 지역 간 성장경쟁을 유도하여야 한다.

균형발전이야 말로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는 자본주의 발전원리에 충실할 때라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웃 마을이 망해야 내 마을이 잘 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균형발전이념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우리 마을의 발전도, 국민경제전체의 번영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6.8. 사회정책의 발전정책으로의 구조조정 필요하다.

복지정책을 포함 사회적 역량강화를 위한 사회정책은 그동안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원리에 역행하는 평등지원정책으로 인해 부가가치창출에 실패함으로써 모두 하향평준화 되고 따라서 지속가능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선진국의 실패하는 복지정책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과거 새마을운동이 사회의식개혁운동으로 출발하여 결국 경제발전정책기능도 훌륭하게 해낸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원에 따른 실제 성과에 따라 엄격하게 후속 지원을 차등함으로써, 즉 경제적으로 차별화함으로써 동기부여를 통해 모든 후발 참여마을들을 적극적으로 운동에 동참시켜, 결과적으로 모든 마을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농업생산성향상과 농업구조조정을 훌륭하게 이루어 냈던 것이다.

사회정책이라고 그냥 인센티브 차등 없이 1/N로 지원할 것이 아니라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를 함으로써 사회정책을 경제발전정책기능까지 하게 해야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6.9. 평등한 경제를 추구하는 경제민주화, 헌법왜곡이며 발전역행적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경제민주화가 가장 정치적으로 인기 있는 말이 되었다. 정부가 경제적 약자를 위해 강자를 견제함으로써 보다 공장하고 평등한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되고 주장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경제민주화는 평등민주주의를 의미한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경제는 민주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장해왔다. 물론 논리는 자명하다. 경제는 속성상 경제사다리를 세우려하지만 정치는 반대로 이를 눕히려 하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을 위한다면 시장의 차별화기능을 살려야 하는데 민주주의는 속성상 이에 반대로 개입하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 즉 평등한 경제는 경제발전의 안티테제이다.

그러나 한편 헌법 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는 이러한 평등 민주주의적 주장으로 해석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필자가 여러 게제에 밝힌 데로 원래 헌법상의 경제민주화는 그 도입당시 정부의 과도한 민간부문에 대한 개입을 완화하여 정부, 기업, 근로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시장친화적 경제를 지향한다는 의미로 도입되었다. 경제민주화란 경제운영의 민주화를 통한 민간주도 경제를 의도한 것이지 소위 부의 배분을 평등화하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부 인사가 이를 왜곡하여 자의적으로 대기업견제, 균형경제 등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으로 해석,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제민주화란 용어가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라는 평등민주주의 개념(Dahl, 1985, 1998)과 유사하여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지만 현재 정치권의 해석은 헌법을 왜곡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의 미신에 빠져 최근에는 심지어 사회적 경제라는 더 사회주의에 가까운 평등민주주의적 개념을 추구하고 있다.

동반성장이 재분배 균형정책으로 달성되지 않음은 이미 지난 60여년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그리고 이론적으로 입증되었다. 지난 반세기이상을 완전한 평등을 추구했던 사회주의는 북한을 빼고 모두 몰락했고 수정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경제평등민주주의를 추구한 서구 선진국들은 오늘날 하나같이 저성장, 양극화에 직면하고 있지 않은가? 경제민주화는 사회민주주의 실천 수단에 다름 아니다. 진정으로 동반성장을 이루고자 한다면 하루 빨리 경제민주화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6.10. 통화정책의 새 패러다임: 중립적 통화정책과 차별적 통화정책

거시 통화정책의 기본원칙중의 하나는 상대가격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통화정책은 미시적 자원배분의 왜곡 없이 전체 경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은 단기국채시장을 대상으로, 지불준비금이나 대출정책은 전체 은행권을 대상으로 하여 개별 산업이나 기업에 차별적 영향이 가지 않도록 중립적으로 집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중립적 통화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소위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특정 분야의 채권을 매매함으로써 특정분야에 자금을 차별적으로 공급하는 방식의 통화정책이 등장하였다. 물론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유동성을 공급한다고 하지만 사실상은 특정부문에 대한 차별적 유동성공급으로 상대가격에 영향을 미쳐 실물부문의 자원배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경우 2008년 주택금융위기이후 주택채권매입이나 AIG라는 보험회사에 대한 금융지원 등이 그 예이며 일부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양적완화정책들을 시행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구조조정의 필요성과 맞물려 중앙은행이 특정산업분야관련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자금을 공급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은 사실상 박정희산업혁명시대에 이미 관행화되었던 정책이었다. 소위 성장통화라 하여 한국은행이 수출금융을 바로 신용장을 기초로 해당기업에 공급하고, 특정산업을 육성하기위해 기금을 조성하는데 참여하거나 특수은행에 출자를 하는 등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사실상 특정 목적이나 분야와 기업에 따른 차별적 공급으로 자원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었다. 이를 교과서적인 중립적 통화정책에 대비하여“차별적 통화정책”이라 명명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차별적 통화정책 때문에 순수하게 물가안정을 위한 중립적인 통화정책기능은 활성화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것은 당시는 물론 그 후의 학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별적 통화정책 하에서도 경제성장은 세계최고에 (소비자물가상승률로 본) 인플레션마저도 1966-1979년 평균 14.1%에 그쳐 당시 세계에서도 모범적인 결과를 시현하였다. 이는 유동성이 바로 생산성이 높은 분야에 직접 공급됨으로써 생산유발효과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통화정책이 중립적 총수요관리정책에서 차별적 총공급확대정책으로 전환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정책의 성공요인이 바로 “신상필벌의 차별화원리”에 따라 생산성이 높은 분야에 유동성이 공급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차별적 지원대상인 기업과 그렇지 않을 기업의 판별은 과거와 현재의 투명하게 들어난 시장성과가 기준이 되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근거가 희박할 수밖에 없는 미래성공기업을 선택한다는 즉 승자를 미리 선택한다는“정치적 고려”가 최소화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정부의 공공정책이 경제발전과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려면 반드시 경제적 차별화원리를 따라야 한다는“일반이론”의 시사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발전의 견지에서 보면 시장은 후발자의 무임승차현상으로 인해 성공하는 이웃에 불리하게 기울어진 경기장이기 때문에 소위 자생적 시장에서 형성되는 상대가격 체계가 항상 공정하거나 경제발전 친화적이지는 않으며, 따라서 거시경제학의 중립적 통화정책명제 또한 절대적 진리이기는 어렵다. 차별적 통화정책 개념과 합리적인 집행방법 등에 대한 보다 진지한 학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7. 결어: 위기의 한국경제,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물론 한국경제도 저성장과 소득불평등심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서 동반성장이니 포용적 성장이니 하면서 모두 더불어 잘사는 나라를 만든다고 정치권이나 학계나 요란을 떨고 있다. 그러나 뾰족한 해답은 없고 성과도 없이 말의 성찬에 그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전 세계가 2차 대전 후 60여년을 바로 모두 더불어 잘사는 경제를 만든다고 애를 써 왔다는 사실이다. 선진국 경제는 소위 수정자본주의라 해서 소득재분배정책을 중심으로 복지제도를 강화해왔으며 60-70년대부터는 사회주의 경제평등이념을 실천하겠다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추구하고 있다. 전후 신생독립국들도 거의 대부분이 사회민주주의체제를 따라 해왔다. 이미 북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망했지만 사회주의국가들은 더 강력하게 국가에 의한 배급 제도를 통해 완전한 평등사회를 지향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결과는 정반대로 성장은 정체되고 불평등은 더 심화된 것이다. 여기에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1980년대 중후반이후 정치민주화와 경제정의·경제민주화 깃발을 내걸고 박정희 시대가 경제 불평등을 초래했으니 이제 반 박정희식으로 하여 국가사회균형발전을 이루겠다고, 정부의 적극적인 규제와 개입을 통해 대중소기업간의 균형과 지역균형발전, 그리고 교육평준화 등 사회균형을 달성하기 위한 평등주의적 정책들을 추구해왔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경제 선진화의 길이라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런 정책을 30여년 해온 결과 오늘날 한국이 진정으로 선진화되고 소득 분배가 보다 개선되고 경제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지금의 성장잠재력은 50년대 수준에도 못 미치고 소득분배는 지난 30여 년간 계속 악화되어왔다. 그런데도 정치권이나 일부 학계에서는 여전히 반 박정희식 경제민주화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세계경제도 한국경제도 도대체 어디서 포용적 동반성장의 해법을 찾을 것인가? 일자리가 넘치고 너도 나도 계층상승의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여기서 필자는 우리 대한민국이 한때 이런 희망의 역사를 썼다는 놀라운 역사적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 동안 한국의 대부분의 학계나 정치계는 거의 모두 박정희시대가 오늘날의 한국경제 불균형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박정희 반대로 해야 선진국이 된다고 믿어왔으나 사실은 박정희시대야말로 ‘세계최고의 동반성장’을 달성한 시대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은행[World Bank 1993]이 전 세계 40여개 주요국들의 1965-85년 평균 경제성장률과 소득분배상태를 비교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한국이 세계최고의 성장과 동시에 최상위권의 양호한 소득분배상태를 시현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사실상 박정희시대 세계최고의 동반성장경험은 당대는 물론 인류역사상 불멸의 최고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 한국은 각종의 잘못된 정보와 때로는 이념적 진영논리, 비근하게는 정치적 목적 등으로 박정희시대를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청산 혹은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박정희시대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박정희 경제정책은‘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상필벌의 시장원리를 적용·실천함으로써 모든 국민들과 새마을, 기업들을 자조하는 주체들로 탈바꿈시켜 동반성장을 이루어 냈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의 경제정책은 거꾸로 스스로 돕지 않은 국민들을 더 우대함으로써 실패를 자기책임이 아니라 사회책임으로 돌려 국가가 모든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반자조적 국민들을 양산함으로써 동반성장의 동기를 차단해왔다. 이 결과가 바로 저성장·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동반성장의 기적을 일군 우리의 역사는 버리고 해외에서, 그것도 과도한 소득재분배와 복지로 반자조적 국민을 양산하여 저성장과 양극화로 질주하는 소위 선진국들로부터 선진화의 답을 찾아 해맨 지난 30여년, 우리는 지금 참담한 결과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한국경제가 성장의 역동성과 본연의 동반성장을 회복하는 길은 하루빨리 평등주의적 포퓰리즘 민주정치에서 벗어나 경제적 차별화원리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는 국민들을 제대로 대접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이‘실패도 성공도 내 할 탓’이라는 철저한 자조, 자립이념을 체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경제제도나 정책이 신상필벌의 차별화원리를 표방하여 경제적 성과가 보다 더 대접받게 함으로써 모두가 동기부여 되어 너도 나도 성장·발전의 길에 나섬으로써 흥하는 이웃이 양산될 수 있어야 동반성장이 가능한 법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200여년의 자본주의 경제발전사는 물론 새로운 경제발전의 일반이론이 시사하는 바이다. 선진국들의 경험을 통해서 이미 실패가 입증된, 재분배에 매달리는 경제민주화나 동반성장전략은 동반성장은 고사하고 모두 하향평준화 되는 저성장과 양극화를 조장할 뿐임을 직시해야 한다. 위기의 한국경제, 박정희 산업혁명에 길을 물어야 답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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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발제문>

혁명가와 정치가의 차이

-박정희 집권 18년은 국가혁명의 길이었다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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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 박정희 집권 18년의 의미

-박정희 재임 18년, 한국사에서 ‘예외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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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의 사전적 의미는 기존의 사회 체제를 거부하고 법이나 사회 제도, 경제 조직 따위의 기초를 급격하게 바꾸기 위하여 활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정치가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고 국민들의 의견을 조정하여 사회를 유지, 보존시키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듯 혁명가와 정치가는 그 성격이나 태생, 활동목적, 추구하는 방식, 삶의 방법론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다. 정치가는 민의(民意)를 존중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지지(투표의 승리)를 토대로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반면에 혁명가는 혁명을 통해 급격하게 바꾼 법이나 사회 제도, 경제 조직 등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평가받는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박정희에 대해 독재자니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느니 하며 정치가의 잣대로 비판한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하여 1979년 부하의 총탄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박정희의 재임 18년은 5·16, 6·3 비상계엄, 10월 유신 등 혁명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박정희는 혁명가로서의 공과, 그의 혁명이 결과한 대한민국 근대화의 성과를 따지는 것이 올바른 평가 방법이란 점을 제기하려는 것이 이 발제문의 의도다.

일본의 한국 정치 전문가인 다나카 메이(田中明)는 1992년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정치를 투시한다』에서 박정희 시대를 ‘예외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를 다나카 메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기 1270년 고려 무인정권의 몰락 이후부터 조선 500년 등 한민족 700년의 역사는 글 읽는 문과(文科)적 지식인을 가장 우대하고 부가가치 창출의 주역인 농민이 그 뒤를 잇고, 기술자와 상공인을 천시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이념 및 지배구조로 일관해 왔다. 즉, 유교를 신봉하고, 글 읽는 선비(즉 먹물)들이 칼을 든 무인들을 찍어 누르고 통치하는, 지구상에서도 예의 중의 예외에 속하는 문민통치(文治) 시대였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사관도 다나카 메이와 유사하다. 단재는 묘청의 서경 천도를 위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하여 ‘선비의 나라’로 굳어진 것이야말로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아쉬워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이전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군인 따위의 ‘인종’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500년에 이어 1948년 대한민국의 탄생, 그리고 제1·2공화국까지도 양반 지배계층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완벽한 문치의 나라였다.

이 와중에 발생한 박정희의 쿠데타와 18년 집권은 한국 정치사에서 고려 무인정권 이후 700년만의 대이변이었다. 박정희는 ‘독립된 국가’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양반 중심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구조를 일거에 뒤엎고 공상농사(工商農士)의 가치관을 우선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의 나라로 변모시켰다.

박정희의 18년 집권기간을 아우르는(광의로 해석하여 육사 출신인 전두환과 노태우 집권기까지를 군인정권의 범주에 넣는다면 총합 30년의) 군인통치 시기는 양반 중심의 문치에 익숙했던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색다르고 어색한, 무인통치(武治)의 시대였다.

이러한 무치 시스템은 한반도 역사에서 ‘예외 중의 예외’에 속했던 시기이므로 한국은 노태우의 퇴장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기질에 알맞은 문치의 시대로 회귀할 것으로 다나카 메이는 예견했다.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 가능성 예언한 스칼라피노

1960년 4·19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 정권은 리더십이 대단히 취약했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민심 이반 현상이 뚜렷했고 거듭되는, 시위로 인해 무질서가 극에 달했다. 장면이 사회질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자 월터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한국에서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은 군이 유일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의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예견한 것이다. 1959년, 동아시아 문제 연구가인 미 버클리 대학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콜론 보고서」(Colon Report)를 발표했다. 핵심 내용은 ‘피치 못할 과도적 정치체제 단계’, 즉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를 예견했다.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는 거의 공개된 것이나 다름없는 ‘예고된 거사’였다. 2공화국 지도부는 네 차례나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한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 정보를 입수하고도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합법적인 정권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고 수녀원으로 도주(총리), 쿠데타에 협조(대통령), 양다리 걸치기(육군참모총장) 등 내부 분열로 자멸했다.

한국은 1인당 소득수준이 50달러 정도의 가난한 시기에,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물적 토대와 훈련받은 중산층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권위주의 사회라고 일컬어져 온 한국에 이질적인 민주주의가 도입됐을 때 사회 전체에 야기되는 불협화음이나 희생을 줄이면서 민주주의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이 “독재타도, 민주주의 만세”만 외쳐댔다.

자유민주선거만 되풀이한다고 해서 후진국 경제가 발전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유민주정치를 위한 선거가 오랜 기간 되풀이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근대화되지 않은 인도와 필리핀을 보면 그것은 명약관화했다. 이것이 약 7개월 간 존속했던 제2공화국의 비극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불과 250여 명의 장교와 3,500여 명의 군인 등 소수 병력이 한강대교를 건너 수도 서울을 장악했을 때 시민들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60만 대군의 나라에서 불과 3,500명의 병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사실, 군부 내에서 조직적인 반혁명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일반 국민 거의 대부분이 쿠데타에 묵시적으로 동조했거나, 오히려 쿠데타를 반겼다는 점은 사회 전체가 새로운 혁명적 기운을 요청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는 <사상계>의 발행인이었던 장준하가 5·16 쿠데타가 발생한 다음 달 발행된 <사상계> 잡지에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라는 권두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장준하는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의하며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평한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결국 4·19 혁명과 제2공화국은 시민들의 봉기를 통해 권위주의 정권을 붕괴시킬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경제발전이나 국민형성 등 다른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값비싼 교훈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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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 : 박정희가 한강을 건넌 까닭은?

-그가 민주주의 잘 하려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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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나 정치가나 출발은 동일하다. 우선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장악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합법적인 정당을 구성해서 선거를 통해 승리하거나,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군인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주동세력(혁명주체)는 정당 결성과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정권 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남은 길은 무력을 통한 정권탈취였다.

군인이 무력을 동원하여 정당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합법정부를 무너뜨리고 헌정질서를 파괴하면 명백한 쿠데타이자 군사반란이 된다. 그렇다면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군인들이 정권욕(혹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권력을 찬탈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쿠데타다. 그러나 초법적 수단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그 후 경제를 부흥시켜 국민을 절대 빈곤에서 해방시키고, 당시 남한보다 월등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을 추월하며, 국가 근대화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쿠데타가 아니라 국가 근대화를 위한 혁명이 된다고 박정희는 해석했다.

쿠데타와 혁명에 관한 박정희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이석제(박정희 시절 총무처장관·감사원장 역임)의 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혁명관, 혁명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우리는 정권이 탐나서 궐기하려는 게 야니야. 우리의 목표는 나라의 근본을 개혁하고 썩어빠진 병폐를 뜯어고치려고 일어서는 건데 혁명이면 어떻고 쿠데타면 어떤가. 그 동안의 정권이 해내지 못한 국가발전을 달성하면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내려줄 거야.”

“혁명거사를 성공시킨 다음엔 혁명주체들이 희생적으로 앞장서서 허리띠 졸라매고 뛸 각오들을 합시다. 우리는 국민들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국가건설에 나서기 위해 혁명을 하려는 거요.”

“국민에게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이는 지도자는 참다운 지도자가 아니오. 여러분들은 어떤 정책이나 법률을 입안할 때 반드시 국민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방법론과 연관을 시켜서 발상을 해야 합니다.”

“인권, 민주 모두 다 좋은 말이오. 그러나 참다운 인권과 민주는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나옵니다. 당장 배고파 죽어가는 국민들 앞에서 말장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인권이나 민주는 경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두고 보시오. 모든 결실은 나보다 오래 사는 세대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희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체험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신성물이었다. 당시 한국의 배부르고 등 따스운 양반 지배층의 후손으로 구성된 정치계와 지식인, 학생들이 ‘민주주의는 신(神)’이라고 떠받들 때 박정희의 신은 ‘밥’이었다. 이처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서로 다른 신을 숭배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 철학

빈곤 타파, 곧 ‘밥’의 확보, 이것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본질적인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다. 그는 이런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의 질서와 근본 틀을 완전히 새로 짜는 혁명을 실천에 옮겼다.

이석제는 박정희에 대해 “즉흥적으로 혁명에 나선 사람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철저한 이론과 논리를 바탕으로 성숙된 자기 나름의 혁명철학을 가지고 거대한 물줄기를 잡아 나간 인물”이었다고 증언한다. 혁명 직전 박정희는 이석제와의 대화에서 국가 근대화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박정희 : “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됩니다. 우선 국민들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제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대화의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

이석제 : “각하, 국가의 근대화란 뭐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박정희 : “이론상으로는 복잡하고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쉽게 해석하자면 농업사회를 뜯어고쳐서 공업화를 추진한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요. 우리나라 인구가 3천만이 넘는데 좁은 국토에서 농사를 지어 언제 국민들 배불리 밥 먹이겠소. 농토에 매달린 농민들을 공장으로 끌어내서 소득을 높여 주는 국가 시스템을 잘 연구해 봅시다.”

이석제 : “공장 지을 돈이나 기술은 어디서 조달합니까?”

박정희 : “장사를 해도 남보다 다른 아이디어와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요. 거기에다 친절하고 정직하면 더 좋겠지요. 가진 게 없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우선 급한 대로 돈 있는 집에 가서 돈을 좀 빌려다가 장사를 해서 갚으면 될 게 아니오.”

여기서도 ‘밥’의 문제가 등장한다. 박정희는 혁명의 대의명분을 ‘국가 근대화’로 정의했다. 그의 사고(思考)는 배고픈 국민에게 세 끼 ‘밥’을 먹이고, 강대국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주장대로 살 수 있는 나라, 즉 ‘부국강병의 조국건설’을 위해 전면 작동했다.

그가 민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가였다면…

군정연장도, 혁명군의 원대복귀도, 3선 개헌과 10월 유신을 통한 정권 연장과 국민 기본권의 제한도 어쩌면 그에게는 하찮은 관심사였는지도 모른다. 배고픈 국민에게 배불리 밥을 먹여야 하고, 안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는 데 있어 민주주의적 절차와 과정을 따지는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사치스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했다. 김대중의 도전은 거셌다. 특히 김대중의 경제정책인 대중경제론은 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개발정책과는 비전이나 철학이 크게 달랐다. 김대중은 해외 수출시장이 아니라 국내시장을 무대로, 대기업이 아니라 농업과 중소기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농민과 서민, 자영업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이석제에게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민주주의나 선거에 대한 박정희의 냉혹한 본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장관, 우리에게 선거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요? 국민들이 2~3년간 피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조금 여유가 생기면 선거를 통해 다 탕진해 버리고, 국민들 마음까지 해이하게 만드니…. 우리에게 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시간인데 맨날 정쟁(政爭)으로 시간과 노력을 헛되게 버리는 게 안타깝구먼.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형편에 민주주의란 참으로 어려운 제도요. 여야는 선거에서 이기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못 쓰듯 돈을 낭비하면서 온 나라를 휘저어 놓으면 일은 언제 하고, 조국 근대화는 무슨 힘으로 한단 말이오.”

박정희는 집권 과정부터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즉 유권자들의 표심에 의해 탄생된 지도자는 아니다. 그가 쿠데타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키 작고 삐쩍 말라 광대뼈가 튀어나온, 선글라스를 낀 육군 소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시민교육을 받은 인사도, 표를 얻기 위해 때만 되면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해야 하는 포퓰리즘형 정치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힘과 무력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섬멸하는 교육에 길들여진 장군이자,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든 말든 망해 가는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혁명가였다. 오직 혁명가였기에 3선 개헌, 국가비상사태 선언, 10월 유신 같이 초헌법적 수단과 국가 총동원령을 이용해 중화학공업의 추진 등 국가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국민의 뜻(民意)’을 최우선으로 섬기는 정치가였다면 거의 전 국민이 결사반대했던 일본과의 국교 수교를 민심을 거슬러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총칼로 시위를 진압해가며 추진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하여 수많은 세계의 전문가와 석학(碩學), 국내의 정치가와 언론인,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던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중화학공업을 온갖 욕을 얻어먹어가며 밀어붙인 것도 민의, 민심, 국민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보였다.

혁명적 발상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국가 근대화를 그는 정치가적인 ‘통치행위’가 아니라, 혁명가적인 ‘건설’로 쟁취해냈다. 그렇게 얻은 성취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고루 나눠줌으로써 혁명의 대의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 대가로 박정희는 지금도 “민주주의를 파탄 낸 독재자”라고 비판에 직면해 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사는 것”을 지상낙원으로 정의했다. 그는 북한 백성들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고 등 따뜻하게 해주겠다고 수없이 약속했다. 박정희도 배고픈 국민에게 ‘밥’을 보장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 누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켰는지는 바보가 아니면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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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 : “한국에서 경제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경제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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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없어 헐벗은 민둥산, 할 일 없이 노는 청장년, 길거리를 떠도는 거지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오고 배고픔이 상식이었던 곳, 제대로 된 건물이나 교량 도로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나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 이것이 5·16 직후의 보편적인 사회상이었다. 당시의 언론보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해 얼굴이 붓거나 영양실조로 사망한 기사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60년, 우리나라는 수출 3,283만 달러, 수입 3억 4,353만 달러였다. 수입대금 3억 4,353만 달러는 정부 보유 달러로 9,717만 달러, 공공원조(구호자금 포함) 자금으로 2억 4,636만 달러를 결제했다. 대한민국은 10 대 1의 절망적인 무역역조 국가, 매년 국가 살림의 71.7%를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적으로는 파산한 나라였다.

세계개발은행(IBRD) 통계에 의하면 5·16 쿠데타가 발생한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의 독립국가 125개국 중 101번째였다. 당시 우리의 1인당 소득은 우간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토고, 파키스탄과 엇비슷했다. 같은 해 이집트는 152달러, 필리핀 260달러, 터키 276달러, 브라질 203달러였다. 북한은 1961년 1인당 국민소득 320달러로 포르투갈, 브라질의 바로 위인 50위였다.

박정희가 합법적인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1년 전인 1960년,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는 1960년에 한국에 대해 “한국에서 경제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썼다. 또 박정희의 쿠데타 직후 ‘앞으로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한 미 CIA의 「남한 장기전망」이라는 특별보고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정치정세는 군부, 민간 부문이 격렬한 갈등과 분파주의에 휩쓸릴 것이다.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도 있다. 경제전망은 심각하지만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국 원조를 잘 사용하면 경제성장률을 다소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 성과는 잘해봐야 지지부진할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 발생 두 달 후 일본 정부는 한국의 상황을 분석하여 두 달 후인 7월 27일 「한국경제에 대해서」라는 분석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자료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이 다음과 같은 7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경제성장과 자립을 이룩한다는 것은 절망적이라고 분석했다.

1)인구의 과잉, 2)자원의 부족, 3)공업의 미발달, 4)군비압력, 5)정치의 졸렬, 6)민족자본의 약체, 7)행정능력의 결여

엘리트 장교들 미국 유학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 미 CIA, 그리고 일본 정부의 분석과는 정 반대로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경제기적이 일어났다. 바로 여기에 박정희 혁명의 본질이 숨어 있다.

6·25 발발 당시 9만 5,000명 규모였던 한국군은 6·25 남침전쟁을 치르며 휴전 당시에는 49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승만이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국군은 70만 대군으로 급팽창한다. 이 와중에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 병사들을 지휘하는 리더십 특별교육도 배웠다. 각종 군사학교를 통해 받은 전문교육으로 장교들은 국가경제에 유익한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했다.

또 엘리트 장교들의 훈련을 위해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1950년부터 1957년까지 7,000여 명의 한국군 장교(육군 4,729명, 해군 920명, 해병대 189명, 공군 1,503명)들이 코누스(CONUS: Continental United States) 프로그램에 의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남한을 방어하기 위해 이승만은 한국군을 남한사회 최대의 공적(公的)조직으로 확대시켰고,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교육시켰다.

통계에 의하면 5·16 당시 군 장교단 약 6만 명 중 10% 정도가 미국 유학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외무부 공무원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군사 해외유학 인원은 1만 1,595명이었는데, 같은 기간 중 민간인 해외 유학 인원은 5,423명에 불과했다([표1] 참조).

군대란 기본적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적을 제압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과학과 기술, 행정력, 지리학, 군수물자의 보급과 통신, 수많은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병참능력,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의학 기술 등 당대의 최첨단 종합기술이 총동원된다. 군은 일종의 축소된 국가나 마찬가지다.

당시 한국 군부는 미국의 원조를 통해 장거리포, 고속함정, 초음속 제트 전투기와 같은 고도의 정밀무기를 운영 유지하는 과학기술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조직이나 운영 면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 된 미국식 제도를 도입했다.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기술적, 과학적으로 가장 현대화되고 능률적인 근대화 집단은 군이었다. 1961년 이후 박정희가 군부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킨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테크노크라트들 대거 등장

군 이외에 박정희가 등장시킨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테크노크라트 집단의 등장이다. 박정희는 혁명공약의 실천을 위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과정에서 인문계통의 행정 관료들로는 계획 수립이 불가능하자 외부로부터 기술자들 대거 끌어 모았다. 당시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상공부 산하 4개의 국(局) 중 상역국을 제외한 3개의 국장에 이공계통 기술자 출신을 기용했다.

과장급도 상역국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공계 기술자 출신들을 스카우트하여 임명했다. 이러한 이공계통 기술자 출신 국장, 과장들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원동력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이 본격 추진되면서 상공부 업무가 급증하여 광공전 차관보(광업·공업·전기 담당), 상역차관보 두 자리가 신설됐다. 당시 상공부의 ‘국장급 이상’ 진용을 보면 차관보급은 두 명 전원, 국장급은 4명 중 3명이 기술 관료다.

이들 중 박충훈 차관, 함인영 차관보, 최형섭 광무국장, 이태현 공업국장, 그리고 박승엽 과장과 화학과장인 오원철 등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던 해 12월 공군 기술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함께 교육을 받은 동기생들이다. 공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미 공군식 행정을 몸에 익힌 이들이 정부에 참여하여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따라서 이들의 사고체계 형성 과정에서 미국 공군식 교육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한다.

이처럼 기술지식을 바탕으로 정책을 다루는 고급 관료, 즉 한국형 테크노크라트들이 등장하면서 한국은 명분이나 체면을 중시하고 글 읽는 사람들이 통치하던 양반 문화, 문치 시스템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박정희 자신도 포병 장교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로서 이공계적 실사구시 철학으로 이들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확고하고 안정적이며 비전 있는 리더십, 둘째, 잘 짜인 경제발전계획, 셋째, 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유능한 정부 관료집단, 넷째, 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확보다.

선진국에서는 정치 사회적 안정을 비롯한 모든 인프라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만 한국은 위에서 열거한 거의 모든 조건들, 즉 자본과 기술, 훈련된 인재, 축적된 경험, 행정력, 사회간접자본, 인프라, 리더십 등이 총체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을 획기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박정희가 단 기간 내에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다음으로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압축적인 국가건설’(short-cut nation-building)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국가가 민간부문과 시장을 통제하고 이끄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즉 계도자본주의(guided capitalism), 혹은 발전국가체제(혹은 개발독재라고도 표현)를 지향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하는 미국식 자유방임적 경제운영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유사하게 정부가 시장과 민간부문에 개입하여 통제하고 선도하는 경제운영방식이었다. 정부가 계획을 수립하고 한정된 자원을 전략적 부문에 우선적으로 투입함으로써 산출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 구성

앨리스 암스덴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국가와 재벌이 주도한 후발 공업화’라는 개념으로 정립해 한국경제의 성공모델을 세계에 알린 석학이다. 암스덴 교수는 “한국이 채택했던 강력한 경제정책이 과연 민주적 정부 하에서도 가능했을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후진국의 경우 강력한 중앙권력은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며, 이것 없이는 공업화를 거의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1960~70년대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면 박정희의 개인적 리더십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박정희가 경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5·16 주체세력들의 슬로건은 “싸우면서 건설하자”였다. 이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구상한 국가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 미국식의 ‘약한 정부’가 아니라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를 원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5·16 직후인 1961년 6월 10일에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고, 7월 21일에는 경제기획원을 창설했다.

중앙정보부는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수집기관이 아니라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국가의 거의 모든 부문을 통제하고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기구였다. 이석제는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같은 파워 집단을 만든 이유는 국가 근대화를 위한 역량을 총동원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국가적 목표를 일사불란하게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목표의 추진과정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를 억누르기 위해 파워 집단의 권력 드라이브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파워 집단의 권한행사가 서툴거나 지도자의 의중을 잘못 읽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경제기획원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예산을 편성하며 경제정책을 조정 통제하는 박정희의 경제 사령탑이었다. 경제정책에 대한 막강한 권한이나 영향력 면에서 경제기획원 같은 기구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박정희는 고도로 중앙 집중화 된 두 기관을 통해 자신의 과업을 효과적으로 조정 통제하며 관리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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轉 : 독자적인 발전전략

-국내외 어느 누구도 박정희 발전방식에 찬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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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이 일어났을 때는 휴전된 지 10년도 안 된 시기로서 남북은 생사를 건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제력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간의 우열을 가리는 지표로 인식됐기 때문에 경제발전은 안보를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였다. 박정희는 공산체제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핵심은 ‘밥’의 문제, 즉 경제라고 판단했다.

박정희는 북한보다 못 사는 나라를 북한보다 잘 사는 나라로 변모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밥’, 즉 경제 문제로 귀결시켰다. 정치마저 경제로 귀결시킨 이런 통치행위에 대해 학자들은 ‘정치의 경제화’, 혹은 ‘경제제일주의’라고 명명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은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고 착취적인 외국 자본의 유입을 막아 대외의존도를 낮춰서 독자적 경제를 구축한다는 후진국 발전 이념을 따르고 있었다.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대폭 수정하는 과정에서 수입대체산업 건설 노선을 포기하고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것은 후진국 발전이론, 그리고 외국 문가들의 조언과는 정반대되는 행보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선진국 대학에서는 ‘후진국 경제발전론’이라는 과목이 후진국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과목이었다. 후진국 경제발전론의 공통된 기조는 후진국들은 전통적인 농업국이기 때문에 농업부터 먼저 발전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저축으로 공업화를 이룩하는 것이 합리적인 경제발전이 된다는 것이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루터 하지스 상무부 장관을 비롯한 미국 정부 관계자와 월터 로스토우 같은 경제개발 전문가들은 박정희에게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농민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며, 수공업과 같은 소규모 산업을 점차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파견됐던 미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박정희가 수출산업 건설로 방향을 틀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비난하면서 “미국과 협조하여 계획을 수정하라”고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거의 대부분이고 전 국토의 22% 정도만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약 200만 정보의 농토는 200만 가구의 농가에 의해 경작되어 농가 가구당 경지면적은 1정보에 불과했다. 게다가 인구밀도는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한반도의 기상 여건 상 겨울이 춥고 길기 때문에 농토를 연중 이용하기도 불가능하다. 강수량은 벼농사를 짓기에 충분할 정도로 내리지만, 7~8월에 집중호우, 폭우 형식으로 집중돼 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늘 가뭄에 시달렸다.

이처럼 농업에 불리한 여건 하에서 미국이 제안한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길을 통한 근대화’의 방법론을 수용했다면 우리는 저급한 농업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이러한 조언이나 압력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으로 나갔다. 1964년 11월 30일, 연간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자 박정희는 이날을 ‘수출의 날’로 지정하고 수출 목표를 초과달성한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런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전략’으로 산업구조가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한국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전략, 수출 목표 달성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학자들이나 관료, 업계에서 이구동성으로 “수출 목표액이 너무 많아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박정희는 매년 40% 수출 신장 목표액을 강제적으로 설정하고 당근과 채찍을 들었다.

오원철의 회고에 의하면 1970년의 10억 달러 수출목표를 제시하자 학계나 국민이나 언론계 모두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고 명령조로 지시했다. 그해 말 역사상 최초로 연간 수출 10억 달러를 돌파하자 박정희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공휴일로 선포했고 1977년 말, 드디어 100억 달러 수출에 성공했다.

서독이 10억 달러 수출에서 100억 달러에 도달하는 데 11년, 일본은 16년이 걸린 데 비해 한국은 6년 만에 이를 달성했다. 그것도 북한의 지속적인 안보 위협과 세계 경제 침체라는 어려운 여건에서 이루어낸 값진 결실이었다.

박정희는 1965년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직접 주재 하에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보고 회의를 운영했다. 월간경제동향보고는 물가와 국제수지, 개별 산업정책, 공기업 구조조정 등 포괄적인 국정과제를 논의하는 회의였다. 박정희가 서거할 때까지 15년 동안 매월 두 차례 대규모 회의를 빠짐없이 주재하며 수출전선의 선두에 서서 뛴 결과가 바로 ‘수출 대한민국’이란 선물이었다.

1961년부터 1972년 사이에 한국의 수출총액은 40배, 제조업 수출은 170배, 연평균 수출증가율 60%를 기록했다. 수출증대는 국내 경제와 산업에 1석10조의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수출이 늘면서 외화획득은 물론 일자리 창출, 품질 및 기술향상, 기업발전, 소득증대 등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정부는 수출입국과 공업입국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수출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박정희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일본과의 경제협력 없이 신속한 경제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의 민심은 일본과 수교하면 한국은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전락하고 일본의 매판자본에 착취를 당해 또 다시 일본에 경제 종속이 될 것이라며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거의 적대적인 분위기였다.

결국 신속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수교가 절박했는데, 그것은 민심을 거스르는 길이었다. 박정희는 정권의 운명을 일본과의 수교에 걸었다. 정치인과 지식인,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불과 몇 개월 전 출범한 박정희 정권을 반민족·매판·친일정권으로 매도하며 대규모 시위로 맞섰고,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한일 수교는 제2의 쿠데타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지도나 인기에 연연했다면 박정희는 한일 수교라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정치가가 아니라 혁명가였다. 1964년 한국의 수출규모가 1억 달러를 처음으로 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일본으로부터의 무상지원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는 1964년 수출대금의 8년 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월남 파병을 통해서도 한국은 엄청난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한국은 2개 전투사단(맹호, 백마부대)과 1개 해병여단(청룡부대), 그리고 지원부대(비둘기부대)의 대병력을 파병,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약 5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상주시켰다. 한국군 전투병력 증파에 대한 대가로 1965~70년 사이 미국은 모두 10억 달러 정도를 한국에 지원했으며, 한국군에 대한 최신 군사장비 지원을 위해 미국은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 한국에 지원되는 파월 장병들의 해외 근무수당을 비롯한 각종 지원금은 경제개발을 위한 소중한 자금으로 활용됐다.

1963~73년 기간 중 한일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여로 획득한 외화 총액은 한국 외화수입 총액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이르는 규모였다. 일본이 6·25를 통해 경제부흥을 했듯이 베트남전은 한국경제의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트남전 기간 중 한국이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은 100억 달러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그러나 여당은 물론 야당과 비판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용병(傭兵)” 운운하며 박정희의 베트남전 파병을 거세게 비판한다. 박정희 정부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지냈던 정구영조차 베트남 파병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강력 반대했다.

“월남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호지명의 월맹과 총칼을 맞대야 하는 더러운 전쟁에 나가 피를 팔아가며 돈을 벌기보다는 차라리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요.”

박정희가 그런 반대에 귀를 기울여 파병을 포기했다면, ‘월남 특수(特需)’라는 경제적 혜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의 조언대로 한국이 자립경제를 이룩하려면 고속도로가 반드시 필요하며, 고속도로가 뚫려야 한국의 근대화는 본격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국내외의 거센 반대 무릅쓰고…

국도 1호선의 포장이 완공된 것은 포장공사를 시작한 지 무려 25년만인 1971년 12월의 일이었다.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국도 1호선조차 포장이 제대로 안 되어 있던 상황에서 2년 5개월 만에 고속도로를 닦겠다고 나선 것은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일로 치부될 정도로 무모한 도전이자 일대 모험이었다.

박정희는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돌입했다. 당시 428㎞의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429억 원으로, 1969년 정부 예산의 13%를 차지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여당과 정부 일각에서는 물론이고 야당과 대학교수, 언론이 “경부고속도로는 부자들만을 위한 길” “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는 지름길”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최고의 반대자는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하여 야당 국회의원들과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들이었다.

마치 군사작전 하듯 공사를 진행한 결과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불과 2년 5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전 구간이 완공됐다.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제일 싼 건설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우리 기술진으로 완성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박정희의 다음 승부수는 종합제철소 건설이었다. 제철산업은 인구가 1억 명이 안 되는 후진국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서구 선진국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이론이었다. 1950년대 이래 미국 원조 관계자의 한결같은 입장은 한국과 같이 산업능력이 빈약한 나라에서는 일관(一貫) 제철소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철강이 필요하면 일본에서 사다 쓰라는 것이 미국 전문가와 일본 기업인이나 정치가들의 주장이었다.

세계은행 총재였던 유진 블랙은 세계은행과 IMF 연차총회에서 “개발도상국에는 세 가지 신화가 있다. 첫째는 고속도로 건설, 둘째 종합제철소 건설, 셋째 국가원수 기념비 건립”이라면서 세계은행과 IMF에서는 이러한 사업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제적인 평가가 이처럼 부정적 비관적인데 국내 여론이 잠잠할 리 없었다.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 많은 이들이 “시기상조”라면서 제철소 건설을 적극 반대했다. 이처럼 부정적 여론이 대세를 이룰 때 박정희는 “종합제철소 하나 없는 나라는 독립국가라고 할 수 없다”면서 제철소 건설을 강행했다.

돈이 없으니 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에서 제공될 예정인 청구권자금 중 무상 및 재정 차관의 51%인 2억 5,000만 달러를 종합제철소 건설에 투입했다. 나머지 자금 중 18%는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댐 건설, 철도 시설 개량 등이 사용했다. 포항제철 덕분에 조선, 자동차, 전자 등 연관 산업이 성공할 수 있었다.

전 세계의 전문가와 국내의 지식인·학자·언론인·정치인들이 극력 반대한 고속도로와 제철소 건설에 거의 전부를 투입한 것을 보면 박정희가 어떤 유형의 지도자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거듭된 남침 도발

3선 개헌,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로 민의를 거슬러 정권을 연장하고 독재정치로 민주주의를 압살한 것이 박정희 최대의 실책으로 현재까지 극렬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복기해 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1960년대 중반, 미군과 한국군이 베트남 정글에 묶여 있는 틈을 이용하여 1965년 9월 3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게 “월남의 베트콩식 무력해방을 남한에서 실시하라”는 강요를 했다.

김일성은 1970년대를 공산통일의 시기로 정하고 도발 강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발목이 잡혀 있어 남침을 해도 한반도에서 제2의 전선을 벌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1967년에는 445건의 북한 게릴라 침투사건이 일어났고,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 게릴라 31명의 청와대 기습을 위해 침투했다. 이틀 후에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 호를 동해안에서 납치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미국 정찰기(EC-121)가 북한 공군기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3명이 사망하고 1명은 포로가 됐다. 1968년 11월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북한의 무장 게릴라 100여 명이 침투하여 이들을 소탕하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다.

1970년 6월 5일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어선단 보호임무를 수행하던 해군 방송선이 교전 끝에 침몰 직전 북한에 납치됐고, 6월 22일에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문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의 거듭된 대남 도발로 안보상황이 크게 위협받자 박정희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 국정지표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의 해’로 정하고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군사훈련 도입으로 맞섰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1969년 7월 29일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970년 7월 닉슨 행정부는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6만 2,000명의 주한미군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명을 철수시켰다. 1971년 2월 닉슨은 중국과의 수교를 발표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중공이 유엔 의석을 차지하고 타이완이 유엔에서 축출되었다.

1971년 12월 5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고, 1972년 10월 17일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10월 유신은 지금도 국민들 기억 속에 국회 해산, 비상계엄령 선포 등 살벌한 공포통치 하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의 임기를 사실상 종신으로 연장하는 등 ‘독재의 표본’ ‘민주주의 장례식’ 등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10월 유신은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10월 유신은 제3의 쿠데타

박정희는 1971년 11월 10일 오원철을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고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여 방위산업을 해결하고,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과제를 동시에 해결기로 결정했다.

당초 박정희의 계획에 의하면 1980년대 초 우리나라 수출 목표는 50억 달러였다. 그런데 50억 달러 수출로는 남북대치, 즉 경제대결에서 완전 승리를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 100억 달러 수출로 목표액을 두 배 늘렸다.

‘1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되면 우리나라의 국력이 북한을 완전 압도하게 되고, 국민들의 생활이 북한 주민보다 월등히 윤택해진다. 또 방위산업을 비롯한 모든 중화학공업이 북한을 능가해서 북한이 6·25 전쟁과 같은 도발을 못하게 된다는 철학이었다. 즉 중화학공업 건설의 성공 여부로 남북문제가 결판 나는 것이니, 박정희는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른다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100억 달러 수출’ 목표가 설정됐고, 목표 달성을 위해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 즉 중화학공업화 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자면 국가 원수가 직접 나서서 상황파악과 분석을 하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즉각 수정·보완·지원을 하는 등 중단 없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즉, 후진국 경제개발에 있어서는 국가원수의 역할이 선진국에 비해 질과 강도를 달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10년 이상의 세월과 10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설비와 고가의 장비가 투입되는 자본집약형 장치산업이 중화학공업이다. 경험과 능력, 자본력이 일천한 우리 기업들은 이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현저히 부족했다.

반면에 박정희의 대통령 임기는 1975년 6월로, 중화학공업을 건설하다 말고 퇴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라는 비상한 정치 수단을 동원했다. 따라서 10월 유신은 5·16, 한일 수교에 이은 제3의 쿠데타인 셈이다.

10월 유신으로 임기에 구애받지 않게 된 박정희는 청와대에 ‘중화학공업화추진 기획단’을 설치하고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1973년 6월 박정희는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석유화학 공업을 6대 전략 업종으로 선정했다. 6대 분야에 8년 간 88억 달러를 투입하여 1981년까지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로 높이고, 1인당 소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박정희, 10월 유신을 ‘혁명’으로 정의

정부의 과감한 지원정책에 힘입어 대기업들은 조선소, 석유화학 공장, 자동차 공장, 전기·전자 공장 등을 설립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여 세계적인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제조업은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를 추구했다. 이처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재벌이라는 이름의 대기업 집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덕분에 1973~78년 기간 중 경제는 연평균 11%, 제조업은 연평균 16.6%라는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제조업에서 중화학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도 1972년의 40%에서 1979년 55%로 크게 높아졌다.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971년 13.7%에서 1979년 37.7%로 크게 높아졌다.

박정희는 거의 매일 국방 관계자와 대책회의를 가졌고, 방위산업 육성을 독려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단 시일 내에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국가 총력전 체제가 불가피했다. 이를 위한 불가피한 시스템이 유신체제라는 것이 박정희의 논리였다.

박정희는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하면서 “10월 유신은 5·16과 그 기조를 같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스스로 10월 유신을 ‘혁명’으로 정의한 것이다.

김형아도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10월 유신을 통해 임기에 구애받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국가 총동원체제로 추진하지 않았다면 과연 중화학공업 건설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중화학공업화의 산 증인인 오원철은 중화학공업화와 10월 유신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과 유신개혁을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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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 : 혁명가와 정치가의 차이

-박정희의 쿠데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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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여 북한 지도자 김일성과 맞섰을 때 남북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2달러 대 320달러로 북한이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러나 “철(鐵)은 곧 국가”라는 슬로건 아래 국가 재건과 총력안보라는 박정희의 ‘돌격적 근대화’ 노선이 본격 시동되면서 남북의 1인당 GNP는 1970년에 역전됐다.

통계청이 2015년 12월 15일 발표한 『2015년 북한의 주요통계지표』에 의하면 북한의 명목 GNI(국민총소득·2014년 기준)는 34조 2360억 원으로 남한(1496조 6000억 원)의 44분의 1 수준, 1인당 GNI는 남한이 2968만 원, 북한은 139만 원에 불과해 21배 차이가 난다. 이밖에 다른 종목의 남북한 격차는 다음과 같다.

▲무역총액 : 북한 76억 달러로, 남한(1조982억 달러)의 144분의 1

▲시멘트 생산량 : 북한 667만 5,000톤으로, 남한(4,704만 8,000톤)의 7분의 1

▲발전설비용량 : 북한 725만 3,000kW로 남한(9,321만 6,000kW)의 13분의 1

▲쌀 생산량 : 북한 215만 6,000톤으로 남한(424만 1,000톤)의 절반 정도

▲도로 총연장 : 북한 2만 6164㎞로 남한(10만 5673㎞)의 4분의 1

▲선박 보유톤수 : 북한 71만 톤, 남한은 1392만 톤

한국은 경제적인 면에서만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나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포린 폴리시가 전 세계 177개국을 대상으로 산정한 ‘실패국가 지수’를 보면, 한국은 2010년 153위를 기록했다. 이는 25번째로 안정적인 나라라는 의미다. 이집트는 49위, 필리핀은 51위, 터키는 89위, 브라질은 119위, 아르헨티나는 148위를 기록했다.

이코노미스트가 2006년부터 발표해 온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2010년)의 성적도 놀랍다. 한국은 20위로 ‘완전한 민주국가’로 분류됐는데, 이는 일본(22위), 벨기에(23위), 이탈리아(29위), 프랑스(31위)를 앞서는 순위였다. 브라질은 47위, 아르헨티나는 51위, 필리핀은 74위, 터키는 89위, 이집트는 138위를 기록했다.

세계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1965~1980년 사이에 평균 9.9% 성장했고 국민총생산은 27배, 1인당 소득은 19배, 수출은 275배 성장했다. 특이한 것은 이처럼 격렬한 성장 과정에서 선진국이나 국제 원조기구, 국제 금융기관 등의 정책제언이나 압력도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히 사절했다는 점이다.

최중경(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은 기적이기 이전에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한국은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국제기구가 앞장서 설파한 경제발전 공식을 그대로 구사하지 않고, 자기 몸에 맞는 제도를 직접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소개한다.

“한국은 수입대체전략 대신 수출드라이브 전략을, 일시적 전면개방과 규제철폐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대신 점진적인 개방과 규제의 단계적 완화를 선택했다. 서구의 전문가들이 타당성이 없다고 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설립, 중화학공업 진입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또 서구식 민주주의의 조기 도입보다는 개발독재(development dictatorship)를 통한 자원동원과 배분의 효율 극대화를 먼저 추구했다. 서구의 조언을 받아들였던 남미의 여러 나라들으니 외환위기가 반복되는 큰 홍역을 치렀고, 우리보다 좋은 조건에서 출발한 동남아 국가들도 더딘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거꾸로 한 한국이 오히려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식대로 해서 성공

한국의 경제발전은 결코 서구 제국의 온정어린 원조와 조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서구 제국의 충고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 오원철에게 “미국의 경제학자라는 자들이 후진국의 실정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하니 우리는 우리 식대로 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국제 원조기구와 선진국 전문가들의 충고대로 움직였다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의 발전이 가능했을까? 국내의 정치가, 학자, 대학교수, 언론인들의 주장대로 한일 수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을 포기하고 농업을 통한 근대화의 길을 택했다면 한국은 지금도 아시아의 빈곤국 대열에서도 후미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이란 책을 쓴 미국 랜드 연구소의 윌리엄 오버홀트는 덩샤오핑(鄧小平)이 박정희 모델을 모방했다고 평가했다. 최근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경제발전을 하고 있는 이유는 개방에 신중을 기하고, 새마을운동을 따라 하고, 국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는 등 한국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접근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이 전개되고 있는 분단국가에서 미흡한 국가안보체계와, 갈 길이 먼 경제적 자립이란 측면에서 볼 때 박정희의 집권 기간은 이승만 시대 이래 계속된 국가건설(nation building) 시기였다.

나는 이승만 시대 12년과 박정희 시대 18년을 합쳐 ‘기적의 30년’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으며, 국가 근대화의 기틀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1962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55세였는데 1982년에 67세로 늘어났다. 경제개발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평균수명이 12세나 연장된 것은 이제 먹고 살만한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다른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언론인 최석채는 생전에 박정희에 대해 이런 평을 한 바 있다.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키고 초법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혁명가에게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혁명가를 정치가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리다.”

박정희는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李光耀)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처럼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고 보았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시행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온 것이 아니다. 그는 빈곤퇴치와 사회개조, 조국 근대화, 즉 전 국민의 ‘밥’을 먹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을 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세 차례에 걸친 다단계 쿠데타를 통해 산업화의 기틀을 완성했고, 그 결과 한국은 비로소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일부 제한했고, 거친 국가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권이 일부 희생되기도 했고, 정치가들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는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이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시민의식의 확립이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산업화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는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누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는가?

학자 겸 정치평론가 파리드 자카리아는 한국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신생 민족국가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이 국가들이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한국이 독재로부터 자유주의 독재(liberalizing autocracy) 단계를 거쳐 민주주의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는 세 차례에 걸친 쿠데타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상당 부분 유보시키는 독재를 감행함으로써 비난의 대상이 됐지만, 산업화와 중산층의 형성을 통한 시민의식 확립을 이룸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데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종결되었는데도 정상적인 국가경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쌀 생산 4,000만 석을 돌파하여 쌀을 자급자족하는 데 성공한 것이 1977년이었다. 이 해에 박정희는 특별방송을 통해 “100% 순쌀밥을 먹어도 좋고 쌀 막걸리 제조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초근목피, 보릿고개로 상징되던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흰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각 나라가 국민소득 4,000달러에서 7,000달러 사이에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즉, 참다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하려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산업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중상층의 형성, 그리고 국민들의 민주시민 의식이 필수적이란 뜻이다.

한국에서 로버트 달이 지적한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적·산업적 기반, 그리고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된 것은 전두환 정부 말기에서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이 시기에 6·29선언을 통해 민주화로 이행한 모습을 보면 로버트 달의 지적은 설득력을 가진다.

박정희는 결코 민주주의를 잘 하기 위해 한강을 건넌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쿠데타를 통해 한국을 산업화하는 데 성공하여 역설적으로 민주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박정희는 결국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 한강을 건넌 셈이 된다. 이와 관련,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내놓는다.

“박정희 정권은 비록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지만 경제발전을 통해서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한국 다원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창출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에 크게 기여했다.”

김광동은 박정희 시대야말로 민주주의의 성장의 토대를 만든 과정이었기 때문에 박정희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기여자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광동은 ‘민주화’ 세력이 단지 집권세력을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는 경쟁적 선거가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공산주의를 주장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반민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재산을 빼앗고,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에 맞선 것이 사실은 그 시대의 민주주의이고, 민주화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를 했느니 안했느니, 독재자니 뭐니 따지는 것은 본질에서 한참 빗나간 비판이다. 그의 본질은 포풀리즘이 됐든, 뭐가 됐든 민의를 따라 인기영합적인 정치를 해야만 하는 정치가의 길이 아니가 아니라 산업화를 통해 국가의 기틀을 완전 혁신하여 전(前)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대한민국을 이행시킨 혁명가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CSP(Center for Systemic Peace)에 따르면, 1946년에서 2010년까지 전 세계에서 750회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를 연구한 학자들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발생한 쿠데타 중에서 1923년 터키에서 일어난 케말 파샤의 쿠데타,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쿠데타, 1961년 한국의 박정희 쿠데타를 세계에서 성공한 3대 쿠데타로 꼽는다. 그런데 케말 파샤와 나세르는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정을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산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5·16은 국가개조에 성공하고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차원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쿠데타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오늘 세미나의 주제가 ‘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이다. 만약 박정희였다면 성장 동력이 고갈되고, 국론은 분열되고, 중국이 부상하여 한국의 경쟁력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중산층이 붕괴되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정치권은 포퓰리즘적 정책만 남발하면서 자신의 당선, 집권에만 눈이 먼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첫째, 그는 인기에 연연하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한 순간 국민을 현혹시켜 정권연장에 급급해 하는 정치, 민심 운운하며 저들의 표를 위해 성장 동력을 망쳐먹는 따위의 정치를 경멸했을 것이다. 당당하게 국민에게 “내 힘으로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을 돕지는 않겠다.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에 한해 국가가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둘째, 허리띠 졸라매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하고 그곳을 향해 자신이 함께 뛰면서 희망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국민이 반대한다고 해서 당장 필요한 개혁을 내일로 미루고, 남의 탓이나 하면서 허송세월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셋째, 적어도 내 나라는 내가 지키고, 체제 도전세력과 북한으로부터의 위협 공갈 따위는 씨도 먹히지 않는 국방의 나라를 만들었을 것이다. 북한의 침략을 받으면 당당하게 보복하는 나라, 미국과 중국과 일본에게 할 말은 하면서 협조 받을 것은 협조 받는 나라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넷째, 오늘보다는 더 잘 사는 내일을 만들고자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중장기 플랜과 단기 계획을 세워 자원을 배분하고 모든 인재를 동원하며, 전 국민의 동참을 유도하고, 시스템적 행정을 통해 국가목표를 반드시 달성해냈을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를 해낼 정치가는 과연 있는가?

 

 

<제3 발제문>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킨다: 박정희 시대의 부국강병책”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제 1 장 서론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논쟁적인 인물은 없다. 박정희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 사악한 독재자로 폄하하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박정희는 과(過)보다 공(功)이 많았음을 인정하는 것이 최근의 대세다. 박정희는 물론 독재자였고 박정희의 독재를 찬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재는 ‘수단적’ 인 것이었고 비록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는 원하던 목적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 최하위급의 극빈 국가를 선진국 문턱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쌓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생존할 수 있는 국가안보의 기반을 쌓는데 성공했다.

우리 국민들 모두는 제퍼슨 같은 민주주의적 지도자만이 이 나라를 지배했어야 이 나라가 올바른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승만이 세우고 박정희가 키운 대한민국에 대해 불만이 많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의 초기 역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불의가 승리한 역사’ 라며 매도당한다. 필자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박정희가 암살당하던 날 과 그 직후 며칠 동안, 현역 육군 대위였지만,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와 역사적 인물은 개인의 감정과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정치가는 모두 민주주의의 화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다. 아무리 보아도 민주주의의 화신일 수 없는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도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저명한 정치학자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민주주의는 산업화의 산물” 이라는 놀랍지만 진리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 대학을 졸업했지만 노점상을 해야 연명할 수 있는 튀니지 청년의 분신자살이 도화선이 되어 야기된 민주화 열기(재스민 혁명, 중동의 봄) 가 결국 시들어 버리고 만 이유는 그들의 나라가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가난하다는 현실적인 벽 때문이었다. 가난한 나라 중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인도를 민주주의라 하지만 인간의 계급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국민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박정희는 물론 립셋 교수의 논문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먹고사는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정치의 ‘우선순위’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적인 상황아래서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안보’가 먼저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국(富國)을 먼저 이야기하고 다음에 강병(强兵)을 이야기 했다. 북한이 국가안보를 위해 저러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박정희의 독재는 용서할 수 없다며 벼르는 모습은 한국 진보세력의 애석한 한계다.

본 논문은 박정희의 여러 가지 업적 중에서 국가안보와 외교정책을 다룬다. 박정희의 정치 철학이 부국을 통한 강병, 즉 경제발전을 통한 국가안보태세 확립이었기에 그의 외교안보 정책을 그의 경제정책과 분리시킨다는 것은 오로지 학문적 편의주의라는 측면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박정희가 만약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현재의 심각한 안보 환경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 해 보고자 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는 선현으로부터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집권 18년은 문자 그대로 국내외적으로 격변의 시대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 월남전쟁, 닉슨 독트린, 미소 데탕트, 미중 외교 재개,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 김일성의 대남 게릴라 전쟁, 월남의 패망 및 공산화는 박정희 정권이 헤쳐 나가야했던 엄청난 대내외적 파도 들 이었다. 특히 국제정치의 격변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기 때문에 국제정세의 변동에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게는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는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박정희는 이 같은 난관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한 1961년의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못살고, 필리핀과는 상대도 안 되었던 나라였다. 박정희가 암살당하던 1979년 10월26일 한국은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을 압도했고 자신의 돈으로 국방예산을 책정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군사 및 경제 어느 면에서 보아도 승리했다.

본 논문은 박정희가 집권 한 이후 어떻게 국내외적 안보 도전을 극복 해 나갔는가에 관한 이야기이자 평가다. 보다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박정희 시대의 국가안보정책을 국제정치적 변수들을 동원해서 설명하고 평가 하려는 시도다. 최근 한국사회의 이념적 혼란과 경제적 정체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고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점차 그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본 필자는 박정희의 행동들이 자의적(恣意的)인 것 이었는가? 혹은 대의(大義)를 위한 피 할 수 없는 일 이었는가? 혹은 적어도 국제정치적인 변수들을 고려 할 때 정당화 될 수 있는 일이었는가? 등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지도자의 업적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그 지도자가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에 기여한 결과를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증진, 인권의 보장 등 추상적 혹은 절차적인 측면이 고려 될 수 있겠지만,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개념들과 갈등을 벌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권, 민주주의가 모두 보장 된 상태에서 급속한 경제 성장과 국가안보를 성취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은 보장 되었지만 경제성장과 국가안보가 확립되지 않아 국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지속하고 생명과 재산이 불안에 떨게 된다면 그런 정권은 어떻게 평가 되어야 할까?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행했던 각종 국가안보 및 외교 정책들이 가장 최선의 정책이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객관적, 표준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시대를 평가하는 경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평가하는 기준도 같을 수 없다. 심지어 같은 분석자가 같은 인물을 평가하는 경우라도 시대에 따라, 그리고 새로운 자료가 나타남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박 정권의 정책들에 대단한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서 시간이 지난 후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을 것이며 그 역의 경우도 가능하다.

결국 한 정부(정권)의 정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제반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 국가(사회)의 정책을 평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개발해 내었다. 박정희 정권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을 평가하기 위한 분석 틀로서 필자는 기왕에 개발 된 비교 국방정책론의 방법을 차용하고자 한다.

박정희 시대의 외교 국방정책 평가 방법

본 연구에서 필자는 더글러스 뮤레이와 폴 비요티 등에 의해 제시된 비교 국방정책 연구 방법을 차용하고자 한다. 이 두 학자는 비교 국방정책론은 비교 정치학의 일반적인 연구들과는 달리 ‘안보의 딜레마’ (security dilemma)로 특징되는 국제정치 상황을 가장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보의 딜레마란 어떤 나라가 진정 ‘방위’를 위해서 행하는 노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게는 ‘위협’을 가하는 행동으로 인식 될 수밖에 없다는 국제 정치의 일반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또한 어떤 국가들이라 할지라도 그 나라의 국방과 안보는 상대방 국가들의 정책(즉 국제환경)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약소국은 물론, 강대국들조차 그 나라의 국방 정책은 국제환경 혹은 국제 체제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상황이 별로 개선된 바는 없지만 한국의 국제적 안보 환경은 박정희 시대의 경우 특히 열악했다. 우선 당시 한국의 국력은 지금보다 상대적, 절대적으로 훨씬 취약했다. 그리고 주변 국제 환경의 변화의 폭과 속도가 빨랐다.

박정희 집권 초기인 1960년대는 대외적으로는 월남 전쟁의 격화, 대내적으로는 북한의 본격적인 도발로 안보환경을 특징지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한반도내에서 북한의 도발로 인한 게릴라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69년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 아시아의 방위책임은 일차적으로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 담당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내우 외환적인 상황이었다.

박정희 집권 후반부인 1970년대는 미중관계의 급격한 변동, 월남의 적화와이에 고무된 북한의 적극적인 대남 전략, 이와 거의 동시에 진행된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전면 철수 정책 등으로 인해 박정희의 한국이 당면했던 안보 상황은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雪上加霜) 이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한국 전쟁을 직접 치른 이승만을 제외한다면 안보 환경이 가장 부정적인 측면에서 요동(搖動)하고 있던 시대가 박정희 시대였다.

서방 학자들 특히 미국 및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의 국방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국방정책이 이루어지는 과정(Defense Decision Making Process)에도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어느 정권이라 할지라도 국방정책이 민주적인 절치를 거쳐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치 상황에 대처하는데도 급급한 형편이었고, 특히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의 자문을 통해 스스로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 연구는 박정희 정권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을 분석하기 위해 당시 급변하고 있었던 국제안보 상황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국제안보 환경을 기술(記述, describe)하고, 박정희 정권이 이 같은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한 것인지(proper adoption)를 기준으로 해서 분석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이슈들로 목차를 구성하고자 한다.

박정희 시대의 국제 안보 환경(International Security Environment)

외교 및 안보 정책이란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적응(adapt)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박정희 정권 18년 5개월 10일은 국제 안보적으로 위기(Crisis)의 연속이었던 시대였다. 박정희는 이 위기 상황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 했는가? 박정희의 대책들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었으며 올바른 대처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인가?

박정희 정권의 국가목표: 국가 전략과 군사전략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역대 정권 중에서 가장 분명한 목표와 슬로건이 존재했던 시대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박정희 정권을 살았던 우리나라 어떤 국민도 그 시절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정치철학과 이에 연유하는 안보관은 무엇이었던가? 박정희의 군사전략은 어떤 것이었으며, 박정희 시대의 한국의 능력은 어느 수준이었는가? 박정희가 제시했던 전략 목표들은 당시 한국의 능력과 비교할 때 적절한 것이었던가? 박정희가 제시한 국가 목표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혹은 한국의 다른 대통령들과 비교해서 어떻게 다르며 혹은 어떻게 비슷한가? 박정희 정권은 자신이 제시한 국가 안보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 했는가? 그러기 위해서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는가?

박정희 정권과 북한

박정희 정권의 외교 및 안보 정책의 대상은 역시 북한이었다. 박정희는 그 개인적인 목표를 김일성을 제압하는데 두었다. 그는 늘 북한과의 대결, 대한민국의 승리를 말했다.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 당시 북한은 거의 모든 주요 국력 지표에서 한국을 앞서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존재했던 기간 남북한의 안보 및 경제 능력 변화 상황을 비교함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공과(功過)를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2 장 박정희 시대 한국의 국제 안보 환경 (1961.5.16.-1979.10.26.)

박정희 정권은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정권이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가 수립 된 이후 현재 까지 총 67년 10개월 (814개월) 중, 박정희 시대는 27.2%에 해당 되는 221 1/3개월 이었다. 가장 오랜 기간 대통령 직을 수행했고, 또한 외교 및 국방에 관한 국제적인 상황 변화도 가장 격심했던 시대였다. 미소 냉전이 정점에 도달했던 시절, 냉전의 최첨단 전선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의 지도자였던 박정희는 무엇보다도 ‘안보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편의상 박정희 정권의 국제안보 환경을 1960년대와 1970년대로 나누어 설명해 보기로 한다.

1960년대 한국의 국제 안보 환경

미소 냉전의 격화

박정희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 할 1961년 5월 당시 국제체제의 모습은 모톤 카플란(Morton Kaplan) 교수가 정의한 바대로 ‘첨예한 냉전체제’(Tight Bipolar System)였다. 미국과 소련 진영에 포함된 모든 나라들은 각각 자기 진영을 주도하는 미국과 소련의 정책을 적극 추종했다. 진영 내부 국가들 사이에는 적극적인 우호 관계, 다른 진영에 있는 국가들은 모두 적대국으로 인식하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한국의 안보 정책을 규정하는 것은 미국의 안보 정책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은 1953년 한미동맹 체결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안보체제의 최첨단 지역에 최정예 멤버로 참여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1961년 5월, 국제정치 환경은 냉전이 더욱 악화 되고 있는 중 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은 제 3세계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으로 급격하게 확대, 심화되고 있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야기되는 모든 대결의 배후에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초강대국이 있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있기 4개월 전인 1961년 1월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케네디는 소련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구체화 시키고 있었다. 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중인 1960년 봄에 미국 정찰기 U-2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된 이후, 미소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소련은 미국과 다투는 한편 소위 제 3세계의 ‘민족 해방운동’ 후원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소련과의 갈등이 장기화 될 것을 인식한 케네디 대통령은 ‘유연 반응 전략’(Flexible Response Strategy)을 새로운 국방전략으로 채택하였다. 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의 도발에 대해서 미국은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으로 대응하겠다던 전략을 대폭 수정한 것이었다. 대량보복 전략이란 한국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미국이 앞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는 도발이 제 3세계든 어느 지역에서든 또 다시 발생할 경우, 미국은 미국이 선택한 지역에서, 미국이 선택한 방법으로(즉 핵무기를 동원하여) 대량 보복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의 핵전쟁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좌파 게릴라 전쟁을 계속 지원하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게릴라 전쟁에는 게릴라 전쟁으로 대응한다는 새로운 전략 개념을 발전 시켰는데 이는 미국은 소련이 후원하는 모든 종류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게릴라전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특수 부대인 그린베레(Green Beret)의 공식 창설을 지시했고, 점차 확전되고 있는 베트남의 게릴라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60년대 초반의 이 같은 국제정치 상황은 한반도에 불리하게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즉 소련이 보다 적극적으로 게릴라 전쟁 방식인 ‘민족해방전쟁’을 지원한다는 사실은 정규전에서 실패한 북한이 그동안 줄기차게 시도한 대남 전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의 간접 침투 및 게릴라성 공격 작전에 시달리던 한국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더욱 절실해 지는 시기였지만 미국의 관심은 보다 다급해 보이는 월남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월남으로 집중 될 경우 미국의 한국 지원은 당연히 약화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한국 안보에 관한 미국의 사활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비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미국과의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떤 일보다 급선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혁명 공약 속에 ‘반공을 국시의 제 1 의로 한다. 와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내용을 분명히 밝혔다. 비록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안보 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밝힌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위반한 한국의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미국 조야의 분위기를 바꾸게 만든 요인이었다.

쿠데타 발발 며칠 후, 미 국무부 체스터 볼즈 차관은 하원 외교위원회의 비밀증언에서 “대체로 한국에서의 정권이동은 그것의 합법 여부를 막론하고 미국에 대해 상극하는 정체로서의 변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의 군부 지도자들은 철저한 반공 투사이며 친미적이다” 고 언급 했다. 민주주의적 가치 제고와 반공전선 강화 등 두 가지를 모두 원했던 미국이지만 현실적으로 더욱 우선순위가 높은 것은 대소(對蘇) 반공 전선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군사 정부는 냉전체제의 한 진영을 주도하는 미국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며 미국의 지지를 득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강조했던 것이다.

한일관계 정상화 문제

1960년대는 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국제정치 상황은 비교적 단순했다. 첨예한 냉전 체제(Tight Bipolar System) 아래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미국 혹은 소련 진영 중 한편에 가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같은 진영 국가들 사이에서는 긴밀한 협력(Intra Bloc Cohesion) 그리고 다른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과는 첨예한 대립(Inter Bloc Hostility)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이 별 적대감도 없는 폴란드를 적으로 간주, 대적하고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이란을 같은 미국 진영에 포함되어 있다고 무조건 우방으로 대하던 것이 당시 국제정치의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냉전의 첨단 지역에 놓인 한국은 냉전 진영의 맹주인 미국과의 관계를 여하히 잘 유지할 수 있느냐가 외교 및 안보 정책의 관건이었다.

냉전 시대 국제정치의 규율 중 하나였던 진영 내부의 결속(Intra Bloc Cohesion)은 사실 당시 한국 외교가 처한 고뇌의 하나였다. 일본은 분명히 미국을 매개로 해서 한국과 같은 진영에 소속된 나라였다. 외교의 신이라는 이승만 대통령도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냉전이 첨예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과 일본이라는 미국의 주요 동맹국 두 나라가 화합(cohesion)을 유지하지 못한 채 갈등을 지속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소련과 냉전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보기에는 주요한 전선 중 하나에 심각한 균열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한‧일 국교 정상화는 박정희 정권이 당면한 최대의 안보 외교 현안이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한국 사람들의 국제정치에 대한 감정적 접근 방법은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문제를 민주주의적 방식만으로는 돌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국가안보라는 더 우위에 있는 목적을 위해 한‧일국교 정상화를 비민주주적 수단을 동원해서 밀어붙였다. 박정희 정권이 한‧일 협정을 밀어 부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군사안보 및 전략적인 이유는 일본을 적대적으로 놓아 둔 채 한반도의 안보 게임에서 한국이 승리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한‧일 협정 타결은 6.25 전쟁 당시 그 전략적 역할을 만족스럽게 수행 했던 일본을 한국에 우호적인 후방 전략 기지로 확실하게 묶어두는 효과가 있었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어떤 정부라도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될 숙제였지만 국민정서상 정권의 안위를 걸지 않고는 밀어붙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박정희 정권만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라도 해야 할 일을 단행 할 수 있는 정권이었을 것이다. 정권보다는 나라의 안위가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월남전쟁의 확전

60년대 박정희 정권이 당면했던 또 다른 국제적 인보 도전은 확전일로에 놓인 월남 전쟁 이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미국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대통령 역시 강력한 반공주의자로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에 대해 강경정책을 추구했다. 특히 1964년 중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후 미국은 중국의 공산주의가 베트남 및 동남아시아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고 이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더욱 확대시켰다. 미국의 관심이 베트남에 집중된다는 사실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박정희는 이미 케네디를 방문했던 1961년 11월, 월남에 한국군의 파병을 제의한 적이 있었고 미국은 1963년 여름, 한국정부에게 월남에 의료 지원단의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월남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의 군사개입 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은 월남에 고문관을 파견하기 시작했고 1964년 말에 그 숫자가 23,0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보다 많은 우방국의 지원을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대단히 중요했다. 1964년 5월 존슨 행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 25개국에 월남 전쟁에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미 파병을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가까운 장래에 전투병의 파병이 현실로 닥쳐올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월남전 파병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주한미군 감축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북한의 게릴라 준동

1960년대 말엽 박정희 정권이 당면한 가장 위협적인 안보 불안은 북한의 준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한국 전쟁이라는 정규전쟁에서 실패한 북한은 이번에는 월남에서 야기되는 방식의 게릴라 전쟁을 통해 한국을 전복하고자 시도했다. 결국 1968년 1월 21일 특수훈련을 받은 31 명의 북한 무장 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 한복판까지 침투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2일 뒤인 23일 오후 원산 앞바다에서 정보활동을 벌이던 미 해군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는 북한에 대한 군사 보복을 생각했지만 월남 사정이 악화일로에 있던 당시 미국은 오히려 박정희를 자제 시키려 했다. 박정희는 푸에블로 호 사건을 1.21 사태 등과 연계시키려 했지만 미국은 은밀히 단독으로 북한과 협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출된 한-미간 인식 차는 박정희로 하여금 자주국방에의 의지를 더욱 확실하게 다지게 했다. 1968년 11월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약 60명의 무장공비가 또 다시 침투하는 등 북한은 월남의 사태에 고무되어 한국에서도 게릴라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기 시작했다. 바로 같은 시기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닉슨 후보가 당선되었다.

닉슨 독트린

미국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은 반공 투사이며, 미국의 월남전 참전을 적극 지지했던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 된 후에는 월남전의 조속한 종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공화당 정부는 대체적으로 보아 민주당 정부보다 국제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고립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선호한다. 닉슨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1969년 닉슨 대통령은 구암(Guam)섬 부근에 정착중인 항공모함 호넷트 호에서 달에 최초로 착륙한 후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인을 맞이했다. 닉슨과 미국으로서는 우쭐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완전히 제쳤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주인이 귀환한 다음날, 1969년 7월 25일, 닉슨 대통령은 괌(Guam) 섬의 장교 클럽에서 비공식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한 기자가 베트남처럼 곤경에 빠진 아시아 동맹국이 있으면 미국은 어떠한 지원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닉슨은 기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다. 닉슨은 분명한 어조로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의존하여 우리가 지금 베트남에서 겪고 있는 그런 전쟁에 우리가 또 다시 휘말리게 되는 그러한 정책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입니다” 고 대답했다. 괌 독트린 혹은 닉슨 독트린이라고 불리게 된 닉슨의 대 아시아 정책이 천명되었던 것이다.

닉슨은 앞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은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미군은 월남에서도 점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주한미군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와 더불어 자주 국방을 최우선의 시급한 정책 과제로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주한 미군마저 철수가 가시화 되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닉슨에게 한미정상 회담의 개최를 요구, 1969년 8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과 회동했다. 당시 박정희는 주한 미군의 증강보다 한국의 전투력 강화를 요구했고,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및 방위산업의 육성 지원을 요구했다.

1970년대 한국의 안보 환경

데탕트와 한반도

1960년대의 국제정치를 경직된 양극 체제라고 말한다면 1970년대의 국제체제는 경직된 양극 체제에 해빙의 무드가 감돌기 시작한 시대였다. 데탕트라는 말로 표현되는 1970년대의 국제정치 체제는 한국과 같이 국제 구조의 하위에 있는 국가들은 대단히 적응하기 어려운 왜곡된 안보 구조를 생성시키게 된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은 완화되었는데 반해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던 남북한 관계는 전혀 완화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강대국 간의 화해는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기존에 택하고 있었던 대결적 정책을 그대로 지속 할 수도 혹은 수정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을 창출하기 마련이다. 데탕트의 상황은 미국이 더 이상 한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미국에 대한 소련의 공격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게 했다. 한국의 방위를 담당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이완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산권과의 긴장완화로 미국은 아시아의 방위는 우선적으로 아시아 당사국이 담당할 것을 주문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주 국방의 능력을 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이 공격할 경우, 효과적인 미국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게 된 박정희 정권은 과거와 다른 모종의 안보 조치를 강구할 수 없는 상황에 당면했다.

주한 미군의 감축

닉슨 독트린은 주한미군 철수라는 실질적인 정책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한국 주둔 미군 2 만 명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1970년 7월 6일 윌리암 포터 주한 미국 대사는 주한 미군 1개 보병사단 2만 명을 철수한다는 미국 정부의 결정을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박정희는 충분한 사전 협의 없는 미군 감축 결정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박정희는 한반도 위기가 해소 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한 미군 철수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측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향후 5년간 15억 달러의 군사 원조와 F-4 팬텀기 1개 전술 비행단을 한국에 배치한다고 약속했지만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 모든 나라에 공평하게 적용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은 자주 국방 이외에는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급격히 빠져 들고 있다고 느꼈다.

미국의 중국 승인

1970년대 한반도 안보에 결정적 충격을 가져다 준 요인은 미국이 중국을 승인한 일이었다. 키신저의 대전략에 입각해서 계획된 중국과 미국의 국교 재개는 한국에게는 국제정치 인식의 패러다임조차 변동시키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한국은 그동안 중국을 ‘중공 오랑캐’ 라고 하며 대적(大敵)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동맹국인 미국이 중국을 외교의 파트너로 인정했던 것이다. 일본도 이를 닉슨 쇼크라고 받아 들였고, 북한도 중국이 미 제국주의와 수교 했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남한이나 북한이나 이 같은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대내적 체제 강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양 진영에 소속되어 두 세력이 벌이던 이데올로기 및 권력 갈등의 최첨단에 놓여 있던 한국과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수교를 황당한 마음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당시 생성된 남한의 유신체제와 북한의 강성 사회주의 헌법 개정 등은 이 같은 충격적인 국제상황 변화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라고 본다.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전면 철수론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나게 되고, 포드 부통령이 짧은 기간 대통령으로 재임한 후, 1976년에 행해진 대통령 선거전에서 ‘주한미군 전면 철수’를 자신의 외교정책 안으로 제시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당선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주한 미군을 철수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였다. 전략적인 이유가 아니라 도덕적 이유를 군사정책의 근거로서 적용하려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중 하나인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카터의 철군 정책이 한반도에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핵 개발 계획도 이와 맞물리는 사건이다. 박정희의 핵개발 계획은 미국의 군사정책에 대한 반동적 동기를 가진 것이라고 분석될 수 있는 것이다. 방한 시 박정희로부터 자신의 철군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당한 카터는 불처럼 분노했다. 박정희는 막판에 ‘갈테면 가라’ 라는 배짱으로 접근했고 결국 미국의 군부와 정치 시스템은 카터의 철군 정책을 차단했다.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박정희 정권이 지속되는 18년 동안은 국제정치에서 한국의 안보와 관련해서 충격적인 사건이 지속적 그것도 설상가상의 형식으로 야기되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원조가 없이 국가를 전혀 이끌어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미국 대외정책의 변동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안보와 경제발전 두 가지 사이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딜레마 때문에 고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3 장. 박정희 정권의 국가목표: 부국강병(富國强兵)

박정희 정권은 국가목표를 구호화(口號化)했던 정권이다. 60년대와 70년대 한국은 구호의 공화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구호가 있었다. 지식인들은 이 같은 정책을 경멸했다. 그들은 이 같은 구호들을, 국민을 무시한 처사이며, 구호가 적힌 명찰을 가슴에 달고 다니던 학생들이 간판이냐며 비아냥했다. 그러나 박 정권이 제안한 구호들은 한국의 국가 전략을 아주 간단명료한 말로 표현한 것들로서 국민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구호 달성을 위한 ‘과정’에서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과’를 가지고 평가할 때 박정희 정권은 설정한 국가 목표들을 대단히 성공적으로 달성한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외교 안보 목표를 구체적인 전략과 더불어 설명해 본다.

부국강병을 위한 외교, 안보 정책

외교 정책

외교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안보를 지키고 다른 국익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한국의 경우 외교는 통일이라는 국가 목표 달성에도 기여 하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은 무엇보다도 국제정세의 변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정책을 가져야 한다. 첨예한 냉전이 서서히 데탕트로 바뀌는 즈음 박정희는 이승만의 무력 북진통일 정책을 전면 수정, “무력에 의한 국토 통일을 원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추구하며 UN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강조 한다”고 말함으로써 통일의 방법을 “평화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치 진보세력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평화통일론’은 사실은 박정희에 의해 창안된 것이다. 물론 박정희의 ‘평화’에는 ‘굴종’이라는 개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 무력수단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것만을 평화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높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는 식의 사고가 그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 이라는 과감한 언급에서 보듯, 북한의 악행에 대해 언제라도 단호한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통일 외교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은 경제 외교에도 주력했다. 박정희 시대 한국 외교는, 1960년대의 경우는 친 서방 일변도의 외자 도입과 경제개발에 치중했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비동맹 외교를 강조했고 수출주도형의 경제 외교도 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일반인들이 흔히 인식하는 것처럼 ‘경직된’ 대 북한 적대 정책을 추구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 이후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햇볕정책 혹은 대북 화해정책의 원형은 박정희가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는 1970년 광복절 축사에서 “5,000만 민족의 이익을 위해 평화적 방법으로 조국의 통일을 달성하자.”고 제의했다.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고 이는 남북관계의 전기가 되었다. 남북 대화의 공식적인 시작은 박정희에 의한 것이다. 박정희는 대화를 하면서도 국가안보를 위한 원칙을 지켰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대화는 안보를 약화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73년 박정희는 6.23 선언을 통해 외교 정책의 대 전환을 시도했다.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남북한의 UN 동시 초청과 동시 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호혜 평등의 원칙하에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와도 상호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는 그동안 고수해 왔던 북한과 수교한 나라들과는 수교하지 않는다는 소위 할슈타인 독트린을 거부하고 한국 외교의 영역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제 3세계와도 외교 관계를 전개하는 박정희의 외교 철학은 한마디로 “실리 외교,” “거품 외교의 배격,” “경제외교의 강조” 라고 평가될 수 있겠다.

국방정책

박정희 정부의 국방정책은: (1) 한미동맹의 유지 및 강화; (2) 군사 장비의 현대화; (3) 자주국방의 군사 안보 철학 제시. 등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우선 박정희는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한 노력에 각별히 노력 했다. 그의 정책은 어떤 경우라도 주한미군의 철군 또는 감축을 저지한다는 목표아래 추진되었다. 국방력 강화를 토대로 미국으로부터의 의존도를 줄여나간다는 자주국방 목표도 박정희 시대에 처음 제시된 개념이었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국력 배양의 기초아래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기반을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국방정책은 우선 북한의 대남 활동을 견제함으로서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지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박정희가 추구하던 자주 국방은 ‘독자노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미동맹에서 한국이 담당하는 비율을 올리는 것을 의미했다. 한때 노무현 정부에서 논의되었던 자주국방론이 한미 동맹을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박정희의 자주국방은 미국을 제외한 단독 국방의 의미는 아니었다. 미국에 대해 사실 불만이 많은 박정희였지만 주한미군이 가지고 있는 ‘전쟁 억제 기능’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예로서 1964년도 박정희 정부의 국방기본시책의 첫 번째 항목은 ‘자유우방 특히 미국과의 군사적 유대에 의한 집단 안전보장체제의 강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월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한 것도 박 정권이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맥락에서 단행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미군이 월남 파견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았다. 미군이 한국군을 작전 통제할 경우 한국군은 캄보디아 국경 등 취약지구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았고, 이 경우 예상되는 많은 전투손실과, 또한 공산측이 내세우는 이른 바 한국군은 용병이라는 비판자들과 북한의 선전을 합리화하게 된다는 점을 미군이 한국군의 작전 지휘를 맡으면 안 될 근거로 제시했다. 박정희는 군사적인 측면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고 강조, 미국의 작전 지휘권을 거절하고, 국군이 월남에서 자율적으로 작전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박정희가 미국에 대해 보였던 자주적 태도는 1968년 1.21 사태와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피랍되던 상황에서도 잘 나타난다. 박정희는 미국 측이 청와대 습격 사건보다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을 더 비중 있게 생각하고 한국 측의 대북 군사보복을 억제하는데 대해 분노했다. 박정희는 이 기회를 이용,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더욱 완전히 보장하는 계기로 만들고자 했다. 박정희는 사이러스 반스(Cyrus Vance) 존슨 대통령 특사에게 한국의 안전에 대한 미국의 서면 보장을 요구했다. 박정희는 또한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도 넘겨주고 소련과 중국이 조약을 통해 북한에 보장한 것과 유사한 수준의 안전 보장을 미국이 제공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박정희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며 북한을 공격하겠다며 미국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말엽, 미국 측은 “우리 두 나라의 우호 협력 관계가 매우 만족할 만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논의해야 될 문제가 별로 없다”고 말할 정도로 한미 관계는 양호한 상황에 도달해 있었다. 이처럼 박정희는 자주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한미동맹을 돈독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국가안보를 위한 박정희의 두 번째 노력은 장비 현대화로 나타난다. 한국전쟁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은 그야말로 병력 위주의 군대였다. 1960년대까지 60만 한국군은 숫자상으로는 북한군(약 40만명 수준)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장비는 현대 전쟁을 치르기에는 형편없이 부족하고 질도 낮았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의 국방비 구성 요인은 전략 증강 투자비 2.3%, 장비유지비 2.6%에 불과한 실정이었고, 인건비는 77.2%에 이르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자주 국방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기의 국내 생산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경제개발 정책으로 내세운 중화학 공업은 군수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모체가 되었다. 물론 미군 철수를 반대하며 박정희 정부가 미국으로 얻어 낸 것도, 월남전 참전 대가로도 얻어 낸 것도 모두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라는 목표 달성에 기여했다. 한국군은 1970년대 이후, 방위 산업이라고 말 할 수 있는 무기 생산 시설을 보유하게 되었다. 장비현대화 계획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개념으로 박정희 정권이 내건 안보 구호가 ‘자주국방’이었다. 오늘도 서울 용산 소재 국방부 청사에 걸려 있는 자주 국방이라는 구호가 바로 박정희의 친필 휘호일 정도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국가의 기본 목표요 철학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미국같은 강대국조차도 다른 나라와 협력함으로서 국가안보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적어도 국방 예산은 한국의 재원으로 100% 조달하는 것을 꿈꾸었다. 박정희는 그 꿈을 1978년 처음으로 달성했다. 그해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군사비 총액을 국내 재원에 기반 한 국방예산으로 100% 충당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후대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대미 “자주파”의 면모를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카터가 도덕적 기준으로 주한미군 철군 정책을 단행하려 했을 때 박정희는 우선 호소를 통해 주한 미군의 철수를 연기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박정희는 카터의 오만에 분노했고 1977년 5월 박정희는 철군 지연을 애걸하는 대신 서종철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사고문들에게 “갈테면 가라고 해!” 라고 지시했다. 김형아 교수는 이를 “돌이켜 보면 이 위험스러울 만큼 당돌한 반응은 박정희가 미국의 안보정책, 특히 핵무기 개발과 관련 된 부분을 위반하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한국의 자체 해법을 찾겠다는 절대적 의지를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

부국(富國)이 먼저다

경제발전의 결과로서의 국가안보 추구

박정희 정권의 국가안보 정책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순서도 분명하다. 박정희는 군을 강화시키는 일과 경제발전을 지속시키는 일 사이에서 고뇌했지만 박정희가 확신을 가지고 추구 한 것은 경제 발전을 ‘통해서’ 국가안보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경제전은 전투나 정치 이전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언급하는가 하면, ‘조국과 민족의 위기가 경제에 오직 달려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진국이던 후진국이던 국가 지도자들이 국가 안보를 위한 정책을 입안할 때 군사력 건설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경제야 말로 국방보다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믿고 있었다. 이점이 박정희의 국가 안보 정책의 위대한 측면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당시, 군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국가 안보를 위해 경제의 피폐를 감수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정희는 경제력이야말로 군사력의 기본이 될 수 있다는 양자의 인과관계(因果 關係)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빈곤을 추방하는 것이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기는 유일한 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북한이 극도로 피폐해 진 것, 구소련이 결국 붕괴하고 만 것은 이 나라들이 모두 부국과 강병의 우선순위를 뒤바꾼 정책을 집행한 결과 나타난 일이다. 소련은 몰락 할 당시 인공위성과 최고 수준의 전투기, 탱크를 만들 수 있었지만 TV, 개인용 컴퓨터는 물론 일반적인 가전제품조차 만들 수 없었다. 세계 수준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북한은 기초적인 가전제품도 만들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아직도 추구하고 있는 선군 정치(先軍政治), 핵-경제 병진 정책 등은 박정희의 국가안보 철학을 뒤집어서 거꾸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강병은 부국을 초래하지 않지만 부국은 강병을 초래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안보상황이 불량한 국가의 지도자들 중에 이 같은 원칙을 이해한 지도자들은 흔치 않다. 군사 안보가 항상 위험한 상황에서도 경제 발전을 우선 한 것은 박정희 전략의 성공이었다.

반공과 자유주의라는 명확한 이념

박정희 정권이 구호로 내 걸은 국가 안보 및 외교 정책의 목표는 ‘반공’이었다. 박정희 그 자신 한 때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 된 적이 있기도 했고, 그가 쓴 글이나 말에서 ‘유물론적,’ ‘사회주의적’ 냄새가 나지 않는바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국가 지도자로서 책임을 담당하게 된 이후 반공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해 국민들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도록,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혁명 공약대로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의 제 1의로 삼았고 그의 모든 노력은 북한의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기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박정희는 오늘의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수준으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모델은 시장보다는 계획경제였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 주도의 국가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자유주의 경제발전의 핵심요소인 ‘인센티브’(incentive)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즉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박정희의 논리는 극빈국가였던 한국을 급속한 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 논리였음이 분명하다.

박정희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출간된 책 중에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정책을 분석한 책으로 박정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주식회사의 사장처럼 경영했다는 내용의 책이다.

현실주의적 국제정치관

박정희 외교 안보 정책 목표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역대 한국 정부가 명분을 앞세운 측면이 많았던데 반해 박정희의 외교 안보정책은 철저히 실용주의에 의거한 현실주의였다. 한‧일회담에 임하면서 박정희는 “무엇보다도 자금이 필요하다. 미국이 도와준다고 해도 원조를 배로 늘려줄 리도 없고 믿음도 없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는 한국이 당당히 받아낼 돈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반일감정이니 굴욕이니 하여 망가뜨리는 일은 대단한 국가의 손실이다.”고 말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적 사고에 근거한 실용주의였던 것이다.

박정희가 케네디를 만났을 때 미국이 제의하기 전에 먼저 월남에 파병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 그리고 존슨 대통령이 전투부대 파병을 요구했을 때 결국 2개 사단을 파병하게 되는 과정등도 모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의 결정이었다.

현실주의란 외교정책의 결정 기준을 국가이익에 두는 主義를 말한다. 이미 언급했지만 박정희의 월남 파병은 보다 억지력이 있는 미군을 한국에 남겨 놓는 대신 한국군이 월남전에 가서 싸워 준다는 논리로 이해되었고, 그렇게 결정 되었다. 월남 파병은 국가 안보는 물론 이거니와 한국의 외화 수입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은 월남전에서 약 10억불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1968년까지 월남에서 얻은 경제적 이익은 당시 한국의 해외 총수익의 16%, 한국 GDP의 2.8%에 이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필자는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미국에 대해 가장 자주적인 입장에 서 있던 대통령은 단연 박정희였다고 평가한다.

미국의 원조가 소비재 중심으로 되어 있어 한국을 공업국가로 만드는데 장애가 된다고 지적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논리적인 측면에서 대들었다. 카터의 도덕 외교에 대해 박정희는 현실주의로 대항했다. 주한 미군이 모두 철수하겠다면 한국은 결국 핵무기를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미국에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대통령으로서 고백하기 어려운 對美觀을 솔직히 글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는 미국을 좋아한다. 자유 민주주의 제도가 그렇고, 우리를 해방시켜준 것이 그렇고, 공침(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방위한 것이 그렇고, 경제 원조를 주어서 그렇다. 그보다도 우리가 미국을 더욱 좋아하는 까닭은, 그와 같은 은혜를 주었으면서도, 우리를 부려먹거나, 무리를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의 미국에 대한 관점은 감정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확대 지향적 국가목표

박정희의 국가전략은 공세적인 것이었다. 박정희는 과거 역사를 ‘모멸의 역사’로 인식했고 그의 궁극적인 꿈은 세계에 대해 ‘공세적’인 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중국의 한 무제(漢 武帝)가 동방을 침략하던 고조선 때부터...... 이조 500년에 이르는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만이 이어진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서 우리 역사를 비통(悲痛), 애통(哀痛)의 역사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민족중흥(民族中興)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박정희가 주도한 수출가공에서부터 중화학 공업에 이르는 발전 정책은 세계로 나가는, 세계를 지향하는 확대 지향의 국가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4장 박정희 정권의 외교 안보 역량 강화 평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던 당시인 1961년의 한국은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견되는 나라였다. 국가의 재정 자립도 혹은 안보상에서의 자주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은 나라도 아니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이 지난 1963년 발표한 회고록 「국가와 혁명과 나」의 맨 앞부분에서 한국은 개국이래 제대로 된 ‘독립’ 국가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개탄하며 당시 한국 정부의 국가예산의 52%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내일이라도 미국의 원조나 관심이 끊어진다면 우리는 무슨 대비를 강구할 것인가” 라는 박정희의 한탄은 박정희가 스스로 말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직접적인 동기였다. 이처럼 당시 한국은 경제는 물론 국가 안보를 위한 스스로의 능력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5.16 쿠데타 이전 한국의 외교 안보 능력

1950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의 국방비는 국민 총 생산의 6.1%, 정부 재정의 50.7%에 해당 할 정도로 한국 경제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고 그중 34.7%가 외국의 자금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막대한 정부 재정을 운영하면서도 지출내용은 봉급 및 급식비를 포함한 인건 유지비가 국방비의 77.2%에 달했으며, 부대유지비 17.2%, 전략 증강 투자비 2.3%, 장비유지비등 군사력의 더욱 중요한 부분은 겨우 2.6%에 불과했다. 6.25 당시 쓰다 남은 장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으며 새로운 장비의 구입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제상황이 너무나 열악했기 때문에 국방 안보는 한국 정부가 신경을 쓸 분야도 되지 못했다. 1959년 한국의 실업률은 23.4%, 1960년에는 23.7%였다. 4.19 학생 혁명 당시 실업자는 250만 이었다. 1960년 당시 전국적으로 900만 명 이상의 아동들이 정기적으로 점심을 굶을 정도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 당시 한국 정부 재정의 50% 이상, 국방예산의 72.4%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고 있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한국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었고, 스스로의 방위 능력을 확보하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오늘의 입장에서 되돌아본다면 당시 대한민국은 독립국이라고 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국군 현대화

국가 안보를 최우선의 국가 목표로 삼았고, 경제 발전을 통해 이를 달성 하려던 박정희의 노력은 1970년대가 된 후 그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국과 안보문제로 인한 갈등을 겪어오며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몸소 체득했던 박정희는 미국이 월남을 ‘포기’할 것을 눈치 채며, 방위산업을 일으켜 스스로의 힘으로 국방력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일인가를 다시 느꼈다. 1968년의 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박정희의 보복 공격을 자제시키기 위해 미국은 한국에 M-16소총 공장의 건설을 지원했다. 한국이 공식적으로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계기였다. 1968년 2월 7일 박정희는 북한의 게릴라전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에 250만 명에 이르는 향토 예비군을 창설했다.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식이 민병대 개념의 향토 예비군이었지만 역시 거센 정치적 반대를 거슬러야 했던 사안이었다. 향토예비군을 무장시키기 위해서도 한국은 방위산업을 시급히 발전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1971년 닉슨독트린에 의거 박정희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7사단이 철수했다. 그때부터 한국군은 휴전선 250Km 전체를 스스로 담당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1971년 11월 11일 20개 예비 사단을 경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 생산 체제를 즉시 조직하라는 명령을 발하였다. 1972년 미국이 중국과 수교를 단행 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안보 관련 패러다임이 바뀌어져 버린 상황에서 박정희는 스스로의 힘으로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군사력 건설사업

한국군의 현대화는 박정희 임기의 후반부인 1974년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4년 3월 15일 박정희는 최신 병기와 군 장비를 구입하고 국군을 현대화하기 위한 극비 방위프로젝트였던 율곡사업을 승인했다. 이 사업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방위성금을 모았고 그것을 사업의 재원으로 삼았다. 1975년 4월 말 월남이 패망하자 박정희 정부는 그해 7월 16일 율곡사업의 새로운 재원으로 의무적인 방위세를 도입하였다. 그 후 1년간 한국은 국가 총수입의 6%를 율곡사업에 지출했다. 박정희는 국방사업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부패에 빠질 수도 있는 유혹을 제거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했다. 결과로 판명 되었지만, 박정희의 독재는 부패한 독재는 아니었으며 일종의 ‘청렴한 독재 혹은 ‘선의의 군국주의’ 라고 말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특히 한국의 대북 독자 억지력 확보를 위한 무기체계 개발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유도탄과 핵무기 개발에 은밀하지만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75년 7월 박정희는 프랑스와 핵 처리 시설과 원자력 발전소 두 군데를 짓기 위한 차관 교섭을 체결한다. 박정희는 1970년대 중반 카터 대통령 취임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미국의 주한 미군 철군 정책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미국을 향해 핵개발이라는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핵우산이 치워진다면 한국은 스스로 핵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언급을 공개적으로 했었다. 물론 핵개발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실제로 핵을 개발 및 보유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주한 미군의 철수를 어떻게 해서든 막아 보려는 전략, 전술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은 박정희의 태도에 당황했고, 당시 포드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함과 더불어 미국은 핵 확산 금지조약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미국은 프랑스를 압박, 한국에 대한 핵재처리 시설을 팔지 못하게 했다.

한‧미 양국이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 때문에 신경전을 한창 벌이고 있던 중인 1978년, 한국은 미사일 발사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세계 7번째로 유도탄을 생산한 나라가 된 것이다. 핵폭탄과 미사일은 마치 바늘과 실과 같은 관계다. 이에 카터의 불안은 더욱 고조되었다. 사실 카터의 도덕주의적인 철군 정책은 박정희를 분노하게 했고, 박정희의 행동은 오히려 미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카터의 철군 정책으로 한‧미 관계는 사상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승자는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1979년 카터와 만났을 때 거의 할 수 없는 막말수준의 말을 했다. 카터는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미군 기지로 향하는 무례를 저질렀고 박정희도 역시 같은 수준의 무례로 카터에 대응 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과거 수많은 정상 회담에 참석해 보았지만 카터와 박정희가 그날 아침에 한 것처럼 지도자들이 무지막지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결국 ‘좌절’한 것은 카터였다. 카터는 주한 미군 철군 계획을 번복했고 번복하는 근거로 그 당시까지 40만 명 선이라고 알려졌던 북한군의 병력 숫자가 실제로는 70만이 넘는 것이었다며 북한군사력 자료를 대폭 수정해서 발표했다.

박정희는 카터와 만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은 박정희 이후 새로 들어선 전두환 정권과 타협하여 한국의 핵개발 계획의 뿌리를 뽑아 놓는다. 박정희는 국가안보를 위해 미국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지만 미국의 정책이 한국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주국방 노력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렇지만 박정희의 실제 계획은 핵 혹은 미사일로 중무장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을 설득하는 수단으로서 이용한 것이었다.

북한과의 안보 경쟁에서 승리한 박정희

‘화살이던 총이던 갖고 덤벼라’라는 말은 박정희 정권이 종반에 이른 1978년-1979년 무렵 박정희가 자주 사용했던 말이다. 김일성의 공격을 능히 막아 낼 수 있는 자신이 있었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8년여의 집권기간 동안 북한보다 훨씬 약했던 한국을 북한보다 훨씬 강한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박정희 체제가 독재정치, 인권 유린을 자행했기 때문에 그 공이 희석되고 있지만, 박정희가 대적한 북한은 세계 최악의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였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박정희의 통치를 비난하기 어렵다. 아무튼 박정희는 경제의 싸움, 안보의 싸움에서 북한을 꺾었다.

북한과의 외교 안보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박정희가 목표로 내세운 국가안보, 외교의 목표가 일단 성공적으로 달성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박정희는 궁극적으로 한국을 일본과 같은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키고 싶었지만 당장의 목표는 북한을 추월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이끈 남한이 안보와 경제면에서 북한을 확실히 앞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북한과 박정희-김일성이 주도한 남북한 안보 경쟁이 1976년 이후 한국의 승리로 역전되는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남북한 국방비 지출액 자료다.

한국과 북한의 군사비 지출 현황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한국

333

411

427

476

558

719

1,500

1,800

2,600

3,220

북한

746

849

443

620

770

770

878

1,000

1,030

1,200

 

자료: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The Military Balance 각 해당연도

호를 참조. 저자가 정리함. 단위: 100만 불.

위의 표가 보여주듯 1970년대 초반, 한국의 군사비는 북한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장비 면에서도 북한은 남한을 월등히 압도했었다. 그러던 것이 1976년 극적인 역전을 하게 된다. 한국의 국방비 지출이 처음으로 북한의 국방비 지출보다 많아진 것이다. 그 이후 박정희가 서거할 때 까지 한국의 국방비는 북한의 국방비와 더욱 큰 격차를 벌렸다. 1978년 한국은 처음으로 군사비 총액을 자체의 국내제원에 기반을 둔 국방예산으로 100% 충당 했다는 감격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제 5장 박정희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당면 했던 18년 동안의 국제 안보상황과 현재 대한민국이 당면하고 있는 국제안보 상황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좌절을 느낀다. 결국 통일을 이룩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안보 상황이 대폭 개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은 당면한 국제 안보 상황을 제대로 극복해 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결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그는 과연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고 있을까? 역사를 연구하는 목표중 하나는 선현의 지혜를 빌려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 일 것이다. 역사학자들을 최근 과거에 일어났던 것과 다른 일을 상상한 역사 연구에도 흥미를 기울인다. 이곳에서는 현재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면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돌파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대체역사 (Alternative History) 를 상상해 보기로 하자. 물론 그 상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당면했던 실제의 역사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우선 오늘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국제안보 환경을 분석의 편의를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문제로 정리해 보자.: (1) 북한의 핵 개발 문제; (2) 한미 동맹에 잠재하는 문제; (3) 중국의 부상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 (4) 일본과의 문제.

북한의 핵폭탄

북한의 핵폭탄에 대한 한국의 대처는 그동안 무대책이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악화일로에 있는 문제다. 2015년 여름 간행된 한국 국방백서는 금명간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배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때 스스로 핵무장을 결심하고 이를 은밀히 추진한 적이 있는 박정희 대통령은 핵폭탄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그리고 핵전략의 기본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심지어는 정치가들조차도,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결국은 망할 것이며, 북한 핵은 우리 것이 될 것이라는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핵전략의 기본은 ‘전쟁을 하지 않은 채 승리하는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실전배치 한 후,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략 상황을 이용해서 대한민국을 유린 할 것이다. 핵무장을 갖춘 북한과 싸울 수 없는 한국은 북한의 각종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은, 겁 많은 한국은 핵무장을 갖춘 북한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 할 것이다.

모겐소 교수는 다투는 두 나라 중 한나라는 핵무장을 하고 다른 나라는 핵무장을 하지 않았을 경우 핵무장 하지 않은 나라의 전략적 옵션은 두 가지로 줄어들게 되는데 그 하나는 마치 일본이 미국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대들다 죽는 것, 다른 하나는 미리 항복하는 것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박정희라면 이 같은 상황의 도래를 어떤 경우라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보다 훨씬 약했던 대한민국의 군사력을 북한을 압도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던 박정희가 전략 균형을 완벽하게 파괴 할 북한의 핵무장을 허락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어떤 방식을 취할까?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북한의 핵에 대응하여 한국도 핵무장 하는 것이다. 우선 북한을 향해, 그리고 중국과 미국을 향해 당신네들이 북한의 핵을 제거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다면, 대한민국도 핵 무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허용할 수 없다면 한국은 북한의 핵이 실전배치 되기 이전, 이를 공격해서 파괴해 버릴 수밖에 없다고 선언할 것이다. 북한이 핵무장을 완성한 후 대한민국은 사실상 ‘전쟁’ 이라는 국가정책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임을 박정희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은 국제사회의 북한 핵무기 제거 노력을 촉구하고,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전쟁억제를 위한 대책을 강구하게 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을 막아야 할 중국 역시 북한의 핵을 제가허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위협할 때 박정희는 군사공격이라는 옵션을 강력히 주장했고,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쩔쩔 매기도 했다. 8.18 도끼 만행 사건시 박정희는 김일성을 “미친개” 에 비유하고 “몽둥이 가 약이다” 고 말했다. 오늘 우리나라 대통령 혹은 지도자들 중에 이 같은 말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박정희가 실제로 통치했던 대한민국보다 지금 대한민국은 현대식 군사력에서 북한을 훨씬 압도하고 있다. 오늘 수준의 대한민국을 통수(統帥) 한다면 박정희는 북한 핵문제를 능히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동맹에 잠재하는 문제

박정희는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자로서 미국에 대해 당당했던 대통령이지만 동시에 미국이 대한민국의 국가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주한미군의 대북 전쟁 억지력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주한미군의 감축에 대해 대놓고 미국을 비판했고, 주한미군이 월남전쟁에 투입될 가능성이 보이자 이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군을 월남전쟁에 파병하기도 했다. 물론 월남파병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대폭 상승 시키는 효과와 경제발전의 종자돈을 마련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가장 큰 기여는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력을 유지시킨데 있었다.

카터 대통령의 비 전략적이고 무조건적인 주한미군 전면 철수 정책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2016년 진행 되고 있는 미국의 대선전에서 공화당 후보가 확실시 되는 트럼프는 한국(일본 독일, 사우디도 포함한다) 에게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을 더 내라고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했다.

카터의 주한미군 전면 철수 정책을 꺾어 버리고 카터에게 거의 망신수준의 욕을 보인 박정희가 지금 있다면 트럼프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은 문젯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다. 박정희는 먼저 한국이 처한 안보 및 경제 상황을 설득할 것이며, 미국이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켜서 얻게 되는 이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서 트럼프를 설득시킬 것이다.

트럼프(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가정할 경우)가 설득당하지 않는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에게도 그렇게 말 했듯이 “갈테면 가라” 라고 말 할 것이다. 트럼프는 한국이 핵무장 해도 말리지 않겠다고 했으니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한국은 위에서 논했던 북한 핵문제까지 동시에 해결 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부상

오늘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과는 경제, 미국과는 안보를 잘 하면 된다고 이야기 한다. 박정희가 본다면 정말 한가한 이야기라고 꾸중할 것이다. 이웃에 강대국이 출현하고 있고, 그 강대국은 한국의 영토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데 이 같은 상황을 ‘위협’이라고 보고 대처하기는커녕 돈이나 벌겠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한국이 한심해 보일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은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할 때, 미국이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본질을 잘 모른다고 우려했다. 중국은 겉모양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아직도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이며 언제든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나라다. 박정희라면 중국이 대한민국에 제기하는 위협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에이 대처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공약에 나와 있는 ‘미국을 위시한 우방국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는 우리나라가 우방과 동맹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잘 말해준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중국과 미국이 다투는 상황 속에 한국이 ‘끼어 있다’고 인식한다. 그럼으로써 미국과 중국 모두로부터 신뢰 할 수 없는 나라가 되고 있다.

우리가 미중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 할 때 동맹국인 미국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중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애써 유지하려 하면서도 중국과 잘 지내겠다는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은 미국과 엄연한 동맹국이다. 미국이 누구와 다툴 경우 우리는 미국을 편 들어주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다. 우리가 진정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고뇌를 해야 한다면 미국과의 동맹을 우선 종지 시켜야 한다. 미국과 동맹은 유지하면서 미중 관계에서 끼어 있어 괴롭다거나 균형자 노릇을 하겠다는 발상은 박정희 수준의 국제정치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중국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우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중국에 대해 애매모호한 한국의 태도에 불만인 미국은 이미 한국에 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강인선 기자는 “미국에선 아시아에서 대(對)중국 연합 세력을 규합할 때 한국은 포기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은 중국과 더 친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예 한국은 빼놓고 호주·일본·필리핀·베트남·미얀마·인도 등과 뭉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 쓰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다면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는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우리 편이 아닌지, 그리고 미국을 우리 편으로 확실히 엮어 두기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2015년 한국의 대통령은 중국의 전승절에 참여, 중국의 군사퍼레이드를 관람 했지만, 같은 날 미국과 일본은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대규모 상륙작전 연습을 벌이는 상황이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면 결코 이 같은 혼돈 상황은 야기 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최근 사드 배치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다. 방어무기 체계를 놓고 시비를 거는데 한국에서는 ‘국방주권’ 이라는 원칙을 말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중국에게 ‘북한의 핵무기가 폐기 된다면 우리도 사드미사일 배치 계획을 곧바로 폐기 할 것’ 그리고 ‘ 중국의 미사일은 단 한 발도 대한민국을 향하고 있지 않는가?’ 라고 응수할 것이다.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은 우리는 더 이상 중국이 우리 편 이라는 중국 몽(中國 夢) 에서 깨어나야 한다. 는 논설을 썼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한일관계

한일관계는 박정희 정권 이후 대부분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뜨거운 감자로 취급하는 문제다. 한국 정부들은 그동안 일본과의 각을 세우는 것을 국내정치적인 인기를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 령이라고 주장할 때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는 한국 대통령도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는 대통령의 대한민국은 독도까지 가서 일본 군사력과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 공군이 가지고 있었던 F-16은 독도상공에서 일본의 F-15 J 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한국해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군함들은 일본이 6척 보유하고 있던 이지스(AEGIS) 함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힘을 늘이기 보다는 말을 크게 하는 대통령도 있었고, 아예 말조차 크게 하지 못하는 대통령들도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도 강력하게 했지만 강력하게 말하기 위해 기본이 되는 강력한 힘을 건설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물론 박정희는 외교의 역할도 무시하지 않았다. 건국이래 고수해 왔던 할슈타인 원칙 을 과감히 폐기하고, 적성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넓혀 나갔다.

박정희의 국가안보 관련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정권의 명운이 위험 할 수도 있는 거국적 반대를 극복하고 일본과의 수교를 단행 했다는 점이다. 일본과 작대관계를 지속하면서 한반도 안보와 통일을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일본은 한반도 통일을 이룩해 줄 힘은 없을지 몰라도 통일을 반대해서 망치게 할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만약 일본이 북한에게 어느 정도 원조 해 준다면 일본은 한반도의 분단을 지속 시킬 수 있는 나라다. 일본과의 수교가 중요한 줄 알지만 국민감정 등 안보 외 다른 요인 때문에 지연되던 일본과의 수교 문제 해결은 한국의 안보상황을 한국에 유리하게 한 단계 격상 시킨 것이나 만찬가지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일본과 중국 중 어느 나라가 한국 안보에 대한 잠재적 위협인지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두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모두 잠재적 위협일수 있지만 한국의 능력과 한국이 처한 국제구조상 두 나라 모두를 잠재적 적대국으로 인식 할 수는 없다. 일본을 잠재적인 안보 위협국으로 삼을 경우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관계를 파탄 낼 각오를 해야 된다. 일본은 미국과 거의 완벽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지속할 경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한국을 포기할 것이다.

이처럼 난감한 현재의 상황에서 박정희라면 주저 없이 일본과 안보 협력관계를 대폭 강화하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국제정치학자 브레진스키 교수는 2012년 간행한 Strategic Vision: America and the Crisis of Global Power 라는 책에서 만약 미국의 세계적 개입이 약해 질 경우 가장 곤혹스런 상황에 처하게 될 나라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라 지적하고 그 경우 한국은 3가지 전략 대안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나는 중국의 비위를 맞추며 사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과 안보 협력을 함으로써 중국에 맞서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한국 스스로 핵무장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책이 간행된 후 약 6개월 지난 후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한국기자의 질문에 대해 브레진스키 교수는 일본과의 안보협력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대답 했다.

6. 결론

박정희 정권은 논란이 많은 정권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 국민들은 물론 세계 각국 국민들이 박정희를 위인처럼 평가한다. 각종 여론 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특히 오늘 우리가 처한 국제 외교 및 안보 상황이 마치 20세기 초반 조선이 당면했던 상황과 판박이 같아 보이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 나라를 건설하고 키워낸 과거의 지도자들을 다시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국제 안보 정세가 급변하는 와중에 있었던 정권이었다. 국력이 아프리카 삼류국가 수준이었던 상황에서 냉전의 종주국인 미국의 대외 전략이 이리저리 변동하는데 따라 한국 정부는 이에 적응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미국에게 애걸하기도 하고 미국의 뒤통수를 치기도 하며 한국 안보의 최대 안전장치인 미국을 한국의 국가 안보에 지속적으로 개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자주성과 존엄을 잃지 않았다. 박정희의 미국에 대한 입장이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실리적, 현실적인 것이었다는 점은 박정희 대미 외교의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 분명한 외교 및 안보 노선의 제시, 실용주의의 추구는 박정희 외교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 시키지 않는 한 한국의 안전과 통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던 박정희는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한‧일 협정 체결이라는, 국민감정을 거스를 뿐 아니라 정권의 안위마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정책을 밀고 나갔다. 박정희는 어떤 나라가 우리나라의 통일과 안보에 순기능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박정희가 국방, 외교, 안보 정책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가장 중요한 교훈중 하나는 박정희가 부국과 강병의 인과 관계를 정확히 알고 그대로 집행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40대의 젊은 군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는 경제 발전의 결과물이라는 신념을 잃지 않았고 이를 관철했다.

박정희 정권의 외교 안보 정책을 ‘성공한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북한과의 안보능력을 비교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초반 북한의 절반도 되지 못하던 국방비를 1979년에는 북한 국방비의 두 배로 올려놓았다. 성공했다. 197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국방예산을 순수이 한국의 재원으로 100% 충당했다는 기록도 세웠다. 세계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 있겠지만 박정희 시대의 자주국방 목표가 부분적으로 달성된 순간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경제 발전의 초석도 박정희의 공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격랑을 헤쳐 가는 조각배 같았다. 국제적으로 격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제적 격변은 그 대부분이 한국의 국가안보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들이었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 (대량보복 전략으로부터 유연 반응 전략으로), 월남전쟁의 격화, 닉슨 독트린을 통한 아시아에서의 미군 철수, 데탕트의 전개, 미국과 중국의 화해 및 수교, 카터 대통령의 도덕 외교,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전면 철군론 등 다양한 요인들은 박정희 정권에게 큰 도전이었다. 박정희 정권들은 이러한 도전들을 헤쳐 나갔다.

필자는 2014년 저술한 책에서 한국은 아직도 거친 파도가 일고 있는 대양을 헤쳐 나가야 할 작은 배라고 묘사했다. 이제 우리는 더 작은 배를 몰고도 파도를 헤쳐 나가는데 성공했던 박정희의 조타술(操舵術)을 배위야 한다. 누가 우리의 적인지, 누가 우리를 진정으로 도와 줄 수 있는 외세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노력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박정희는 우리에게 이 같은 어려운 질문들에 답 할 수 있는 좋은 교훈들을 주고 있다.

2016.6.3. 李春根 (6월 15일 박정희연구회 세미나 발표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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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좌파척결 2017-07-28 15:03:18
이렇게 발악을 하면서 댓글을 쓰는 걸 보면 박장희 경제철학이 맞았다는 거네

얼빠진 2016-11-01 01:44:01
지금 순실이 그네 게이트 보고도 아직도 박정희 한테 뭔가를 묻고 싶냐?

군부독재자 박정희 2016-07-16 10:52:32
쿠테타 친일파의 원조 박정희에게 무엇을 묻는다는것입니까? 아직도 그따위 독재 군국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 나질 못하네~머릿속에 벌레라도 듣것인가요? 참 한심합니다. 박정희 따위에게 무엇을 묻는다는 것 입니까???

김팍새 2016-07-06 16:58:07
우습고 한심한게 지랄들하고 자빠졌네~ 칵~&#53879;~ ㅗ

거참 2016-07-04 16:52:35
친일파 빨갱이 독재자 박정희 유신정권때 정경유착으로 커온 대한민국 경제의 부작용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재 박정희 한테 물어 어쩌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