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老兵(노병)의 전쟁
아직 끝나지 않은 老兵(노병)의 전쟁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6.25 0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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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인터뷰] 6·25 참전 소년 학도병 류형석 씨

마치 소년 시절 참전했던 낙동강 전투 다시 하듯 戰史 연구에 몰두하여 

<낙동강>(전8권) <삼팔선>(전 4권) 같은 대작 완성

인터뷰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사진·정리 : 정재욱 기자 

올해 82세인 6·25 참전 용사 류형석 씨는 6월만 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과거에는 정부에서 행사도 거창하게 하고 방송에서도 떠들썩하게 특별 방송으로 주요 전투나 영웅적 군인들을 소개했는데, 최근에는 너무 조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참전 용사, 아니 6·25 전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은 분명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가 특별히 금전적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6·25 참전 유공자들이 국가로부터 받는 보상금은 매월 받는 18만 원의 참전명예수당이 전부입니다. 사회적으로 예우를 해준다거나 명예를 높여주는 일은 바라서도 안 되죠. 6·25 참전 유공자는 아무런 존재감 없이 그냥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대구농림중 2학년이던 16세에 “무작정 피난만 갈 순 없다”는 생각에 소년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류 씨가 얻은 훈장은, 왼쪽이 유난히 올라간 형태로 비뚤어져 있는 어깨다. 작은 키의 소년이 왼쪽 어깨에 둘러멘 M1 소총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항상 그쪽 어깨를 올려 세우고 무전기를 메고 전선을 누빈 탓이다. 

류 씨는 중대·대대 통신병이었기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왼쪽에 소총을 메고 오른손으로는 무전기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신체 구조가 기형이 됐다. 가만히 있으면 왼쪽 어깨뿐 아니라 목젖까지 비뚤어져 있는 상태가 된다. 6·25가 그에게 남긴 흔적이다.

▲ 6·25 전쟁의 훈장으로 왼쪽으로 올라간 비뚤어진 어깨를 갖게 된 류형석 씨는 자신이 겪은 전쟁을 젊은 세대에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낙동강>, <삼팔선>, 등의 전쟁史 저작을 남겼다.

유일한 훈장 

류형석 씨 같은 참전 용사가 예우를 탓할 정도면, 6·25뿐만 아니라 월남전 같은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에 참여했던 국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예우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연평해전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금이 2002년 당시 3000여만 원이었고,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은 평균 8억 원이라는 언론 보도가 들려오는 순간에는 덜컥 화도 났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류 씨와 같은 소년 학도병 참전 유공자 사이에선 “내 손자는 전쟁에 안 보낸다. 이런 나라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하소연도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는 국가나 사회가 6·25를 기억해 주기만을 바라고 마냥 기다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지난 2000년 시작해 10년 동안 자료조사와 현장 답사를 해가며 집필한 8권 분량의 6·25전쟁사 <낙동강>을 2010년에 발간했고, 올해 5월에는 4권짜리의 또 다른 역작 <삼팔선>을 세상에 내놨다. 

<낙동강>이 전쟁 발발부터 속절없는 남쪽으로의 후퇴, 처절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다뤘다면, <삼팔선>은 해방 후부터 38선이 획정돼 남북이 분단되기까지의 5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류형석 씨는 휴전 후인 1954년 제대하고 2년 후에 당시 보통고시에 합격, 1957년부터 감사원의 전신인 심계원과 국세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1980년부터 대우그룹에 입사, 나중에 대우엔지니어링과 합병한 전(全)엔지니어링 대표이사까지 역임했던 그는 회사를 퇴직하고 세무사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전쟁사를 공부한 것이 이런 대작을 내놓게 된 계기다. 주변에선 서울대 법대에서 강의를 한 세법 전문가가 엉뚱한 책을 썼다고 말한다. 

“제가 직접 겪었기 때문에 제일 잘 알 수 있다는 책임감으로 덜컥 시작했죠. 자료조사를 하고 관련 서적을 읽고 책 내용을 고민할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집필한 결과가 바로 <낙동강>과 <삼팔선>입니다.” 

▲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6·25전쟁을 체험한 류형석 씨의 저서인 <낙동강>(전8권)과 <삼팔선>(전4권).

중공군 피리소리에 아찔… 죽음의 공포 느껴 

류형석 씨는 낙동강 다부동 전투가 한창이었던 1950년 9월 1일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11연대 1대대에 통신병으로 배속됐다. 1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곧바로 북진하여 10월 19일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고 평안북도 박천을 거쳐 10월 25일 영변에서 중공군을 만났다. 그리고 운산, 태천을 거치면서 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후퇴하게 된다. 

류형석 씨의 부대가 지나쳤던 운산의 북쪽에 압록강과 접경해 있는 초산이 있는데, 이곳은 국군 제6사단이 진격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이 6사단에 류 씨의 셋째 형 류원석 씨가 소속돼 있었다. 안타깝게도 셋째 형은 10월 26일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실종돼 전사 처리 되었다. 류 씨가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전장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류형석 씨는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던 지옥 같은 다부동 전투를 온몸으로 체험했고, 다부동에서 영변까지 27일 동안 1000㎞를 강행군하며 북진 작전에 참여했다. 중공군이 글자 그대로 새까맣게 몰려 왔고 총소리가 콩 볶는 소리처럼 요란했다.

영변에서 중공군에 포위돼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빠져 나왔고, 태천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후퇴할 때는 총알이 귀 옆으로 ‘핑핑’하고 빗발칠 정도로 집중사격을 받는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중공군들은 국군 부대를 포위를 한 다음 피리를 불어요. 사방에서 한 바퀴 도는 식으로 차례로 피리를 부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모골이 송연하고 총을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중공군이 무서운 건 옆의 전우가 죽어 쓰러져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밀려들어 온다는 것이었어요. 100명이 돌격하는 와중에 총에 맞아 죽고 20명만 살아서 우리 고지에 와도 아군이 무너지는 거였죠.” 

류형석 씨는 “그때 정말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당시 병사들 사이에선 중공군들이 술에 취해서 진격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고, 실제 중공군 시체나 포로 옆에 가면 술 냄새가 났다”고 회고했다. 

6·25 당시엔 그저 명령에 따라 진격하라면 진격하고, 후퇴하라면 후퇴를 하느라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후에 나이가 들어 10년 이상의 자료조사와 공부를 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은 6·25전쟁과 전쟁의 전후 배경, 동북아 국제정세에 관해 누구보다 전문가가 됐다. 

38선에 대한 일본의 책임 

최근에는 남한 내 이념 갈등 상황이 6·25 직전, 즉 류형석 씨가 펴낸 <삼팔선>의 시대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 걱정이라고 한다. 실전과 이론을 겸비한 노병(老兵)의 판단이어서 더욱 경청해볼 만한 대목이다. 

“해방 후에 한반도의 이념 상황은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공산주의자였다고 보면 돼요. 그냥 있었으면 공산화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용단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지만, 국민들 의식 속에 스며든 공산주의 사상을 불식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요즘 대한민국 내에서 종북세력들이 준동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상황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류 씨는 “대한민국이 그동안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면서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에 대해 김일성에게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라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김일성이 일으킨 남침전쟁으로 인한 살육과 납치, 비무장 민간인 살해 등등 극약 처방이나 다름없는 직접적인 전쟁 경험 아니었으면 공산주의의 달콤한 유혹에 많은 국민이 속아 넘어갔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6·25 참전 용사만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전쟁 체험 세대의 숫자가 작아지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약화되는 현실에 대한 우려이기도 했다. 

▲ 16세 어린 나이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류형석 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소년병에 대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예우가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사진은 6·25 전쟁 당시 앳된 모습의 류 씨(앞줄 왼쪽).

류형석 씨는 <삼팔선>이라는 책으로 공산주의의 망상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또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바로 일본이다. 38선 때문에 일어난 전쟁에 뛰어들어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을 했던 참전 용사가 고민과 연구 끝에 도대체 왜 일본이 분단되지 않고 한반도가 분단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류 씨는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진 책임은 일본에 있다는 시각이다. 한반도가 일본 대신 분할됐다는 주장이다. 사건의 단초는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의 주요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여하기로 한 연합국의 최후통첩인 포츠담 선언이었다. 이 포츠담 선언이 일본에 전달된 것은 1945년 7월 26일 이었다. 

일본은 연합국의 최후통첩을 접수하고도 이것이 진짜 최후통첩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며 미적거리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얻어맞고 뒤늦게 항복을 한 탓에 애꿎은 한반도가 분단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지 3일 만,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당일인 8월 9일 밤 어전회의에서 포츠담 선언을 최종적으로 수락해 무조건 항복을 결정합니다. 일본은 처음에는 연합국의 최후통첩인 포츠담 선언을 가볍게 여겨 묵살했어요. 포츠담 선언에 소련이 서명하지 않은 것을 두고 소련이 일본과 맺은 중립조약을 존중하여 대일전에 가담하지 않을 것으로 지레 짐작한 거죠.

일본은 그전부터 자신들과 중립조약을 맺었던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하지 않고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연합국과의 종전을 중재해 주도록 극비리에 소련을 상대로 외교 교섭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믿었던 소련도 8월 9일 전격적으로 참전하면서 그들이 구상했던 꿈이 깨진 겁니다.” 

류형석 씨에 따르면 이때 한반도의 운명에 중요한 분기점이 생긴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즉시 수락했거나 늦어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에만 항복을 했다면 소련의 참전과 한반도의 분단은 없었을 것이다. 또 소련이 참전하되 일본 본토로 진격했다면 한국 대신 일본이 분할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일본 군부가 강경론을 밀어붙여 죽기 살기로 끝까지 항전했다면 소련이 한반도 점령에 이어 일본까지 진주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류 씨가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으로 <조선종전 기록>의 저자인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분석을 참고한 것이다. ‘왜 소련은 일본 본토로 진격하지 않았는가?’가 관심의 대상이다. 

실제로 일본 육군은 본토에서의 최후 항전을 준비했다.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육군상이 235만 명의 병력과 400만 명의 추가병력 외에 15~60세의 남성과 17~45세의 여성 2800만 명에게 죽창과 몽둥이를 들게 해 끝까지 항전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건전한 신체를 가진 남자 10명이 상륙하는 미군 1명을 죽인다면 미군의 본토 상륙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승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6·25 참전 소년병 戰史 집필 예정 

“6·25에서 직접 전투에 참여한 이래 왜 우리가 이런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 항상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전황의 불리함을 인정하고 좀 더 일찍 항복을 했더라면 우리가 분단되지도 않았고 6·25전쟁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우리가 전쟁을 겪는 동안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이 생산하게 되면서 일본에게는 2차 대전 패전의 피해를 복구하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하는 기회가 됐죠.” 

<낙동강>과 <삼팔선>을 통해 6·25 전쟁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류형석 씨의 집필 욕심은 끝이 없다. 6·25 연작 개념으로 국군의 38선 돌파 이후의 전황을 정리해야 하는데, 그 전에 소년병 전사(戰史)에 대한 책을 하나 내려고 한다. 최근에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소년병 전사를 발간했는데 너무 부실해 직접 집필하기로 결심했다. 

현재 소년병은 국가유공자에 포함돼 있지 않다. ‘소년병에 대한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16·17·18대 국회에서 꾸준히 발의됐지만 폐기됐고, 19대 국회에는 2012년 10월 유승민 의원이 ‘6·25 참전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류 씨는 “14세부터 16세가 주를 이루는 게 소년병”이라면서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전쟁터를 3년 간 누볐는데 너무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4년, 5년씩 복무하고 제대하여 사회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낸 책을 보면 이게 과연 군사전문가들이 쓴 것인가 의아할 정도입니다. 기본적인 소속이나 지명도 없어요. 그래서 내가 60여 가지의 질의사항을 보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성의가 없었습니다. 선배 군인, 아니 민원인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고 있는 거죠.”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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