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중산층 그들은 무엇을 원하나?
대한민국 중산층 그들은 무엇을 원하나?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6.06.25 04: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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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추적] 중산층과 정치의식

살림살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정의로운 사회라도 구현해야 한다는 심정이 한국의 중산층들이 가진 정치 의식 

한정석 자유통일문화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 

무서운 말로 들린다. 한 사회에 안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중산층이 붕괴된다는 말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묵시록 같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지시하는 관념으로 이뤄진 세계라는 뜻이다. 

우리는 중산층이라는 단어로부터 ‘안정’, ‘번영’, ‘평화’, ‘질서’와 같은 연관 개념을 유추한다. 그러니 중산층이 붕괴된다는 건 바로 그러한 질서들이 붕괴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잘 정의되지 않아서, 심지어는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달랐으며, 심지어는 국내 정부 부처 간에도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은 좀 거칠게 말하자면 ‘순수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만일 우리가 ‘순수한 사람들’을 무엇을 기준으로 정의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에 동의한다면, 중산층의 기준에 대해서도 그래야 한다. 

그러면 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일까. ‘중산층’이라는 말은 학문적 개념이 아니다. 대중적으로 그렇게 일컬어지는데  Middle class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개념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의 계급구성론에 바탕한다. 따라서 계급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중산층의 개념도 변화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계급론’이 객관적 지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각 의식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이다. 즉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당신은 중산층이다’라고 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중산층이다’라는 계층의식이 중산층을 이룬다는 의미다. 따라서 중산층은 자기 주관적 인식이라는 것이 사회심리학자들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2015년 현대경제연구원과 NH투자증권이 ‘행복 100세’라는 주제로 실시한 조사보고에 의하면, 서구의 각국 정부는 중산층에 대해 소득 수준과 함께 문화-사회 의식 두 영역으로 국민들의 중산층 인식을 조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한국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안정 희구와 함께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욕구가 크다.

나라마다 다른 중산층의 기준 

중산층은 경제적 수준이나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 되며 스스로 중산층 의식이 있는 사회집단을 일컫는다. 프랑스에서는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 실력’이, 영국은 ‘불의(不義)와 불법(不法)에 의연히 대처할 것’이,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할 것’ 등이 소득 외 중요한 중산층의 기준이다. 

반면에 우리 국민들의 중산층 인식은 ‘빚이 없고 월수입이 580만 원 이상에 6억 원짜리 아파트와 중형 이상의 자동차를 가진 이’들이다. 이 정도의 생활 수준을 누리는 이들은 한국에서 중산층이 아니라 상위 소득 10% 안에 드는 이들이다. 한국에서 그런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인들이 이제 자기 분수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나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꿈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중산층이다’라는 자기 인식이 줄어드는 현상은 아무래도 경제 침체와 관련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중위소득의 50~150% 집단을 중산층으로 본다. 중위소득이란, 그야말로 국민들을 소득 수준으로 나란히 세워서, 그 중간 값에 해당하는 소득을 말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산층 비중은 1997년 이전까지 75% 전후의 비중을 유지하다가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 69.6%로 줄어들었다. 2000년대 들어 70%대로 다소 회복됐으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시 악화돼 65%대로 떨어졌다. 이렇듯 ‘경제적 중산층’은 경제 상황에 따라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문제는 중산층이 늘고 줄음이 아니다. 1776년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는 영국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 수준이 식민지였던 미국 근로자들보다 훨씬 높음에도 미국 근로자들에 비해 사회에 대한 불만이 높은 이유를 고찰했다. 

아담 스미스는 한 사회의 근로자들이 갖는 행복감은 임금이 높고 낮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이 정체되어 있는가 아니면 상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탁월한 결론에 이르렀다.

즉 어느 나라든지 소득이 적더라도 소득이 상승하고 형편이 나아지는 과정에서 국민들은 희망과 행복을 느끼는 반면, 소득이 높더라도 더 이상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면 불행을 느낀다. 아담 스미스의 고찰은 대한민국에서 분명하게 발생했다. 

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1970년대 한국인은 ‘마이카(My car)’를 중산층의 자각적 지표로 생각했다. 국민차 포니가 출시된 이후 자가용은 ‘사장님’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중산층의 한 지표가 됐다. 

1980년대에는 ‘마이 홈’이 중산층의 지표로 떠올랐다. ‘국민주택’이라는 소형 아파트를 시작으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30평대 아파트를 갖는 것은 모든 한국 중산층들의 꿈이었다. 하지만 1997년 IMF를 계기로 한국의 자각적 중산층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중산층으로 여기게 되지 않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러한 원인에는 1987년 민주화 체제 하에서 발생한 우리 경제의 비효율과 관치(官治), 노사분규의 만연과 반(反)기업 정서로 인해 ‘소득 거품’이 구조적으로 깨지는 과정이 있었다. 소득의 성장이 정체되면서 분배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지만, 결국 생산의 부가가치 증대가 없는 분배는 갈등만을 촉발시켰다. 그런 과정을 거친 한국의 중산층은 이제 어느 정도 저성장 시대에 적응했다는 데이터도 발견된다. 

지난 5월, 국민대통합위가 마련한 ‘저성장 시대의 출구로서 화합과 통합’이라는 포럼에서 김용하 교수(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는 한국인이 불행을 느끼는 본질적 원인은 정작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냈다.

김 교수는 2012년 유엔 산하 ‘지속가능한 발전 해법 네트워크(SDSN)’가 조사한 각국 국민의 행복 요인에 대한 자료를 인용해 한국인들은 1인당 GDP에 대한 불만보다 사회연대 결여, 부패, 사회 갈등, 선택의 제한 등으로 인해 행복도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사실을 제시했다.(그림 참조)

▲ 행복도 결정요인 국가비교(동일 측도)

즉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도가 낮은 것은 경제적 요인보다는 비경제적, 사회적 요인이 원인이었고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관용, 부패 등의 측면에서 열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용하 교수는 일본의 경우 우리와 유사하게 부패 문제와 사회적 불관용의 팍팍한 삶이 국민들의 행복을 저해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우리 경제가 비록 저성장 시대를 맞더라도, 여전히 사회에 만연한 공직 사회의 부패와 기득권을 남용하는 엘리트 그룹에 대한 개혁, 그리고 사회적 연대감을 추구한다면 국민들은 보다 안정적인 행복감을 느끼게 되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최근 100억 원대 법조 브로커 비리라든지, 구의역 선로 사고에서 드러난 서울시 지하철 마피아, 은성PSD와 같은 케이스에 보여준 국민들의 분노가 입증하고 있다. 국민들은 소득이 아니라 불의한 사회에 더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국민들, 특히 중산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이제 어느 정도 자신들의 경제 형편에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국에서 정말로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면, 중산층들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중산층 붕괴’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중산층이 갖고 있는 정치·사회 의식의 변화다. 

정신문화적 측면에서의 선진화 필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 보고에 따르면 한국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는 이들은 안정희구와 함께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욕구가 크다. 이러한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욕구는 단지 ‘가진 자, 있는 자’에 대한 부도덕성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번 서울시 지하철 메피아 사건이 보여줬듯이 공공부문의 지대추구(독과점 기득권을 이용한 이윤추구) 행위에도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한국 중산층은 이제 더 이상 정부 관치경제의 효율성을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정부의 관치 비중이 높아 개인들의 민간 경제활동이 정부의 공공경제로 인해 제약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은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상생포럼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특히 공직사회의 부패와 여성들의 사회참여 제약, 관존민비(官尊民卑)와 같은 관료주의에 의한 시민들의 선택권이 박탈되는 문제 등이 국민 행복감 결여에 작용하는 바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용하 교수는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사회 전반적 갈등 구조의 해소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정신문화적 측면에서의 선진화가 필요함을 알려주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중산층의 이러한 특성은 이들이 경제 문제를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현실이 정치적 판단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더구나 앞으로 지속될 저성장의 지속성은 한국 중산층의 정치 인식에서 경제가 단기간에 좋아지기 어렵다는 공통의 기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주된 정치적 관심은 경제의 성장보다는 사회의 전반적인 구악(舊惡) 해소에 달려 있다는 전망은 설득력이 있다. 살림살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정의로운 사회라도 구현해야 한다는 심정들이 바로 오늘 한국의 중산층들이 가진 정치적 의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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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2016-06-28 15:42:09
외국의 중산층기준 운운하는 문장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겠네요. 마치 진짜 보수가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좌파들의 주장처럼 악의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중산층의 인문학적 정의라는게 세상에 있는게 말이 되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