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을 위한 꿈과 노력
자주국방을 위한 꿈과 노력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7.04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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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정신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7)

미·중 데탕트가 무르익으며 미국이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키자 박정희, 핵개발에 돌입. 연구용 원자로 자체 개발, 핵연료 국산화, 핵연료 가공시설 준공

박정희는 대단한 현실주의자였다. 1970년대 초 방위산업을 육성하면서 박정희는 미군이 원조해 준 M1 소총이 한국인 체형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무거워 사용이 어렵자 “우리 몸에 맞는 무기를 생산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군수장비에만 국한된 생각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근대화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비단 서구화나 서구의 모방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토양에 맞게 근대화를 하고, 서구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초반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는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에 대응해 핵무기와그 운반체인 미사일 개발에 나서 소기의 성과를 보았다. 사진은 최초의 국산 미사일 백곰.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와 포스코 제철소를 건설하려 할 때 세계은행이나 IBRD의 전문가, 미국의 석학 등은 “기술이나 자본이 턱없이 부족하고 아직 산업화 단계가 고도화되지 못한 한국이 이런 일을 시작하는 것은 무리”라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런 반대 의견에 미동도 하지 않고 오원철에게 “미국의 경제학자라는 자들이 후진국의 실정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하니 우리는 우리 식대로 해 나갈 수밖에 없다”면서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만약 당시 박정희가 전 세계 전문가들의 조언이나 주장을 받아들여 뜻을 접었다면 한국은 아직도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 침실에 놓인 카빈 소총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한 심야대책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를 주재한 박정희는 관계 장관들을 본관 현관 앞까지 나와 전송하고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청와대 앞마당을 서성이며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서 무장공비와 교전이 벌어지는 총소리를 들으며 근무해야 했던 대통령이었으니 고민이 컸을 것이다.

그날 이후 박정희의 침실 머리맡에는 항상 카빈소총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언제든 공산군이 청와대에 또 쳐들어오면 대통령이 직접 총을 들고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시였다.

1975년, 박정희가 진해에서 여름휴가 중일 때 미국 국회의원 10여 명이 서울에 도착하여 대통령을 예방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때는 바야흐로 미·중 간에 데탕트로 인해 월남이 적화통일 되는 등 냉전구도가 격렬한 파열음을 내고 있을 때다. 박정희는 전용기를 보내 울프 의원을 비롯한 의원 전원을 진해로 초대하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미·중간에 진행되던 데탕트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네들은 데탕트라고 하여 덩치 큰 코끼리 두 마리가 좋아져서 서로 몸을 비비고 있는 격인데, 그러는 사이에 코끼리 두 마리 때문에 잔디가 밟혀 죽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이 바로 그런 잔디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1970년 7월  윌리엄 로저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 정부와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 2만 명 철수’를 통고하고 병력을 빼내가기 시작했다. 8월에는 애그뉴 부통령이 방한하여 대만으로 가는 기내에서 “5년 내에 주한미군 완전 철수”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예정대로 1971년 3월 주한 미 7사단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박정희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통해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국방을 할 수 있는 길을 비밀리에 닦아나갔다. 그리고 1972년 7월 20일 국방대학원 졸업식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치사를 했다.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이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할 때,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은 협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국방입니다.”

핵개발 계획은 1973년 겨울에 접어들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우리 연구진이 프랑스 보르도의 핵폭탄 제조 연구소에서 핵폭탄 제조와 기폭 기술을 연구했다. 우리 연구진은 고폭탄 실험, 텅스텐 시험구 등을 이용한 내폭형 원자폭탄 개발을 진행한 결과 1970년대 중반에 ‘20KT 이상급, 중량 1톤 미만’의 원자폭탄 설계를 마쳤다. 한국은 이미 북한보다 30년 앞서 기술적으로 북한제 핵폭탄보다 기술적 위력적으로 월등한 폭탄의 개발을 끝마친 것이다.

최형섭 장관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랑수아 오르톨리 산업기술개발부 장관으로부터 재처리 기술 등을 제공 받기로 했다. 미국은 한국의 핵 보유는 동북아 지역의 안정을 해치는 중대 요소가 될 것으로 보고 집요한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는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시설 도입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공식적으로는 핵개발 프로젝트는 공식 종료되었다.

카터, 인권외교의 배후에는…

그러나 박정희가 핵 개발을 완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핵 역량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먼저 1976년 1월 말, 연구용 원자로 자체 개발에 나섰고, 이어 핵연료개발공단을 설립하여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시작, 1978년 10월 핵연료 가공시설이 준공됐다.

미국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집요하게 핵 관련기술 개발을 진행하자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1976년 5월 한국 국방장관에게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고집하면 미국은 안보와 경제 문제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가 한국의 인권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이면에는 박정희의 핵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9년 농축과 재처리 부분을 제외한 원자력 산업의 기술적 자립을 이뤘고, 같은 해 10월 무렵엔 재처리 설비의 모든 설계가 끝났다. 그리고 1979년 10월 박정희는 핵심 측근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었다. 핵무기와 운반체 개발을 통해 자주국방의 꿈을 이루려던 박정희의 노력은 그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정희 대통령의 국방대학원 졸업식(1972.7.20)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gbn=DH&mediaid=821&mediadtl=6294&qualit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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