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바라본 6.25 전쟁
탈북자가 바라본 6.25 전쟁
  • 이애란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7.06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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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6·25전쟁을 “공화국을 말살하려는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도발”로 규정하고 해마다 반미 성토대회를 열고 근로자들과 학생들과 가정주부들까지 동원하여 반미 구호 외쳐

6월 25일은 한반도가 전쟁의 참화에 휩쓸려 동족상잔의 비극을 빚은 참으로 가슴 아픈 날이다. 북한은 6·25전쟁(한국전쟁)을 ‘조선전쟁’이라고 부르면서 “미제와 남한이 공화국(북한)을 무너뜨려 점령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일으킨 침략전쟁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선동했다. 

북한은 6·25전쟁을 “미제의 식민지가 된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저들은 이날을 미국이 북한을 침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날로 규정하고 매년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를 ‘6·25 미제 반대 투쟁의 날’로 기념하면서 남한과 미국을 비난하는 행사를 열고 주민들에게 미국과 남한 정권에 대한 복수심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북한은 소학교(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정규 교과목으로 정해놓고 암기시키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세뇌시키는 <김일성 혁명역사>에서 6·25전쟁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 책은 6.25전쟁을 “공화국을 말살하려는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도발”이라고 규정하고 해마다 6·25만 되면 ‘미찡구’(러시아어로 퍼레이드라는 의미)라고 하는 반미 성토대회를 열고 근로자들과 학생들과 가정주부들까지 동원하여 반미 구호를 외치게 하는 것이 하나의 정례화 된 과정이다. 

북한의 교과서들과 선전물들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전쟁이 발발하자 김일성은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북한 주민들을 단결시키고 시급하게 전시체제를 편성하여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6월 28일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1주일 만에 서울을 완전히 해방했으며,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이 실시했던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해 남한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선전했다. 

북한은 전쟁의 과정에 대한 영화와 소설, 시, 가요, 뮤지컬 등 각종 예술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선전선동을 했고 읽은 책 발표 모임, 전쟁박물관 견학, 전쟁 참가자들과 만남 및 이야기 모임 등 각종 행사와 이벤트를 통해 6·25전쟁이 김일성의 위대한 업적임을 선전했다. 김정일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는 김정일의 전쟁과 관련된 스토리를 만들어내 선전선동에 동원했다. 

▲ 6·25 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두고 지난 23일 북한 청년학생들의 결의 모임이 신천박물관에서 열렸다.

‘미제 반대투쟁의 날’ 

북한은 해마다 6월 25일 전쟁 발발일부터 7월 27일 정전협정일까지 한 달 기간을 ‘미제 반대투쟁의 날’로 규정하고 각종 행사를 통해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미제와 남한 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 시킨다. 

김정일은 생전에 ‘붉은 단풍잎’, ‘이름 없는 영웅들’과 같은 6·25전쟁 관련 영화 제작에도 직접 관여하면서 예술작품을 통해 6·25전쟁의 진실을 왜곡하도록 진두지휘했다. 정전협정 체결 40주년인 1993년에는 처음으로 전국노병대회를 개최했다. 김정일 사망 후 권력을 세습한 김정은은 2012년과 2013년, 2015년에 전국노병대회를 개최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북한이 자신들이 선택한 공산주의 체제로 남한을 해방한다는 의미다. 

북한은 전쟁 발발에 대해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에 남한과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날은 일요일이고 미국과 남한은 기독교를 믿는 국가이기 때문에 성서의 교리에 따라 일요일에는 절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북한의 예술영화 ‘붉은 단풍잎’에서는 전쟁의 발발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영화에서도 미국과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략하여 전쟁을 먼저 도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이 남한에 전쟁 도발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계획적인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에서도 나타났듯이 1946년 9월 7일 정판사 위폐사건 때문에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박헌영 등 중요 좌익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북으로 도주한 박헌영이 김일성을 부추겨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진실이다. 

남한 내에서 거취가 어려워진 박헌영은 월북하여 김일성에게 남한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남로당원들이 김일성의 인민군이 내려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부추겼다. 만일 인민군이 서울로 진입한다면 지하에 잠복해 있는 2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인민군에 합세하여 남한 전역을 손쉽게 공산화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 6·25전쟁 당시 정훈장교로 활동했던 고(故) 한동목 중령이 1950년 8월 촬영한 영천의 피난민 행렬.

남침전쟁과 박헌영의 역할 

이러한 감언이설에 넘어간 김일성은 박헌영을 데리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찾아가 전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은 1주일 만에 서울을 완전 점령하였으나 서울에 안주하면서 추가 공격을 멈추고 1주일이나 기다렸다. 기세 좋게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남으로 진격했다면 아마 전쟁의 승패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남쪽으로 전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서울에서 1주일간이나 기다린 이유는 무엇일까? 

박헌영이 애타게 기다리던 20만 명의 남로당원들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주일여를 한강 이북에서 지체한 북한군은 뒤늦게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했으나 국군이 후방으로 철수하여 재편성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함으로써 호기를 놓쳤다. 

미국과 유엔군의 참전을 유도하게 되면서 한국전쟁은 국내전쟁이 아닌 국제전으로 발전하였고 무려 3년 1개월간이나 장기전으로 전락되었다. 20만 명 남로동당원의 협동작전을 통해 속전속결로 한반도의 공산화를 장담했던 박헌영과 이승엽은 나중에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다시 말해 6·25전쟁은 박헌영의 20만 남로당원 총궐기 거짓말에 넘어간 김일성이 박헌영의 말을 믿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추동하여 일어난 한반도 공산화 전쟁이자 적화통일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남한을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현재의 한반도는 공산왕조로 멸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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