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親日) , 그리고 박정희·박근혜 부녀(父女)
친일(親日) , 그리고 박정희·박근혜 부녀(父女)
  • 여명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6.07.15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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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발언대] 박근혜 대통령과 위안부 문제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정권 중 어느 누구도 박근혜 대통령이 받아 낸 수준의 사과나 책임을 일본 정부로부터 이끌어낸 적이 없었다

한대련(21C한국대학생연합·구 한총련) 아이들이 이석기와 함께 지리멸렬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싶더니, 위안부 협상으로 인해 그 조직의 하부 조직이었던 평화나비네트워크 활동으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 

▲ 여명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평화나비네트워크란 약 3년 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활동을 한다는 명분으로 생겨난 단체다. 이들은 한대련의 근거지이자 여성이라는 특수성을 갖고 있는 숙명여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활동을 해 왔다. 현재 평화나비네트워크 대표와 집행위원장이 모두 숙명여대생이며 공통적으로 구(舊) 통합진보당 학생위원회 출신이다. 

문제는 평화나비네트워크가 위안부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활동들이다. 노란색 평화나비 배지를 만들어 팔아 수익금을 “좋은 곳에 쓴다”는 훈훈한 모습 뒤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집행위원 6명 중 4명이 간첩 행위자와 연루)와 긴밀한 네트워크 유지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주제로 한 농활이나 강연회를 기획한다. 

이 강연회는 위안부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가르쳐 주는 강연이 아니다. “박정희가 왜 친일파인지, 어떻게 사람들 잡아다 죽였는지, 그러므로 죄인의 딸인 박근혜도 친일파이며 이번 위안부 한일협상 역시 그런 역사적 배경 하에 타결 됐다”는 식의 강연을 한홍구, 박한용 따위의 사이비 역사학자들을 연사로 모셔서 진행해 오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치하에서 교사를 했던 경력, 1944년 만주군 군관 경력이 이른바 친일 이력에 해당한다. 박정희 집권 직후 추진한 한일협정이 그의 오래 된 친일 습관의 발로라고 역사음모론자들이 말한다. 

독립운동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무장독립 투쟁, 외교 투쟁, 실력양성 투쟁, 크게 이 세 가지의 방향이다. 무장독립 투쟁은 세계인들과 조선 땅에 살고 있는 한민족에게 우리가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그러나 안타깝게도 1930년대 초반 이후로는 활동을 하지 못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외교에 의해 독립을 추구하는 외교 투쟁 노선은 언론·출판·대중집회·로비 등을 통해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한국의 독립이 필요함을 알리는 노력이다. 또 해외에 진출한 한국 동포들을 교육하고 계몽하여 그런 노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강화시키는 방안도 포함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런 노선의 대표적 인물이다. 실력양성운동은 한민족의 근대화를 통한 점진적 독립을 노렸다. 그 당시의 독립은 단순히 ‘외세로부터의 해방’ 을 뜻하는 것이 아닌, ‘어떤 민족이 근대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증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할 당시,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던 일본이 실상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해 가르치는 것에 불만을 갖게 돼 갈등이 잦았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에 지원한 것은 실력 양성 측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돈 좀 빌려주십시오” 

한일협정을 생각해보자. 굴욕 외교라고 한다. 맞다. 굴욕 외교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국제금융 신용도로 차관을 빌릴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돈 좀 빌려주십시오.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 주세요. 돈 좀 빌려 주세요.”(박정희 서독 국회 연설 중) 

조국의 현대화 이전에 근대화부터 달성해야 했던 박정희에게는 부모의 원수가 건네준 돈이었다고 해도 달가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회가 극심하게 혼탁할 때, 특히 군이 정식으로 참모 그룹을 키우며 엘리트 계층을 군으로 진출하게끔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더욱이, 군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게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한 지도자의 숙명은 이전 정권보다 더 나은 삶을 국민에게 보장해 줘야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가난을 증오했던 박정희. 국민들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것이 늘 가슴 아팠던 이승만. 두 사람이 일본을 바라보는 관점은 친일도 반일도 아닌 극일(克日)이었다. 

시간이 흘러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최초로 일본 정부로부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사과라는 외교적 성과를 얻어 냈다. 모든 국민이 얼떨떨해 하면서도 기뻐했고, 필자와 같은 걱정 많은 사람들은 “아베 정권이 저런 파격적 행동을 할 리가 없는데, 혹시 외교적으로 공개할 수 없는 거래가 있었던 거 아니야?” 라고 의심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지난 수 년 간 아베 정권의 정체정은 내셔널리즘이었으니까. 

그러나 한나절 만에 상황은 반전됐다. 정대협이니 평화나비네트워크니 각종 좌익 시민단체들과 좌편향 인터넷 언론들이 일제히 “이것은 굴욕 협상”이라고 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아쉽지만 정부가 수고했다”며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도 그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이후 소녀상 앞에서 밤을 새는 무슨 무슨 좌익 단체 소속 학생들이 생겨났으며(매일같이 밤을 샜던 한 학생은 4·13 총선 당시 민중연합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한일협상은 국정화 교과서 이슈와 합세해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역사적 죄인으로 몰고 갔다. 

아이러니한 점은 역대 정권 중 어느 누구도 박근혜 대통령이 받아 낸 수준의 사과나 책임을 일본 정부로부터 이끌어낸 적이 없었으며, 한일협정으로 양국이 교류를 한 이후 어느 정부도 이번 정권만큼 한일관계가 경색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 약 3년 전 위안부 할머니 지원 활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생겨난 평화나비네트워크의 핵심들은 구 통합진보당 학생위원회 출신이다. 수요집회 장소 벽면에 소위 ‘평화나비’를 붙여놓은 모습. / 연합

누가 이 만큼의 양보를 얻어냈나? 

박근혜 대통령이 그간 끊임없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청산 문제를 제기해 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외교 영역에 국민 정서를 개입시켰기 때문에 지난 3년간 외교안보적, 경제적 손실을 입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개념을 모르는 세대가, 함부로 그 시대를 말하고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 우리가 세계 무대에서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때로는 비웃을 수도 있는 데는 피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원수 앞에 고개 숙이고 돈을 빌려야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참담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자리에 학생들도 좀 얼굴이 보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학생들! 지금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말하고 떠들면 내용도 모르고 덮어놓고 거리에 나가서 우선 플래카드를 들고 성토대회를 하고 무슨 정부 물러가라, 매국하는 정부 물러가라, 이런 철없는 짓들 하는데, 나는 학생 제군들에게 솔직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두겠네. 제군들이 앞으로 이 나라의 주인들이 되자면 적어도 10~20년 후에라야만 제군들이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제군들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우리들 기성세대가 모든 것을 책임을 지고 여러분들 못지않게 나라에 대한 것을 걱정을 하고 근심을 하고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학생 여러분들을 절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여러분들과 같이 한 20대 젊은 학생 시절을 생각 좀 해보는데 여러분들은 아직까지도 공부를 하고 배워야 되고 모든 것을 훈양을 해야 되고 자기의 실력을 배양할 시절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부가 하는 일,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에 낱낱이 직접 간섭하거나 참여하거나 직접 행동해온 길, 그런 시기도 아니고 또 그런 것이 여러분들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학생들은 4·19 정신 운운하며 뛰어나옵니다. 여러분들의 선배가 4·19 당시에 거리에 나와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같이 지키기 위해서 뛰어나온 그 정신은 그야말로 백년에 한번, 수백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이런 숭고한 정신인 것입니다.

어떠한 사소한 정치적인 문제가 국회나 사회에서 논의가 될 때 그 문제 하나하나를 들고 학생들이 거리에 뛰어나와서 그것이 4·19 정신이라고 이렇게 떠든다면 그야말로 4·19 정신을 그 이상 더 모독하는 것이 없을 뿐더라 4·19 정신은 절대 그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작년 연말에 내가 독일에 방문했을 때 독일 대통령이 첫날 저녁에 나를 만나서 한 얘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엔 왜 학생들이 거리에 뛰어나와서 정치 문제에 대해서 자꾸 간섭하기 좋아합니까?’ 나한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나는 다소 창피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한국의 학생들은 일부 그런 학생이 있지만, 대다수 학생들이 다 건실하고 나와서 하는 것은 일부 학생들뿐이다.

당신 나라에도 그런 학생들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 이런 답변을 했더니 독일 대통령이 하는 말이 ‘내가 알기에는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정치 문제를 가지고 데모를 하고 떠드는 나라치고 잘 되는 나라가 없습디다’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독일 대통령의 훈수 

‘자기 나라 독일은 1차 대전 이후 그 동안 전쟁을 두 번 했고 정권이 몇 번 바뀌고 사회에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지만 1919년에 한 번 함부르크항에서 영국 배와 독일 배가 충돌을 했을 때 학생데모사건이 있은 연후에 그 뒤에 학생들은 한 번도 거리에 나온 일이 없다. 학생들은 어디까지든지 이 시기에는 공부를 해야 되고 배우는 시간이고 실력을 양성해야 하는 시간인데 자기들이 직접 이런 일에 참여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의 학생들은 거리에 나오기 좋아합니까? 학생들이 거리에 떠든다고 해서 난 절대 그 사람들이 애국주의 학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혹 대통령이 이런 소리 한다고 해서 일부 학생들이 불만을 품을지 모르지만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한국의 일부 철부지한 학생들에게 확실히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한일 문제를 가지고 거리에 나와서 떠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부 정치인들의 앞잡이 노릇밖에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합니다.

한일회담의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점이 여야 간에 싸우고 있는 쟁점인지, 내용이라도 알고 떠들어야지 덮어놓고 뭐라고, 요즘에 바깥의 세상이 뒤숭숭하니까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서 한번 기분을 풀기 위해서 나가보자는 이런 사고 방식을 가진 학생들이 있다면 이것은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 우리 조국의 앞날을 위해서 대단히 걱정되는 일이라 이겁니다.”(박정희 대통령 연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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