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 돈만큼의 총을 주시오”
“나에게 이 돈만큼의 총을 주시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7.28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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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정신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8)

“당신이 나에게 준 돈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요.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 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박정희 대통령은 물욕, 특히 개인적인 재산에 대한 욕심이 없는 인간유형이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보리를 많이 넣은 잡곡밥과 국수를 즐겼고, 국산품을 애용했다. 

국산 와인 개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두산산업이 마주앙 상표의 포도주를 개발했을 때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신부와 수녀를 청와대에 초청하여 외국산 일류 포도주와 비교하기 위한 시음행사를 열기도 했다. 

박정희는 틈만 나면 헬기나 자동차로 국토 곳곳의 현장 확인에 나섰는데, 그때마다 헬기 기상에서 여기저기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 아름다운 농촌주택, 크고 작은 공장들과 다목적댐, 방조제, 간척지 등을 내려다보며 마치 대통령 자신의 아파트나 집, 공장들이 늘어나는 듯 기뻐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는 농민과 공장 근로자, 생활구호대상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회 있을 때마다 지시를 하고 정책을 챙겼다. 

박정희는 농민이 잘살고 농촌이 풍요하면, 특히 자작농(自作農)이 늘어나면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절대로 이긴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장 근로자가 중산층이 되어야만 사회가 안정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맥도널 더글라스가 건넨 100만 달러의 뇌물을 돌려주며, 돈을 전부 총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인의 물욕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국가 안보 증진과 경제 성장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린 소녀의 한(恨)도 못 풀어준단 말이오?” 

1970년대 초 박정희가 경남 마산의 한일합섬 공장을 시찰할 때의 일이다. 수천 명의 여공들이 열심히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다. 다른 소녀들보다 어려보이고 키도 작은 한 소녀를 본 대통령이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을 물었다. 그러자 이 소녀의 입에서 기상천외한 말이 나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恨)입니다. 저도 영어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영어를 잘 모르니까 감독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요.” 

월급을 올려달라든가, 근무 여건을 개선해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이 나이 어린 소녀가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니…. 순간 대통령이 울컥하여 말끝이 갈라지고 흔들리더니 이내 눈에 이슬이 맺혔다. 대통령 체면에 잠시 고개를 젖히는 등 애써 눈물을 숨겼다. 

감정을 추스린 대통령은 옆에 있던 김한수 사장에게 “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뜻을 일아챈 김 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대통령의 눈물로 인해 1974년 산업체 부설 야간실업학교 1호인 한일여자실업고가 개교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나이 든 여공들까지 모두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졸음을 참아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회사에서는 교복을 무료 지급하는 등 여공들이 공부에 필요한 소요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한 맺힌 교복이었다. 그래서 이들 여공들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갈 때면 꼭 교복을 입고 갔다. 방학 겸 휴가철이면 고향에 갔던 학생 겸 근로자들이 자기네 뒷동산이나 논두렁의 뗏장을 떠다가 학교 운동장을 덮어 훗날 ‘팔도 잔디’로 유명해진 학교다. 

이 학교의 첫 졸업식인 1977년 초가 가까워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문교부(오늘날의 교육부)는 규정에 의거, 이 학교는 정식 인가를 받은 3년제 고교가 아니므로 수료증은 가능하지만 정식 학력을 인정할 수 없어 졸업장 수여는 불가하다는 답이 날아왔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즉시 문교부 장관을 불렀다. 

“장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어린 소녀가 낮에 일하고 밤에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래, 그 한도 못 풀어준단 말이오? 그런 규정은 당장 뜯어고치시오.” 

아들 지만 씨를 육사(陸士)에 보내며 

대통령의 준엄한 질타에 당장 규정이 고쳐져 졸업생들은 모두 정식 학력을 인정받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졸업식 날 학생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재학생도 따라 울고, 교사도 사장도, 참석한 내빈도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

박정희는 1977년 1월 30일, 외아들 지만 씨를 육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켰다. 이날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6시 반 경 기상. 7시에 지만이를 깨우다. 영하 14, 15도의 혹한이다. 8시 반 지만이와 조반을 들다. 지만이는 아침에 육사 생도 규정대로 짧게 이발을 했다.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 “머리를 깎고 나니 이제 정말 집을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육사와 같은 훌륭한 학교에 가는데 사나이 대장부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야 어찌 하느냐” 하고 타이르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하여 간신히 참고 태연한 체 하였으나 이 자리에 저희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나도 몹시 마음이 언짢았다. 저것이 저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저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참을 길이 없었다. (중략) 

오전 중에 지만이 방을 정돈했다. 온 집안이 텅 빈 듯하다. 군에 자식을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다 마찬가지리라.’ 

박정희 대통령의 월남 파병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한국군 무기 현대화를 위해 M-16 소총 공장 건설을 지원해줬다. M-16 제조회사인 맥도널 더글러스(김성진의 <박정희를 말하다>에는 M-16 제조회사가 맥도널 더글러스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정렴 회고록 <한국경제정책 30년사>에는 콜트 사로 기록되어 있다.

1971년 3월 13일 정래혁 국방부 장관과 미 콜트 사의 벤케 사장이 M-16 소총 생산 공장 한국 내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편집자 주)는 중역인 데이빗 심슨을 청와대로 보내 한국에 M-16 공급계약 체결에 감사하는 인사를 전했다. 당시 심슨 중역은 박정희를 예방한 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비서관이 열어준 집무실 안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다. 커다란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 속에서 자신의 몸보다 몇 배나 커 보이는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더운 날씨를 이겨내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내 마음에 자리 잡았던 모순이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의복을 갖춘 다음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앉으세요.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켠다는 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요.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 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 아니겠소. 여보시오, 비서관, 손님 오셨는데 잠깐 동안 에어컨을 켜는 게 어떻겠소?”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 나라의 대통령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러 후진국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중략)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 소총의 수입을 결정하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표시하는 작은 성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요?” 

나는 준비해간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박 대통령은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구려….” 
차갑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었다. 나는 그도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표시하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요?”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시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 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요.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값어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 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돈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요.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 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말했다. 

“네, 잘 알았습니다. 반드시 100만 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집무실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돌아본 나의 눈에는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그러나 너무나도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보였다.’(김성진 저, <박정희를 말하다>, 삶과 꿈, 303~305쪽)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정희 한일여실고 제1회 졸업식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gbn=DH&mediaid=10098&mediadtl=20558&qualit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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