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 ‘시민 자산화’는 양지 바른 좌익 시민운동 생태계에 금잔디를 깔겠다는
정치적 의도. 따라서 ‘시민 자산화’는 ‘좌익 활동가 자산’이라 부르는 것이 올바른 용어
요즈음 서울 어느 지역을 가든 눈에 띄는, 심지어 웅장하기까지 한 신식 건물들이 있다. 소위 청년공간이라든지 시민공간이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마포구, 성북구, 용산구, 은평구 등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청년 활동가나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건물에 입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 받은’ 단체 내지는 활동가들이다. 서울시의 ‘선택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박원순 시장의 일관된 신념인 ‘공동체 경제’를 충실히 전파하는 메신저 활동을 해 왔거나, 그럴 계획이 있어야 한다.
최근 들어 서울시에서는 산하 위원회인 ‘서울시 마을공동체위원회’, ‘협치(協治)서울 추진단’ 명의로 일명 “시민 자산화” 토론회를 몇 회째 개최하고 있다. 요는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된 지역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마을 공동체가 공동 경영을 할 수 있는 시민 자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좌익 진영 전문가들에 따르면 시민 자산화의 정의는 “특정인의 사적(私的) 소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부나 지자체 같은 공공의 소유도 아니다. 시민들이 공동의 소유권을 만들고, 책임 있는 협치 구조를 통해 함께 운영해가는 과정을 이른다”라고 한다.
무슨 집단농장의 21세기 버전 설명을 보는 것 같다. 이 글에서 임대료 문제는 거론하지 않겠다. 서울시 토론회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표면으로 내세우고 있을 뿐,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마을공동체 경제와 시민 자산화의 정당성이다.
서울시가 말하는 ‘시민’의 정체는?
먼저, 시민 자산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학 개념인 ‘공유지의 비극’(주인이 따로 없는 공동 방목장에선 농부들이 경쟁적으로 더 많은 소를 끌고 나오는 것이 이득이므로 그 결과 방목장은 곧 황폐화되고 만다는 걸 경고하는 개념)을 낳을 공산이 크다. 일부 좌익 언론들이 영국에서 공동 소유의 개념이 법과 제도적 지원을 받아 어떻게 성공 사례를 만들었는지 열심히 퍼 나르고 있지만,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서울시에서 내세우는 ‘시민 자산화’라는 용어에서 ‘시민’은 평범한 시민들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러니까 전투적 학생운동 시기부터 현재의 권력형 시민사회 시기까지 좌익들은 풀뿌리 생태계를 건설해왔다.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부터 서울시에서 말하는 ‘시민’은 ‘좌익 시민사회 생태계에서 좌익 이념을 갖고 활동하는 시민 활동가’를 의미한다.
서울시가 시민 자산화를 논하는 것은 안 그래도 양지 바른 좌익 시민운동 생태계에 금잔디를 깔겠다는 정치적 의도다. 따라서 시민 자산화가 아닌 좌익 활동가 자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용어다. 한편 서울시에서 이미 마을공동체에 민간 위탁 외주 사업 ‘몰아주기’로 예산 지원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자, 그렇다면 서울시의 마을 공동체주의는 우리가 살리고 지켜가야 할 가치를 갖고 있는가? 더 구체적으로는 박원순 시장의 ‘공동체 경제’는 2016년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이 시책으로 지향할 만한 가치인가?
원래 공동체 경제,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는 그 속성이 매우 폐쇄적이다. 폐쇄적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로는 첫째, 공동체 구성원이 자유의사로 마을의 정책에 불참여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구조다. 이는 소규모 마을 공동체에서 생을 이어가야 하는 구성원의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외지인에게 닫힌 구조라는 것이다. 잠시 박원순 시장의 측근이자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센터장이면서 서울시 협치 자문관이기도 한 유창복 씨의 말을 살펴보자.
“시민 자산은 과거 농촌의 마을 사람들이 함께 땔감을 구하고 버섯을 키우며 소나 염소를 풀어먹이던 공동의 뒷산 같은 것이다. 이 뒷산을 회복해야 한다. 화목한 문중(門中)에 문중 재산이 있듯이 시민과 주민에게 시민 자산이 있어야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시민사회, 지역사회가 가능하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유창복 씨는 시민들에게 농촌적 감성, 혹은 시골 낭만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뿐이다. 폐쇄적 마을 공동체로 남아 있는 몇몇 지역들을 떠올려보자. 그곳에는 주민들이 뒷산에서 화목하게 열매와 버섯을 따먹고, 함께 소를 치는 등의 아름드리 풍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풍광이 존재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았던 신안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은 폐쇄적인 섬마을 공동체 안에서 쉬쉬하며 일어난 일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적지 않은 주민들이 외지인인 젊은 여교사가 당한 폭력을 알고 나서도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대에는 현대에 맞는 진화된 도덕성이 요구된다. 기술의 후퇴는 대개 정신의 후퇴까지 가져온다. 박원순 시장이 청사진을 그리고 유창복 씨와 같은 좌파 활동가들이 현실화하려고 들쑤시고 있는 원시 농경사회 경제체제는 우리가 가꿔온 사회를 교란시키며 정신마저 오염시킬 가능성이 높다.
청년수당은 ‘박원순 키즈’ 양성이 목적
일례로 성미산 마을 등의 마을 공동체 활동가를 다룬 좌파 언론들의 기사들을 읽어보면 그 무슨 1970년대 몇몇 소설들처럼 주인공들이 대개 청년, 예술가, 상인, 주민과 같은 고유명사로만 불린다. 하나같이 이념적 목적성을 띠고 힘깨나 있는 좌익단체에서 한 자리씩 맡고 있는 면면들이기 때문에 추상적 단어 뒤로 숨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숨는다 뿐인가? 고유명사가 주는 순수성마저 획득할 수 있는 1석2조의 장치다. 당연하게도 이 활동가들은 마을에서 각자 직책을 맡고 정책을 결정한다. 이들 주요 활동가들 대부분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거나, 전교조 출신 해임교사 등 좌파 성향의 인물이고, 공동체가 운영하는 카페에는 정치색이 강한 서적과 전단지들이 즐비하다.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풀뿌리 중심의 좌익 양성소라면 박원순 시장의 이른바 청년 설자리 정책인 청년수당은 서울시를 전국구로 한 ‘박원순 키즈’ 양성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정책은 긴밀하게 연계가 돼 있다.
서울시에서 청년수당을 받는 청년들은 서울시 인증 청년교육 받아야 한다. 이 교육을 받으면 수료증이 나오고, 사회적 기업의 우선 취직 대상의 자격을 얻는다. 현재 한국의 사회적 기업 시스템은 이윤의 3분의 2 이상을 사회에 기부해야 하는데 시스템 절차상 사회적 기업 이윤의 기부가 제일 쉬운 곳이 서울시 마을공동체다.
전통의 가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중요하다. 창업가 정신이 뛰어난 몇몇 청년들은 스스로를 ‘글로벌 보부상’이라 칭하며 해외 시장에 눈을 돌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장사를 한다. 제주도의 5일장에는 2030 젊은이들이 직접 만든 액세서리와 캔들 등을 내놓아 시장에 새로운 문화를 도입함으로써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전통시장에서 어우러져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은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소규모 마을 공동체가 본인들이 자급자족하며 전체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들만의 히피 공동체를 구성해 살아가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히피 공동체에서나 통할 문화와 감성을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시책으로 도입하려는 박원순 시장의 정책이다. 마을장, 장돌뱅이 등등의 전통적 단어들에 이념을 우겨넣는 정치병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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