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잘 먹고 잘살 때에만 가능
자유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잘 먹고 잘살 때에만 가능
  • 정재욱 미래한국 기
  • 승인 2016.07.3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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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여행-우암(友巖) 김재순이 말하는 한국 근현대사>  

김재순·안병훈 대담, 기파랑 

지난 5월 17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제13대)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7선 국회의원으로 정가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고등학교 졸업생 신분으로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에 가입해 반탁(反託) 운동을 하는가 하면, 이듬해 대학에 들어가선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60년 이승만 정부 막바지에는 월간지 <새벽>의 주간으로 자유당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19혁명에 큰 공을 세웠다. 

<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여행>은 생전(生前) 김재순 의장과 안병훈 기파랑 대표가 만나 나눈 대담을 정리한 일종의 회고록이다. 

김재순 의장에 대한 안 대표의 평가는 이렇다. ‘그는 피가 뜨거웠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나서는 행동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따뜻하고 유머러스했다. 그것은 그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었다’ 등이다. 

꼼꼼한 자료 조사와 풍성한 대화 덕분에 이 책에는 굴곡이 많은 우리 근현대사를 살아간 노 정객이 체험한 비화가 많이 담겨 있다.

예컨대 김 의장이 1965년 6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앞두고 일본 정계의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島龍三)를 당시 박정희 정부의 실세였던 김종필에게 소개한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려지는 것이다. 1962년 11월 ‘김종필-오하라 메모’가 작성되기 전에 세지마 류조가 김 의장에게 김종필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해방 이후 청년 지식인들의 활동 반경이 대단히 넓었다는 점이다. 정부의 장관급 관료들과 교분을 쌓았던 김 의장은 식견을 넓히기 위해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김구와 최남선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기도 했다. 

다만 김 의장이 1951년 2월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 학생회를 조직하고 학생회장을 맡아 반(反)정부 시위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평가가 엇갈릴 대목이다. 여기에는 안창호 계 흥사단 출신인 김 의장의 뿌리 깊은 이승만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안병훈 대표에게 “그렇지 않아도 자기 혼자 도망가서 한강다리 끊은 사람이라고 이 박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을 땐데 그런 (직선제 개헌이라는) 얕은 술수나 부리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여하튼 4·19혁명 때 민주주의에 헌신한 김재순 의장은 그보다 1년여 후인 5·16 이후에는 쿠데타 군부 실세인 김종필과 의기투합해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그리고 승승가도를 달렸다. 다음은 4·19 주동자인 그가 박정희 정부에 참여한 것에 대한 설명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다가 산화한 젊은이들과 민주 발전의 제단에 젊음과 생명을 바친 그들의 고귀한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민주주의라는 허울만 남지 않았습니까? 국민의 삶을 도외시한 허울뿐인 민주주의, 이탈된 민주주의를 정상 궤도로 옮기는 일, 그것이 바로 제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일임을 통감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잘 먹고 잘살 때에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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