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대(事大)의 정치심리
중국 사대(事大)의 정치심리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8.30 0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층취재]

국제정치는 ‘적과 동지’로 구별되는 질서, 중국은 경제적 동지이면서 정치적인 적. 

경제적으로 이롭다고 해서 적에 대한 개념을 포기하면 위험 초래 

“한국은 중국이라는 달리는 말 궁둥이에 붙어 만 리를 따라가는 파리와 같다.”이렇게 말한 이는 박원순 서울시장이었다. 2015년 박 시장이 베이징을 방문한 후 언론을 통해 던진 메시지는 명료했다. ‘한국은 21세기의 슈퍼파워로 등장한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이다. 

박 시장은 이를 ‘중국 사용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비단 박원순 시장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식자층과 기업인, 그리고 일반 서민들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심대하게 평가한다.

만일 우리가 중국과 사드 문제 같은 것으로 갈등을 빚고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면 중국의 경제적 보복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많은 공감을 받는다. 일단 이러한 생각의 시비를 가리기 전에 해방 후, 동아일보에 등장했던 한 사설을 기억해 보자. 

1946년 8월, 동아일보에는 <문화인과 정치참여>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우리는 친미(親美)사대와 함께 배소(拜蘇)사대도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반공과 친공으로 나뉘어 이념 대결 국면이 극한에 이르고 있었다. 사설의 논자는 이러한 갈등을 ‘민족주의’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이란 근대가 만든 상상의 공동체’라고 정의한 이는 故 베네딕트 앤더슨 교수였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민족을 ‘혈연의 무한한 확장’이라고 말한다. 즉 부족주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공동체, 그리고 혈육의 동질성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북한은 6·25를 ‘민족해방, 민족통일 전쟁’이라고 강조했다.

이념과 민족이 동반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당위감은 대한민국에서 ‘민족-민중-민주’라는 NLPD(민족해방, 민중민주)전선을 만들었고, 그것이 오늘날 87체제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추진 동력이었다. 이로써 진보의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자유주의, 개인주의와 손잡지 못하고 ‘집단성’의 민중주의와 민족주의와 손을 잡았다. 오늘날 대한민국 진보의 내면은 그 집단성의 본질에 있어 파시즘이다.

▲ 미래한국 고재영

박원순 시장의 ‘한국은 중국의 파리’론                   

박원순 시장뿐만 아니라, 한국 진보인사들의 국제 질서에 대한 보편적 사고는 ‘반미, 친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 식민’을 지렛대로 해서 한국 진보의 내면에는 어떻게든 북의 ‘민족통일노력’을 방해한 美제국주의자들과 ‘친미, 친일종자’들에 대한 증오가 자리한다. 

반면에 중국은 일제 항일기에 독립투사들을 지원했고, ‘조국통일전쟁’이었던 6·25에서 미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진정한 인민들의 민주기지로 성립한 북한을 지켜냈다는 의식이 거부할 수 없도록 작동한다.

그렇기에 한국의 진보에게 중국은 6·25 중공군 개입으로 통일을 방해한 세력이 아니다. 극단주의적인 종북좌파가 아니더라도, 진보적 민주주의 이념을 갖고 있는 중도좌파들에게도 이러한 내적 논리는 거부하기 어려워 보인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실제적인 면에서 그 지시 대상과 개념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음에도 진보에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자동적으로 반미를 지시하는 코드가 된 이유 역시, 한국 진보의 내면에 깊은 강처럼 흐르는 ‘민족-민중’의 가치 때문이다. 그것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후원자를 만난 것이 오늘 대한민국 진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닌가. 

이들에게 중국의 부상(浮上)은 한국의 보수가 미국을 후원자로 하는 헤게모니적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아닌가. 속내가 궁금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박원순 시장의 ‘한국은 중국이라는 말 엉덩이에 붙은 파리’라는 말을 할 수 없다. 

한국인들이 민족주의를 벗어 던지지 못하는 한, 한국인들은 중국이라는 문화권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민족이란 역사·문화 공동체의 성격을 갖기에 삼국시대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문화는 중국을 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동반성 내지 종속성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19세기 메이지 유신을 거쳐 ‘탈아입구’라는 서구 근대화의 내면을 통해 조선인들과는 그 문명적 분기점을 지나갔다. 그렇기에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보다는 중국인들과 만나면 오히려 문화적 불편함이 적다. 

이로움을 주는 적도 적이다 

한국인들은 공동체를 선호하며 가족과 대의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을 얕보면서도 일제 강점기에서 오는 트라우마 때문에 거부감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의 물건도 사주는 나라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정서(情緖)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국가 정치 질서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 되고야 만다. 이 점에 대해 우리에게 현명한 관점을 제공했던 독일의 헌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살펴보자. 

칼 슈미트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상을 보며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들의 혼합 양상이 공법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사람들이 도덕을 통해 선과 악을 구별하고,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별하며, 경제를 통해 이익과 손해를 구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면 사람들은 정치를 통해서 무엇을 구별하는지 성찰했다.

그 결과, 정치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과 경제가 독립적이고, 예술과 도덕이 독립적이라면, 정치 역시 경제나 도덕과는 독립적이기에 정치에는 ‘도덕적인 적’도 있고 ‘부도덕한 동지’도 존재하게 된다. 

‘아름다운 적’도 존재하며,‘추한 동지’도 정치에는 존재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익을 주는 적’과 ‘손해를 주는 동지’다. 칼 슈미트는 “경제적 이익을 준다고 해서 적이 동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힌다. 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이러한 ‘적과 동지’의 정치적 개념은 주권에 배타적인 국제 정치에서 유감없이 드러나게 된다. 미국은 분명히 우리의 우방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반드시 이익을 주는 존재가 아닐 수 있으며, 중국은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을 준다하더라도, 그것이 정치적으로 우방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만일 우리 위정자들이 일찌감치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알았다면 결국 중국은 북한 핵에 대해 ‘동지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우리의 동지인 이상, 미국이 주권상, 적으로 간주하는 중국에 대해 군사적 방어책으로 사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일찍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과도하게 순응적이었다. 중국과의 교역 확대 과정에서 중국과 우리 사이에 정치적, 주권적 관계 설정에 사실상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과 중국 간에 서로 ‘정치적 적’이라는 질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등거리 외교’라는 비현실적 정책으로 ‘게도 구럭도 잃는’ 상황에 온 것은 아닌가 라는 점 때문이다. 

중국은 동지가 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과의 경제 협력 속에서도, 중국이 대한민국과 북한을 ‘동시적 동지’로 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전제 하에서 중국의 북핵 처리 프로그램과 우리의 사드 배치 프로그램을 연계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맞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포섭전략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 결국 민족의 개념이 추동하는 ‘한-중 문화·역사 공동체’라는 근본 사대주의가 발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개념은 국가들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적과 동지의 구별 원리를 희석화 시키는 것이었고, 그러한 ‘평화주의’가 더 큰 전쟁의 위험을 불러온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의 생생한 역사적 진실이었던 것이다. 

중국이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대한 지정학적 필요성 때문에 서해와 제주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는 이미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된 바가 있다.

2012년 2월, 세종연구소가 펴낸 <미국과 중국의 동아시아 해양 전략과 한국의 해양안보(정철호 연구위원)>라는 보고서에는 ‘미.중 간의 남중국해 해양통제권 경쟁과 갈등의 영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보고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동아시아 영유권 분쟁, 특히 중국의 남사군도 분쟁의 원인은 과거 대륙세력에서 해양세력으로 진출하려는 중국의 ‘대해양전략’의 변화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략이 미국과 일본을 크게 자극하고 있으며 우리 한국도 이 영향권 안에 놓여 있다고 봤던 것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중국의 해상 봉쇄를 위해 일본-한국-대만-필리핀 군사기지 라인에 이어 베트남과 군사적 동반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해상 방위선이 연해(沿海) 중심에서 대양(大洋) 쪽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심화될 경우, 미국의 워게임 시뮬레이션은 2028년경 미국과 중국 간에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결론이다. 따라서 현재 동아시아 영유권 분쟁은 단순한 민족감정과 애국심, 그리고 자원 문제라는 피상적 배경을 넘어 중국과 미국의 해양전략이 충돌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세종연구소의 이러한 분석은 최근 필리핀이 헤이그의 중재재판소에 남지나해에 대한 영유권 분쟁에서 승소하면서 성큼 현실로 다가왔다. 그 순간에 미국은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고고도 미사일 사드 배치를 한국에 결정적으로 통보해 왔을 것임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러한 시나리오에 전혀 대비하는 프로그램이 없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사드는 어차피 미.중간에 풀어야 할 문제이니, 우리로서는 공을 양쪽에 넘겼다고 방심했던 것은 아닌가.

미국과 중국이 정치적으로 적대관계라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점을 지나치게 믿었던 것은 아니었나. 그렇다면 우리는 칼 슈미트가 성찰했던 대로 ‘정치적 敵’은 ‘경제적 동지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너무 쉽게 간과했던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