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터널> ‘헬조선’이 아니라 ‘가족’으로 통했다
<부산행> <터널> ‘헬조선’이 아니라 ‘가족’으로 통했다
  •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6.09.02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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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좌파 문화권력과 영화

‘헬 조선’에 입각한 현실 비판 영화. ‘진보적’ 평론가들은 가족애(愛) 과잉 문제 삼아 퇴행적이라 지적했지만, 관객은 가족 코드에 공감 

여름 극장가에 <부산행>, <터널> 재난 영화 두 편이 잇따라 개봉하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부산행>은 KTX 안의 평범한 승객들이 좀비들을 피해 살아남기 위한 혈투를 벌이는 영화이고, <터널>은 붕괴된 터널에 갇힌 주인공이 생존해 나오는 과정을 담았다.

재난 극복의 아슬아슬함이 물론 영화의 흥행 요소이겠지만, 두 영화는 모두 현실 비판이라는 면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이 영화들엔 지난 2014년 침몰한 세월호의 아픔이 담겨 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진이 여전한 세월호가 재난 영화에서 빠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어색한 일일 수도 있다. 주제 의식 면에서 그렇지만, 흥행을 고려해도 현재 우리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두 영화가 세월호 사고를 차용한 정도는 다르다. <부산행>의 경우 KTX라는 교통수단과 그 속에 갇히다시피 한 승객들, 그리고 열차 운행과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기관사라는 설정 자체가 세월호의 상황과 유사하고, 위선적 기득권층을 상징하는 인물로 고속버스 회사 간부가 등장해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정도다. 

이에 반해 <터널>은 좀 더 적극적이다. 세월호 침몰 당시 구조 과정에서 제기된 정부의 위기 대응 조치에 대한 불만 사항-물론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는 당시 세간에 떠돌았던 선동성 유언비어들을 모아놓은 듯한-들이 배치돼 있다.

예컨대 인명 구조보다 유가족과 사진 찍기에 급급한 공무원들의 모습, 비용 문제 때문에 유가족에게 구조활동 중단 동의 각서를 받는 모습 등은 모두 세월호 구조 과정에서 제기됐던 논란들이 비틀어져 녹아 있는 대목들이다.

▲ 영화 <부산행> 스틸컷

‘헬 조선’? 좌파 영화 ‘선동 공식’에는 2% 부족 

특히 중견 배우 김해숙 씨가 연기한 주무 부처 장관은 생존자 구조보다 의전과 치적 쌓기에 바쁜 관료주의의 전형처럼 등장하는데, 이 인물의 생김새는 누가 봐도 박근혜 대통령을 빼다 박았다. 중간 중간 웃음을 자아내는 장치로 살짝 비껴나가긴 했지만, 세월호 처리와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정면으로(감독 입장에선 풍자) 내놓은 것이다. 

여기서 우문(愚問)을 하나 해보자. 그렇다면 이 영화들은 요새 흔하디흔한 ‘진보적’ 선동영화인가? 일단 ‘위선적 권력층이 기득권을 독식하는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지옥과 같다’는 ‘헬조선’이라는 프레임 설정으로 보면, 이 영화들은 충분히 ‘진보적’이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은유적 설정을 차치하더라도, 감독의 설명만 들어도 이런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특히 <터널>의 김성훈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풍자와 관련해 “누굴 은유하려는 건 아니지만 분명 최고 통수권자로 비유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때 했다. 오히려 아니라고 하는 게 거짓말이지 않을까”라고 밝혔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을 영화에 차용한 정도 때문인지, 두 영화에 대한 영화 평론가들의 평이 엇갈린다. 고매한 진보 평론가들의 쓴소리를 듣는 건 주로 <부산행>인데, 대체로 ‘국가가 방기한 재난의 희생자’, ‘자본주의 탐욕이 만든 재난’이라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상업성에 치중하느라 리얼리즘을 놓쳤다는 말이다. 

이 말도 맞다. 사실 <부산행>이 좌파 영화로 인정을 받으려면, 인간들을 좀비로 전염시킨 바이러스를 만든 바이오 회사와 이 업체에 투자해 부를 쌓은 정재계 커넥션, 또 투자 유치와 주가 띄우기 과정에서 활약한 언론 권력 등이 등장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좀비 바이러스의 근본 원인이 미군 부대의 생체 실험 정도는 돼야 좌파 영화로 완성될 수 있다. 이쯤 되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 정계·재계·언론계 권력의 비리를 다룬 <내부자들> 같은 영화와 같은 대열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진보’ 시각에서 보면 <터널>도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결국 주인공을 살린 것은 정의감 넘치는 우리 정부의 소방 구조대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왜 그럴까. 두 영화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특히 <부산행>의 이야기 구조는 가족애가 완성했다. 좀비 바이러스 회사의 투자자 가운데 하나였던 주인공 석우(공유)가 개인주의 성향에서 벗어나 이타적인 희생을 했던 것은 딸의 영향이었고, 그 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또 영화의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끌고 간 상화(마동석)의 헌신도 결국 임신한 아내와 뱃속의 자식 때문이다. 

또한 <터널>의 주인공이 끝까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도 결국 밖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딸을 보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가족은 ‘진보적’ 코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이념 운동의 시각에서 보면, 가족은 대중의 의식화나 체제 변혁의 동력을 약화시키는 핵심 요소, 종교와 마찬가지로 아편과 같은 존재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나오는 림계진(이범수)이 “이념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하는 것이 이런 맥락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인공 장학수(이정재)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도록 했던 것도 이념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친구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념의 비정함이었다. 

‘피’보다 역사의 ‘진보’가 소중한 우리나라 평론가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진보적’ 평론가는 <부산행>이 보여주는 가족애에 대해 퇴행적이라고까지 지적했다. 현실과 리얼리즘을 희석시키는 ‘신파조’라는 말이다. 이 퇴행이라는 평론가적 표현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놓고도 진보적 평론가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물론 영화 전편에 흐르는 반공주의에 주목한 평가였지만, 주인공 장학수와 어머니, 장학수의 동료인 남기성(박철민)과 아내가 대표하는 영화 속 가족애에 대해서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가족이든, 반공이든 진보적 평론가들이 원하는 현실 인식에 부합하지 않으면 퇴행적이 된다. 퇴행이라는 것은 역사가 진보한다는 전제가 있는 개념일 텐데, 이렇게 보면 가족은 과거의 가치가 된다. 그리고 이는 달리 해석하면, 우리나라 평론가들이 지금 림계진처럼 ‘이념이 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들리는 대목이다. 

영화 <부산행>과 <터널>의 감독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영화를 통해 희화화는 해도 실제로 ‘진보적’ 이념운동에는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관객의 힘 때문에 이를 관철하지 못한 것이다. 

영화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한다. 저예산 영화의 경우에는 감독의 작가주의적인 이념 성향이 투영될 수 있지만, 수백억의 자본이 투입되는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이중, 삼중의 검열 시스템이 작동되기 때문에 개개인이 아무리 운동가 성향을 지녔어도 실제로 개봉할 때는 관객이 원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영화계의 구조라는 것이다. 

가족을 내세운 <부산행>과 <터널>의 흥행 성공, 그리고 반공을 공론화한 <인천상륙작전>의 흥행 성공은 결국 일부 평론가들이 퇴행적이라고 했던 가치들이 관객들과 통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근에 ‘헬조선’임으로 분출된, 1980년대부터 구축된 좌파 문화권력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관객들은 “무엇이 퇴행적인데”라며 기꺼이 뿌리치고 있다. 우리 관객들에게 ‘진보적’ 선동이 식상해졌다는 것이고, 이런 사실을 영화 산업계도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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