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관심은 민족이었다
박정희의 관심은 민족이었다
  •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6.09.06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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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저서 4권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속에는 ‘민족’이란 과제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는 패배주의적 사고에 빠진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고군분투 

박정희 대통령은 만약 군인이 되지 않았으면 소설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문필에 일가견이 있었다. 때문에 그가 1961년 5·16혁명 이후 총 4권의 저서를 발간했다는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박정희는 고비마다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담은 내용을 집필하여 단행본 행태로 발간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집필한 <우리 민족의 나갈길-사회재건의 이념>(1962년 3월 1일), 1963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 출간한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8월), 집권 후 10년을 정리한 <민족의 저력>(1971년 3월 1일), 10월 유신 후 6년 만에 내놓은 <민족중흥의 길>(1978년 9월 10일) 등이 그것이다. 

4권의 저서 곳곳에는 5·16 이후 국가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사람으로서 느낀 책임감과 과제, 목표, 그리고 치열한 현실 인식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박정희의 저서 4권은 5·16, 대통령 선거 출마, 10월 유신 등이 어떤 국내 정치적 상황과 위급한 국제 정세 속에서 단행됐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다.

또 1960년대와 1970년대, 박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 개발 정책들을 추진해 나갔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 속에는 항상 ‘민족’이란 과제가 용솟음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의 ‘밥’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였다. 박 대통령은 패배주의적 사고에 빠진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의식을 심고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애를 썼다. 

한강의 기적은 ‘민족 혁명’에서 시작됐다 
<우리 민족의 나갈길-사회재건의 이념>(1962년 3월 1일) 

박정희의 첫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사회재건의 이념>은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1962년 3월 1일 발간한 것으로,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현실 인식과 국가 운영 비전을 밝힌 자료다. 1961년 5·16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혁명위원회,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임시 조직을 통해 국정을 수행하다가 전역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 때는 해방된 지 17년, 6·25가 휴전된 지 9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박정희의 가장 큰 고민은 공산주의의 침투와 정치인들의 분열이었다. 

‘공산 종주국이며 북괴의 상전인 소련이 세계 적화의 야욕을 버리지 않는 이상 6·25와 같은 남침이 다시 없으리라고 아무도 단정할 순 없다. … 공산주의자들은 그들만이 애국자요 민족애의 순교자라도 된 것처럼 떠들고 있지만, 실은 양의 껍데기를 쓴 이리에 불과하다. 공산주의자들의 전매용어인 조국통일이니 중립통일이니 하는 것도 실상은 언어의 선전적 마력을 이용하여 그들의 내심의 흉계 즉 적화통일을 교묘하게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는 이런 대내외적 문제의 근원을 조선시대의 유산(遺産)에서 찾았다. 조선시대를 토지개혁, 외교, 신분제도, 명분론적 당쟁 등을 통해 분석했는데, 조선시대가 갖는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조선시대 평가와 관련하여 일제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이 발현된 것이라는 일부 비판도 있지만, 그가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시대의 악습을 거론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지적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박정희에게 국력이 약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은 1960년대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의미로 다가왔다. 

과거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그는 해결책 또한 민족주의에서 찾았다. ‘민족 전체가 … 주권자로서 다시는 실정과 부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각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내세운 과제는 인간 혁명, 가난 극복, 민주주의 재건이었다. 

‘인간 혁명’이 정부가 주도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박정희가 국민을 결집시켜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개발 성공을 이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확인되는 그의 목표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 ‘잘 사는 나라‘, 즉 복지민주국가였다. 

혁명의 목표는 구습(舊習) 타파와 경제 자립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8월) 

‘본인은 한강을 건너올 때 이미 개인적인 생사는 초월하였다. 어디까지나 국가와 민족의 사활이 달려 있는 혁명 그것을 위하여 이것은 성취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박정희의 두 번째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밝힌 혁명 의지 표현이다. 이 책 발간 두 달 후인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거행됐으니, 박정희의 간접적인 대통령 출마의 변(辯)에 해당하는 셈이다. 즉, ‘혁명 완수’가 박정희의 대선 출마 이유였다. 

이 책을 집필할 때만 해도 박정희는 대선 출마의 뜻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아 그의 출마 여부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박 대통령은 그해 10월 대선에서 46.6%를 득표, 45.1%를 득표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5대 대통령에 올랐다. 

대선 직전에 나온 이 책은 당연히 박 대통령이 주도했던 5·16의 정당성과 의미, 향후 과제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박 대통령이 바라본 5·16 직전의 상황은 참담했다. 특히 1961년 국가 예산의 52%(총 6088억 환 중 3169억 환)를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로 충당하면서도 국가 기간산업 육성은커녕 국민의 기본적인 식량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간의 건설된 공장마저 수입 원료, 수입 중간제품, 가공류의 것으로 원조 의존도만 높여 놓았을 뿐 농업국인 한국이 매년 식량난을 당해야 하였고 막대한 달러 원조를 받았으면서도 항상 외환 부족에 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박 대통령이 최우선적으로 삼은 과업이 자립경제와 산업혁명이다. 그는 이를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했는데, 통화 개혁, 세제 개혁, 울산 공업센터 설치, 수출진흥책의 확립 등의 정책을 통해 당시 1962년 말 기준으로 주요 부문 성장률이 5·16 직전인 1960년 5월 대비 광업 47.1%, 제조업 26.1%, 전력 23.6% 증가한 지표를 기록했다. 전체적으로는 29.4%나 증가한 호조였다. 

이런 혁명적 개혁이 필요한 배경으로는 지난 첫 번째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길>와 마찬가지로 과거 우리나라의 잘못된 역사를 꼽았다. 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라고 소제목을 잡기도 했다.

“그 어디에 해외의 문물을 광구하여 민족사회의 개혁을 시도한 일이 있었으며 … 언제나 강대국에 밀리고 맹목적인 외래문화에 동화되거나 원시적인 산업의 범위 내에서 단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것이 과거에 대한 박 대통령의 통렬한 평가였다. 

생사를 건 혁명을 감행한 후 국가의 총체적인 개혁을 추진했던 주인공으로서 혁명 대상인 과거 민족성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런 우리 민족이 본받아야 할 롤모델로 전후 독일의 성공을 이끈 독일을 주목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참았고 입을 것을 아꼈으며 쓸 것을 모아 살았다. 내핍하고 절약하고 저축하는 개인 생활에 철저한 것이었다. … 관광여행의 길에서도 이들은 독일의 차를 이용하고 독일의 빵을 싸가지고 다녔으며 필름, 휴지까지도 자국제를 썼다고 한다.’ 

1960년대 확인한 한민족의 가능성 
<민족의 저력>(1971년 3월 1일) 

<민족의 저력>은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5·16으로 집권한 후 약 10년 만인 1971년 3월 내놓은 책이다. 박 대통령이 그 동안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다졌다고 자체 평가를 내린 덕분인지 5·16 직후에 나온 <우리민족의 나갈 길>(1962년),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전 저서에서 박 대통령이 1960년대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절절하게 자기 반성을 했다면, <민족의 저력>에선 민족적 원기(元氣)를 회복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민족적 저력과 관련하여 ‘빛나는 유산’이라는 별도의 차례를 두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측우기, 한글 등의 발명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했다. 

‘그 짧은 시간에 우리는 일찍이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을 두고도 이룩하지 못했던 거창한 중흥 과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왔다.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벽촌 낙도 그 어디에서도 십 년 성상의 성과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는 조국의 밝은 모습을 살펴보면서 나는 땀 흘려 일해 온 온 국민과 더불어 벅찬 환희와 긍지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흐뭇한 일은, 우리 민족은 이제 오랜 은둔의 동면에서 깨어나 대오 각성하여 힘차게 분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19세 말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의 근세 100년은 ‘암영과 퇴영의 시기’라고 분명히 인식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한 가운데에 “우리 국토에서 열강들이 지배권을 위요하고 치열한 각축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신분제적 전제 체제 속에 들어 엎드려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방위할 만한 충분한 자체의 역량을 구비하지 못하였던 우리나라의 부패되고 무능하였던 통치 체제와 지도층”이 있었다. 

이런 구(舊) 정치인에 대한 비판은 6·25전쟁 이후의 자유당 정부에까지 이어진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와 관련 “부정과 무능으로 상징되는 근대 한국의 압축판 자유당 정권”이라고 평가했다. 

‘(자유당) 정부는 대세의 흐름을 파악치 못하고 외국의 원조를 보다 많이 얻어 올 것에만 혈안이 되고 그것을 활용하여 우리의 국민 생산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자립적인 경제 발전을 기대하는 생산적인 정책을 실천하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유한 엘리트 군인의 시각에서는 이승만 정부의 경제 정책이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추진해 성공했다고 이 책에서 밝혔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현대 정치가 요청하는 전문성에 따라 주로 대학 교수로 구성된 기획위원회를 설치하고 제반 개혁을 위한 방안을 구상 검토케 함으로써 이들의 지혜를 빌리고 아울러 군인들에 의한 무모한 독단을 피해보고자 했다”는 대목이다.

당시 정부가 정책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군 출신 조직이라고 해서 무모하게 밀어붙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1960년대 성공을 발판으로 국민들이 조금만 힘을 내면 1970년대에는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국민들의 동기 부여를 위한 책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 책이 나온 1971년의 대외 환경도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베트남에 대한 불개입, 주한미군 철수 주장 등으로 나타난 미국의 신(新)고립주의적 ‘닉슨독트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를 19세기 말엽 ‘힘의 진공상태’의 재현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는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이 예고되는 장면이기도 했다. 

1970년대는 오천년 역사상 가장 뜻 깊은 시기 
<민족중흥의 길>(1978년 9월 10일)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년대는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이 완공되면서 역동적으로 흘러갔던 시기이다. 또 2·3·4차가 진행됐던 이 시기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중점 과제는 수출 증대 및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즉, 박 대통령이 1961년 5·16을 일으키고 경제 건설을 위해 매진한 정책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던 시기였다. “빈곤과 실의 대신 풍요에의 꿈과 자신이 넘친다”고 평했듯이 박 대통령이 그토록 바라던 우리 국민의 빈곤 탈출과 의식 개혁도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그간 온 국민이 땀흘려 일한 보람으로 오늘의 이 70년대를 우리의 역사상 가장 뜻 깊은 연대로 기록하게 되었다. … 세계사의 대열에 당당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 오천년의 유구한 전통 속에 가다듬어 온 민족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세 번째 저서 <민족중흥의 길>은 1970년대의 경제 개발이 막바지에 이르고 유신이 단행된 지 6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온 책이다. 그런 만큼 박 대통령이 어떤 정치, 경제, 안보적 맥락에서 이 비상조치를 발동했고, 그 결과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경제 건설 단계의 국가에서 안정된 정치 질서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5·16 당시부터 견지한 박 대통령의 일관된 신념이다. 이런 생각은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밖으로부터 주어진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우리식 민주주의가 우리 실정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정치질서 안정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이 유신을 향한 첫 번째 계단이었다. 

‘해방 후 20여 년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의 본질과 정체를 체득하지 못한 채 그 외형만을 모방한 탓으로 심각한 정치 불안과 혼란을 겪었고 끝내 두 차례의 혁명이라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민주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정국의 혼란과 사회의 불안이 거듭되었다. 이로 인해 시급한 국가정책의 추진이 지연되고 근대화를 향한 국민적 노력이 좌절의 위기를 겪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유신의 배경에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변화도 크게 작용한다. 1971년 저서 <민족의 저력>에서 강조한 바 있는, 미국 고립주의적인 닉슨독트린에 의해 한반도가 19세기 말엽 식의 ‘힘의 진공상태’에 빠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특히 당시 주한미군 철수계획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일일 수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주한미군 지상군의 철수계획으로 안보상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고 있지만 자주국방은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제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 시련을 자주국방을 앞당겨 이룩하는 전기로 삼아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주한미군의 철수문제가 표면화되기 이전부터 이 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필요한 준비를 착실하게 추진해 왔다. 그것이 바로 정부와 국민이 합심하여 추진해 온 총력안보태세이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이 닉슨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대응해 1970년대에 줄곧 핵 무기 자체 개발에 매진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하튼 정치 안정을 확보하고 새마을운동과 경제 개발에 집중한 덕분에 당시 경제 상황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자평은 긍정적이다. 

‘새마을운동은 이미 전국 방방곡곡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가난과 침체의 상징이던 우리 농촌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인식되고 있으며 농민들의 생활과 의식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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