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회심을 촉구하며
조선일보의 회심을 촉구하며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9.16 03: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커스] 메이저 언론의 일탈

언론은 사익 추구의 도구가 아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언론은 진실이라는 상품을 팔 수 없게 되고 독자로부터 버려진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손실은 너무나 크다.

대한민국에서 조선일보의 위상은 막강하다. 보수언론의 대표적 일간지라는 위상답게 조선일보의 사설과 논평은 국민 여론과 대한민국 국정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위상 때문에 좌파진영에서 조선일보는 ‘공공의 적’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김대중 정권을 계기로 조선일보에 대한 좌파진영의 공세는 집요했고 또 치열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조선일보는 더 이상 보수이념과 가치를 수호한다고 보기에 회의적이라는 독자 여론이 비등하다. 독자층의 현실적 변화에 부응하려 했는지 모르겠으나, 조선일보는 2010년을 기점으로 특이한 선택을 했다. 보수적 이념가치를 중도 내지, 진보적 성향으로 옮긴 것이었는데 안보와 국방을 제외한 경제 부문에서 중도좌파의 성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물론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인터넷 미디어의 빅뱅은 조선일보의 웹사이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종이 신문의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오마이뉴스’와 같은 인터넷 언론사들의 활약은 광고시장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문제는 온라인 네티즌들의 성향이 보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인터넷의 포털들이 실질적인 뉴스 유통사의 지위를 독점하게 되면서, 조선일보의 권위는 더욱 약화됐다. 조선일보의 위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전 사장의 연임 로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의 부인이 대우조선해양 선박 명명식에 참석해 당시 대우조선 남상태 사장 옆에서 명명 세리머니를 하는 장면. /연합

좌파코드에 굴복했던 ‘자본주의 4.0’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조선일보는 야심차게도 ‘자본주의 4.0’이라는 중도좌파적인 아젠다를 내세웠다. 시장경제 자본주의는 종말에 이르렀다는 식의 사설들이 넘쳐났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로 인한 국제금융위기 파장을 십분 고려하더라도, 그러한 문제가 미국 정부의 지나친 관치금융과 저금리 정책, 그리고 부동산 규제가 만든 버블로 인한 정부 실패라는 우파 경제 전문가들의 주장에 조선일보는 귀를 닫았다.

조선일보가 내세운 ‘자본주의 4.0’은 시장경제의 부도덕과 탐욕으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그 대안은 ‘복지와 상생’, 그리고 ‘재벌·대기업’ 규제였다. 하지만 정작 ‘재벌 언론’이라 비난받는 조선일보였고, 신문 광고시장의 70%를 독점하는 상생 없는 ‘독점 언론’이 조선일보 자신이었다. 조선일보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가 재벌언론이라고 해서 공정하지 않았다 할 수 없고, 신문시장 독과점이라고 해서 소비자의 선택이 그렇게 만든 것은 부도덕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일보 만큼이나 정확하고 풍부하며 깊이 있는 보도를 하는 언론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일보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것이라 본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은 ‘시장경제는 악’이라는 의도된 이념 프레임이었다. 

현실을 규범에 맞춰 보겠다는 그런 의도는 그리스 부도 사태와 유로존 위기를 만나면서 체면을 구기고 지면에서 사라졌다. 복지 병폐와 포퓰리즘이라는 정부실패가 명확했던 까닭이었고, 시장경제원리가 옳다는 것의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시장경제 수호자로 진화돼야

당시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프레임에 적극 반대 논리를 편 언론은 본지 <미래한국이 유일했다. <미래한국> 필진들은 조선일보의 반자본주의적 프레임은 결코 현실을 올바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좌파의 허구적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날선 비판을 계속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본지를 우회적으로 성토하며 토론을 제의하기도 했다. 조선일보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본지 <미래한국>이 조선일보와 ‘자본주의 4.0’을 공론으로 토론을 벌였다면, 승리는 <미래한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래한국>으로서는 토론의 실익이 양쪽 모두에게 없다고 봤다. 보수내 분열로 밖에 비쳐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미래한국>과 조선일보가 ‘자본주의 4.0’을 가지고 공론적인 논쟁을 했다면 조선일보가 동원할 수 있는 경제 전문가란 대개 중도좌파일 수 밖에 없고, 조선일보는 경제 이슈에서 더욱 좌편향 되었을 것이다. 실익이 없었다.

하지만, 그 배후에 송희영 주간처럼, 부도덕한 인물이 경제 데스크를 장악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보수진영이 ‘믿고 보는 조선일보’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한 전형적인 부패 언론인이 보수정론지의 경제 편집 데스크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언론은 사회의 공기(公器)이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언론은 독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려 든다. 지금 돌이켜 보면 조선일보의 ‘자본주의 4.0’이라는 기획도 조선일보 경제부를 총괄했던 송희영이라는 한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로부터 발로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재벌과 대기업을 시쳇말로 ‘조져서’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하면 그 만큼 정경유착이 된 기업들, 정부 관치로 흥정망청대는 대우조선 같은 기업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거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또 그래야 재벌과 대기업들이 송희영이라는 개인에게 잘 보이고자 조선일보에 광고를 바치며, 그에게 온갖 향응을 베풀거라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언론을 개인의 사익추구물로 만들 때, 그 언론은 반드시 타락한다. 조선일보는 그런 점에서 내부적 공론의 정의가 없는 시스템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조선일보는 시장경제의 수호자로 진화해야 한다. 현재의 조선일보는 한참 잘못되어도 잘못되었다. 

만일 그것이 사주 개인의 독단에 의거한 것이라면, 사주를 버리고 조선일보를 살려야 한다. 그것이 조선일보 독자들이 원하는 바일 것이고, 독자들의 명령일 것이다. 언론도 기업이다.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 죽고 산다. 조선일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독자들의 수준만큼 진화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를 피할 수 없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