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중 사대의 근원에는 숭명 성리학이 있다
친중 사대의 근원에는 숭명 성리학이 있다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9.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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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친중 사대의 역사적 기원

광해군은 국익을 위해 철저하게 실리외교를 선택했지만, 성리학적 명분론과 숭명 사대주의에서 매몰된 조정 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드 배치를 두고 성주 지역민이 삭발을 하는 등 반발이 거센 것을 논외로 하더라도 사드 배치는 “G-2로 부상한 중국을 자극하며 또 중국과 미국과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칫하면 한국이 샌드위치가 될 우려가 있다”는 ‘중국자극론’을 들먹거리면서 중국의 협박에 눈치를 살피는 소위 친중 사대주의에 빠진 지식층 그룹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특히 한국근현대사 전공자들 중에서 상당수 있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친중 사대주의의 역사적 기원은 멀리 고려말 성리학이 중국 원나라로부터 수입되고 조선의 이성계가 정도전의 사상적 지원을 받아 건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널리 보급되고 대외적으로는 친명사대주의를 표방했다.

조선의 왕이 즉위할 때마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승인이라는 외교적 절차를 밟았지만, 조선 초기에는 명이 조선의 내정에 시시콜콜 간섭하지는 않았다. 즉 외교적으로 친명사대를 표방했지만, 내정에서는 정치적으로 자주독립을 유지한 상태로 명의 입김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미약했다.

그러나 친중 사대의 원조는 숭명 사대주의(崇明事大主義)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이 번성하면서 선조 초기 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해 중국에 대한 숭명 사대주의 사상의 기반이 마련되었고, 사대부들은 바야흐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만드는 것을 이상적 국가의 모델로 간주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심화된 중국 사대주의

조선의 사대부들은 북송에서 도피한 남송이 문약(文弱)에 빠져 결국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에게 멸망당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상적 학문적 성찰이 부족했다. 아니 오히려 성리학은 중국 대륙에서보다 이를 수입한 조선에서 16세기 중반 이후 더 발전해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극성을 보였으며, 심지어 성리학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나 여하한 비판을 제기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기에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는 질식되고 말았다.

성리학적 사상 체계는 필연코 사대부들에게 숭명 사대주의의 폐단을 낳았고 합방 이전까지 조선조 최대의 국란을 자초한 인조반정의 정묘호란, 병자호란 시기를 거치면서 정신사적 측면에서 우리 역사에서 뿌리가 깊이 박혀버리게 된다. 

숭명 사대주의 분위기가 전국으로 한껏 확산된 계기가 된 것은 임진왜란 시절 명군의 지원으로 조선이 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명 조정의 주문과 강요도 이런 분위기 형성에 크게 일조를 했다. 급기야 임란 이후 관운장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도처에 생길 지경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동관왕묘는 서울의 동쪽(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인데, 관왕묘는 중국의 장수 관우의 조각상을 두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선조34)에 동서남북 4곳에 지어졌다. 관우 숭배는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를 통해 전해졌으며, 일제강점기까지 성행했다고 한다.

선조의 즉위로 훈구파가 몰락하고 재야에 은거하고 있던 사림파가 집권한다. 사림파는 기묘사화 이후로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산림에 돌아와 학문에 전심하고 제자를 키워 뒷날을 기약한 일군의 성리학자들을 말한다. 학문의 경향도 성리학적 사색과 이론의 방면으로 일관했다. 조정에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가담한다. 이에 위기를 맞은 훈구파는 이이를 중심으로 서인을 형성한다.

이리하여 선조 8년에는 동인과 서인의 붕당(朋黨)이 마침내 형성되었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는 실용적인 정책 개발에 몰두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배운 성리학 이론을 정적 제거와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자리에 있던 모화관은 조선의 임금이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조선의 임금이 허리를 굽혀 중국의 사신을 극진하게 맞이하던 모습을 그린 기록화.

숭명 사대주의에 제동을 건 광해군 

숭명 사대주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일시적이나마 제동을 걸고 왕권 강화와 부국강병책으로 노심초사했던 군주가 바로 광해군이었다. 1608년 임란을 간신히 수습한 이후 노년에 후계자 문제에서 의심암귀에 찬 선조가 서거했다.

힘들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일찍이 누구보다도 전란의 아픔을 백성들과 함께 겪었던 군주였다. 그는 임란 시절에 선조의 명에 따라서 분조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임금노릇을 하면서 각지로 가서 병력을 모으고 백성들을 위무했기에 전란이 끝난 후 조정 대신들이 광해군이 선조를 계승해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광해군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으며 상당한 독서를 통해 제왕학을 습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그리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동안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으로 재정이나 군사력에서 많은 손실을 봤다.

그 결과 사방에서 지방 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특히 건주위 여진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의 동향은 종전과는 달랐다. 즉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명이 만주지역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한 틈을 이용해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만포진 건너편 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는 흥경노성을 근거로 하여 주변의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더니, 1616년(광해군 8년) 마침내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고 스스로 한(왕)이라 칭했다. 그는 계속해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1618년에는 푸순(撫順)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대해 전쟁을 포고했다.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던 대외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 제조 등으로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그는 조선의 주적(主敵)이 일본이 아니라 만주족임을 한 눈에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후방 현해탄의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임란 이후 팽배한 반일감정에도 불구하고 국익 차원에서 조정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우호적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만주대륙에서 욱일승천하는 만주족에 대한 정보 수집과 면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실리외교를 통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노선을 취하여 후금의 침공을 막으려고 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멸망하는 명에 계속 사대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성장하는 청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때 광해군은 국익을 위해 철저하게 실리외교를 선택했지만 그의 선견지명과 통찰력을 이해하려는 신하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정 대신들은 성리학적 명분론과 숭명 사대주의에서 매몰되어 이것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이것으로부터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조정 대신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서원에서 할거하는 유생들의 경우는 더 심했다. 

한편 명나라는 후금의 등장으로 배후가 불안하게 됨에 따라 이전 임진왜란 때 파병한 은혜를 상기시키면서 조선군의 출병을 집요하게 추궁, 강요했다. 친중 시대주의에 찌든 조정의 신하들은 영토와 국익을 수호하려는 광해군의 원대한 속셈을 읽어내기는 커녕, “은혜의 나라이며 상국(上國)인 명나라의 은혜를 왜 갚지 않으려 하는가?”를 따지면서 친명 사대주의 노선을 확실하게 걸을 것을 집요하게 채근했다. 

이렇게 조정의 핵심세력인 이이첨을 포함한 대북파들조차도 명의 원군 요청에 대해 거절하지 못하고 명분론에 휘둘렸고 광해군은 안팎의 집요한 추궁으로 인해 시달리게 된다. 조선 조정의 분위기를 한눈에 간파하고 있는 명의 간청과 협박은 계속되었다. 광해군은 조정에서 고립되면서 어쩔 수 없이 명의 지원 요청을 수락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해 1만5000명의 군사를 주어서 만주에 파병하게 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광해군의 용인술이다. 광해군은 강홍립이 문관 출신으로 중국 사정과 외국어에 능통한 점을 높이 평가해 이를 최대한 활용하게 된다.

조명 연합군은 행군 과정에서 조선군이 선두에 섰는데, 그 이유는 명군 사령관의 조선군에 대한 독전 강요와 전투 지휘권에 대한 간섭이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강홍립의 조선군은 심하전투(1618)에서 매복한 후금 군대에게 기습을 받아 대패하게 되고 병사의 태반을 상실한 강홍립 도원수는 누르하치에 투항하여 볼모가 된다. 

▲ 임진왜란 때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탈환 전투를 치르는 장면.

강홍립의 후금 투항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조선군의 만주원정이 명의 강요에 의해서 불가피했음을 설명해 누르하치의 양해를 구했고 이로 인해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의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했다. 그 이후 강홍립은 광해군과 개인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후금의 동정을 소상히 알려줬다.  

그러나 강홍립의 투항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특히 조정 안에 있는 대북파 신료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사대부 유생들의 심리적 충격은 컸다. 그들은 만주족 오랑캐에 대한 조명 연합군의 패전을 믿을 수 없었다. 평양감사 박엽은 강홍립의 가족을 모두 하옥시켰다.

조정 대신들은 명나라를 배신하고 투항한 강홍립은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며 그의 가족을 모두 주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대신들의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무시하고 그의 가족들을 서울로 데려와서 편안히 살도록 조치했다. 

강홍립의 패전 원인과 투항에 대한 해석을 놓고 역사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첫째는 강홍립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일부러 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몰락한 서인 사대부들과 명나라 측에서 최초로 흘러나온 것이다.

강홍립의 투항 소식이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사태를 숨죽이면서 관망하던 서인세력들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않은 채 조명 연합군의 패배는 조선군이 열심히 싸우지 않고 강홍립이 투항했기 때문이라고 음해하면서 강 원수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했고 자기네들끼리는 쾌재를 부르면서 ‘반정을 일으킬 대의명분’의 호재로 봤다.

여기에다가 조선이 몰래 후금에게 붙지 않을까 의심하는 명나라에서 패전의 책임을 조선군에게 전가하고 지원을 다시 독촉, 협박하면서 조정에서는 더 논쟁에 불을 질렀다. 

둘째는 광해군의 ‘밀지 책략설’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密旨)를 내려서 정세를 살펴 적당하게 싸워 누르하치에 투항해 생명을 유지하고 볼모로 잡혔을 때, 적의 정세를 정확하게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광해군이 사태를 관망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어의(御意)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런데 실제 전황 기록을 검토해 보면, 강 도원수가 적당하게 싸우고 몸을 사리고 말고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조선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기습을 당했고 수천 명이 졸지에 전사한 것이다. 강홍립이 이끈 조선군은 명군의 지휘 하에 배속되었고, 선두에 나섰다가 누르하치의 군대에 급습을 당했고 이어서 명군도 또한 각개격파 당한 것이다.

요약 정리하면, 명군 지휘관이 누르하치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고 조선군을 의심하고 무조건 독전을 강요하면서 만주에서 지형지물에 익숙지 않은 명군과 조선군이 합동연계 작전을 기민하게 하지 못해서 패배한 것이다.

강홍립은 군사적 참패 이후 후금과 적수가 되지 못한 점을 재빨리 인식하고 외교적 수습을 통해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사태를 매우 기민하게 처리했다. 강 도원수를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 전투 지휘력이 아니라 바로 이 점이다.

인조반정으로 끝난 광해군의 실리외교 

그런데 심하전투 이후 명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은 후금부대에 쫓겨 압록강 입구의 가도(假島)에 주둔해 실지 수복의 구호를 내걸고 조선에 지원을 요청한 바, 이것으로 3국간의 마찰의 불씨가 마련되었다. 조선은 마지못해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해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시 말해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다. 군사력에서 명과 후금보다 취약한 조선으로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와 부국강병책은 집권 15년 만에 인조반정(1623년)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내키지 않았던 정예군사 1만5000명을 파병한 결과 도성과 궁궐의 치안을 소홀히 한 것이고, 둘째로 광해군은 대북파의 권력 남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 결과 광해군 재위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들은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이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 같은 행위들은 광해군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성리학의 도덕주의, 도의 정치, 왕도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은 혼란스런 명·청의 권력교체기에서 탁월한 외교적 업적을 거뒀다. 이는 조선시대사를 총괄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정의 불안정과 취약점으로 인해 인조반정의 구실을 줬고 마침내 실패한 군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으며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면의 제약상 ‘인조반정 이후 친중사대주의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호로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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