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영화계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조희문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0.05 01: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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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리메이크와 재상영

옛날 영화에서 만족과 감동을 얻으려는 소비 흐름은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를 부담스러워하며 친숙한 과거로 돌아가려는 심리적 퇴행 현상 

리메이크와 재상영. 요즘 영화 소비 경향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매그니피센트7> <벤허> <엑소더스-신들과 왕들> <씨 오브 하트> <맨 프롬 엉클> 등은 최근 1~2년 사이 다시 만들어진 영화들. 그 전에도 다시 만든 <토탈리콜>이나 <로보캅> <코난> 같은 영화들이 나왔다. 

▲ 조희문 영화 평론가·미래한국 편집위원

미국 영화계에서 주로 보이는 현상이다. 각각 <황야의 7인> <벤허> <십계> <백경> <0011 나폴레옹 솔로>를 모델로 한 것이다. 디즈니 영화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타잔>이나 <정글북>도 전작을 다시 만든 경우다. 

국내에서는 옛날 영화들을 다시 상영하는 일이 줄을 잇는다. <벤허> <매트릭스> <글루미 선데이> <죽은 시인의 사회> <굿윌헌팅> <노트북> <러브레터> 같은 영화들은 상영을 계획하고 있거나 이미 상영을 마쳤다. 

리메이크와 재 상영이 요즘 영화계 트렌드 

<매그니피센트7>은 같은 제목의 1960년 작을 다시 만들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개봉 제목은 ‘황야의 7인’. 대머리 배우로 유명한 율 브린너를 중심으로 스티브 맥퀸, 호르스트 부크홀츠, 찰스 브론슨, 제임스 코번, 로버트 본, 브라드 덱스터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총잡이 멤버를 이뤘고, 산적 떼 두목 역은 엘라이 월락이 맡았다. 혁명기 멕시코의 어느 산골 마을. 농민들을 괴롭히는 산적 떼를 소탕하는 일곱 총잡이들의 비장한 활약이 펼쳐진다.   

이번에 새로 만든 영화도 서부를 배경으로 마을 주민을 괴롭히는 악당 세력과 그것에 맞서는 서부 사나이들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큰 틀의 구성은 닮았지만 캐릭터의 설정이나 세부적인 구성은 다르다. 옛날 서부영화에서라면 금기처럼 기피했던 흑인 주인공을 선두로 세우고 동양인이나 남미 인디언 출신 배우를 섞었다. 선악의 구조도 권력을 가진 부자가 가난한 정착민을 약탈하는 이야기로 꾸몄다. 

전작과 닮은 듯하지만 다르고 다른 듯하지만 닮았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전작이라 할 <황야의 7인>도 사실은 일본영화 <7인의 사무라이>(1954)를 서부영화로 번안한 것이니 <매그니피센트7>은 2중 3중의 다시 만들기인 셈이다.

<벤허>나 <엑소더스-신들과 왕들>도 비슷하다. 루 월레스의 소설 <벤허>를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 <벤허>는 이미 1907년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고 1925년에 다시 만들어졌다. 마차 경주 장면으로 널리 알려진 컬러판 <벤허>는 1959년 작이다. 찰톤 헤스톤이 주인공 벤허 역을 맡았고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했다. 

▲ 벤허 포스터(오른쪽부터 2016년, 1960년, 1925년)

와일러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뒤 ‘오 주여, 제가 이 영화를 만들었나이까’라며 스스로 감동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1925년의 흑백 작품도 스케일이나 박진감 면에서 압도적이다.

흑백화면에 무성으로 구성했지만 당시로서는 미국 영화 제작 기술을 총동원하여 거대한 스펙터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차 경주 장면은 지금 봐도 눈부실 정도다. 1959년에 대규모로 리메이크를 한 것은 전작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보다 더 나은 무엇을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던 덕분이다. 

이번에 만든 <벤허>는 디지털 기술이 시각적 효과를 주도한다. 군함의 전투 장면이나 마차 경주 시퀀스의 시각 효과는 지금의 수준을 반영하는 장면들이다.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시절, 형제처럼 자란 벤허와 멧살라는 각별한 우정을 나누지만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면서 충돌한다.

적대와 증오, 복수의 불꽃이 타오른다. 하지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의 복음은 두 사람 사이에서 폭발하던 증오의 마음을 녹인다. 용서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고 설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계 자기 복제는 영화산업의 노화 현상? 

<엑소더스-신들과 왕들>은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를 배경으로 모세와 람세스의 운명적 갈등을 그린다. 이집트인들의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 민족을 이끌고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모세와 그것을 왕권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도발이라고 여기는 람세스는 모세를 압박하려 한다. 세실 B 데밀 감독이 연출한 1956년 작 <십계>를 다시 만든 경우다. 

그러나 다시 만든 영화가 이전의 작품을 넘는 감동을 이끌어낸 경우는 거의 없어 보인다. 전작을 다시 만든다는 태생적 전제가 붙는 데다 전작과 똑같이 만들 수도,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도 없다는 한계가 이중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결국 새로 만든 영화는 전작의 성공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란 비아냥을 듣기 쉽고, 관객들로부터는 오히려 전작의 감동을 흩어버리고 만다는 눈총까지 받아야 한다. 전작을 보지 못한 젊은 관객들에게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없는 그저 그런 영화 중의 한 편에 그칠 가능성도 높다. 

최근에 다시 만든 영화들 중에서 전작에 버금할 만하거나 뛰어넘는 작품을 찾기 어려운 것은 리메이크 영화의 부담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한다. <벤허>나 <엑소더스-왕들과 신들> <매그니피센트7>처럼 오랫동안 세계적 명성을 가졌던 전작을 다시 만들었는데도 별다른 바람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구체적인 사례다. 

그런데도 리메이크 영화가 계속 등장하는 것은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어렵고, 새로운 영화가 성공을 거두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탓이다. 옛날 상품을 새롭게 포장해 신상품인 것처럼 포장하는 자기복제 현상의 심화는 영화의 생물학적 수명이 한계에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개봉 영화의 잇단 등장은 요즘처럼 영화 보기가 쉬워진 환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흥미롭기까지 하다. 지상파 방송은 물론이고 케이블이나 위성방송, VOD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언제든 보고 싶은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상태에서 지나간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다시 보겠다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관객의 영화 관람 행태가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전 관객들이 영화의 내용을 단순 소비하는 것으로도 만족했다고 한다면 지금의 관객들은 큰 화면에 제대로 음향 설비를 갖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려는 욕구가 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을 많이 주기만 한다면 최고로 여기던 상태에서 음식의 맛과 질을 따지기 시작한 격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 관객의 영화소비 행동이 고급스러워지는 현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옛날 영화에서 만족과 감동을 얻으려는 소비 흐름은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를 부담스러워하며 친숙한 과거로 돌아가려는 심리적 퇴행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말랑한 멜로 드라마가 재 상영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그 같은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영화계가 옛날 영화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우리나라 관객들 또한 옛날 영화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지금의 영화가 예전 같은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다. 영화의 노화일까, 비만 같은 성인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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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ght 2016-10-05 20:28:41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