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단, 조총련과의 70년 전쟁
민단, 조총련과의 70년 전쟁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10.05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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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이념 갈등의 한인사회를 가다②

“민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발전도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고 안보도 크게 위협을 받았을 것”

도쿄=제9호 태풍 민들레, 10호 태풍 라이언록 등 두 개가 연이어 도쿄만 쪽으로 몰려오면서 일기가 고르지 못했다. 제10호 태풍이 도쿄에 상륙한 날 오전에는 지상 전철이 멈춰서고 나무들이 넘어지는 등 곳곳에서 피해가 잇따랐다.

우산을 받쳐 쓰고 도쿄 미나토구(港區) 미나미아자부(南麻布), 한국대사관 근처에 있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 사무실을 찾았다. 건물 3층에는 한국 영사관이 위치하고 있었다. 민단은 올해로 창립 70년을 맞았다.

다른 나라의 교민회의 경우 ‘교민회’ 혹은 ‘한인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비해 일본 교민사회는 ‘민단(民團)’이란 독특한 용어를 사용한다. 오공태 민단 중앙회 단장은 “민(民)은 ‘국민’을 뜻하고, ‘단(團)’은 ‘단결’, 즉 ‘국민의 단결’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일본 입국관리국의 발표에 의하면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 보유자는 2015년 말 기준 46만 명, 북한 국적 보유자는 3만 3939명 등으로 중국인에 이어 재일 외국인 가운데 2위다.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일본에 거주하던 200여만 명의 한국인들 중 대다수는 귀국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본에 남은 한국인은 64만 7000여 명이었다. 당시의 세력분포는 북한을 추종하는 조총련계가 95%, 대한민국을 따르는 민단은 5%에 불과했다. 70년 만에 전세가 완전 역전된 셈이다. 

▲ 도쿄 시내 한복판 황궁 근처에 위치한 조총련 중앙본부. 일본과 국교가 없는 북한의 사실상 대사관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우익들의 시위에 대비하여 일본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민단을 하이재킹하려 했던 조총련 

그 동안 민단은 질적·양적으로 압도적 우세를 보인 조총련으로부터 폭력적·문화적·공작적 차원의 공격을 무시로 당해 왔고, 그때마다 처절한 투쟁을 벌여가며 기사회생했다. 말하자면 냉전기간 내내 일본에서 북한을 추종하는 조총련과 70년 전쟁을 벌여온 조직이 민단이다. 하정남(河政男) 민단 사무총장은 “민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발전도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고 안보도 크게 위협을 받았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북한 간첩 이선실이나 일본인을 여러 명 납치한 것으로 알려진 신광수도 그렇고 대부분이 일본 조총련 사회를 발판으로 한국에 침투한 간첩들입니다. 만약 조선노동당의 통일전선체인 조총련이 재일동포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면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국의 안보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조총련이 민단 상대의 고도의 공작이 꽃을 피운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2006년 5월 17일, 당시 민단 중앙본부 단장 하병옥(河丙鈺)은 느닷없이 서만술 조총련 의장과 만나 “민단과 조총련은 하나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일본에서 남북 연방제를 선언한 셈이다. 이것이 재일교포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일본판 ‘5·17 쿠데타’다.

5·17 사태란 2006년 5월 17일,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남북 화해 무드에 따라 민단과 조총련이 50년 만에 수뇌회담을 갖고 그동안의 반목을 청산하고 하나가 되었음을 공식 발표한 사건이다. 말하자면 민단과 조총련이 일본에서 남북 연방제에 합의하고 조총련이 민단을 하이재킹하려 했던 사건이다.

문제는 이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 민단 내의 어느 누구와도 상의를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이다. 하병옥 단장이 민단 내 어느 누구와 합의도 없이 기습적으로 민단과 조총련의 합작을 선언하자 정진 씨를 비롯하여 현 민단 중앙본부 단장 오공태(吳公太) 씨가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한 달 후인 6월 23일, 민단의 하부조직인 재일상공회의소 집행부가 합작 철회를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서명을 주도한 인사들에 대한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9월에 하병옥 단장을 비롯한 민단 중앙지도부가 사퇴하면서 민단-조총련 합작을 전면 무효화 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민단의 핵심 지도부는 ‘5·17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었던 민단 내의 한통련 세력을 숙청하고, 하병옥 씨를 해단(害團) 행위로 제명 조치하여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일본에서 조총련과 민단의 합작을 부추기고 도운 사람이 바로 당시 주일대사였던 나종일 씨였다고 한다.

그 무렵 일본 사회는 북한이 일본 국민을 납치하는 데 조총련이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총련에 대한 분노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 와중에 민단이 일본인을 납치한 범죄 집단인 조총련과 손잡고 “우리는 하나”라고 선언하자 일본 사회는 “민단이나 조총련이나 다 똑같은 자들이군” 하는 인식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민단, 당신들마저…” 

급기야 일본 우파의 아이콘인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국가기본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일본의 인기 주간지인 주간신조(週刊新潮)에 ‘민단, 당신들마저…’라는 제하의 칼럼을 게재했다. 충격을 받은 민단 지도부는 성금을 모아 납치자 송환을 돕는 단체를 찾아가 사죄를 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도쿄에서 발간되는 재일동포 신문인 통일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에서 김대중과 한민통 활동을 함께 했던 곽동의(郭東儀, 한통련 상임고문,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공동위원장)는 일본판 연방제 사변이 벌어지기 3주 전인 2006년 4월 2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민족21’ 창간 5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일본에서는 38선이 없어졌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의 비호를 받아 일본에서 이루려 했던 민단과 조총련의 합작 쿠데타 시도는 민단의 뜻 있는 인사들의 저항으로 겨우 수습되었으나, 조총련계의 공작에 노출된 민단 조직의 취약성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 통역을 맡은 홍형 통일일보 주간

통일일보 주간 홍형 씨는 “2006년의 5·17 쿠데타 이후에도 하병옥 세력의 머리만 몇 명 쳐냈을 뿐 민단 내에는 아직도 그들과 선을 대고 있는 인물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 언제 또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강창만(姜昌萬) 통일일보 대표의 설명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 차장으로 있던 나종일 씨가 일본에 와서 교포 유지 간담회를 한다면서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등 친북주의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70년대 초 일본 체류 시절 의장을 맡았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후신이 바로 이 단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식 때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 등 일본 사회당 퇴물 정치인들을 대거 초청했습니다. 또 매년 자신의 구출운동에 가담했던 좌파 인사들에게 연하장을 보내는 등 노골적인 좌파 예우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일본 내에서 조총련을 비롯한 한통련 세력들이 기세등등하게 된 겁니다.”

민단 부단장 출신인 김소부(金昭夫) 민단 생활상담센터 소장은 납치자 문제가 표면화 된 이후 일본 내에서 조총련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단히 악화되었다면서 “조총련은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민단에 적극적인 침투 공작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낙관했다.

“한국인은 일본인들을 고용하는 고마운 존재”

일본 교포 사회에서도 조총련이 약화되었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북의 통일전선전술을 대행하고 있는 조총련이 오늘날까지 왜 이렇게 질긴 뿌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김 소장은 재일동포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을 그 이유로 들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일본 국적이 없으면 학교도 못 다니고, 주택도 못 빌렸습니다. 심지어 길을 지나가면 일본 아이들이 돌을 던지기도 했어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울분에 찬 재일동포들이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 와중에 민족교육을 강조하는 조총련으로 자연스럽게 기울게 된 거죠. 게다가 민단이 운영하는 민족학교는 일본 내에 6개에 불과하여 한글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곳곳에 있는 조총련계 학교에 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김 소장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의 고향은 일본이다. 그러나 부친의 고향이 경남 진주여서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진주 일대에 20만 그루 정도의 나무를 심는 일을 돕고 있다. 고향에 나무 심기는 김 소장 뿐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 받는 거의 모든 동포들이 하고 있는 사업이다.

재일동포들의 모국에 나무 심기는 1972년 12월, ‘60만 새마음 심기 운동’을 시작했다. 재일동포 60만 명이 고향에 각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모국의 산림녹화에 동참하자는 취지였다.

그 결과 모국을 방문한 재일동포 청년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삽자루를 어깨에 메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심은 다음 막걸리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지금도 재일동포들은 모국의 산림을 녹화하는 데 있어 일조한 것에 대해 커다란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여행사 경영 등 여러 가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김 소장은 현재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불편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사라졌다고 한다. 오히려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일본인들을 고용하는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재일동포는 조총련까지 합치면 55만여 명인데, 거의 대부분이 경영자로서 일본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고용주입니다. 재일동포들이 사업체를 운영하여 고용하고 있는 일본인은 적게 잡으면 200만 명, 넉넉하게 잡으면 500만 명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교포 사회에서 민단과 조총련을 하나로 엮으려는 시도를 하는 그룹이 통일교다. 정시동(鄭時東) 민단 도쿄 시부야 지부 상임고문은 훈민정음 글로벌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부인 스에나가 기쿠코(末永喜久子) 씨와 함께 약속장소에 나왔다.

스에나가 씨의 한국명은 박영희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국제결혼하여 온 한국인 통일교 신자들을 한국요리 및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정시동 고문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의 한 잡지가 현재 일본 사회 내 신흥종교 종단의 신자 수를 조사한 결과 통일교는 창가학회에 이어 2위로 나타났다고 한다.

통일교가 민단과 조총련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하는 이유를 묻자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가 좌익과 우익을 하나로 엮는 두익(頭翼)사상을 주창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 정시동(鄭時東) 민단 도쿄 시부야 지부 상임고문(左)과 부인 스에나가 기쿠코(末永喜久子·한국 명박희) 훈민정음 글로벌협회 이사장

재일동포들, ‘식민지 해방’ 선언한 소련공산당 추종 

정 고문은 해박한 역사적 지식으로 동포 사회의 동향을 국제정세와 엮어 설명했다. 그도 조총련 세력이 쇠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김정일이 납치자 문제를 시인하는 바람에 조총련이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그 동안 조총련은 ‘일본인 납치는 한국 측의 선동’이라고 거짓말을 해 왔는데, 김정일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수상과의 회담에서 ‘일본인을 납치했다’고 시인하는 바람에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재일교포 중 절대다수가 남쪽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경상도 출신이 50%, 호남 출신이 25%, 제주 출신이 20% 정도 돼요.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간 사람들도 그들 고향이 북쪽이어서 간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렇다면 남한 출신들이 왜 북한을 추종하는 조총련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일까. 정 고문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민족자결, 식민지 해방을 외치는 바람에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던 세력들은 소련 공산당에 우호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재일 한인들이 공산당에 기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22년 7월 15일 일본공산당이 창당되었을 때 이들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을 계기로 다수의 재일동포 청년들이 일본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그 여파가 조총련으로 이어진 것이죠.”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공산당에 입당한 조선 청년들이 조총련의 전신인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이하 조련) 결성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일본공산당 지도자로 활동하던 김천해(金天海)가 출소하여 조련에 간여하면서부터 재일동포 사회는 급격히 좌경화되었고, 그 결과 조련은 일본공산당의 폭력적 전위부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민단 단장을 역임한 신용상(辛容祥) 씨의 증언이다.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고 불과 두 달 만에 일본 전역에서 좌익 계열 인사들이 모여 조선인연맹(朝聯)을 결성했습니다. 패전 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그처럼 빠른 시기에 일본 전역에서 이 조직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이들이 설쳐대는 바람에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쫓겨나 1946년에 민단을 결성하게 됩니다.”

정시동 고문은 재일동포 사회가 좌경화 된 결정적 이유는 김일성의 공작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김일성은 북한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12월, “100만 재일동포에게”란 연설을 통해 재일교포 공작에 돌입했다.

반면에 대한민국 정부는 여순 반란사건, 주한미군 철수, 남파된 북한 게릴라 토벌 등 혼란 속에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재일교포 사회는 조총련이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 고문의 설명이다.

“식민지하에서 재일동포 지식인들이 급진 좌경화 되자 여기에서 이탈하여 만든 조직이 민단입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민단을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유일한 동포 단체로 인정을 했습니다. 좌경화 된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공산당의 폭력 전위부대로서 마치 점령군처럼 행동하며 일본인들에게 거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들이 화염병 공격을 하는 등 폭력 활동이 도를 넘자 맥아더 사령부는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고 1949년 9월 조련을 비롯한 조련 산하의 단체들을 폭력 단체로 규정하여 해산시켰고, 조직의 주요 간부였던 김천해·윤근·한덕수 등은 공직에서 추방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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