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왜곡하는 ‘역사 영화’들
역사를 왜곡하는 ‘역사 영화’들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승인 2016.10.11 08: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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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덕혜옹주> <암살> <밀정>

국가 패망 시기 왕가의 안위 지키기에 급급했던 조선 황실을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했던 것처럼 왜곡하는 행위는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을 수 없도록 한다. 

망국의 풍경들 

#1. 고종과 신정희의 대화 (매천야록) 

고종이 즉위 후 경연(經筵)에서 “어떻게 하면 연운의 땅에 말을 달려 병자년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느냐”고 하문했다. 오늘날의 국방비서관 격인 무승지(武承旨) 신정희가 “전하,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종이 기대에 차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신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성덕(聖德)을 닦으시옵소서.” 

조선은 군인조차 문신 흉내를 냈던 나라였다. 

#2. 민비와 민영휘의 대화 (매천야록) 

동학란이 발생한 후 민비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려 하려 했다. 민비의 척족인 민영휘가 “청군을 끌어들이면 일본군도 개입할 수 있다”고 반대하자 민비는 이렇게 호통을 쳤다. “내가 차라리 왜놈의 포로가 될지언정 임오년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3.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 

양무호(揚武號)라는 배가 있다. 대한제국이 보유했던 최초의 근대식 군함이었다. 영국에서 1881년 건조한 이 배는 원래 전투함이 아니라 일본 미쓰이물산에서 사용하던 석탄운반선 팰러스(Pallas)호(3432톤)였다.

이 고물 선박을 1903년에 당시 국가예산(500만 원)의 10%, 국방비의 30%가 넘은 거금 55만 원에 구입한 것이다. 여기에 대포(80mm) 4문, 소포(5mm) 2문을 장착해 ‘군함’이라고 했다. 함장은 동경상선학교 출신 신순성이라는 분이 맡았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이 배에서 연료로 사용할 석탄을 댈 돈도 없었다. 바다에 나가는 날보다 항구에 묶여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이 배는 러일전쟁 직후 일본 해군에 징발 되어 화물수송선으로 쓰이다가 군대해산 후인 1907년 해양실습선으로 전락했고, 1909년 일본 하라다상회에 4만2000원에 팔렸다. 그리고 1916년 동중국해에서 침몰했다.

#4.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일갈 

러일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존 헤이 국무장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 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상은 대한제국 시절에 벌어졌던 몇 가지 사건들이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정도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고종의 광무개혁을 높이 평가하면서 고종을 ‘근대화를 추진했던 계몽전제군주’로 미화하고 있다. 하지만 광무개혁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내장원(황실재정기관), 원수부(통수기구) 등 황제의 개인권력기반 강화 차원에서의 개혁이었지, 진정한 의미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제(大韓國制)’ 제2조를 보면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무슨 근대성이 있나? 

군대해산 당시 대한제국 군대 규모는 중앙과 지방의 군대를 다 끌어 모아도 1만여 명 수준이었다, <매천야록>을 보면, 군대가 폐지되자 백성들은 오히려 반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군대가 아니라 양아치, 무장 강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경술국치). <두 얼굴의 조선사>(조윤민)라는 책에 의하면, 8월 22일 조약을 체결하고서도 29일 공표한 이유는 8월 28일 순종 즉위 3주년 기념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당시 위정자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망국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기가 막히다. 한 달 내내 조선시대 동안 정변이나 당쟁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 옛날 신하들에게 시호를 추증(追贈)하거나 대신들에게 훈장을 줬다는 기록이 계속된다. 나라가 망하기 이틀 전인 8월 20일에는 26명에게 시호를 내리는데, 정약용에게 문도(文度), 박지원에게도 문도(文度), 남이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시호 왕창세일’을 한 것 같다.

▲ 영친왕

 

나라는 망했어도 왕가는 살아남다 

나라가 망하자 집권 노론 대신들은 일본 작위를 받았다. 황실은 왕실로 격하되었다. 한일병합이 발표되던 날 메이지 일본 천황은 아래와 같은 조칙을 내렸다. 

‘짐이 영원무궁한 큰 토대를 넓게 하고 국가의 비상한 예의를 마련하고자 하여 전 한국 황제(韓國皇帝)를 책봉하여 왕(王)으로 삼고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이라 칭하니 이후 이 융숭한 하사를 세습하여 그 종사(宗祀)를 받들게 하며, 황태자(皇太子) 및 장래 세사(世嗣)를 왕세자(王世子)로 삼으며, 태황제(太皇帝)를 태왕(太王)으로 삼아 덕수궁 이태왕(德壽宮李太王)이라 칭하고, 각각 그 배필을 왕비(王妃), 태왕비(太王妃) 또는 왕세자비(王世子妃)로 삼아 모두 황족(皇族)의 예로써 대하여 특히 전하(殿下)라는 경칭(敬稱)을 사용하게 하니, 대대로 따르는 도리에 있어서는 짐이 마땅히 법도와 의례를 따로 정하여 이가(李家)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손손 이에 의지하고 복록(福祿)을 더욱 편안히 하여 영구히 행복을 누리게 한다. 이에 대중에게 널리 알려서 특별한 법을 밝힌다.’(<순종실록부록> 제1권, 1910년 8월29일) 

이렇게 해서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망했어도 이씨 왕실의 종묘는 보존되었다. 이후 ‘이왕가’는 순종-영친왕으로 이어지면서 일제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황족의 딸과 결혼한 영친왕은 일본 육군중장까지 올랐다.

이왕가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다른 일본 황족들의 연간 세비가 많아야 10만 엔이던 시절, 영친왕의 세비는 150만 엔에 달했다고 한다. 천황 다음가는 부자였다. 이왕가가 문을 닫은 것은 1947년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의 왕-공족, 화족(귀족) 제도를 폐지했을 때였다. 

▲ 영화 <덕혜옹주>

영화 <덕혜옹주> 유감 

그런데 그 영친왕이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해 망명을 시도했다고 주장하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10대 후반에 이미 조발성치매 증상을 나타냈던 영친왕의 이복누이가 일제 하에서 소외받던 조선민중들의 민족의식을 깨우쳤던 대단한 독립운동가였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560만 명(9월 15일 현재)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덕혜옹주>가 바로 그 영화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 영화는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고 광고를 한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며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되었고 너무 감동적이었다”, “덕혜옹주의 작은 몸부림은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처럼 가엾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덕혜옹주>는 반일코드와 함께 친일파 청산 실패, 친일파의 친미파로의 변신 같은 반대한민국, 반미코드도 감추고 있다. 작년에 1270만 명이 보았던 영화 <암살>, 개봉 3주만에 6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밀정>도 비슷하다.

<암살>이나<밀정>은 여기에 더해 의열투쟁의 영웅 김원봉이 해방 후 월북해 노동상·국가검열상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국적(國賊)’이자 6·25전범(戰犯)의 하나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제 값을 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각자의 방식대로 전투를, 문학 게릴라전을 감행해야 한다”고 했던 달턴 트럼보, “작가로서 여러분은 공산주의 전부를 보여 주려 하지 말고, 쓰고 있는 모든 대본에 공산주의 원리가 5분간, 당 노선이 5분간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했던 존 하워드 로손은, 아마 이 영화를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 영화 <밀정>

그런 영화들 속에 숨어 있는 정치적 코드들보다 더 불편한 것은 그런 영화들이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고종의 광무개혁을 칭송하는 것이나, 이왕가의 후예들이 대단한 독립운동이라도 했던 것처럼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못난 역사를 미화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일제(日帝)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자는 것이다. 맹자도 “국가가 필시 스스로 자기를 해친 연후에 남이 치고 들어온다(國必自伐而後人伐之)”고 했다.

스스로의 잘못을 직시하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해서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그와 유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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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h, J 2016-10-11 14:35:18
진짜 개념 있는 연기자라면 저런 영화는 비켜 갈 지혜와 안목이 있어야지...죽자고 끼여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