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은 친명 사대주의에 찌든 결과
인조반정은 친명 사대주의에 찌든 결과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0.1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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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중 사대의 역사적 기원

인조를 위시하여 서인 집권층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자기반성은 커녕 변명에 급급했고, 숭명 사대의식은 종묘사직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인조반정으로 인한 광해군의 폐위는 단순한 왕의 교체가 아니었다. 이것은 중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중국대륙의 명·청 교체기에 균형자 노릇을 하면서 동북아 세력 균형을 통해 조선의 국익을 최대한으로 도모하려 했던 고독한 군주가 노심초사했던 대중 자주노선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그렇기에 향후 정국에 미친 파장은 심각했다. 이제 어느 군왕도 감히 중립외교를 연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칫하면 이런 균형자 노릇으로 인해 왕위를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당시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교서는 이 당시 조선 지배층의 숭명 사대주의가 얼마나 뼛속 깊이 박혀 있는지를 유감없이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명나라를 섬겨 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로는 군신 사이요, 은혜로는 부자 사이와 같다.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再造至恩.재조지은)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조께서는 42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서 평생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으셨다. 

그런데 광해는 그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명나라 황제)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청나라)와 화친하였다...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는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인이 어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라고 언급되었으니, 명과 조선과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君臣)관계가 아니라 부자(父子)지간과 같다고 인식되었다. 

인조반정은 숭명 사대주의자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은 골수(骨髓)에까지 물든 숭명 사대주의자들의 궁정 쿠데타였다. 정원군이던 인조는 즉위하자마자 서인세력과 함께 노골적인 반청(反淸) 정책을 취했다. 청은 ‘오랑캐의 나라’이기 때문에 더불어 상종(相從)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은 조청(朝淸) 전쟁의 발발 가능성에 대한 아무런 군사적 대책이 없는 맹목적인 ‘묻지마 반청(反淸)’이었다는 점이었다. 

결국은 인조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2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침입을 불러와 종묘사직에 막심한 피해를 끼친 전란 발발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또한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면서 조선 역대 군왕 중에 ‘가장 무능하고 한심한 군주’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인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제위에 있었으니,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국가의 위신은 추락했고,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졌다. 

인조반정 직후의 민심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광해군이 백성들을 고단하게 한 면은 있으나 임진왜란 후의 전후 복구를 충실히 시행했고,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당시 최고의 의학 서적이었던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식으로 군주의 의무를 헌신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이 인조반정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조반정에 대한 명의 태도도 좋지 않았다. 명은 인조반정의 쿠데타 소식을 접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태도를 보였으나, 인조의 책봉을 요청한 조선의 사신에 대해 분명한 답신을 주지 않았다. 명은 인조반정을 일종의 찬탈로 인식했으나 후금과의 전쟁 상태였기에 이 기회에 조선군을 끌어들여 배후에서 후금을 압박하려는 카드로 활용하기로 대조선 정책이 결정되었다. 

후금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이 취할 태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후금은 서인세력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대의명분이 오랑캐와의 화친이었는데, 명을 부모같이 섬기면서도 자신들과 화친하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조선 조정의 사대부들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광해군이 취한 중립정책을 인조가 계승할 것인지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 후금이 명을 격퇴한 사르후 전투를 기록한 만주실록의 삽화도.

후금이 침략을 준비하는 와중에 명나라만 쳐다본 인조 

이런 불투명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 조선의 태도를 보고 후금은 조선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후금의 입장에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명나라 요양선 장수였던 모문용 문제를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모문용은 조선으로 도피, 망명하면서 평안도 가도에 군사기지를 만들어 후금의 배후를 노리는 애물단지가 됨에 따라 정명전(征明戰) 이전에 후환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모문용은 통행세를 내게 하고 후금과 조선을 오고가는 사신들의 서신을 함부로 빼앗고 행패를 부리고 해적질까지 하면서 후금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모문용은 인조의 약점을 자기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었다. 인조가 책봉을 받지 못한 점을 이용해 명의 실세, 환관 위충현을 움직여서 인조의 책봉을 성사시키고 그 대가로 끊임없이 조선에 물자 지원을 요구하며 ‘슈퍼갑’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둘째, 1619년 조선이 명과 출병한 사르흐 전투에 대한 책임을 묻고 찰떡같은 조명간의 군신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신과 새로운 군신 내지 형제 관계로 조선을 묶어놓겠다는 것이다. 셋째는 정명전에 앞서 조선으로부터 식량, 군마, 피복, 함선 등 군사·경제적 지원을 확보하겠다는 것 등이었다. 

그렇다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이런 미증유의 국난 앞에 인조의 대응책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인조는 반정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감을 씻기 위해 부친인 정원부원군을 원종으로 하여 명의 책봉을 얻어내는 것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정하고 무려 10여 년에 걸쳐서 명에게 사신을 보내는 등 온갖 노력을 했다. 욱일승천하는 후금의 위세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부국강병책을 추진해도 시간과 물자가 부족한 어려운 시기였는데,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 순위로 결정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아무리 왕의 부친이라고 해도 왕이 된 적이 없는 인물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하여 반대가 심했고 이것이 서인 집권세력 간 정쟁의 원인이 되었다. 명의 황제는 조선을 두고 청과의 미묘한 각축의 시점에서 원종의 책봉을 허락하면서 인조의 환심을 사는 한편 교지를 내려서 그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를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인조로서는 자신의 책봉에 대한 은혜에 원종이라는 부친의 책봉까지 받음으로 인해 명을 배신하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인조는 광해군과는 달리 후금의 흥기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전혀 그에 대한 정보 수집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여진족 1만 명이 뭉치면 대적하지 마라”는 소문은 구전으로 내려왔듯이, 여진족은 만주의 맹추위와 배고픔에 단련이 된 민족이었다. 임란 시절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일본 군대가 함경도로 북상했다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혼이 나서 패퇴한 전력이 있었다. 

더욱이 후금의 침략에 대한 군사적 대비가 전혀 마련되지 못했다. 인조반정 1년 뒤에 발생한 이괄의 난(1624)은 평안도의 군사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또 다른 반란을 두려워한 인조는 군사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 후금의 철기병에 맞설 조선군의 주력 부대는 조총부대였는데 조총 연습을 제대로 못했기에 임란에서 축적된 전투의 이점을 충분히 살릴 기회를 잃었다. 

의병들도 임란 때와는 달리 별다른 맹활약이 없었다. 임란 이후 유명한 의병장들이 역적으로 숙청되어 의병이 거병할 신바람을 내지 못했다. 김덕령, 곽재우, 이산겸 등이 역적으로 몰렸고 이순신이 전사했기에 오히려 화(禍)를 입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소문이 회자될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임란 시절 경상도 지역의 많은 의병장들이 북인 출신들인데 북인들의 숙청으로 의기소침하여 정권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인조가 철석같이 믿고 숨겨둔 ‘비장(秘藏)의 전략’은 손자병법의 36계였다. 여몽 전쟁 시절 39년 동안 고려왕들이 강화로 대피한 역사적 사례는 잊지 않고 있었는데, 다만 여기서 백성들이 흘려야 하는 피와 눈물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막강한 조선군의 조총부대로 철기병을 무찌르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고구려나 고려처럼 청해전술로 산야를 불태우면서 보급을 차단하는 치밀한 지구전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강화로의 도피가 유일한 전략이요, 탈출구였다.

▲ 후금이 명을 격퇴한 사르후 전투를 기록한 만주실록의 삽화도.

10일 만에 평양성이 함락된 정묘호란 

1627년 1월,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린 청의 3만6000명의 철기군대는 볼모로 잡아두었던 강홍립을 대동하면서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이것이 정묘호란의 시작이었고 임진왜란이 종식된 지 거의 30년 만의 대재앙이었다. 비보를 접한 인조와 조정의 반응은 “왜 우리가 침략을 당했지?”라는 황당한 반응이었다.

조선의 반응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인조반정 이후 조선에서는 친명배금(親明排金) 분위기가 고양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이 배금(排金)의 기조를 노골적으로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금의 입장에서 볼 때, 인조와 서인 조정이 모문용에게 끌려 다니면서 식량과 의복 및 군수물자를 제공한 것, 그 자체가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후금의 철기병들은 하루 30리 강행군으로 10일 만에 평양성을 점령했는데 인조의 전략은 무엇이었던가? 몽고군처럼 후금군이 수군(水軍)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인조는 강화로 피난을 가고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다. 인조는 병력을 수집했는데, 정권 안보에 급급하여 자신과 조정의 호위병으로 3만 명을 모집하였으나, 서북에는 조기에 병력 파견을 주저했다. 

후금군이 갑자기 화친을 요구하였는데, 의외였다. 후금군은 명의 원숭환 군의 공격과 배후에서 조선군의 역습을 우려한 것이다. 처음 후금군의 요구 조건은 “명과 화친을 중단하라, 아니면 우리와 전쟁을 하든가?”였다. 

그러나 서인 정권의 답장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그것을 할 수 없다”는 막무가내 식 응답이었으니, 종묘사직이 무너져도 명을 부모처럼 떠받드는 친명사대를 하겠다는 참으로 황당한 배짱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고 후금에 볼모로 잡혀갔던 강홍립 등이 양국간의 화의를 조정, 교섭하였는데, 전쟁수습책인 조약으로는 온건한 편이었다. ①화약 후에 후금군은 즉시 철병하고 ②후금군은 철병 후 압록강을 다시 넘지 않을 것 ③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후금은 철수 시에 의주에 4000명을 주둔하게 하여 가도에 모문용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렇게 평안도 일대는 다시 모문용의 명군과 후금군의 크고 작은 전투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위기에도 반성이 없었던 인조와 서인들 

정묘호란 이후 인조를 위시하여 서인 집권층에게 자기 반성의 자세가 현저하게 부족했다. 숭명 사대의식은 종묘사직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후금의 명에 대한 압박이 심해질수록 명과의 군신의리를 생각하고 명을 부모지국(父母之國)으로 섬겨야 한다는 인식이 깊이 각인된 이상, 명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인조의 부채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심지어 조경 같은 사대부는 “후금이 영원(寧遠)과 가도를 침범하여 천자(天子)의 적자들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조선은 마땅히 달려가 구원하되 강약, 이해, 성패 따위는 돌보지 말고 오로지 명과의 의리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의분(義憤)을 불태웠다.(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p.70). 

중국대륙이 오랜 전란으로 세력 균형의 축이 바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사회의 분위기는 숭명 사대의 큰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조선의 일반 백성들조차도 후금을 오랑캐로 멸시했으며 조선에 온 청 사신들조차 아이들로부터 돌팔매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한다. 춘추시대의 공자나 맹자, 송나라의 주희와 같은 탁월한 성리학자들도 오랑캐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대우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던 것이 조선에서의 서당과 서원 교육은 철저하게 성리학 위주의 중국 문화 예찬론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후일 서인 정권은 반성은 커녕 정묘호란이 가져온 국난(國亂)에 대해 변명에 급급했다. 아무도 정치적 책임을 지는 자들이 없었고 개인적 명예의 실추를 만회하려는 데 급급했다. 심지어 적반하장격으로 정묘호란이 마치 강홍립의 ‘흉계’인 것처럼 인식하는 여러 차례의 역사적 기술을 남겼다. 

광해군이 후금과의 화친을 시도한 것이 인조반정 명분의 출발점이었는데, “광해군과 강홍립으로 이어지는 조선군 지휘부의 배신 행위로 인해 1619년 사르흐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역적 강홍립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주요 논리이다.

그 이유는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치욕적 항복을 하면서 서인들이 내세운 거사의 명분이 정묘호란의 패전으로 상당 부분이 훼손된 것에서 그 낭패를 벗어나기 위한 궁여지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조와 서인정권은 과연 다가오는 병자호란을 어떻게 대비해 나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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