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 백남기’ 그가 왜 농민으로 불려야 하는가
‘투사 백남기’ 그가 왜 농민으로 불려야 하는가
  • 백요셉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6.10.18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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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백남기 논쟁에서 빠진 것

시위대의 폭력성은 무시하고 경찰의 과잉 진압과 시위대의 희생만을 부각해 여론을 선동하려는 시도는 문제 

백남기 씨의 사망 원인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다. 그는 지난해 11월 광화문 민중총궐기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은 후 혼수상태를 지속하다 최근 숨졌다.

백 씨를 치료한 서울대병원 측이 사망진단서 사인을 ‘병사’라고 기재함으로써 촉발된 논란은 경찰이 정확한 사망 원인의 규명을 위해 법원의 영장을 받아 부검을 시도하는 가운데 유족들은 경찰이 쏜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가 분명하다면서 부검을 거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야당과 진보 진영 또한 이번 논쟁에 가세해 ‘백남기 특검’을 주장하며 정치 쟁점화를 시도하고 있다. “정부의 과잉 진압으로 농민 백남기 씨가 희생됐다”는 것이다. 반면 일각에선 백 씨의 사망 과정에 경찰의 물대포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 개입됐을 수 있다는 ‘제3의 인물론’을 제기하고 있다. 

백남기 씨의 사망 원인에 대해선 현재로선 무엇이 맞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경찰의 철저한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다. 다만 최근의 백남기 씨 논쟁이 중요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컨대 백 씨가 정부의 과잉 진압 과정에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식의 언론 보도이다. 

물론 시각에 따라선 진압 과정에서 행한 경찰의 대처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 백남기 씨가 부상당한 지난해 11월의 광화문 시위는 경찰보다는 오히려 쇠파이프로 경찰차를 파손하는 식이었던 시위대의 과격한 폭력성이 문제였다.

백 씨가 부상당한 물대포 진압도 밧줄로 경찰차를 묶어 전복시키려는 과격 행위를 막기 위한 경찰의 수세적 대처였다. 당시 문제의 시위를 주도한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씨는 불법 폭력시위 선동 및 경찰버스 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 지난 10월 12일 종로구 보신각 앞에 설치된 백남기 씨 영정 사진 앞에서 추모하는 사람들. / 연합

1970년대부터 반 체제운동 매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백남기 씨 관련 논란에서는 시위대의 과격 폭력 시위에 대한 문제 제기는 보이지 않는다. 시위 도중 부상당해 사망에 이른 백남기 씨의 사정이 딱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와 관련 시위대의 폭력성은 무시하고 경찰의 과잉 진압과 시위대의 희생만을 부각해 여론을 선동하려는 시도다. 마치 과거 반(反) 정부 시위에서 희생자들을 앞세워 동정 여론을 극대화했던 사례들을 보는 듯하다. 

당시 민중총궐기 시위는 불법이었고  경찰 113명이 부상했고 경찰 차량 50대가 파손됐다. 이런 맥락에서 더욱 의문스러운 대목이 있다. 바로 ‘농민 백남기’라는 규정이다. 과연 백남기 씨는 농민인가, 아니면 전문 투쟁가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백 씨는 우리가 아는 농민은 아니었다. 

백남기 씨는 1947년 8월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났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에 입학해 법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백 씨는 1971년 10월 군대를 대학 내에 상주시킨 위수령 조치에 반발하여 시위를 주도하다 첫 번째 제적을 당한다.

1974년 재입학했지만 이듬해인 1975년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하면서 제적된다. 두 번째 제적이다. 그 후 1980년 3월 복교(復校) 후에 중앙대학교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이 되는데, 이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를 주도하다 같은 해 5월 중앙대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된 후 7월에 퇴학 처분되어 사실상 영구제적 처분을 받았다.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란 1980년 5월 15일 전두환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중앙대 학생들이 일으킨 가두시위로서 ‘의혈이 한강을 넘으면 역사가 바뀐다’는 구호 아래 흑석동 캠퍼스에서 한강대교를 건너 서울역까지 도보로 행진한 시위였다.

그리고 1980년 8월에는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6개월을 복역하다가 1981년 3·1절 특사로 가석방되는데, 백 씨의 유족이 올해 초 광주시에 5·18 유공자 신청을 한 것을 보면 5·18에 참여한 것이 문제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백남기 씨의 투쟁은 1986년부터 가시화된다. 백 씨는 1983년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된 후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고 이듬해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을 지낸다.

그 후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후 1992년에는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을 주도했다. 그러다 1993년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직을 역임하며 운동권의 중요한 한 축인 농민운동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전국 부회장을 지낸 가톨릭 농민회 

그렇다면 가톨릭 농민회란 어떤 단체인가. 1966년에 창립된 가톨릭 농민회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농민단체라고 표방한다. 하지만 이 공동체의 강령과 헌장을 보면 농민단체라기보다는 정치단체나 급진적 통일운동조직에 가깝다.

이들이 강령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슬로건에는 ‘농민’이 아닌 ‘민족자주’ ‘자주통일’ ‘민중’ ‘민중적 의료체계’ ‘민중의 주체적 힘’, ‘민족자립경제’ 등 농민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가톨릭 농민회 강령과 헌장의 중요 대목 요약이다. 이를 보면 가톨릭 농민회는 농민의 이익보다는 ‘외세 배격, 민족자주’와 ‘통일’, ‘독점자본 극복’ 등을 주장하는데, 이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의 과거 운동권 핵심들의 논리와 대동소이하다.

▲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시위 현장.

강령 
- 민족자주화의 실현과 통일은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한 지상과제
- 모든 고통과 질곡은 분단에서 비롯된 것 … 자주·통일 운동에 앞장선다.
- 통일운동의 자유를 확보하고,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을 자주통일의 방향으로 변혁한다.
- 정치의 주체는 민중이며, 민주화는 민중의 각성·단결·참여로써 이룩된다.
- 민족의 자주와 민중의 주체적 힘을 키워, 전인적인 인간완성을 이룩하는 참교육과 민중적 의료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 노동운동과의 굳건한 연대를 통해, 전체 민족통일 민주화 운동의 중심역량을 확고히 한다.
- 교육의 자치를 철저히 보장하고, 12년제 무상교육을 실현
- 의료의 독점을 타파하고, 민중의 정신적·육체적 건강에 봉사하는 체제로 혁신
- 이땅에 민족의 수난과 민중의 고통에 응답하는 민족·민중교회 건설에 앞장서며
- 높은 정치의식과 책임성을 갖춘 헌신적 활동가들을 배출하고,
- 본회는 민족통일과 참된 민주화, 생명과 평화를 위해 애쓰는 국내외 모든 민족·민중·양심과 긴밀히 연대한다.

헌장 
첫째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적·평화적·민족 대단결의 원칙과 방법에 따른 민족통일을 이룩한다.
둘째 모든 형태의 독재와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민중 스스로 선택·결정하고 책임지는 정치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한다.
셋째 국내외 독점자본의 지배를 극복하여, 민족 자립경제를 건설하고 사랑과 정의에 토대 를 둔 소유와 분배질서를 확립한다.
넷째 억압·경쟁·소비적인 지배문화를 거부하고, 해방·협동·생산적인 민족·민중 문화를 건설한다.
다섯째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고, 모든 이의 자유를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화하고, 하느님 창조질서보전과 공동체적 삶의 실천을 위해 헌신한다.
여섯째 민주화와 민족통일, 생명과 평화의 길에 함께하는 세계교회와 모든 민족·민중세력들과 굳건히 연대한다.

1994년부터 2014년까지 20년 동안 백남기 씨의 뚜렷한 외부 활동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2014년 백 씨는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으로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5년 11월에는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의 자격으로 서울로 향했다.

이렇게 민주노총이 주최한 ‘민중총궐기 시위’에 가담한 백남기 씨는 경찰 저지선을 넘었다가 물대포에 의해 쓰러져 300여 일을 의식불명상태로 있다가 지난 9월 25일 사망했다. 

‘민주 열사’ 백남기가 맞는 것 아닌가? 

현재 백남기 씨는 유족에 의해 5·18민주유공자 신청이 된 상태다. 5·18민주유공자로 등록이 되면 국립5·18민주묘지 안장이 가능하다. 또한 광주시는 5·18 관련자 인정 여부와 별개로 유족 측이 원할 경우 고인을 민족민주열사들이 묻힌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하는 방안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대 민주동문회는 지난해 12월 백남기 씨에게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한 바 있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농민 백남기’라는 프레임은 오히려 고인의 활동을 축소하는 행위가 아닌가 싶다. 백 씨의 입장에선 그날의 행동이 농민이라는 지엽적인 이익을 대변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반대하는 행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 씨를 농민으로 규정할 이유가 따로 있지 않다면 그는 2015년의 민주 열사가 맞는 것 같다. 

그들은 언제쯤 백남기 씨를 열사라고 부를까. 아마도 백남기에 대한 열사 호칭은 없을 것 같다. 열사란 김지하가 말한 바, ‘죽음의 굿판’을 벌이는 이들의 작당이라는 것을 이제는 국민들도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열사보다는 농민이 더 국민들의 눈을 가리기 좋은 프로파(선동)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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