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본질을 잊은 나라, 일본
‘칼’의 본질을 잊은 나라, 일본
  • 김용삼 편집위원
  • 승인 2016.10.2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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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이념 갈등의 한인사회를 가다③

중국의 팽창정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본은 꿰뚫어 보고 있다

도쿄=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인천공항에서 도쿄 나리타 공항까지 항공료가 20만~30만원 대, 기자가 도쿄 출장 때마다 애용하는 시나가와(品川)프린스 호텔의 하루 숙박료가 조식 포함 11만원 대였다. 일본의 버블 경제 여파인지는 몰라도 3~4년 전에 비해 물가가 더 낮아져 서울과 비슷했다. 다만 교통비가 서울보다 좀 비싼 것이 부담이었다. 

태풍과 지진의 나라답게 일본 체류 기간 동안 9호부터 11호까지 세 개의 태풍이 동시에 몰려와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비상이 걸린 것은 태풍으로 인한 날씨만이 아니다. 중국의 팽창주의에 대한 경보음이 일본 열도 곳곳에서 울려대고 있었다. 

지난 8월 27일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서울에서 열린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과 재무장관회의에서 한일 통화스왑 재개에 합의했다. 한일 간의 통화스왑은 지난 2001년 7월 20억 달러 규모로 시작하여 2011년 10월엔 700억 달러까지 규모가 확대됐다. 그런데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2015년 2월 23일 통화스왑이 종료됐다.

재일동포 지도자들은 한일 통화스왑의 재개는 사드 배치 문제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중(韓中) 관계와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다는 점을 한국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홍형 통일일보 주간의 설명이다. 

“한일 통화스왑의 복원은 앞으로 한국의 경제위기 상황이 닥칠 때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일본은 그 동안 한국이 너무 친중(親中)적인 정책으로 인해 한국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 왔는데,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자 통화스왑을 복원키로 결정했습니다. 중국의 팽창정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본은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죠.” 

이번 일본 취재를 통해 한국도 좌경화로 인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일고 있지만 일본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점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의 지식층이나 언론에서는 아베 정권이 헌법을 개정하여 보통국가(혹은 정상국가), 즉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다.

▲ 일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헌법 96조인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공동시위를 하고있다./연합

평화헌법 개정 논란 

그런데 아베 정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문제는 일본 좌익들의 70여 년에 걸친 선전선동으로 인해 결코 손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즉 평화헌법을 건드리면 일본은 큰일 난다는 일본 좌익들의 주장에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이 철저하게 세뇌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아베 정권의 강력한 개헌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란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일본이 헌법 개정에 성공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현재의 일본이 1920~30년대 시절처럼 군국주의화하여 이웃 나라들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지난 3월 29일, 아베 정권의 염원이었던 안전보장법제(안보법제)가 발효됨으로써 집단적 자위권(right of collective self-defense)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 자위대는 자국이 직접 공격받지 않더라도 동맹국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우방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 무력으로 이를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국운상승이라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맞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맹을 잘못 설정하고 미국, 영국 등 세계 패권국에 도전했다가 원자폭탄 두 망을 맞고 참혹하게 패전했다.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국가기본문제연구소 이사장은 말한다. “세계 6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국군’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위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평화가 너무 난만한 상황이 오래 되어 ‘칼’의 본질을 잊은 것이 오늘의 일본이라고.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하면 한국에서는 주변국을 침략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그녀는 한국인에게 묻는다. 

한국의 좌경화는 일본 좌익 덕분 

중국이 북한 편이라는 사실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반적 사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이 자유민주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과정에서 도움을 줄 나라는 미국과 일본일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독자적인 힘으로 한국 주도의 자유민주통일을 이루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그리 간단치 않다. 주변국의 협조와 지지와 동의, 그리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김일성의 6·25 남침 때도 경험했지만 한국이 북한의 침략을 당해 위기 상황이 발생되었을 때 주일미군이 한반도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후방 지원 및 보급, 기술적 지원은 필수적이다. 

사쿠라이 요시코 이사장은 “한국인들은 믿지 않으려 하겠지만, 일본의 헌법 개정은 자유민주통일을 앞둔 한국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이 근거도 없이 일본의 역할을 ‘침략자’로 단정하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거나, 한일 좌익세력들의 합작에 의한 선동이 제대로 먹힌 탓이라는 것이 기타 요시로(喜多由浩) 산케이신문 기자의 분석이다. 

기타 요시로 기자는 1998~99년 한국 특파원을 역임했고, 일본 내에서 조총련을 오래 취재해 왔다. 지난해에는 조총련계 재일교포와 결혼한 일본인 쌍둥이 자매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소설집 <아키와 가즈-머나먼 조국>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과연 일본 사회, 특히 일본 언론의 경우 좌익세가 어느 정도인가를 질문하자 기타 기자는 이렇게 답한다. 

“일본의 언론계는 예나 지금이나 좌익세가 막강합니다. 아사히, 마이니치, 도쿄신문, NHK, TV아사히, TBS, 그리고 이와나미 출판사 등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NHK는 특히 노조가 강해서 NHK 노조위원장이었던 우에다 데츠(上田哲)가 ‘노조의 천황’이라 불렸습니다. 그가 사회당으로 총선에 출마하여 3선의원이 되었어요. 전에는 언론계의 90%가 좌익이었는데, 최근에는 분위기가 바뀌어 좌익이 70%, 우익이 30% 정도로 약간 바뀌었다고 봅니다. 특히 공영방송인 NHK가 너무 좌편향적인 보도를 하는 바람에 아베 총리는 자신의 측근인 모이미 가쓰토 씨를 NHK 회장에 임명했어요.” 

일본 좌익 지식인과 언론들의 선동 공작으로 일본 사회가 좌회전했고, 그 불똥이 한국으로도 튀었다. 이영희(전 현양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 번역(혹은 편역)한 일본 좌익 서적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 한국도 좌경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타 기자는 일본 사회가 조총련에 유화적인 이유는 일본에서 좌익세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조총련들이 좌익 정당과 자민당 내의 유력 정치인들과 강력한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일본 사회가 제대로 대처를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최근 들어 조총련 조직이 인적·재정적으로 크게 약화되어 이대로 가면 5~10년 후에는 소멸될 것으로 예측했다. 

조총련 학교의 민족교육은 주체사상 교육 

“과거에 조총련이 일본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총련계 학교 덕분입니다. 조총련계 학교 재학생 수가 많을 때는 4만 명을 헤아렸는데, 지금은 6000여 명으로 축소됐어요. 그들은 겉으로는 ‘민족교육’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김일성 충성심 교육을 하고,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학생들을 북한 공작의 전위부대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총련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정시동(鄭時東) 민단 도쿄 시부야 지부 상임고문은 일본의 정치적 전환기는 1955년이라고 설명한다. 좌파의 경우 분열되었던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이 일본사회당으로 통합되었고, 우파는 민주당과 자유당이 합당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이 탄생된 해가 19955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1955년 체제’라고 부르는데, 이런 정치적 전환기의 한복판인 1955년 5월 22일, 조총련 조직이 재건되었다. 

국제공산당 규약에 의하면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존재한다는 1국 1당 원칙이란 것이 있다. 일본공산당은 이 원칙에 의거, 조총련을 자신들의 지휘 하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일성은 “조총련에 대한 지도권은 우리가 행사해야 한다”고 맞섰다. 모스크바는 김일성의 손을 들어 줬다. 그 결과 김일성을 추종하는 한덕수가 의장에 취임했고, 조총련은 재건과 더불어 ‘애국상공’이라는 이름하에 북한에 대한 지원운동을 벌였다. 

▲ 1958년 12월 14일 니이가타에서 북한 청진으로 출항하는 북송 선박.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면서 일본의 절대다수의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이며, 소련이 세계의 패권국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 와중에 ‘사회주의 지상천국론’이 불거지면서 재일동포 북송운동이 시작된다. 

사실 재일동포 북송은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하고 이 선을 넘은 일본 어선을 나포하고 어민을 체포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1959년부터 시작된 조총련 북송사업은 재일교포를 인질로 잡고 재일교포 인재를 북한으로 빨아들이기 위한 북한의 공작이 성공한 것이다. 북송사업으로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그 가족이나 친척을 북한의 인질로 잡힘으로써 조총련 확대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정 고문은 설명한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좌익계 재일동포들은 패전 직후 승전국 행세를 하며 온갖 불법을 다 저질렀고, 일본공산당의 폭력 전위조직이 되어 일본 사회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북송사업은 조총련뿐만 아니라 일본공산당, 보수정권, 매스컴,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적극 환영했습니다. 골치 아픈 존재들을 해외로 쫓아내 인종 청소를 한다는 데 어느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자료를 찾아보니 재일교포 북송 당시 아사히신문은 “귀환 희망자가 늘어난 건 ‘완전 취업·생활 보장’이라고 알려진 북한의 매력 때문”이라고 보도했고, 산케이신문은 “1000명 가까운 귀환자를 따뜻한 방에 수용하는 모국의 경제력에 (북송된 사람들이) 안심했다”고 썼다. 

한덕수 조총련 의장, 북송 열광적으로 환송 

1959년부터 9만 3000여 명을 북으로 인종 청소한 재일동포 북송사업에 대해 조총련이 결성 60돌을 맞아 지난해 발간한 <총련 주요활동 일지(1955~2015)>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58년 8월 11일: 총련 가나가와현 나카도메 분회 동포들, 처음으로 공화국에로의 즉시 귀국을 결의,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께 편지를 드림, 일본 정부에 요청서 제출.
9월 8일: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께서 재일동포들이 돌아와 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보장해줄 것이며 이것은 공화국 정부의 민족적 의무라는 데 대하여 천명하시었다.

1959년 12월 14일: 제1차 귀국선 니가타 출항. 1차 귀국 동포 수 975명, 한덕수 의장을 비롯한 각 단체 대표들, 일조(日朝)협회, 니가타 현 지사 열광적으로 환송. 16일 6만여 명 군중의 환영 속에서 청진항에 도착. 총련 중앙상임위원회, 귀국 사업에 적극 협조해준 일본 인민들에게 사의를 표하며 계속 협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성명 발표.’ 

이승만 정부는 재일교포들의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 특수임무수행자라는 조직을 일본으로 밀항시켜 행동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다를 건너던 중 풍랑을 만나 사망을 하는 등 비극이 발생했다. 이들에 대한 존재가 그 동안 비밀에 싸여 있다가 이명박 정부 당시 특수임무수행 동중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예우하는 법률이 통과되어 보상을 받게 되었다. 정 고문의 설명이다.

“교포들은 북송될 때 일본의 재산을 다 처분했는데, ‘모든 것이 공짜인 사회주의 천국으로 가는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는 조총련들의 선동에 속아 넘어가 조총련계 금융기관에 돈을 맡기고 북송선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모인 돈이 조총련의 자금줄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이 와중에 1969년 7월 20일,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좌경화로 치달았던 일본 사회, 그리고 재일동포 사회는 미·소(美蘇)의 국력이 역전된 현실을 보면서 가치관의 혼련을 겪었다고 한다. 정 고문은 말한다.

“당시 한국은 월남에 국군을 파병하여 경제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기 시작했고,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했습니다. 저는 이런 면면을 보면서 드디어 한국이 양반 문화에서 벗어나 진정한 근대적 국민으로 탄생하는구나 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이 와중에 아폴로 우주선이 달 착륙에 성공하여 소련 우선적인 사고 방식이 붕괴되었죠.

김일성은 1972년 4월 15일 자신의 환갑 때까지 남한을 해방시키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미 세계 정세의 흐름 상 사회주의가 패퇴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동포 사회에서 북송 희망자들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겁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조총련의 확장세에 제동이 걸린 데다가, 북송된 재일교포들이 틈만 나면 소금을 보내 달라, 돈을 보내라는 비밀 편지들이 답지하면서 ‘사회주의 낙원’ 북한의 참혹한 실상이 재일교포 사회에 알려졌다. 

당시는 조총련의 주력에 거의 다 북송되어 북으로 끌려간 재일교포들로부터 북한의 어렵고 힘든 실정이 알려지면서 조총련 사회가 흔들리자, 북한과 조총련 핵심 지도부는 민단을 조총련화 하는 공작에 돌입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민단에 침투한 조총련 세력을 쳐내기 위해 통일일보가 중심이 되어 정상화 작업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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