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된 재일동포 구출은 조총련의 힘으로!”
“북송된 재일동포 구출은 조총련의 힘으로!”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0.27 01: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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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이념갈등의 한인사회를 가다④

조총련의 마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그들 손으로 북한을 해방시키고, 북송된 재일동포를 구출해 오도록 사명감을 심어주는 작업 지금부터 시작해야

도쿄=한 시절 냉전의 주(主) 전장이었던 도시가 일본의 수도 도쿄다. 남북한에 중립적 입장이었던 일본을 사이에 두고 민단과 조총련이 피 나는 싸움을 벌인 곳이 바로 도쿄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남북 열전의 한 줄기가 1973년 8월 8일 벌어진 김대중 납치사건이었다. 

기자는 잠시 짬을 내어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졌던 도쿄의 치요다 구(千代田區) 아키하바라에 위치한 그랜드 팰리스 호텔을 방문해 보았다. 지금은 특이함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평범한 호텔이지만, 약 43년 전 발생한 납치사건은 한국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김대중은 후에 반국가단체로 지목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기 위해 북한과 깊은 연계를 맺고 있는 조총련 조직원들과 빈번하게 회합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뤄볼 때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을 납치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면, 김대중은 영락없는 조총련 조직의 일원으로 인생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대중은 이 호텔 2210호실에서 중정 소속 행동대원들에게 납치되었다가 5일 후인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에 나타남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김대중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이후락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대중은 대통령 당선 후 당시 한민통 소속 조총련 조직원들을 초청하여 청와대에서 수시로 그들을 만난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다. 

한민통은 북한의 지령에 의해 만들어진 반국가 단체이고, 김대중은 서울로 납치된 후 이 단체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그들은 주한미군 철수와 남북연방제 통일을 주장했다. 이후락은 1987년 10월호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김대중 납치를 지시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김대중 씨가 친북인사들과 함께 한민통을 결성하여 사실상 망명 정부로 만든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 망명 정부가 김일성과 직접 대화하여 연방제 통일을 획책하고 우리 정부를 괴뢰시 하려 할 것이다. 북한 정권이 김대중 씨의 평양 방문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친북 인사들이 김대중 씨와 조총련 의장 한덕수의 면담을 주선하고 있다는 첩보도 있었다. 우리로서는 김대중 씨를 한민통 결성 이전에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1961년 8월 15일 오사카의 동포기업가 서갑호 씨가 당시 박정희 의장에게 본인 소유의 주일 한국대표부 건물과 부지를 국가재산으로 헌납하고 있다.

조총련 모국 방문 사업의 성과 

겉으로 보기엔 활기 넘치는 도쿄지만, 아직도 이 도시 곳곳에는 북한을 추종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조총련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들과 맞서 싸운 사람 중의 하나가 강영순(康榮淳) 씨다. 제주 출신으로 30년 전 일본으로 건너와 제주한라일보 일본지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재일동포 중 제주 사람들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제주 4·3사건에 연루된 분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주를 탈출하여 밀항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조총련 간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강 지사장의 장인 강자길(姜自吉) 씨는 도쿄 가츠시카 구(葛飾區) 조총련 분회장으로 활동 중 1974년 조총련에 반기를 들고 가족들과 함께 맨 먼저 조총련 동포 추석성묘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다녀왔다. 그러자 조총련들은 “강자길은 김대중 사건을 일으키고 조총련 파괴공작을 진행하는 KCIA(중앙정보부)의 충실한 앞잡이”라는 유인물을 뿌려 사업을 방해하고 공갈 협박을 일삼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법을 어긴 간첩들이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모국 방문을 허용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적용을 정지시키는 특별명령을 발표했다. 이렇게 시작된 조총련 동포 추석성묘단 사업은 조총련들에게는 충격과 경악이었다. 이 사업으로 인해 5만여 명의 조총련이 모국 방문 후 자신들이 조총련과 북한의 선전에 속은 사실을 깨닫고 북한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강 지사장은 장인과 함께 조총련 동포 모국 방문 사업을 추진했는데, “모국 방문단 사업이 조총련 조직을 와해시키는 결정타였다”면서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모국 방문을 하겠다고 신청을 하고 임시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은 후에도 조총련들의 협박과 방해공작으로 인해 공항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업이 선풍적 인기를 끌자 북한도 동포 모국 방문 사업을 추진했는데,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은 북한의 살벌한 감시체제와 참혹한 실상에 충격을 받고 조총련을 탈퇴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강 지사장은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이 고향 발전을 위해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를 해줘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은 사비를 털어 중산간 부락에 전기와 수도를 넣어주고, 제주의 각 학교에 밴드부를 만들어 악기를 사 주었습니다. 그 결과 제주의 곳곳에서는 악기 연주 소리가 들렸어요. 감귤 묘목을 수백만 그루 일본에서 가져다 오늘날 제주를 감귤 천국으로 만든 것도 재일동포들이요, 제주에 관광호텔을 짓고 골프장을 건설하여 오늘과 같은 관광의 허브로 만든 것도 재일동포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제주 발전을 위해 공헌을 한 재일동포들을 기리기 위해 제주도는 자치단체 차원에서 재일동포들이 1만 원만 내면 1주일 간 제주를 무료 여행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강 지사장은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일 감정에 대해 불만이 많다면서 “독도와 위안부, 일본 교과서 문제는 북한과 조총련이 한일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한 3대 꽃놀이 패”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재외국민들의 투표 문제도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관광 제주’는 재일동포들의 작품

“선거 때 재외국민들이 투표권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본국 정부는 명분론, 관념론에 밀려 이를 허용했습니다. 막상 투표권을 주었더니 실제 투표율은 5%, 심지어 1~2%밖에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막대한 선거관리 비용을 들여가면서 재외국민 투표를 계속하는 것이 좋은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괜히 교민 사회에 지역감정, 이데올로기 갈등만 선동하고 부추기는 이런 일들에 정력과 시간, 비용을 낭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길인지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 재일 경남도민회는 30여 년 동안 20만 그루의 과실수를 고향 경상남도에 심었다.(2008년 4월 경남 사천)

올드 커머(old commer)와 뉴 커머(new commer) 

재일동포들을 만나면 ‘올드 커머(old commer)’ ‘뉴 커머(new commer)’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해방 무렵, 혹은 그 이전에 이주해 온 동포들은 올드 커머, 유학이나 상사 주재원으로 비교적 최근에 일본에 이주한 동포들은 뉴 커머로 구분한다. 올드 커머들을 대표하는 조직인 민단이 국시(國是)를 존중하는 반공세력이라면, 뉴 커머들이 결성한 한인회는 생활단체를 표방하고 있다. 

뉴 커머들은 주로 도쿄 신주쿠(新宿)의 가부키쵸(歌舞伎町), 신오쿠보(新大久保)역 근처에 코리안 타운을 형성하여 일본 사회에 한류(韓流) 붐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뉴 커머들을 모아 재일본 한인회를 결성하여 3~4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사람이 조옥제(趙玉濟) 씨다.

한국의 중소기업인 GK주식회사 일본지사 대표를 맡고 있는 조옥제 씨는 일본 유학을 왔다가 그대로 눌러 앉은 뉴 커머의 전형적인 사례. 그는 민단의 정체성에 약간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 초까지 민단은 뉴 커머들에 대한 관심이 적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최근 일본에 정착해 살고 있는 분들이 자연스럽게 한인회를 결성하게 된 것이죠. 한국에서 좌파 정권이 등장하면서 민단은 기합이 완전히 빠져서 반(反)국가단체에 소속됐던 사람들이 민단을 지배하다시피 했어요. 하긴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가 반국가단체 소속원들을 초청하여 환대를 하는 마당에 민단인들 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조총련이 저 모양으로 몰락하고 있는 것은 민단이 잘 싸워서가 아닙니다.” 

조 대표는 조총련은 절대 몰락하여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진단했다. 

“저들은 조직원들을 게릴라화 하여 민단 곳곳에 침투시켜 민단을 숙주 삼아 민단을 통째로 조총련화할 가능성도 있어요. 2006년 이른바 5·17 사태 당시 민단 단장 하병옥 씨가 내쫓기기 전에 저를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한인회와 내가 손잡고 교민사회에서 혁명을 하자. 민단의 강경세력을 거꾸러뜨리는 데 한인회가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어서 제가 ‘당신이 민단을 장악할 능력이 없으면 깨끗이 손을 떼고 떠나라’고 충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 대표는 최근 들어 민단 내에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민단은 웰빙 단체 비슷하게 변해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의욕도 상실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아직도 일본 사회 곳곳에는 붉은 물이 짙게 배어 있는 조총련들, 그리고 조총련에서는 탈퇴했으나 아직도 사회주의적 환상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기자는 이번 도쿄 취재 과정에서 그런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는데,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은 자기 신분 공개를 꺼렸고, 사진 촬영도 거절했다. 

그들은 “공화국” “수령님”이란 낯선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북한은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도와준 은인”이라고 칭송하고 있었다. 북한은 일본인을 납치하고, 핵무기로 동족을 말살하려 하고 있으며, 당신들 가족과 친척을 북송시켜 인질로 잡고 있는 인질범 아닌가 하고 물으면 “그렇게 말하면 대화를 하지 말자는 얘기”라면서 입을 막는다.

반면에 일본 곳곳에서 착실하게 기반을 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도쿄 분쿄 구(文京區)에서 미나리(味菜里)라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문춘자(文春子) 대표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문 여사의 일본명은 이와모토 하루코. 그녀는 나이 60이 넘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 지금은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한다. 

“어린 시절 길을 가면 일본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일본 사람에게 져서는 안 된다’면서 악착같이 살았죠.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게 된 계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고 생각해요. 올림픽 이후 일본 사람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을 보는 시각이 완연하게 달라졌어요.” 

▲ (오른쪽부터)강영순, 문춘자, 이수원, 이달완

“한글 배우기는 개인 의지의 문제” 

문 여사의 남편은 메이지대 유학생 출신의 한국인으로 오래 전에 사별했다. 문 여사는 그 후 남편을 대신하여 강철환 씨 등 탈북자들도 많이 도왔다고 한다. 또 유명한 NGO인 글로벌 어린이재단(GCF)의 일본지부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을 돕는 일에도 앞장 서 2015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고 한다. 

“동포들 중에 한국 정부에다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분들이 있는데,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에 한국어 학교를 지으려면 수천 억 원을 들여도 어려울 겁니다. 저는 한글을 독학으로 배웠어요. 친구들과 카톡을 하면서 어려운 받침 쓰는 것을 깨우쳤어요. 한글 배우는 문제는 교육기관이 문제가 아니라 개인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문 여사도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일 감정에 대해 “과거의 창피한 기억들을 되살려 자해하듯 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일”이라면서 “이제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서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일본과 협조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일본의 유명 교수님들,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 특파원들이 손님으로 와서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일본 지식인들은 독도 문제를 한국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어요. 한국이 안심할 수 있는 나라이고 체제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나라라는 믿음이 있다면 아마 독도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게 제기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국 사람들은 통일된 한국은 일본에 도움이 된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노력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일본인들에게 부담이 되고 경계심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씀들을 하세요.”

문 여사는 재일동포들에게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재일동포 분들은 지금부터 남자든 여자든 일본 사람들에게 ‘배우자는 한국계가 최고’라는 평을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어는 물론이고 한국어와 영어 등 3개국어에 능통하도록 교육을 시키고 예절교육을 시켜 일본을 넘어 세계와 소통하는 사람들이란 비전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자와 헤어지면서 문 여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일본에서 한국 국적자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한국 국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겁니다.”

민단 도쿄지방본부의 감찰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수원(李壽源) 씨는 조총련계 학교인 조선대학교 출신으로 민단 간부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위원장은 민단의 위상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도쿄에서 민단의 위세가 가장 강했던 아다치(足立區) 지부의 경우 연간 회비가 2000만 엔 정도 조성되었는데, 최근에는 3분의 1 수준인 700만 엔으로 떨어졌습니다. 도쿄 내 21개 지부의 사정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에요. 재정의 자주권 확립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조총련 ‘민족교육’의 실상 

민단의 위상보다 더 심각한 붕괴 현상에 직면한 것이 조총련이라고 한다. 이 위원장의 설명에 의하면 조총련계 초등학교는 한 학교 당 학생이 30~50여 명밖에 안될 정도이며, 전교생이 2000명이 넘던 조선대학교의 경우 현재는 재학생 총원이 600여 명에 불과하여 학부 당 100명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에게 민단 소속이면서 조총련계 학교를 다닌 이유를 묻자 “민단계 학교가 몇 개 안 되어 전체 재일동포의 60~65%는 한국 국적자들이면서 조총련계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오신 교수나 좌파 인사들은 뭣도 모르면서 조총련계 학교가 ‘민족교육을 한다’고 주장들을 하는데, 이게 정말 이상합니다. 제가 조선대학교에 다닐 때 1~2학년 때는 기초개론을 공부했습니다만, 3학년부터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혁명역사, 주체사상을 강제로 배워야 했어요. 이게 민족교육의 실체란 말입니다.”  

그는 애가 타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조총련을 자기들의 동지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 이 분들이 조총련 본부와 조선대학을 찾아가서 ‘민족교육을 도와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제가 조선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사정을 좀 압니다만, 조선대학 졸업자들이 조총련계 기업이나 학교 교원, 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몰래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을 왕래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파견 나온 통일전선부의 지시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가 종북 세력들과 접촉하여 지시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런 위험분자들, 지하로 숨은 간부들이 한국에 입국하면 감시나 제대로 하고 있는지 우려가 큽니다.” 

이 위원장은 일본 내에 조총련 세력이 점점 쇠락해가자 북한은 노길남, 신은미 등을 내세워 미국 내 교포 사회에 조총련 비슷한 조직을 만들고 있다면서 “미국이나 유럽의 친북 단체를 지휘하는 거점이 도쿄”라고 말했다. 조총련의 정치국(현재는 국제통일부)이 이런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의 설명이다. 

“미국 내 재미교포 교회의 4분의 3을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으로 파견된 교포 선교사들이 조총련계 조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또 일본 내 한국 교민들이 다니는 교회로 들어가 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이게 뭘 뜻하는 겁니까.” 

이 위원장은 조총련 조직이 쇠락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뿌리가 워낙 깊어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 재일동포 중 북한 국적자가 3만 4000명 정도인데 이 중 절반 정도는 학생이고, 나머지는 일선에서 뛰고 있는 조선노동당 일본지부의 정예당원들입니다. 말하자면 북한의 통일전선 전위부대인 셈이죠. 이들은 일본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아직도 조선노동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주체사상을 신봉하면서 남한 사회에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어요. 조총련에서 악질로 활동하는 자들은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가 통일된 후 이들을 반역자로 처벌해야 합니다.” 

골수 공산당원의 귀환 

한일문화교류협회의 한국 측 대표간사를 맡고 있는 이달완(李達完) 씨는 지팡이를 짚고 힘겨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몇 년 전 갑상선암이 발견되어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기적적으로 암세포가 사라졌다고 한다. 

“저는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부터 공산주의 이념에 빠져 1952년 나이를 속이고 일본공산당에 입당, 육체노동을 해가면서 당 세포신문 만드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1955년 조총련이 재조직될 때 일본공산당 소속이었던 저와 다른 조선인 당원들은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받는 조총련으로 적을 옮기게 됐죠.”
그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마구 섞어가며 조총련과 사회주의에 미쳐 살았던 자신의 일생을 토로했다. 

“1958년 조총련 동포 북송사업(그는 ‘귀국사업’이라고 표현했다) 때 저는 열성 활동원으로서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일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오마치시(大町市)에 위치한 한 부락의 경우 이 동네에 거주하던 재일동포 180명 전원이 북송 신청을 한 사례도 있었어요. 그 당시 ‘나가노현(長野縣)에서 귀국사업을 하는 조총련 운동원은 사실상 이달완 한 명’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습니다.” 

1960년 1월 14일, 당시 63세였던 부친 이경환(李景煥)과 여동생 두 명이 제4차 북송선을 타고 ‘공화국(북한)’으로 떠났다. 이달완 간사도 북송을 자원했으나 조총련 중앙은 “일본에 남아 조직 사업을 추진하라”면서 허가하지 않아 일본에 남게 됐다고 한다. 일본을 떠나기 전, 부친은 가족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북조선이 지상낙원이란 소리는 다 거짓말이다. 일본이 이렇게 못 사는데 공화국이 무슨 수로 일본보다 잘 산단 말인가. 비록 공화국이 지상낙원이 아니라 해도, 나는 조국에 나무 한 그루라도 심기 위해 공화국으로 간다.”

얼마 후 처음으로 부친과 여동생에게 온 편지를 받았는데, “소금과 단 것을 좀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달완 간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1959년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래 2~3년 간 엄청난 교포들이 북송선을 타고 떠났는데, 북한의 참혹한 실정이 알려지면서 1962~63년 무렵부터는 북송 희망자들이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북에 있는 가족 친지들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내놓고 “북한이 못 산다, 나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 2006년 5월 17일 하병옥 민단 중앙본부 단장과 서만술 조총련 의장이 만나 협작을 선언하는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모습.

원산에서 밀봉교육 받아 

이 간사는 투철한 당성과 충성심을 보인 덕에 조총련 학습조로 선발되었다. 1973년 혁명 간부일꾼으로 선발되어 원산의 청년간부 양성소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특별 밀봉교육을 받았다. 말하자면 한국에 침투하는 간첩 및 공작요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그는 “한국에 가서 간부사업을 하라”는 명을 받고 난수표 해독, 비밀통신법, 사격훈련 등을 받았으나 남한 침투 지령은 내려오지 않았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시 나는 조총련 활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모순을 느꼈지만 전 세계가 사회주의로 나갈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모든 불만을 속으로 다스렸습니다. 원산에서 밀봉교육을 마치고 평양으로 가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만났는데, 아버지는 모란봉공원 관리원으로 계시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토굴에 살면서 일 년 내내 쌀밥 한 번 못 먹고 산에서 채취한 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하고 있더군요. 나 때문에 가족들을 동평양의 아파트에 잠깐 이주시켜 저와 상봉을 시켜주었습니다.”

그가 조총련 조직에서 제명된 것은 88서울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건 때문이다. 당시 조선노동당 지도부는 88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를 의결하고 이를 조총련에 지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달완 간사는 “한국이 거지상태라더니, 이런 거지들과 어떻게 남북이 공동으로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가”하며 남북 공동 개최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조총련은 그를 소환하여 강력 비판한 다음 “이달완은 남조선의 간첩 행위를 하고 있다”면서 제명시켰다.

이달완 씨는 “내가 조금만 젊었다면 조총련들을 회유시켜 우리가 북으로 보낸 동포들을 구출하는 운동을 벌일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그런 운동을 하기에는 그의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보였다. 

북한교포 구출작전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민단 단장을 역임한 신용상(辛容祥) 씨는 한국 사회에서 조총련을 대하는 회색적인 태도를 엄중 경고한다. “조총련 중앙은 김일성과 김정은이 일본에 파견한 전위부대이고, 조총련 임직원은 김정은의 관료나 마찬가지라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 전 단장은 “북한이 조총련을 통해 재일동포 사회나 남한을 대상으로 적화 공작을 펼친 것은 국제 냉전이라는 큰 틀로 봐야 그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한 통일일보의 홍형 주간의 설명이다. 

“동서 냉전 시절이 한창이던 1968년에 유럽을 휩쓴 학생운동·민권운동·여성운동, 그리고 미국을 강타한 월남전 반전(反戰)운동과 좌경화는 기존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그 이유라고 생각들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구(舊) 소련이 망한 후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 모든 흐름이 크레믈린의 지령을 받은 KGB와 중국공산당의 최고 엘리트들이 진행한 고도의 공작의 결과였다는 겁니다. 소련과 중공이 이런 공작을 벌이는 과정에서 북한과 쿠바는 청부업자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냉전 시절 북한이 전 세계 과격파 테러리스트의 훈련소로 활동했고,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사회주의 국가들에 군사고문단을 보내 훈련을 시켜준 것이 그 일환이었죠.”

1950년 한반도에서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이 손을 잡고 남한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냉전의 주전장이 일본으로 옮겨갔다. 당시 일본에는 남한을 지키기 위한 유엔군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을 중립 입장으로 붙들어 매기 위해 크레믈린과 중국공산당은 일본 사회의 좌경화 공작을 전개했고, 조총련 세력이 그 전위대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 일본 사회 좌경화 불똥이 한국으로도 튀어 한국도 지금까지 좌경화의 홍역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 홍형 주간의 설명이다. 

재일동포 사회를 지켜오고 조총련과 70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통일일보(대표 姜昌萬)다. 1959년 1월 1일 문을 연 통일일보는 고비마다 조총련과 최전선에서 싸우며 동포 사회를 적화의 물결에서 지켜 왔다. 현재는 주간(週刊)으로 발간되는 통일일보는 그 동안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의 배후를 추적하여 정력적으로 보도했고, 우리 정부가 시작한 조총련계의 고국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동안 신문을 이끌어오는 과정에서 엄청난 사재를 털어 넣는 등 맹활약을 해 온 강창만 통일일보 대표는 “지금까지 통일일보의 노력으로 겨우 조총련의 위세를 꺾어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통일일보는 경영난, 자금난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보수우파 언론들의 재정난, 자금난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민단과의 70년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조총련계 동포들의 대량 탈북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들을 보듬어 건전한 대한민국 수호세력으로 전환시켜야 할 책임은 민단과 주한 일본대사관, 그리고 본국 정부의 몫이다. 또, 아직도 주체사상의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데 앞장서고 있는 조총련 조직원들은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처벌의 근거를 남겨야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과제는 조총련들의 선전선동에 속아 북한에 인질로 잡혀 있는 재일동포와 그들의 일본인 처(妻)의 구출 문제다. 조총련의 마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그들 손으로 북한을 해방시키고, 북송된 재일동포를 구출해 오도록 사명감을 심어주는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출범 70주년을 맞은 민단의 핵심 과업이 되어야 할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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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6-10-31 09:00:41
그렇게 북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을 구해주고싶으면 극우보수단체가 아닌 조총련이 해야하는것은 당연한일이다~!!! 물론 북한을 떠나고 싶어하지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안되지만....!!!!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