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골수 조직원, 반기 들다
조총련 골수 조직원, 반기 들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0.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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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출범 70년, 제일교포 사회를가다] 조총련 공개 비판한 고충의(高忠義) 씨

전 재산 바쳐가며 활동했던 고충의 씨, 북송교포 태운 만경봉호 선상에서 김일성 우상화 모습 보며 큰 충격 받아

도쿄=고충의(高忠義) 씨는 약속시간보다 먼저 약속 장소인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역 부근의 음식점에 도착해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네받은 명함에는 ‘메아리전기통신’이란 상호와 전기통신설비의 설계·제작·시공·보수를 하는 회사란 설명이 적혀 있었다. 명함 뒷면에는 전기주임기술자(3급), 전기통신공사 담임자(아날로그 제1종), 소방설비사(갑종 제4류), 계산척검정(1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고 씨는 전기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조총련에 반기를 든 최초의 인물로 일본 언론에 알려진 사람이다. 조총련의 히로시마 지부 선전 간부를 지냈던 그는 지난해 10월 도쿄에서 열린 조총련 산하 상공회(商工會) 70주년 기념행사에서 조총련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조총련의 변화를 요구하는 제언서를 실명으로 배포했다. 

“제언서에서 제가 조총련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다섯 가지였습니다. 첫째, 조총련의 모든 사무실과 산하 단체에서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를 제거하라. 둘째 납치 피해자를 해방 시키고, 귀국동포(북송교포)와 귀국동포를 따라 북으로 간 일본인 배우자의 자유 왕래를 보장하라. 셋째, 조총련 산하 청년조직 결성 당시 발표한 8대 행동강령에 핵무기 개발 금지 조항이 들어 있었는데, 이것이 사라졌다.

조총련 강령에 핵무기 금지 조항을 넣어라. 넷째, 조총련계 산하 금융기관에 맡긴 동포들의 막대한 재산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밝혀라. 다섯째, 조총련 간부들은 북조선과의 종속관계를 끊기 위해 조선노동당을 탈당하거나, 당원 아닌 사람이 간부를 맡아라. 이렇게 5개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허종만 조총련 회장 앞으로 보내는 제언서 형식으로 쓰인 이 유인물을 30여 명에게 나눠주던 중 조총련 조직원들이 이를 제지하고 서둘러 회수했다. 그런데 유인물을 받은 일부 조총련 상공인 누군가가 일본 언론에 이 내용을 제보하는 바람에 일본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 

조총련계 활동에 가장 비판적인 산케이신문은 “조총련의 대북(對北) 종속에 불만을 가진 내부 목소리가 그동안 존재해 왔지만, 이처럼 실명으로 불만이 표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보도했다.

▲ 한 시절 열렬한 조총련 활동가였다가 조총련을 공개 비판하는 제언서를 실명으로 발표한 고충의(高忠義)씨.

누구보다 열렬하게 조총련 활동 

이날 유인물 배포를 강제로 제지당한 고 씨는 우편을 통해 조총련 중앙본부에도 같은 내용을 보냈다. 

“제 실명으로 보낸 우편물이 조총련 중앙본부에 도착하자 그들은 제 이름을 확인하고는 뜯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반송시켜 되돌아왔습니다. 덕분에 저는 한 시절 조선노동당원이었고, 조총련 산하 학습조 조직원으로서 거의 모든 재산을 바쳐가며 누구보다 열심히 북한을 위해 활동했던 열혈 활동가였으나 조총련 개혁을 주장하다가 제명을 당했습니다.”

고충의 씨가 소속됐던 학습조란 1958년, 김일성에 충성을 맹세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혁명투사집단 양성’을 목적으로 조총련 산하에 결성된 비밀조직이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한반도 공산화 공작 수행 ▲재일민단 조직의 와해 ▲위장평화 공세에 의한 통일전선 수행 ▲북한의 무기구입과 밀매 지원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기업을 운영하여 자금 확보 등이었다. 

산케이신문은 2002년 9월 2일 일본 공안 소식통을 인용하여 “북한과 노동당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조직으로 알려진 학습조의 회원이 2000명 정도”라고 보도했다. 고 씨도 그 2000명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고 씨는 조총련 동포들이 조총련계 금융기관에 맡겨뒀던 막대한 자금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이 자금이 북한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가타 시게타게(緖方重威) 전 일본 공안조사청장은 1994년 중의원에 출석하여 “조총련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는 돈이 한 해 600억~800억 엔”이라고 발언했다. 이를 토대로 지금까지 조총련이 30년 간 북에 돈을 보낸 것으로 계산하면 최소 1조 8000억 엔 이상의 돈이 북으로 흘러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북송동포 환송회에서 받은 쇼크 

2013년 사망한 사토 가즈미(佐藤勝巳) 전 월간 ‘겐다이(現代)코리아’ 발행인은 2010년 8월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조총련이 충성자금으로 거액을 (북한으로) 유출하여 파산 직전에 이른 조은(朝銀)신용조합을 2002년 3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이 1조 4000억 엔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려냈다”고 비판했다. 

고 씨의 부모는 제주도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집에서 부모님의 제주도 사투리를 들으며 자랐고, 일본 학교에 다니느라 한국어를 배우지 못했다가 뒤늦게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고교 재학 시절에는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던 교토 출신의 교포 2세 서승 씨와 일본 학교에 다니는 교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운동을 함께 했다. 

고 씨 가족은 북한 국적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고향에 가 보고 싶다고 하여 고향 방문을 위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고 씨도 이때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한 후 조총련 열혈 활동가로 맹렬하게 활동했다. 당시 일본의 사회 분위기가 좌경화로 기울고 있었고,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던 고 씨도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북한을 위해 활동하면서 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니가타 항에서 북송 교포들을 태운 만경봉호를 호위하고 북송되는 동포(그는 귀국동포라고 표현했다)들을 환송하는 행사에 참석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에 살던 동포들은 일본의 하층민으로서 세금을 낼 형편도 못되니까 의료보험이나 사회보장 등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북한이 조총련 활동가들을 통해 ‘북한에 가면 학교도 공짜, 병원도 공짜, 입을 것, 먹을 것, 주택까지 국가에서 다 마련해주니 여기가 바로 사회주의 천국’이라고 선전하는 통에 모두가 속아 넘어가 북송선을 타게 된 것입니다.

당시 동포들은 일본에서 어렵게 모은 재산을 다 처분하고 북송선에 올랐는데, ‘사회주의 천국에 가는데 돈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재산 처분한 돈을 조총련계 금융기관에 맡겼습니다. 이것이 조총련 자금으로 활용되어 일본 사회에 조총련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겁니다.” 

그런데 ‘귀국동포’ 환송을 위해 올랐던 만경봉호 선상에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만경봉호에는 김일성이 앉았었다는 의자, 김일성이 식사를 했다는 밥그릇과 접시 등을 국보(國寶) 전시해놓듯 모셔놓은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지도자 우상화의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충격을 느꼈다. 

“그 때 북한의 개인숭배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중국공산당도 모택동의 개인숭배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습니까. 알고 보니 김일성은 모택동보다 개인숭배가 훨씬 더 심각하고, 후에는 아들, 손자에게 세습까지 하더군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조선노동당에서 탈당하게 되었고,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용기를 갖게 된 겁니다.” 

조총련 중앙, 그에게 공작원 활동 권유 

1970년대 중반, 조총련 오사카 지부의 청년조직 부본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추석성묘단의 일원으로 남한을 방문하고 왔다. 남한에서 그는 “서승은 고문에 의해 재일교포 간첩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떠들었는데, 이런 활동이 조총련 조직에 보고가 돼 사상성이 투철한 조직원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귀국하자 조총련 중앙본부는 고 씨를 불러 “서울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라”는 지시를 했다. 말하자면 남한 사람을 포섭하는 공작원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당시 조총련 활동을 하면서 그는 “본부로부터 공작활동을 명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처럼 공작원 활동을 지시 받은 사람이 상당히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 큰 충격은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수상이 일본과 북한 수교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터져 나왔다. 당시 조총련은 북한과 일본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것으로 믿고 축하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김정일이 고이즈미 수상에게 일본 국민을 납치한 사실을 시인하고 생존자를 임시 방문 형식으로 귀국시킨 것이다. 

김정일이 일본 국민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람은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였다. 김현희는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리은혜’라는 여성이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존재임을 증언했다. 김현희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에 나선 일본 경찰은 ‘리은혜’가 일본에서 실종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惠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정일은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수상에게 다구치 야에코가 다른 피납자(被拉者)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해서 살다가 평양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다구치의 남편 하라도 간경변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하라는 조총련 오사카 상공회 이사장 이삼준이 자영하던 중국 요리집 ‘보해루’의 요리사였다. 하라를 북으로 납치한 북한 공작원이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거물 간첩 신광수였는데, 그는 1985년 납치해간 하라 타다아키의 신상 정보를 이용, 일본인 여권을 만들어 1985년 2월, 한국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옷깃에 자살용 독약 앰플을 숨겨놓고 있었다. 

1988년 사형 판결이 확정된 뒤 그해 12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김대중 정부는 1999년 밀레니엄 사면으로 그를 석방했다. 김대중 정부는 평양에서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온 뒤인 2000년 9월, 63명의 비전향 장기수와 함께 북으로 보내버렸다. 당시 소위 좌파 진영에서는 그의 북송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신광수는 하라 외에도 일본인 지무라 야스시 부부와 요코타 메구미의 납치에도 가담한 악질범이었다. 일본은 수사관을 파견하여 신광수 면담을 요청했으나 김대중 정부는 신광수가 원하지 않아 면담이 불가능하고 신광수의 공범만 면담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2002년, 일본 경찰은 신광수가 일본인 납북에 관여했다며 인터폴을 통해 국제수배하고 북측에 신광수의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 1960년대 초 국내에 투자를 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재일동포 경제인들.

형님과의 관계 심각해져 

김정일의 충격적인 일본 국민 납치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 고 씨를 비롯한 골수 조총련 조직원들은 폭격을 맞은 듯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그는 오랜 고민과 방황 끝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고 판단, 조총련에 정면 도전하는 제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한 후유증은 심각했다. 

“제가 쓴 제언서를 보고 조총련 학교 출신인 여동생은 ‘오빠가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고 찬성했습니다만, 집사람은 반대를 하더군요. 처가 식구들 중 조총련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죠. 조총련 조직과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인연을 끊고 나오기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형님 가족들과의 관계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형님은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조선대학교 프랑스어과 교수였습니다. 제언서를 배포하기 전에 제가 쓴 내용을 형님에게 미리 보여주고 혹시라도 수정할 부분이 없는지 자문을 구했습니다. 제가 쓴 내용 중에 ‘김일성은 나라를 망친 지도자’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형님이 이 내용을 보더니 ‘당연히 말해야 할 내용들이군’ 하며 동의를 하시더군요. 그런데 이 내용이 일본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형님은 조총련 본부에 불려가 단단히 주의를 받았습니다.”

며칠 후 밤에 형이 잔뜩 술에 취한 목소리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오늘부터 우리와 형제가 아니다. 부모님 제사도 함께 지낼 수 없으니 앞으로는 연락도 하지 말라”고 절연 선언을 했다.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만, 형님에게 가족관계를 단절한다는 연락을 받으니 참담하더군요. 형수님도 저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습니다. 형수님의 부친이 조총련 고위 간부로서 북에서 예우를 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이죠. 형수님은 ‘공화국의 지도자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북에 가보지도 않은 시동생이 뭘 안다고 지도자를 비판하는가.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고 경고를 하시더군요. 형수님 처지도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들이 조총련이 운영하는 신용조합에 근무하고 있고, 형님도 조선대학 교수로 있으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거죠.” 

고 씨는 제언서에서 주장한 내용들은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서야 뒤늦게 글로 정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조총련계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비판을 하고 싶어 하지만, 가족이나 친척들이 북송되어 인질로 잡혀 있어 하고 싶은 비판을 참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김일성이야말로 나라를 망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숭배도 모자라 세습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민족의 태양이니 뭐니 하며 떠받들 수 있습니까. 제가 제언서를 공개함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만 여러 언론들이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앞으로도 힘닿는 데까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조총련 이탈자들을 규합하여 조총련을 각성시키는 운동을 해나갈 작정입니다. 조총련도 변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엉터리 지도자를 떠받드는 정치 활동이 아니라 재일동포들의 권리옹호와 생활 향상을 위한 운동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고 씨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이고, 나이가 들어서도 사회주의를 고수하면 더 큰 바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조총련계 이탈자들이 일본 내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조직화하는 게 너무 어렵고 힘들어요. 만약 이들을 조직화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조총련을 변화시키는 활동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어요. 조금만 젊었어도 그 일을 위해 내가 앞장설 수 있었을텐데…. 

 

고충의 씨의 조총련 비판 ‘제언서’(全文)

조총련은, 결성 이래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와 민족교육에 있어서 큰 업적을 세워 왔습니다. 그리고 공화국의 대사관 역할과 국교가 없는 북일 양 정부의 유일한 파이프로서의 역할도 해 왔습니다. 젊어서, 집안의 파산으로 거두었던 여동생의 조선고교 졸업과 동시에, 당시의 전 재산을 쏟아 부으며 조총련 활동가로 지내온 저이지만, 최근 조직의 쇠퇴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재일동포의 의사를 결집하는 조총련은 원래부터 공화국의 지시에 휘둘리는 하부 조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 의장이었던 한덕수 씨가 죽었을 때, 행여나 이것으로 조총련도 조금은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를 가진 재일교포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서만술 씨도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현재에 이르렀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조총련이 진정한, 재일동포의 민주적인 조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공화국과의 통로를 유지하면서도 아래와 같은 사항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1.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모든 기관에서 철수할 것. 
2. 일본인 납치 피해자 전원 해방 및 귀국동포, 일본인 배우자의 자유 왕래를 실현시킬 것. 
3. 조총련 조직 강령에 결성 당시의 8대 강령이었던 핵병기 금지 항목을 부활시킬 것. 
4. 조선은행을 통해 사라진 재일동포의 막대한 재산의 행방과 그 책임을 명백히 할 것. 
5. 조직 간부는 조선노동당 당적을 이탈하거나, 당원이 아닌 사람이 취임할 것(당원이 당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가, 왜 이러한 제언을 하게 되었는지를 말씀 드리면, 이대로 침묵하고 있으면 순진한 동족애와 청빈한 생활 속에서 민족 활동을 해온 많은 활동가와 재일동포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귀국자와 인민이 시달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희생되고 있습니까. 세계의 국가 중에는 통렬한 경험을 바탕으로, 헌법에서 지도자의 개인숭배를 금지한 나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신화로 이뤄진 것이 종교입니다. 물론 종교의 자유도, 포교의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매 가정집마다 초상화를 걸고 개인을 숭배하는 북한의 종교와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조총련이 재일동포의 민주적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이는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되는 항목입니다. 

제가 조직활동가였던 시기, 숙직 때, 평양방송, 서울방송, NHK, VOA, 북경과 모스크바의 조선어 단파방송을 들은 바 있습니다. 방송을 들으면서 사물현상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많이 느꼈습니다. 또한 <김일성 저작선집> 5권을 모두 읽었습니다. 이 책은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를 적대하는 세력을 비난하면서 ‘우연분자’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능력도 자질도 없으면서 현재의 지위에 이른 일당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어, 당신이 최고의 우연분자가 아닌가”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공화국이 되어 버린 것에는 김일성의 죄가 무겁습니다. 

김일성 씨는 생존 중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게 하고, 초상화를 보급하고, 후계자 세습까지 하였습니다. 김일성 씨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아무 것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현지지도’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말한 방법 말고는 일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죄가 깊은 것이, 전국을 돌면서 마구잡이식으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숭배, 신격화에 관해서 제가 겪은 일을 두 가지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히로시마에서 활동하던 시절 한 여자학원에 재적하고 있는 재일학생을 지도했을 때의 일입니다. 반에서 홀로 재일학생이었던 이 여고생(훗날 조선대학에 진학)이 우리의 지도로 민족에 눈을 뜨고, 급우에게 촉구해서 히로시마 가무단의 지도로 전원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무용을 문화제에서 공연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신문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이후 평양신문에 실린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때 평양신문의 기사 말미에 “매우 감격한 학부모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눈물을 흘리며 김일성 원수 만세를 외쳤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고 했고, 미화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제가 히로시마 현 서(西)히로시마 지부 선전부장이었을 때, 한국의 군사정권하에서, 동료였던 서승 씨가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에 가, 서울에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에 대해 규탄 연설을 하고 강제 송환된 후의 일입니다. 

조총련은 전국 각처에서 “히로시마의 한 애국청년이 서울의 각계각층의 명사 앞에서 김일성 원수 만세를 외쳤다”고 선전하였습니다. 절대로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본인이었던 제가 말하기 때문에 틀림없습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인간 기관차로 불린 마라토너 자토페크 씨와 도쿄올림픽에서 인기를 누린 체조 선수 챠스라후스카 씨가 ‘2000어 선언’을 엮어서 자유를 촉구한 사건입니다. 

저는, 라디오에서 시시각각 전해오는 바르샤바협정군에 저항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의 투쟁 모습을 듣고,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과거 이토 히로부미가 군사력을 배경으로, 우리 조국을 일본에 예속시킨 굴욕의 역사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김일성은 당시 소련의 탄압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천안문 사태는 자유와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중국 청년 다수가 학살된 사건입니다. 김일성은 이 때도 중국 정부의 탄압 행위에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어디가 민족의 태양입니까? 단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중을 힘으로 억압하는 세력을 지지하고, 자신의 보신을 제일로 생각하는 사람을 어떻게 경애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왜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인민이 시달리고 있지만 관여하지 않고, 자신만 귀한 것입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 모두는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느끼며 삽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를 느끼면서도 결정적으로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그 자괴를 담아서 이 제언서를 쓰고 있습니다.  

요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 텔레비전에서 공화국의 실상이 조금씩 영상으로 보여지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것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 총련계 부인이 “지금 시대는 CG(컴퓨터 그래픽)로 무엇이든 영상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이 지경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재일동포의 대변자로서 당당히 공화국 정부에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지적하십시오. 북일 양 정부의 파이프로서의 조총련은 공화국에 있어서도 귀중한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저 한 사람의 활동으로는 부족하니, 의견을 써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조직의 당사자는 답변해 주십시오. 더 이상 조선 인민과 세계 평화에 대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부탁을 드립니다.  

제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을 받거나, 그런 지적에 대해 제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제가 생각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이 옳고, 당신의 의견이 잘못되었다면, 당신이 생각을 고쳐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잘못을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 동경 도스기나미구(杉&#20006;區) 거주 조총련 전 활동가 고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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