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명분론만 가지고는 중국과 전쟁에 이길 수 없었다
성리학적 명분론만 가지고는 중국과 전쟁에 이길 수 없었다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1.11 12:2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 친중 사대의 역사적 기원下

인조는 군왕으로서 숭명의리론에 집착하면서도 국방 및 외교적 대비를 소홀히 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백성의 생명과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다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10년, 후금과 조선에서는 상대방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분명한 점은 쌍방은 상대방의 조약 이행의 성실성 여부를 둘러싸고 상호불신, 오해 그리고 불만이 증폭되어갔다는 점이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후금으로서는 모문용의 제거가 실패했고 이 점에서 조선이 비협조적이었으며 명에 대한 대우에 비교해 볼 때, 아직도 조선 조정에서 후금을 배척·무시하는 척화론이 강화되는 분위기에 못내 불만이었다. 

조선으로서는 갈수록 증가되는 후금의 개시(開市) 요구와 터무니없는 세폐(歲幣) 문제 그리고 잡혀간 포로의 배상금 지불 가격 등이 크고 작은 불만들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전쟁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오랑캐와의 화의를 비판하고 결전을 강조한 것이 조선 조야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후금의 재침을 막아내야 할 귀중한 10년의 세월은 이렇게 헛되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 당시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면서 국가의 명운이 걸린 첩보전이 치열하게 진행될 무렵, 조선과 후금간에 정보력은 어떠했을까? 양측이 주고받은 외교문서를 살펴보면 정보력에서도 후금이 조선을 앞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631년 1월 홍타이지가 조선에 보낸 국서를 살펴보면 그가 인조와 조정대신들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조선이 두 마음을 품고 명을 도울 경우 자신은 몽골군 10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기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홍타이지는 “후금군이 조선으로 쳐들어갈 경우 조선 국왕은 오로지 섬(강화도)으로 피신할 것이며, 조선의 장기는 반기(叛旗)를 들다가 항복하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실제로, 6년 뒤인 병자호란에서 그의 협박과 예견은 그대로 어김없이 실천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스스로가 침공의 구실을 자초한 점이 없지 않다. 1633년 청의 홍타이지는 전략회의를 통해서 대신들에게 조선 정벌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의 군세가 그다지 대수롭지 않으니 조선 정벌은 명을 정벌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런 와중에서 그해 봄 명군의 지휘관 공유덕과 경중명이 함선과 홍이포 등 수군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가지고 투항함에 따라서 유목 민족으로 수군이 없었던 약점을 보강하면서 조선 정벌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 준비는 없었던 인조의 척화론 

1636년 정세는 급변했다. 그동안 정명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둬 중원으로의 진공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조선 정벌의 호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조선 정벌의 명분은 세 가지였다.

첫째로 조선이 가도에서 후금의 목구멍의 가시처럼 행세한 명의 모문용 잔당과 더불어 대(對) 후금 군사작전을 노골적으로 실시한 것이고, 둘째는 본격적인 정명전 이전에 배후 조선을 완전히 군신관계로 굴복시켜 인력과 물자 공급의 후방기지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셋째로 홍타이지의 ‘칭제건원’을 조선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1636년 봄 심양의 홍타이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두 조선 사신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두 사신들에게는 ‘칭제건원’을 ‘오랑캐의 참월한 행위’로 인식한 것이다. 홍타이지는 사신들을 돌려보냈지만 이것으로 조선 정벌의 명분을 축적했다. 

그런데 두 사신들은 돌아오는 길에 청에서 준 국서(國書)를 길가에 버리고 오게 된다. 그 국서에서 청은 왕자, 대신,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보다 척화론이 강해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로써 조선과 청 양국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과연 조선은 무엇을 믿고 큰 소리를 쳤던가? 1636년 봄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가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전개될 무렵,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에 논쟁이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척화론자들은 중화주의와 화이론에 기초한 대명 의리론을 절대적 진리로 전제하면서 주화론이 군부를 불의한 지경에 빠트리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와 반대로 주화파 최명길은 “스스로의 역량을 돌보지 않고 대언(大言)을 일삼아 견양(犬羊)의 노여움을 촉발시켜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트리고 종사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죄악”이라고 일갈했다. 

최명길을 위시한 주화파의 주장은 “후금을 자극하여 나라에 이로울 것이 없고 종묘사직이 위험에 처했으니, 오랑캐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용하면서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고, 김상헌을 위시한 척화파는 “보모처럼 섬기는 대명(大明)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으며 죽었으면 죽었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주자학의 명분에 찌든 조선 조정에게 대청의 건국은 ‘오랑캐의 참람한 칭제건원’으로 간주되었고 이로 인해 격앙된 분위기는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간 조경 같은 인물은 “태어난 이후 대명천자가 있다고 들었을 뿐, 홍타이지가 천자가 되고 싶으면 자국 안에서 할 것이지 왜 조선을 끌어들이냐?”고 반박했다. 

청군은 5일만에 도성 점령, 인조는 남한산성에 고립

이 당시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큰 쪽이 이기는 법이다. 명으로부터 자신과 부친의 책봉을 받은 인조로서는 명에 대해 부채의식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후금과의 화친을 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미구에 닥쳐올 국가적 재앙에 대한 구체적 대비는 없었다. 강화도로 가면 일단 오랑캐의 병마를 피해서 당분간 일신의 안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조선의 전략은 이렇다. 정묘호란에서 봤듯이 일단 강화도로 몽진해 장기전으로 버티면 언젠가는 상국(上國)이며 부모지국(父母之國)인 명의 원군이 올 것이고, 여기에다가 임란처럼 전국에서 애국심에 불타는 의병·승병 등 근왕병의 봉기가 일어날 것이다.

비록 임란과 이괄의 난으로 병력 손실이 컸지만, 실제로 조선군은 병력이 속오군 9만, 수군 3만과 600여 척으로 장기전을 끌면서 점차 병력의 집중만 이룬다면 청군과 호각지세를 이룰 수도 있는 군세였다. 

그런데 조선의 전략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후금의 진격을 사전에 간파해 조기에 신속하게 강화도로 피난을 가야 하고, 후금이 수군으로 공격을 하더라고 후금의 강화도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결의와 방어 태세가 충분했어야 했다.

또 평안도 일대의 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이 청군을 추적해 적의 배후를 끊임없이 공격, 적의 보급품 및 후방교란을 해야 승산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서 위의 어떤 것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이제 재앙은 닥치고 말았으니, 대청의 깃발을 든 위압적인 철기군 13만 명(몽골 3만 명, 한족 2만 명 포함)은 1636년 12월 2일, 추운 겨울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도 없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의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청군은 우회했고 12월 14일 개성을 통과해 한양으로 쾌속 진군했다.

17세기 여진족 철기군의 전격전(電擊戰)이었다. 의주성에서의 봉화를 대수롭지 않게 본 도원수 김자점은 한양으로의 통고를 늦추면서 인조가 강화도로 몽진할 시간적 여유가 없게 만드는 결정적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인조는 12월 13일에 침공을 인지했고, 14일에 강화도로 피신을 하려 했으나 날씨는 영하의 강추위로 땅바닥이 얼어붙고 귀하게 자란 인조와 대신들은 몇 번씩이나 땅바닥에 미끄러지는 봉변을 당하면서 강화로의 피신을 포기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길목에 청군이 가로막고 있기에 인조 일행은 1만3000명의 병력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다.

▲ 인조가 소현세자 및 신료들과 함께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한 항복 장면이 담겨 있는 삼전도비 옆 부조물.

필패를 가져온 성리학자의 비과학적 전쟁 

5일 만에 도성을 점령한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인조가 철썩 같이 믿었던 근왕군은 남한산성 주변까지 도착했지만, 청의 별동군에 의해 각개격파를 당하고 만다. 도원수 김자점은 근왕군의 유기적 협동체제를 구축하는 데 별다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별채를 어슬렁거리면서 칩거하고 있었다. 

인조와 신하들이 군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포위한 청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에도 서인 사대부들의 전투 방식은 성리학적인 전투 방식을 고집하다가 패전을 자초했으나, 누구도 책임을 지는 장수가 없었다.

1636년 음력 12월 28일 술사(術士) 몇 사람이 성안에 들어와서 점괘를 쳐서 방어작전을 책임진 김유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화의를 하든 싸우든 모두 길한 날입니다.” 김유는 이 말을 듣고 성을 나아가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던 청군을 쳤다. 청군은 조선군 포로와 가축들을 버리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는 계략이었다. 김유는 전진을 명령했고, 진군에 방해가 된다고 남한산성을 둘러싼 소나무 목책도 불 질러 없앴다. 그런데 조선군의 병력이 모두 산을 내려간 뒤 드디어 청군이 매복 위치에서 튀어나오면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후퇴할 때 의지가 되었을 목책도 없어져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김유는 패전의 책임을 부하에게 전가했다. 전사자가 300명이 넘었는데도 40명인 것처럼 축소조작 보고도 올렸다. 

이것이 성리학도들의 비과학적 전쟁 방식이었다.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조선군이 오랑캐 군대에게도 패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에 눈을 감은 것이다. 이들은 전쟁은 도덕성과 관련 없이 전쟁 기술에 의해 승패가 갈린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병사 중에서 동상자가 속출했고 식량과 전쟁 물자의 부족에 허덕이는 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1637년 음력 1월 2일 포위당한 남한산성의 인조 일행이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일 무렵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문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 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청 태종은 참혹한 겨울 전쟁을 자초한 인조와 그 서인 사대부 신하, 특히 명분론의 인질이 된 척화파의 안보 의식과 무개념과 안이한 국방 자세를 마음껏 조롱했다. 청은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강화도 함락을 결정했다.

조선 수군은 강화도 부근에서 청군 수군에게 참패했고 청군은 홍이포를 대동하고 강화도에 상륙해 왕실과 사대부 가문의 부녀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강화도 함락에 따라 약탈과 강간을 피하기 위해 ‘낙엽처럼 바다 밑으로 떨어지는’ 귀족 부녀자들의 자살행위가 속출했다.(이 비극적 상황에 대해 검인정 교과서에서는 아직도 유구무언이다.) 

인조의 항전 의지는 강화도 함락의 소식을 듣고 나서 급속도로 무너졌다. 그럼에도 병자호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종묘사직이 풍전등화에 처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주화파와 척화파의 지루한 논쟁이 재현되었다. “나라는 망해도 대명에 대한 의리는 지켜야 한다”는 판에 박은 척화파의 주장은 이미 광해군 시절부터 대외정책을 놓고 군신간의 대화에서 오고갔던 내용들의 재탕(再湯)이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이조판서 최명길의 항서(降書)를 찢었고, 최명길은 그 항서를 다시 풀로 붙이기까지 했다. 김상헌은 통곡하면서 가족 앞에서 자살 소동 해프닝까지 벌였으나 그것을 실천할 용기는 전혀 없었다.

1월 30일 인조는 산성을 나와서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적인 항례(降禮)를 세 차례가 행했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으며 왕은 마음에도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날 날씨가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햇빛에 광채가 없었다”고 적혀 있다. 

조선 인구 850만 명에 전쟁 포로만 50만 명 

어쨌든 승리한 청군은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척화의 주모자 후일 3학사로 불린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을 잡아 2월 15일 철군하였다.

청의 홍타이지는 청의 공덕을 새긴 삼전도비를 만들게 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이 먼저 맹약을 어겼다. 청은 조선의 무례함을 응징하고 너그럽게 수용했다. 이 교훈을 잊지 말라”로 요약된다. 이 때에 잡혀간 포로의 숫자가 많게는 50만 명에서 적게는 수만 명에 이르며 심양에서는 ‘인간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850만 명으로 추산되기에 적지 않은 수치다. 이로 인해 조선은 노동인구의 감소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대동아전쟁 시절에 끌려간 정신대·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에 외교적 협상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가는데, 병자호란으로 인해 유린당한 조선 여인들의 한 맺힌 인권과 정조(貞操)는 과연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병자호란 직후에도 인조는 왜 이런 참화가 벌어졌는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없었고 백성들에게 “양해를 해 달라”는 식이었다. 인조의 술회를 검토해 본다면 성리학적 가치관에 몰입된 중독 현상이 뿌리가 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많은데, 하루아침에 오랑캐인 원수의 신첩이 되었다” “윤리를 바로잡기 위해 반정이란 거사를 일으켰는데, 끝내 견양(犬羊)과 금수(禽獸)와 같은 결과가 되었다”는 식이니 애당초부터 인조의 반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조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요순(堯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루어지는 행동은 없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군주로서 인조의 실책과 죄악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군왕으로서 숭명의리론에 집착하면서도 국방 및 외교적 대비를 소홀히 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한 것 ②홍타치에게 개인적 모멸을 당한 이유로 대청 복수심에 집착하여 국가 개혁과 서방 문물의 유입 등을 통한 부국강병책의 기회를 놓친 것 ③누구보다도 청의 정보에 밝고 서양 문물에 관심이 컸던 왕세자 소현세자를 독살에 이르도록 교사·방조하고 그의 며느리에게 사약을 명하는 등 자식 일가의 멸족을 감행함으로써 인의예의를 숭상하는 성리학 선비로서는 해서는 안 될 패륜(悖倫)의 범죄를 저지른 것 등이다.

그렇다면 대청복수심에 불탄 인조의 유언을 계승한 효종의 북벌론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다음호에는 북벌론의 실상과 허상을 파헤쳐 본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tomakmin 2016-11-12 00:05:14
그리고 1895년까지 동 아시아 유일의 패전국으로서 계속 존재하고 온 거죠.

베트남도 류큐도 중국에 패전한 것은 아니니까요(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