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造船) 강국의 뒤에는 그들의 땀이 있었다
조선(造船) 강국의 뒤에는 그들의 땀이 있었다
  •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6.11.23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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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秘話) 발굴] 파독 근로자의 또 다른 주역, 조선기술자

파독 조선 기술자들이 독일에서 배워온 블록 시스템을 대한조선공사에 최초로 도입. 덕분에 수십 톤의 대형 선박을 제조할 기술력 갖추게 돼 한국 조선업 대분출의 전기 마련

1972년 2월 독일(당시 서독) 쾰른 공항의 밤. 가죽 점퍼를 든든하게 챙겨 입은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칠흑 같이 어두워서인지 이역만리 미지의 땅에 도착한 심경은 더욱 복잡해졌다.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여기서 실패하면 한국에서 다시 자리를 못 잡지 않을까’ 등등 온갖 잡념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파독 조선(造船) 기술자 이원구 씨(81)의 독일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선 기술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1963년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파독 근로자의 한 부류였다. 광부들이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사들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여 명이 독일로 진출했고, 조선 기술자들은 300여 명 정도가 독일로 향했다. 

파독 근로자 가운데 광부나 간호사의 노고와 애환은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 기술자들은 그 동안 상대적으로 언론이나 국민들의 관심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귀국 후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다른 근로자에 비해 뒤질 것이 없다. 

이원구 씨는 1971년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조선 기술자 가운데 마지막 3차로 독일에 왔다.

“함부르크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에 조선소에 나가서 보고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어요. 3000톤 배를 만들다 5만 톤 규모의 선박을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죠.”

쾰른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밤새 달린 후에 도착한,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위치한 호발트(HDW; Howaldt swerke Deutsche Werft) 조선소가 3차 파독 조선 기술자 60여 명 일행의 목적지였다.

다른 파독 근로자들과 마찬가지로 3년 계약을 맺고 독일에 온 이들은 이곳에서 독일인뿐만 아니라 유고슬로비아, 터키 등 유럽 각국에서 선발된 조선 기술자들과 함께 근무하기 시작했다. 

▲ 박점식(左), 이원구(右)

한국인 조선 기술자들에 독일인들 극찬 

그 무렵 독일은 경제 성장에 성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나락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성장의 시기인 이때 독일은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났고, 이 간극을 유럽의 빈국(貧國)과 한국 근로자들이 메웠다. 우리나라가 근로자를 보내기 전에는 일본의 광부들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63년 8월까지 파견됐다. 

선체 조립, 용접, 배관 등 조선소의 중요 기술직에 배치된 한국의 조선 기술자들에 대한 현지 평가는 “원더풀”이었다. 이원구 씨는 “선주(船主)인 영국인 감독관들이 한국인 기술자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극찬했다”면서 “킬(Kiel) 지역의 잠수함 기지에도 파견돼 잠수함 건조에도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호발트 조선소는 독일이 패전에 대한 대가로 영국에 제공해야 하는 대형 선박 5척을 건설하는 데 한국 근로자들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선주는 영국 정부였다. 

1972년 7월 파독돼 같은 조선소에서 근무한 박점식 씨(78)는 선박 철판 등의 조선 조립을 담당했다. 박 씨에 따르면 파독 조선기술자들이 대부분 대한조선공사 등에서 수년 간 근무했던 경력자들인 데다, 경쟁을 통해 선발됐기 때문에 기술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이 독일 현지 관계자들로 하여금 우리 조선 기술자들을 높게 평가하도록 했다. 

“현지의 다른 직원들은 일과 중에도 쉬고 잡담하고 해서 실제로 일 하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심지어 맥주를 먹고 일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시간 외 근무도 마다않고 악착같이 달려드니 조선소에서 우리를 안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타지 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은 역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특히 조선 기술자 가운데 3분의 1 가량이 기혼자여서 아내와 자식들 걱정이 컸다. 이원구 씨는 아내와 슬하에 아이 세 명이 있었다. 

“독일 숙소에 전화가 없어서 저는 우체국에 가서 전화를 했고, 한국의 집에도 역시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옆집에 가서 통화했어요. 그때 아내와 아이들과 통화할 때 울컥하는 감정은 말로 표현 못합니다.” 

▲ 호발트 조선소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파독 조선기술자들. 왼쪽부터 우택섭, 박종환, 조영칠, 김역만, 최기환, 모덕안 씨.

독일에서 번 돈으로 동생들 결혼시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아무리 간절해도 당시로서는 큰돈을 매달 가족들에게 보내는 낙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한국 근로자들은 대부분 몸은 고달프더라도 야간근무, 연장근무, 휴일근무 등을 자청하고 나섬으로써 되도록이면 급여를 늘리곤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이 독일에서 받은 월급은 약 2000마르크 정도였다. 우리 돈으로 16만 8000원 정도인데, 당시 서울 미아리의 집값이 70만 원 정도였다고 하니 한 달 급여로는 매우 큰 액수였다. 1970년 국내 물가는 담배 1갑이 10원, 쇠고기 1근이 375원, 자장면 가격이 100원 정도였다. 1972년 말부터 1976년 초까지 근무한 이원구 씨도 귀국 후 부산 영도에 저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파독 근로자에 선정되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다. 1963년 8월의 1차 모집에서 190여 명을 선정하는 데 전국에서 2895명이 몰려 15:1이라는 경쟁률을 보인 데 이어 1964년 1월 공모에도 3,158명(791명 선발)이 지원했다.

이 가운데 조선 기술자들은 현재의 인하공업전문대학에서 독일 호발트 사(社)의 인사부장 입회하에 치른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만 최종 합격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이원구 씨의 설명이다. 

“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진 않지만 경쟁률이 엄청났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급여가 워낙 좋았고, 선진 조선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였거든요.” 

“급여가 한국보다 10배 정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러니 다들 독일에 가려고 노렸했죠. 그때만 해도 국내 경기가 좋지 않을 때였잖아요.”(박점식) 

이원구, 박점식 씨를 비롯한 파독 근로자들은 본인들은 고단하게 일했지만 자신이 고국으로 보낸 외화가 가족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고, 1970년대 경제개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었다. 영락없이 가족을 위해 헌신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달수의 모습이다. 

“그 시대 우리네 가장들은 대부분 달수와 비슷한 삶을 살았을 거예요. 제게 동생이 둘 있었는데, 제가 독일에서 보낸 돈으로 둘 모두 장가 보냈습니다.” 

실제로 파독 근로자들의 외화 송금은 국가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들어온 파독 근로자의 총 송금액은 1억 달러가 넘는다.

1960년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가 2300만 달러에 불과했고, 1952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년간 우리나라가 유치한 공공차관이 약 7억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파독 근로자들이 국내에 송금한 외화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독일에서 배워온 블록조립공법 

파독 조선 기술자들도 다른 파독 근로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체험하고 배워온 선진 기술과 시스템을 국내에 보급하며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던 조선업의 경우 향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발전하는 데 파독기술자들의 공로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 

이원구 씨는 “독일은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면서 “철판 용접뿐만 아니라 공구부터 해서 공정 전체가 선진화 돼 있었다”고 했다.

특히 박점식 씨는 조선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블록조립공법’이 파독 근로자 출신들이 고안해 도입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과거에는 선박의 뼈대를 먼저 만들고 철판을 갖다 붙이는 식이었다면, 블록조립 방식은 블록, 즉 구획별로 뼈대와 철판을 만든 후 이 블록들을 조립해 완성하는 방식이다. 

박 씨는 “이원구 씨 등과 함께 연구를 거듭한 끝에 독일에서 배워온 블록 시스템을 대한조선공사에 최초로 도입했다”며 “덕분에 수십만 톤의 대형 선박을 제조할 기술력을 갖추게 됐다”고 밝혔다. 독일에서 배워온 선진 조선 기술이 한국 조선업의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들이 독일에 갈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조선소는 식민지 시기 일본이 사용하다 남겨놓은 공장을 활용했던 (주)대한조선공사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3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가 설립됐고, 1978년 대우중공업, 1979년에 삼성중공업이 문을 열었다. 1970년대는 세계 조선 업황이 어려울 때였지만, 불황을 기회로 활용해 국가 차원에서 적극 투자에 나서 1990년 세계 조선 1위로 올라선 것이다. 

조선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1월 12일 신년 회견에서 밝힌 “공업구조의 중화학공업화” 계획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속에 조선은 철강, 비철금속, 자동차·기계, 전자 및 화학과 함께 6대 기간산업으로 포함돼 있다. 이원구 씨의 말이다. 

“우리가 귀국할 때쯤 한국에서 막 조선업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것 같아요. 그래선지 대한조선공사에서 상무급 임원이 직접 독일 함부르크에 와서 면담하고 우리 중에 30여 명을 특별 채용했어요. 귀국해서 1주일 만에 출근했는데, 대부분 과장·계장·반장 등을 맡으면서 기술자들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게 됐어요.” 

이원구 씨는 귀국 후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전신) 사내 직원훈련원의 교사로 발령을 받아 후진을 양성했고, 박점식 씨는 독일에서 귀국 후 실력을 인정받아 이란 조선소에서 1년 더 근무하다 돌아와 대우조선해양의 총기장을 역임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독일을 방문해 파독 근로자들을 위로하신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게 안타까웠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정말 대통령을 뵙고 싶었는데 지역이 달랐죠. 그래도 1972년 독일에서 방위성금을 모금해서 고국에 전달했을 때는 정말 뭉클했습니다.”(이원구) 

“광부와 간호사에 비해 조선 기술자들은 좀 소외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사람 수가 많진 않았어도 조선산업 발전에 기여한 역할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박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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