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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5·16 혁명세력의 참모습

[그때 역사의 동력]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l승인2016.11.24l수정2016.11.24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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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webmaster@futurekorea.co.kr

혁명의 새벽을 열었던 그들은 달랐다. 사람들이 달랐고 지식이 달랐으며 통찰력이 달랐다. 대한민국은 5·16을 기점으로 그 전과 그 후로 구분된다. 그들은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역사적 DNA를 가진 이들이었다. 

4·19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5·16. 1961년 5월 그때 사람들은 “올 것이 왔다”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어떻게 그러한 것을 느꼈을까.

▲ 서울대 정치사회학 박사·자유와창의교육원 석좌교수

사람들 감각 속에 필연(必然)이라는 것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역사의 전환기마다 솟아나는 집단예지(集團叡智)의 강한 예측성, 그런 헤아림 때문일까. 아니면 4·19가 미완의 혁명임으로 해서, 혁명을 완수할 다음 혁명을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그 무엇이었든 5·16은 일어났고. 그리고 그 5·16은 미완의 혁명을 종결짓는 ‘역사의 동력’이 됐다. 그로 해서 우리 역사는 밑에서부터 위에까지 통째 모든 것이 다 바뀌는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었다.

이 역사의 대전환을 가져오는‘역사의 동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경험하는 ‘적나라한 물리력의 독점’(monopolization of naked forces)에 기초한 강력한 리더십에서 나왔다. 

국가란 무엇인가. 현대 사회과학의 기초를 만든 독일의 사회사상가 막스 베버에 따르면 국가는 ‘적나라한 물리력의 독점체’다. 현대사회의 대조직들-그것이 대기업이든 대학이 든 대병원 혹은 대은행이든, 이 조직들은 모두 국가와 똑 같은 기능을 한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영토가 있고, 그 영토에 소속된 국민(조직 성원)이 있고, 주권(의사결정권)이 있다. 

단 하나. 그것은 군·경찰·무기와 같은, 유사시 인정사정 없이 얼마든 무력을 행사하는, 그래서 적나라하다고까지 말하는 그런 물리력이 없다. 그 물리력은 오직 국가만이 가지고 있다. 

오랜 문치(文治)에 젖고, 문치만을 정치의 근간으로 삼아 온 우리의 오랜 정치 습성에서 국가의 물리력은 으레 거부되거나 부정되는 정치관 및 통치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도 군사령관은 언제나 문인(文人)이 했다. 

5.16은 정변이며 혁명 

전쟁을 모르는 문인은 소위 말하는 지상병전(紙上兵戰)-‘종이 위에서 전쟁’을 했고, 그 ‘종이 위에서 전쟁’ 때문에 백전의 장군 이순신도 전장(戰場) 근처도 가 본적 없는 임금과 조정 대신들 앞에 불려와 문초를 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었다. 

5·16에 와서 비로소 국가는 형식이 아닌 실질적인 ‘적나라한 물리력의 독점체’가 되고, 그 ‘적나라한 물리력의 독점’에 기초한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국가와 사회는 재조(再造)되고 역사의 장(章)은 완전히 다시 펼쳐졌다. 그렇다면 5·16은 어떻게 새 나라를 만들고 새 역사를 여는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었는가. 그 무엇이 그 동력을 만들어 냈는가.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 역사에서 5·16은 대체 무엇인가. 5·16 없이도 오늘날의 이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한, 오늘의 이 대한민국은 아니라 해도 대한민국이란 존재 그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칠레나 아르헨티나 혹은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신생국 등 어디나 보이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의 그 나라, 그 대한민국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되고 민주화되고 세계화된 현재의 이 대한민국, 세계 주요국 정상회담 G20을 개최할 만큼 세계의 중심에선 대한민국의 역사가 5·16 없이도 가능했을까.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대국 군사대국 IT강국. 수출입 1조 달러를 넘보는 무역대국, 이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5·16이 아니고도 가능했을까. 아무리 ‘무모한 역사적 가정’이라 해도, 5·16 없이 그 때 그 50여 년 전의 민주당 정권으로 오늘날의 이 파천황적 대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5·16이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 놓은 대변혁의 주체라 해도, 5·16은 분명히 군사정변(政變)이다. 군사 쿠데타라는 비합법적 수단으로 국민이 선택한 합법적인 정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한 정변이고 사변(事變)이다.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고, 또 부인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대다수의 5·16 주체들은 5·16이 쿠데타라는 데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부정하려고 하지만, 거부한다고 정변이 정변 아닐 수 없고, 부정한다고 사변이 사변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르고 그 결실이 완전히 달랐다. 

그 많은 신생국들에서 보는 그 많은 군사 쿠데타, 군사정변과는 완전히 다른 쿠데타이며 다른 정변이었다. 다른 신생국들의 그것은 힘으로 권력만 탈취했을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 거둔 열매가 없었던 것만큼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실패했던 것만큼 역(逆)쿠데타 재(再)쿠데타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경제는 침체되고 부정과 비리만 쌓여 갔다. 5·16은 쿠데타였지만 예의 다른 쿠데타였고, 분명 군사정변이었지만 예외의 정변이었다. 

예의 다른 쿠데타. 상례(常例)에서 볼 수 없었던 정변, 그것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는 복(福)이었다. 다른 신생국들에게선 화(禍)가 되고 재앙이 되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정반대가 되었다. 복이며 행운이 된 것이다.

쿠데타가 어떻게 복이 되며, 정변이 어떻게 행운으로 둔갑할 수 있는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5·16이 그런 결실을 거둔 것이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며 그 결실은 대성취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대성공이며, 무엇이 대성취인가. 그것은 산업화 대성공이며, 국가재조(再造)의 대성취다. 우리는 5·16이 일어나던 1960년대 초에서 민주화로 이행되던 1980년대 말까지, 불과 30년 사이에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했다. 그 탈바꿈의

속도는 너무 빨랐고, 그 탈바꿈의 과정은 너무 치열했다. 

GNP 증가율이 연 10% 내외로 30년간 계속되었다. 그 사이 우리는 수천 년 꼭 같았던 한 모델의 낡은 국가체제에서 완전히 다른,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델의 다른 국가체제로 바뀌었다. 그것은 곧 새로운 국가의 창건, 바 로 국가재조(再造)였다.

▲ 5·16 혁명 세력이 아닌 민주당이 집권했다면 과연 혼란한 사회가 정화될 수 있었을까? 사진은 이정재의 숙청 모습.

대성공 대성취 - 무엇이 만들어 냈는가

이 국가재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가 전 분야에서 격렬한 구조변동을 야기했다. 그 변동은 마치 앙샹 레짐이라는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이행하던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치르는 ‘피의 투쟁’과도 흡사했다.

삶의 틀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활양식 사고방식 행위유형, 이 모두가 지난날의 양태와는 완전히 결별했고 또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만큼 그 과정은 리얼하고 격렬했다. 

문제는 무엇이, 그 어떤 ‘역사의 동력’이 그것을 동시적으로 이룩하게 했느냐이다. 그 어떤 요인이 그 같은 대성공 대성취를 가져오게 했느냐이다. 그것은 그 3개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그 3개의 요인은 첫째는 사람이고 둘째는 지식이고, 셋째는 통찰력이다. 물론 더 많은 다른 요인들, 특히 방법론에서 더 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세 개로 집약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사람이 달랐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때의 정권 안팎에 있던 기성 정치인(흔히 말하는 구 정치인),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행동하는 바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가치관도 미래관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1960년, 4·19 뒤 들어선 새 정권(민주당)은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뭐 하나 일관되게 추진되는 것이 없었다. 대학가에선 데모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 때 나는 수색에 있던 국방대학원에 취재차 갔다가 우연히 고급장교들(대령급)의 세미나를 참관했다. 주제는 국방개혁에 관한 것이었고, 국방개혁은 예나 이제나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군이라는 다측면의 것이어서, 종합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세미나를 참관하면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쳇말로 군인들이 ‘너무 똑똑하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식견이며 사회에 대한 안목이 기성 정치인, 기성 지식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의 두뇌는 명석했고, 그들의 설명은 분석적이었다. 어느 것 하나 두루뭉수리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 뚜렷이 느껴지는 그들의 결단력과 추진력, 돌파력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우유부단하고 사욕 사심에 차고 권력에 눈이 어두운, 내가 자주 자주 대하는 그 기성 정치인들과는 아예 유(類)가 달랐다.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지식마저도 노트를 읽어 주는 것 말고는 아예 강의를 못했던 강단의 교수들, 미래상도 시대감각도 변화의식도 전혀 갖지 못한 일반 지식인들이며 언론인들, 그들과도 그들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내가 다녔던 서울대학을 가고도 남을 정도로 고등학교 때 성적이 우수했고, 거기에 미국 사람들에 의해 군인 장교로 미국에 유학하며 세계를 봤고 바깥 세계를 알았다.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었던 우리 지식인, 우리 기성 정치인들과는 경험이 다르고 차원이 달랐다. 

차원이 다른 것만큼 사람이 달랐다. 나는 쿠데타를 직감했다. 1960년, 그때까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신생국은 우리만이다 할 정도로 우리는 쿠데타에서 예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 없이 깨어진다는 예외의 법칙이 있다. 

그들이 기성 정치인과 달랐기에, 그들이 기성 지식인들과도 달랐기에, 그들은 쿠데타를 했고, 정변을 일으켰고, 그리고 산업화와 국가재조에 성공했다. 그들이 만일 당시의 기성 정치인, 당시의 기성 지식인들과 같았다면, 우리 역시 다른 신생국들의 쿠데타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고, 우리 또한 오늘날 북한이나 다름없이 50년 전 보릿고개를 아직도 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달랐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 줘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보는 바른 눈이고, 5·16에 대한 바른 평가다. 

▲ 5·16 세력은 단지 무모한 군인에 불과할까? 박정희와 그의 사람들은 당시 최고 석학(碩學)도 갖지 못한 놀라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다.

둘째로 ‘지식이 달랐다’ 

앞서의 ‘사람이 달랐다’는 것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사람도 ‘지식이 달랐다’면 미상불 팔팔 뛸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지 않으면 그 또한 무지의 소치다. 당시 정치인도 지식인도 경제발전 경제개발에 대한 욕구는 대단했고, 의욕 또한 넘쳐흘렀다. 신문도, 잡지도 그 기사 그 글이 가장 인기가 있었고, 특히 그에 대한 외국 석학들의 글은 취재가 되는 한, 모두 게재했다. 

자유당 말기부터 정부도 부흥부 등, 경제개발 부서를 만들어 개발에 전념했다. 그것은 4·19 후 민주당 정권에서도 계속 되었고, 그 열기는 계속 뜨겁기만 했다. 

그런 지식 그런 열기로 보아 5·16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당시 정권 또한 경제발전을 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당시 기성 정치인, 기성 지식인들도 산업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현장을 뛰고 현장을 취재한 사람으로서 생각하면,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이유는 경제개발의 절대적 요건인 추진력·결단력·돌파력은 차치해 두고, 무엇보다 지식이 부족하고 통찰력이 거의 제로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3단계 과정에서 당시 정권 담당자나 정치인·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지식은 1단계에 그쳤고, 2단계 3단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제1단계는 마스터플랜(master plan), 즉 계획수립이다. 물론 종합적이고도 기본적인 전체계획의 수립이다. 흔히들 말하는 경제개발의 청사진이다. 

이 마스터플랜은 해외 지식인, 특히 미국 경제학자들에 의해 잘 만들어졌고, 우리를 포함해 많은 신생국들이 수입해 가지고 있었다. 

마스터플랜은 어디나 복사가 가능했고, 그것을 자기 나라에 맞춰 다시 짜면 바로 그 나라의 미래 청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마스터플랜대로 하면 경제는 어김없이 발전해 간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개발의 능력은 바로 그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그 마스터플랜대로 되지 않았고, 그 마스터플랜만 가지고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경제개발의 2단계는 인스티투션 빌딩(institution building), 즉 제도 형성이다. 마스터플랜이 있다면 그 마스터플랜을 실현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제도는 법과 기구다. 그것은 경제개발을 담당하는 부서를 만들고, 매뉴얼과 규정을 만들고, 자리를 만들고, 그리고 그 자리에 가장 맞는 사람을 골라 앉히는 것이다. 신생국들이 하나같이 실패한 것은 이 2단계에서다. 

부서를 만들고 규정을 만들고 자리를 만드는 것은 어느 나라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을 못 찾아내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적재적소,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앉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가 불안할수록 사회가 혼탁할수록 되지 않는 것이다. 뇌물 비리에 가득 찬 당시의 우리 정치를 생각해보라. 당시의 우리 사회를 회고해보라. 능력 있는 적재일수록 탈락하고 뇌물청탁에 능한 사람일수록 발탁되지 않던가. 

경제개발의 3단계는 퍼포먼스(performance), 즉 성과 달성이다. 성과 달성은 투입(input)보다 산출(output)이 많아야 가능하다. 적자를 내면 안 되는 것이다. 숫자에 빨간 글자가 많아지면 어떤 기업도 망하고 어떤 개발도 실패한다.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고 자랑하던 일본항공(JAL)도 적자가 누적되면서 망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2단계도 어렵지만 이 3단계가 가장 지난한 것이다. 사람도 달라야 하지만 무엇보다 지식이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 중에서도 이론지(理論知)보다는 실행지(實行知)가 다르고 뛰어나야 한다. 실행지는 일의 선후, 일의 완급, 일의 프라이어리티(priority)를 아는 것일 뿐 아니라 메스돌로지 (methodology), 이른바 방법론에 정통한 것이다. 

당시 우리 지식인들의 최대 약점은 이 방법론의 무지, 아니 아예 방법론이 없는 것이었다. 방법론의 개념조차 없었다. 원론적인 것, 당위적인 것만 내세웠다. 당시 최고 지성지라는 <사상계>를 지금 한 번 펼쳐 보라.

모두 원론이고 모두 당위다. 어떻게 그것을 해낼 것인가, 어떻게 실현해서 어떤 성과를 낼 것인가는 전혀 없었다. 이유는 ‘방법론’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법론이 없는 지식,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방법론을 가르치지 않는 학문, 그것이 학문이 될 수 없듯이. 

5·16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 방법론의 지식이 있었다. 낡은 이론지보다 실행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식이 달랐다. 그래서 또한 경제개발의 그 어려운, 다른 신생국들이 못 해낸, 경제개발의 2·3단계를 충분히 해냈을 뿐 아니라 초과 달성까지 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지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치인, 기성 지식인들이 도저히 갖지 못한 것을 또 하나 더 갖고 있었다. 이른바 통찰력(洞察力)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통찰력이 달랐다’ 

통찰력, 그것은 유기체와도 같은 상황(situation),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상황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것이다. 당시 우리 경제학자들은 이 통찰력이 없었다.

정치인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경제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경제학자들이 5·16을 일으킨 군인들보다 미래 경제에 대한 통찰력이 훨씬 부족했던 것이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1961년 쿠데타가 나고, 군사정부 최고회의에서 곧장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그 요지 중의 하나는 ‘수출입국’이었고, 그리고 4년 후인 1965년에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당시 최고의 경제학자로 일컬어지던 성창환(成昌煥) 교수-그는 최고회의 의장고문까지 역임했었다-가 격렬히 비판하고 나섰다.

비판의 핵심은 군인들이 경제를 전혀 모른다는 것. 그 결과 이런 5개년 계획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더구나 수출입국은 전혀 실행 불가능한 정책일 뿐 아니라, 수출 1억 달러는 코리아 판타지(한국 환상곡)라고, 가히 절규하다시피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경제학자들은 예외 없이 수입대체산업을 주장했다. 

절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성창환 교수와 꼭 같이 비판했고, 언론도 모두 그렇게 썼다. 그래서 국민도 정치인도 군사정부는 곧 무너지고 한국경제는 수렁에 빠지고 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1965년에 달성한다던 수출 1억 달러는 한 해 앞당겨 1964년에 달성했다. 

그것은 완전 기적이었다. 1961년 5개년 계획 수립 당시 우리의 수출은 2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리고 외국에 팔아먹을 상품도 없었고, 그 상품을 생산할 산업도 없었다. 누가 생각해도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수출입국으로 산업화를 성공시킨다고 생각했고, 국가재조를 발상했는가.

오늘날 무역 1조 달러를 2000만 달러 시대에 어떻게 내다볼 수 있었는가. 그 통찰력, 그 예지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뿐이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는 어떠했는가. 최고의 반대자는 김대중·김영삼 전직 대통령들(당시 야당 당수)이었고, 국회의원들이었고,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들이었다. 

김대중 당수는 경부고속도로가 아니라 서울-강릉 고속도로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때 야당 당수들 반대대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이 대한민국이 존재할까. 도대체 박 대통령은 어떻게 그 같은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까. 

포스코를 건설할 때는 어떠했는가. 한국에 일관제철산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일본 기업인, 일본 정치인이 먼저 주장했고, 거기에 세계 최고의 경제분석기관이라는 세계은행(IBRD)이 가세했다. 세계은행은 한국이 간청하는 차관을 브라질과 터키에 제공했다. 우리는 제철산업의 고로(高爐) 경험이 전혀 없고 그들 나라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모두 실패해서 세계은행은 돈만 날리고 말았다. 세계은행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만큼 국내 정치인, 국내 지식인, 심지어 경제장관들도 제철산업을 모두 반대했다. 일본 수상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도 박태준에게 불가능함을 설득했다.

후쿠다 수상은 후일, 박태준이 “해냅니다. 나는 해냅니다.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의미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어쩌면 이 사람이면 해낼지 모른다 생각했고, 그리고 자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포스코라는 대사업을 성취해냈다”고 술회했다.

도대체 그 통찰력, 그 지식, 그 결단력과 추진력 돌파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5·16은 그런 사람들이 일으킨 쿠데타였고 정변이었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 낸 혁명이었다. 나는 5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그때 내가 그들을 취재했을 때와 꼭 같이, 그들은 사람이 달랐다, 그들은 지식이 달랐다, 그들은 통찰력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꼭 같이 말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말할 것이다. 5·16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을 상상할 수 있을까, 5·16이 아니고도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이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은 그 인프라를 만든 4·19와 5·16, 그 4·19의 의식혁명과 재탄생혁명, 그리고 5·16의 산업화 혁명과 국가 재조혁명, 바로 이 두 혁명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4·19와 달리 5·16은 ‘역사의 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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