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의 조선입국에 한몫했다는 게 자긍심”
“내가 한국의 조선입국에 한몫했다는 게 자긍심”
  • 미래한국
  • 승인 2016.11.2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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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독일 거주 파독 조선기술자 유정일 씨

1971년부터 1972년까지 3차에 걸쳐 독일로 파견된 300여 명의 조선기술자 가운데 40여 명은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서 자리를 잡았다. 1976년 4월 동호회로 시작해 지금은 재독 한인조선기술자협회(회장 김부남)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지난 9월 24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파독 45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곳에는 현재 파독 조선기술자 3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다음은 1971년에 파독된 유정일 씨(74세)와의 일문일답이다. 인터뷰는 김복녀 재외동포신문 기자가 진행했다. 

- 파독 근로에 지원한 동기와 선발 과정에서의 일화를 소개해 달라. 

나는 기계공고 기계과 출신으로 전기용접 1급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동양화학의 창립 멤버로 근무하다 독일 함부르크 호발트(HDW) 조선소에서 일할 조선기능공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응모했다. 독일 엔지니어들의 실기와 도면 심사를 거쳐 합격했다.

그런데 이때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정부가 기능 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아 일정이 중단되었다. 70~80명의 합격자들이 출국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을 시기였다. 우리는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었기 때문에 절박했다. 그래서 청와대 앞에 가서 농성까지 해서 결국 1971년 11월 7일에 독일로 출국할 수 있었다. 

파독 조선기술자들 대부분은 눈치가 빠르고 성실해서 잘 적응했지만, 일탈 행위를 했던 이들도 있었다. 특히 파독 조선기술자 1진 가운데 몇몇 동료들은 한국을 빠져 나오려는 목적으로 이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계약 기간 중에 미국, 호주 등으로 빠져 나가기도 했다. 영국을 통해 미국 등의 비자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독일 측이 2진 때부터 도면, 특수 용접 등 시험을 봤던 사정에는 파독 1진에 실망한 측면도 있었다. 

- 독일에서 근무하고 생활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난 구조조정이 있었던 1983년까지 호발트 조선소에서 근무했다. 그 후에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다 62세에 퇴직했다. 언어 문제가 있었지만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라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독일 사람들은 상부상조하면서 일은 정확하게 했고 책임자에게는 절대복종했다. 

나는 수입이 더 나은 낮 시간보다 밤 근무를 선택해서 일을 했는데,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야간 근무 때문에 귀에 장애가 생겼다. 독일 동료들과 사이는 참 좋았다. 

- 독일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그리고 가장 보람됐던 기억을 소개해 달라. 

한국 기능공들이 워낙 적응을 잘했다.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도 자주 들었다. 45년 전 한국이 어렵던 시절 오직 잘 살아보겠다는 목표만을 갖고 와서 오직 앞만 보면서 일을 했다. “내가 한국의 조선 입국에 한몫을 했다”는 자긍심이 가장 큰 보람이다. 많을 때는 2200마르크 정도를 받았는데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장남으로서 한국의 부모님에게 전부 송금했다.

퇴직 후에는 다시 만든 주민등록증과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1~3개월 정도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노숙자에게 음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특수 장애학교를 찾아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미용을 배워 양로원에서 어르신들 머리도 깎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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