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력도 없이 청나라 정벌 구호 외쳐
군사력도 없이 청나라 정벌 구호 외쳐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1.2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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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조선 역사] 효종의 북벌정책, 그 실상과 허상

북벌정책은 실천과 결과에 상관없이 숭명사대주의에 길들여진 조선의 사림 사대부들의 자존심을 한껏 고양시키는 한편, 백성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결속시켜서 조선 왕조를 더 길게 그 수명을 연장시켰다.

정묘, 병자호란이란 전대미문의 참화를 겪은 조선의 조정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이런 국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방안에서 두 가지 방책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하나는 조심스럽게 자주국방을 강조한 부국강병책으로 소수파가 제시했고, 또 하나는 사림세력의 다수파가 주장한 오랑캐 청을 응징하자는 북벌정책이 그것이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조지타운대 방문교수·미주리대 객원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부국강병책의 중심에는 소현세자가 있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서 몇 년 후 조선에 잠시 귀국해 부친 인조와 대면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심각한 언쟁이 오고갔다. 언쟁의 주된 이유는 조선의 대청정책에 대한 부자 간의 심각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소현세자는 심양에 억류되면서 욱일승천하는 청의 매서운 국력을 몸소 목격했다. 

그는 조선이 청과 대적해 국력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청과 화친, 협상해 포로를 송환받고 자력강생 및 부국강병책을 취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가급적이면 실리 외교를 통해 대청관계를 원만하게 하여 향후 국력을 다지자는 장기적 현실주의적 접근을 보였다. 

반면에 중국 대륙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인조는 원한에 사무쳐 대청 복수심에 절치부심, 와신상담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인조는 부친의 심적 고통을 위로하기는커녕 대청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장자의 변한 모습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고 청이 소현세자의 카드로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점에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실용론인 소수파의 부국강병책과 명분론인 다수파의 북벌정책 대립

소현세자는 1644년 70일 동안 도르곤을 따라서 정명전(征明戰)에 따라갔다가 북경에 머물면서 독일 선교사 아담 샬 등과 교류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서양문물을 접하고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부국강병에 활용할 의지에 불타올랐다. 

청에 볼모로 가서 8년만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인조와 조정대신들의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살피지 못한 채 자신의 부국강병론을 설파, 부친을 설득하려다가 오히려 참변을 당했다. 소현세자의 시신에서 검은 반점이 발견된 것은 왕명에 의한 독살을 의미한다. 세자가 죽은 즉시 청에서 가져온 각종 서적과 서양문물들은 검토의 여지도 없이 깡그리 모두 불태워졌다. 

이로써 양국 간의 신뢰를 통해 청과 교류하고 자주적 개방정책을 통해 서양문물을 입수해 강한 조선을 만들려는 소현세자가 평생을 염원한 부국강병책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원래 북벌정책의 기원은 정묘호란 이후 주화파 최명길과 척화파 김상헌 간의 논쟁에서 척화파를 달래기 위한 최명길의 주장에서 비롯된다. 최명길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오월(吳越) 항쟁의 고사(古史)를 비유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 패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절치부심(切齒腐心)-와신상담(臥薪嘗膽)을 거론하면서 북벌의 불을 지폈고, 병자호란 이후 3학사(三學士)가 볼모로 끌려가 청에 대한 분노가 격앙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두 달만에 귀국한 형의 급작스런 죽음을 듣고 급히 귀국, 인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왕세자로 책봉된 봉림대군(후일 효종)은 조정의 분위기를 간파하고 대청강경책만이 자신이 살 길임을 현명하게 깨달았다. 

봉림대군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인조의 복수심에 비위를 맞춰야 했고 숭명사대주의(崇明事大主義)에 집착한 집권층 서인 사대부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운신의 폭은 아주 좁았다.

그 자신도 심양에 볼모 생활을 하면서 소현세자와는 달리 청으로부터 차별적 푸대접을 많이 받아서 청에 대한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또한 심양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돌아간다면 복수하리라 하늘에 맹세했었다.

▲ 정묘, 병자 호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참화를 겪은 조선의 조정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각색한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장면.

1649년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말라”는 인조의 유지를 받든 효종은 대청강경책을 언급하고 왕좌에 올랐다. 그는 인조 때 세력을 가진 반정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송시열과 송준길을 발탁하고 서인 내에서 비공신 세력이던 사림계열을 영입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인조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였다. 김육을 발탁해 대동법 실현과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효종은 집권세력인 서인들과 크고 작은 정책에서 충돌을 빚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북벌정책이었다. 

대부분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에는 효종이 송시열과 함께 북벌정책을 추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실체가 없다. 

북벌론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거의 한 구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워낙 청국을 의식해 비밀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효종이 북벌정책을 추진했다는 증거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 자료로는 송시열이 남긴 자료다. 이것은 북벌이 언급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료로서 효종과 인조판서 송시열과의 회담의 내용이,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서습유> 권7 ‘악대설화’에 실려 있다. 이때가 효종 10년 3월 11일(1659. 4. 2.)이었으니, 효종은 북벌론을 제기하고 나서 3개월도 안 되어서 죽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담에서, 효종은 자신이 군비를 증강하는 목적은 실은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며 “10년만 준비하면 청나라를 꺾을 수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효종이 처음으로 북벌론을 입에 담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송시열은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이라면서도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라고 신중론을 피력했다. 총론에는 찬성, 각론에는 반대였던 것이다.   

송시열이 반대 입장을 나타냈는데도 효종은 집요하게 자기 입장을 개진했다. “하늘이 내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관계없이 한번 거사해볼 계획이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보도록 하오.” 송시열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신은 결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전하께서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겁니다.” 

효종은 잠시 화제를 바꿔 봤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급선무인지 말해주시오.” 그러자 송시열은 격물·치지·성의·정심을 통한 마음 공부가 가장 급선무라고 대답했다.

격물·치지·성의·정심은 <대학>에 나오는 것으로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 격물(格物)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 치지(致知)는 무궁한 단계까지 지식을 확장하는 것, 성의(誠意)는 마음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또 정심(正心)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송시열의 말은 ‘치국평천하’에 앞서 ‘격물·치지·성의·정심’부터 하라는 것이었다. 군비 증강을 주장하는 임금 앞에서 “마음공부나 하시오”라고 말했으니, 임금을 조롱한 것이다. 

효종은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밤낮으로 애써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력을 기르는 일 뿐이오”라며 다시 한 번 협조를 구했다. 송시열의 답변은 “먼저 기강을 세운 뒤라야 이 법(군비 증강)을 시행할 수 있는데, 기강을 세우는 길은 전하께서 사심을 없애는 데 달려 있습니다.”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 진짜 목적은 북벌이 아니라 왕권 강화가 아니냐는 메시지였다. 송시열은 독대에서 여러 차례 주자(朱子)를 거론해 스스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임을 과시했다. 송시열과의 담화는 비밀로 은폐되었다가 효종 사후 15년 후인 현종 15년에 공개되었는데, 그 이유는 송시열이 정치적 곤경에 처하면서 자신이 효종의 충신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궁여지책의 일환이었다.

하멜 일행 표류 때 서양문물 개방정책 기회 놓쳐

효종의 북벌책의 구체적인 두 번째 증거로 일부 학자들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행의 군사적 공헌을 자주 지적한다. 하멜은 동인도회사에 소속되어 30여 명의 일행과 함께 무역을 위해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해 1666년 조선을 탈출하기까지 13년 동안 조선에 체류하다 귀국한 후 <하멜보고서(하멜표류기)>를 쓰면서 유럽에 조선을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다. 

한양의 조정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은 하멜은 효종의 심문에 답했는데, 하멜이 “자신의 조국에는 바닷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선박이 많이 있다”고 자랑하자 박장대소하는 신하들은 많았지만 신하들 중 누구도 하멜의 말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만약 이때 서양의 사정에 대한 관심을 보여서 조정대신 중 누군가가 네덜란드에 직접 가보든지 아니면 서양 문물에 대한 적극적 개방정책을 취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했던 것은 역시 중국이 세계 문명의 중심지라는 중화사상과 성리학적 세계관에 찌들어 있어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선은 소현세자의 사망 이후 하멜 일행의 표류가 지닌 역사적 함의를 간과하면서 안타깝게도 또 한번의 개방정책을 추진할 호기(好機)를 놓치고 말았다.

효종 7년 <효종실록>에는, “새로운 체제의 조총(鳥銃)을 만들었다. 이에 앞서 만인(蠻人)이 표류해 와 그들에게 조총을 얻었는데, 그 체제가 매우 정교하므로 훈국(訓局, 훈련도감)에 명하여 모방해서 그것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남만인(南蠻人)이 표착해 왔을 때 가지고 온 조총이 정교하니, 훈련도감에 명하여 그것을 모방해서 서양식의 새로운 조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1653년부터 1666년까지 하멜의 조선 억류 과정이 고국인 네덜란드에 알려지면서 연합동인도 회사의 요청으로 하멜은 일종의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이것이 ‘하멜표류기’이다. / MBC 특집다큐 [항해와 표류의 역사 2부] 영상 캡처

하멜 일행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었지만 그들의 군사적 공헌도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멜표류기>에서도 군사적 공헌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더구나 남만인(조선이 당시 외국인을 지칭한 말)들의 체류는 반드시 청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조선은 이 사실을 감췄고 청의 사신이 올 때마다 남한산성에 그들을 숨기기에 바빴다.

급기야 이들 중 일부의 탈출사건이 터지고, 결국 전남으로 유배를 보내면서 하멜 일행에 대한 활용가치는 급락했기에 하멜 일행을 충분히 군사적으로 활용할 여건이나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려웠다.

세 번째 증거로는 18세기 중반의 북학파(北學派)의 거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저술에서 명분에 사로잡힌 조선 사회의 분위기와 북벌론의 단편적 편린을 읽어낼 수 있다.

17-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누구나 북벌론에 대해 소문을 듣고 난상토론을 벌였을 것이고 비현실적이고 가당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몇 차례 북경을 방문했던 박지원의 <열하일기>인 연행록의 한 대목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우리 명을 위해 대신 복수하겠다며, 청을 치겠다고 하는데 그 넓다란 소매자락으로 무슨 전투를 할 것인가? 거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만주 벌판에서 말 오줌을 먹어가며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이 말은 연행록의 저자가 잠시 꿈결에 명의 도인을 만나 듣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꿈을 빌려 당시 조선의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견문을 전하면서, 이에 따른 자신의 실학사상을 피력했다. 

이때 박지원은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조선의 낙후성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했다. 효종이 죽은 지 무려 120년 후의 일이다. 

박지원의 <허생전>이란 문학 작품에서도 북벌론에 대한 언급이 풍자적으로 배어나온다. 주인공 허생이 어영청 대장 이완에게 정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3가지 대책을 내놓았는데, 이완이 모두 어렵다고 실토하자 허생이 그를 베어 버리겠다고 한 것은 북벌론이 오랑캐에게 당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과는 달리 당시 서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상에서 봤듯이, 효종은 송시열이나 이완 등 최측근들에게 북벌을 은밀하게 종용, 추진하려 했던 흔적은 보인다.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이 고백한 효종과의 독대는 자신이 살기 위해 전적으로 꾸며낸 것은 허무맹랑한 소설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효종의 북벌론은 실체가 있었다고 인정하더라도 정치 구호로서는 ‘허구’였다는 점이다. 구체적 자료를 통해서 북벌의 목표나 전략, 전술에 대한 언급은 전무한 상태이다. 

압록강 위화도에서 멈춘 태조 이성계의 못 이룬 요동정벌의 유업을 계승해 요동지역만을 평정, 정복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청과 전면전을 벌여 청을 굴복시킬 목표인지 구체적인 각론이 없다. 

북벌이 반청공세정책인지를 가장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 청의 요청을 받아 러청 접경지역으로 출정한 나선정벌이다. 이것은 병자호란 시 체결한 ‘정축화약’으로 “청의 요청이 오면 조선은 지원한다”는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효종이 청의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고 청의 신뢰를 돈독히 해야겠다고 판단해 출정했겠지만, 광해군이 명으로부터의 후금 공격 지원을 거절하려고 했던 것과 유사한 고뇌의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군의 침공을 격퇴한 두 차례(1654년에 1차, 1658년에 2차)에 걸친 나선정벌로 조선군은 조총부대의 위력을 과시했으니 효종의 북벌정책은 엉뚱한 곳에서 효과를 톡톡히 발휘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군사력으로 청의 대군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다. 청이 조선에 파병 요청을 한 것은 자체적으로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조선군의 실력을 테스트하고 딴 마음(反淸)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효종이 북벌론의 제기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유는 정통성의 확보에 있었다. 죽은 형 소현세자의 장남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차지해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부담감을 가진 봉림대군에게는 북벌론의 카드로 사림과 반대세력을 무마시켜야 했다.

즉 북벌론은 내부 조정대신들과 사림들의 지지를 얻고, 인조 대에 청의 통제를 받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조선의 군사체계를 다시 재정비하며 방위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봐야 한다. 

북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동법 등과 같이 내부 제도를 개혁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다수의 성곽과 포대를 구축하고, 부족한 정통성을 북벌론을 통해 보충해 지방 사림의 지지를 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벌론은 왕권 강화뿐만이 아니라 서인집권세력에게도 상당한 이득이 있었다. 

정묘-병자 양 호란의 패배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면서 들끓는 민심의 불만을 봉합하고 분노의 분출구를 북쪽의 청에게 향하도록 하는 정치적 분풀이 효과도 다분히 있었다. 이렇게 북벌론은 처음에는 효종과 서인집권세력에게는 모두 이득이 되었기 때문에 서인세력들은-훗날에는 뒷감당을 못하지만-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북벌에 대한 효종의 진정성을 송시열은 간파했고 이를 통해 조정대신들은 물론이고 재야 사림에까지 점차 알려지자, 군신(君權)과 신권(臣權)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게 된다. 우선 국방력의 강화는 집권세력의 조세 부담으로 귀결되는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청과의 무력 충돌 결과 패전할 경우, 남한산성의 악몽을 생생히 기억하는 대신들로서는 언제 다시 볼모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조와 함께 겪었던 삼전도의 치욕을 상기한다면 효종의 북벌론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효종이 북벌군을 일으켜서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사망하는 것이었다. 서인 집권층으로 볼 때, 즉위 10년 효종의 서거 시기는 최적의 타이밍에서 일어난 것이다. 공식적 병명은 과로사로 기록되지만, 효종의 사망은 후일 호사가들에 의해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하기야 서인 집권층이 효종의 북벌정책을 명분으로는 찬성하는 척하며 정면 반대는 안 했지만 내심으로 불가하다고 판단, 북벌을 반대했고 각종 개혁정치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효종의 조기 사망은 과로사이든지 독살이든지 간에 북벌정책 추진과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가 심화된 현대에 오면서, 효종의 북벌정책은 서인 집권세력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방패막이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사에서 순진하고 착한 백성들에게 군왕의 진정한 의중을 기만한 대표적인 정책 구호로 평가절하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실천할 수도 없는 정책을 구호로 내걸었다면 이것은 ‘대국민 정치사기극’으로 간주,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북벌정책은 실천과 결과에 상관없이 숭명사대주의에 길들여진 조선의 사림 사대부들의 자존심을 한껏 고양시키는 한편, 백성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결속시켜서 조선 왕조를 더 길게 그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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