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사태 20주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IMF사태 20주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2.01 15: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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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무지와 사회주의 이념이 조작한 IMF사태의 원인. 

그러나 원인의 핵심은 시장과 기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관료들에게 있었다.

2017년 12월은 대한민국이 IMF사태를 맞은 지 2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1997년 12월처럼  대통령 선거가 있다. 위기는 반복된다는 점에서 97년 IMF사태의 상황은 지금의 상황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 전 KBS PD <세계는 지금>, 등 연출·<딱 맞게 풀어쓴 국부론> 저자

동시에 경고음이 없다는 점에서도 놀랍게도 닮아 있다. 97년 IMF사태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이전에도 경제위기는 있었으나 위기는 한국 경제의 경로 안에 있어서 조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97년의 경제위기는 대한민국이 OECD국가에 가입하고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어서 과거의 경제위기와는 전혀 다른 악마의 얼굴로 등장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 바둑에서 큰말은 죽지 않는다는 뜻)라던 대기업의 절반이 사라졌고, 무엇보다 ‘은행 부도’라는, 한국인들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사태들이 속출했다. 

당시 국민들에게 은행의 부도는 나라의 부도와 같은 것이었는데 그 배경에는 뿌리 깊은 관치금융으로 인해 공공기관인 모든 은행은 국책은행인 한국은행의 실질적 지점으로 기능한 것이 있었다. 

IMF사태는 100만의 실업자들을 양산했다. 금리는 30%대까지 치솟았다. 삼성, 현대, LG와 같은 대기업은 ‘한번 입사하면 영원한 직원’이라던 불문율이 깨지면서 ‘직장=직업’의 관행이 사라지자,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이라는 말이 국민적 공감을 자아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IMF사태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던 것이며 그 달라진 모습은 2000년 IMF 위기가 극복된 후, 소득의 불평등이라는 뚜렷한 양상으로 국민들을 괴롭혔다. 

진보와 좌파 진영에서는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신자유주의 비판론’은 반시장경제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고, 노동개혁을 가로막으면서 대한민국에 사회주의 이념에 튼튼한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 사실이다. 

종금사의 무분별한 외화대출이 위기의 진범? 

IMF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대부분의 학자들과 언론들은 IMF 경제위기가 재벌 대기업들의 선단식 경영과 무리한 몸집 부풀리기, 문어발식 사업 확장, 정경유착을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재벌만 위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안경을 끼고 ‘반자본, 반기업’의 노동주의, 사회주의 이념의 세계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IMF사태가 시작된 97년부터 극복이 이뤄진 2000년을 지나 2007년에 이르는 10년간,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배격한다며 정부 주도의 관치 경제, 그것도 노동주의와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IMF사태에 대한 원인을 재벌과 시장경제에 돌리는 행태는 일견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진단은 아무런 교훈과 예방을 낳지 못한다. IMF사태 20주년을 맞아 이 문제를 올바르게 보려는 노력은 그래서 필요하다.

97년 IMF사태의 원인으로 가장 흔하게 지목되는 것은 비은행권인 종합금융사들이 무질서하게 해외에서 외화를 단기차입으로 빌려와 부실한 기업들에 장기로 빌려주거나 투기 노름에 가까운 투자를 했고, 그 결과 투자 실패로 종금사들이 경영위기에 몰리면서 외환위기가 시작되었다는 해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임에도 여전히 이 시각은 교정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외화, 특히 달러 단기차입은 국내 종금사들만의 행태가 아니라, 금융권 전체의 행태였으며 그 이유는 경제에 무능했던 김영삼 정부가 1994년 6월 1일 외국환관리규정 제2-56조(외화자금의 차입신고 등)를 통해 1년 이상, 1000만 달러 이상의 중장기 외화차입에 대해 본격적인 규제를 시행하고 특히 ‘중장기외화여신법규제’ 시행령을 통해 금융사들의 1년 이상 장기의 외화대출 한도를 70%에서 50%로 축소하는 규제 쪽으로 정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외화대출에 관한 한, 국내 금융권 전체는 해외에서 달러를 장기 차입하는 데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당시 국내 종금사들은 비은행권에 속했기에 은행권에 비해 경영에 자율적 운신의 폭이 컸다. 이러한 종금사들은 과거 단자회사라고 해서 사채(고리대금 사채가 아님)에 가까운 금융회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기업의 매출채권이나 어음, CP 등을 사서 기업들에게 자금을 융통하는 업무들을 해왔다. 

이러한 종금사들은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나름 금융 노하우를 관치 제도권 은행보다 더 많이 터득한 상태였으며 자신들의 신용을 담보로 해외에 역외펀드를 설립해 달러화를 들여와 기업들에게 빌려줄 정도로 해외금융업무에도 숙련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1994년 김영삼 정부의 ‘100일 경제혁신’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1년 이상의 중장기외화도입을 위해서는 도입건별로 사전신고를 해야 하는 행정상의 부담이 생겼고 그 밖에 금융기관의 단기차입(3개월 이하)에 대해서는 물량 규제가 없는 대신 중장기차입에 대해서는 연초에 도입 한도를 설정하면서 분기별로 도입할 수 있는 물량에 대한 규제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 결과 국내 종금사들은 3개월 이하의 단기 외화자금을 역외펀드에서 차입해 국내 기업들에게 장기대출을 하는 관행이 두드러지게 된다. 문제는 김영삼 정부 하에서 고질적인 관치와 정경유착 비리로 터진 한보사태로 국내 제도권 은행들이 물려들어 가면서 부실채권을 조기회수하는 가운데 기업들에 흑자부도와 연쇄부도가 발생하고 급기야 기아차가 쓰러지는 상황을 맞았다는 점이다.

거액의 부실채권은 정경유착을 통해 부실기업에 정책대출을 했던 관치은행들에게 있었지, 종금사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채의 성격이 강했던 종금사들은 기업의 매출채권이나 어음, CP 등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줄 때 대주주의 지급보증이나 주식을 담보로 잡았고 기업들로서는 갚을 수 있는 자신이 있었기에 종금사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한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종금사들의 외환위기는 종금사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관치 제도권 은행들의 모럴 해저드와 정책 부실대출이 만든 것이 진실이다. 그런 점에서 종금사들은 IMF사태의 원흉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였던 셈이다. 

▲ 진보·노동 세력은 반시장 관치주의 정책에 일조한다. 사진은 11월 23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앞 공원에서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성과연봉제 철회를 외치는 모습. / 연합

대기업의 문어발 사업이 IMF 위기의 주범? 
 
IMF사태가 기업들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때문이라는 시각 역시 20년이 되도록 바뀌지 않고 있다. 이 관점은 근본적으로 오류인데, IMF사태는 정부가 보유한 국제결제 수단인 외화, 특히 달러화의 부족 사태를 말하는 것이지, 기업들의 경영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은 경영난에 빠지면 자산과 영업권을 다른 기업에게 매각하는 절차를 밟는다. 망해서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는 것보다는 1원이라도 건질 수 있을 때 주주들이 팔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기업이든 주주들은 자신의 기업을 아무도 사려 하지 않을 정도로 그 가치의 하락을 방치하지 않는다. IMF사태는 정부가 기업이나 외국투자자들에게 바꿔줄 달러가 없어서 발생한 것이지, 기업들이 적자를 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왜 97년 당시 정부에게는 달러화가 부족했던가. 그 원인은 결국 정부에 있다. 금융 당국이 적정 외환보유액의 정책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다. 

IMF사태 이전, 정부 당국이 보유하고 있던 외화의 공적보유액은 위기 발생 전 330억 달러 내외 수준을 유지했으나 외국 금융기관의 본격적인 대출금 회수가 시작되자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판명됐다. 그 배경에는 금융당국이 60~70년대 IMF 전문가들의 의견을 좇아 1차 오일쇼크 후부터 3개월분 수입결제용 외화 확보를 적정보유 목표로 보고 당시에 이르기까지 외환보유액을 그 수준으로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금융 당국으로서는 ‘3개월 수입결제용 외화’가 보유의 적정액이었다는 이야기인데, 96년 OECD에 가입하고 ‘세계화, 개방화’에 진입하면서 금융기관들의 단기 외화거래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이들 금융기관의 3개월 단기 수요에 대비한 외화보유정책이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경제 수준이 우리와 비슷했던 대만의 경우 당시 외환의 금융거래 수요에 대비해 우리보다 2배가 넘는 85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고 대만은 이 외환보유고로 아시아 금융위기 사태를 피해갈 수 있었다. 또 필리핀의 경우는 아예 환율과 국제 자본거래를 우리보다 앞서 자유화시켜 놨기 때문에 우리와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동시에 외환위기에 빠져들 때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우리는 급증하는 국제자본 거래 상황에서도 고정환율제를 고집하고 있었고 IMF 구제금융에 사인하기 직전까지도 환율방어라는 미련한 정책으로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120억 달러의 외화를 날려버리기도 했다. 

기업의 ‘껍데기 경영’원인은 노동경직성 

IMF사태의 원인으로 기업들의 수출 채산성하락과 저하된 기업의 이윤율을 꼽는 학자들도 많다. 실제로 한국 경제는 1994-95년 중 9% 가까운 고도성장을 경험한 후 1996년 들어 경기가 둔화되기 시작했다. 1996년의 6.8% 경제성장률은 외양적으로 연착륙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내용면에서는 문제가 심각했다. 

먼저 대외경쟁력이 약화되면서 1995년에 30% 증가를 보이던 수출이 1996년에는 4% 미만의 낮은 증가율에 머무르게 된다. 또한 수입 증가세가 높은 가운데 수출단가의 급격한 하락으로 교역조건이 악화됨에 따라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4.7%에 달하는 230억 달러에 이르게 된 것도 사실이다. 

90년대 경제성장은 외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미 그 질에 있어서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노동쟁의가 조직화되던 시기였다. 노사분규는 이전 80년대보다 줄어들었지만, 90년대를 맞이한 노동운동은 더 이상 80년대의 그것이 아니었다. 

90년대 노동운동은 학생운동을 넘어서 힘과 조직력을 가졌고, 사업장별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등을 거쳐 마침내 민주노총이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탄생하게 된다. 

전노협이 출범한 이래 사무직을 중심으로 한 업종회의,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연대회의, 그룹별 조직의 출범 등 민주노조 진영조차도 대공장, 중소기업, 사무직 등으로 나뉜 채 발전해 왔다.

90년대 노조의 연대는 더 강화되어 80년대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88.8),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88.12),에 이어서 ILO 공동대책위원회(91.10),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93.6), 민주노총준비위(94.11.13) 등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92년에 집권한 김영삼 정부는 초기에 노동시장 개혁을 주요 경제 현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영삼 정부는 노동시장 개혁의 플랜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개혁은 계속 보류되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90년대 들어 노동운동이 단순한 근로자의 복지 아젠다를 넘어서 정치투쟁으로 변질된 원인이 있다. 

80년대 후반, 운동권의 주사파들이 노동현장에 위장취업 등으로 침투하면서 파업은 정치권을 위협했고 노사관계는 노(勞)-자(資) 간 이념 대립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노동개혁을 오히려 기업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하는 ‘노동개악(勞動改惡)’의 양상마저 띠었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가속화된다. 

이는 노동시장 전반에 걸쳐 거품고용 만연을 초래해서 대부분의 국내기업에서 사내 잉여 인력이 30%에 달하는 정도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 임금상승률이 생산성증가율을 웃돌아 단위노동비용은 88년 2.3에서 96년에는 그 배에 가까운 4.0에 이르고 근로자 1인당 실질임금상승률은 평균 91.8%에 달했다. 

이는 미국 2.2%, 캐나다 3.0%, 프랑스 10.2%, 영국 15.7%, 독일 14.1%, 이탈리아 20.1%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었다. 당시 수출이 고용을 창출하던 한국 경제는 중국의 부상으로 가격면에서 크게 밀리고, 제품에서는 일본에 밀리는 샌드위치 상황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기업들로서는 경영혁신과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기였으나 강력한 노조의 반발에 부딪혀 경영개혁은 표류하고 있었다. 

▲ 정권의 정경유착과 시장개입이 IMF 사태를 불렀다. 한국 사회는 권력이 잘못하면 애국 국민이 수습하는 패턴을 계속 하고 있다. 사진은 IMF 극복을 위한 금모으기 운동. /출처 = KTV

우물 안 개구리, 때를 놓쳤던 정부 

IMF사태에 결정적인 패착들은 정부의 정책 실기로부터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개방화의 지연이었다. 세계 경제는 90년대 들어 통합화가 가속화되면서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각국은 경쟁적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필요한 외국자본을 국내 유치보다는 차입을 통해 조달하는 전략을 고수하면서 경제개방에 소홀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 경제의 총고정자본형성 중 외국인직접투자비중은 1% 수준(96년 기준)에 머물렀던 점이 말해준다. UN 조사 대상국 52개국 전체평균은 7%, 동남아시아 9개국 평균 8.1%, 23개 선진국 평균 5.7%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었다.

한편 경상수지 적자는 계속 확대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본시장개방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당연히 동반되어야 할 환율절하는 억제되었고 이 과정에서 외환위기 발생의 전형적인 환경은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초기 흑자 기업들이 금융기관의 채권회수로 쓰러질 때 부도유예협약의 도입과 기업부도사태의 신속한 처리에 정부는 실패했다. 대기업의 연쇄도산이 벌어지면서 경기 침체가 급속히 일어났고 대외신인도는 떨어지고 있었지만 부실 기업처리는 지연됐다.

그 결과 외국투자자들과 외국 금융기관들이 우리 정부에 대해 불신을 갖기 시작했고, 그 정점은 기아차 사태에 대한 매각이든 회생이든을 결정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으로 나타났다. 

이때 본격적인 외국투자자들의 철수가 일어났다. 이에 대응하는 김영삼 정부의 행동은 상식 이하였다. 환율이 급등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으로 외환보유고를 소진하고 있었던 것.

1000억 달러에 달하는 단기채무의 만기연장이 안 되는 상황에서 25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로 외환시장 방어에 나섰다가 97년 10월과 11월 중 절반에 가까운 120억 달러 규모의 외환보유고가 날아갔고 결국 항복 선언을 했던 것이다. 

IMF사태를 겪으며 우리 사회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IMF정책이 신자유주의라는 오류 

우리 정부에 긴축과 구조조정, 고금리를 강요했던 IMF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혐오는 시장원리에 대한 비판을 불렀다.  그 결과 IMF는 시장원리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처럼 인식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엉터리다. 신자유주의란 1940년대 프랑스 몽페를린 소사이어티에서 등장한 반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의 아젠다였다. 

이 그룹의 아젠다는 ▲경제정책에 정부개입 최소화 ▲규제의 완화 ▲ 공공재의 공급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 세계 각국에 과도하게 불어 닥친 집단주의 경제이념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구체적으로는 효과가 없었던 미국의 케인즈 뉴딜정책에 반기를 들고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아젠다였다.

하지만 IMF는 97년 우리 경제의 외환위기에 시장적 대응을 주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강도의 정부주도의 구조조정과 환율과 이자율의 조작, 긴축재정 등을 요구했다. 

이는 신자유주의든, 구자유주의든 ‘시장으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게 하라’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100% 상치되는 것이었다. 기업이 누구와 인수합병을 할 것인지, 어떤 기업이 살고 어떤 기업이 도태될 것인지를 시장경제의 원리에 맡기라는 것이 신자유주의라면 IMF의 처방은 ‘국제관치’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진보는 이러한 IMF의 자본을 ‘초국적 국제자본’이라고도 말하지만, IMF의 구제금융 자본은 민간 기업들이 아니라 각국의 정부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출연해 만든 것이다. 

97년 IMF의 처방에 국내 자유주의 이코노미스트들이 반발했던 논리들 역시 IMF를 ‘신자유주의’로 매도했던 한국의 무지한 진보들과 이들에 영합했던 정치인, 시민운동가, 더구나 경제학자들이 문제였다.

2003년 12월, 한국경제연구원과 IMF독립평가국은 공동으로 ‘외환위기 당시 IMF 정책 평가 : 한국을 중심으로’(The Role of the IMF in Recent Capital Account Crises)라는 제목의 국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 IMF 독립평가국은 97년 IMF의 과도한 재정긴축과 고금리 정책에 문제가 있었음을 실토했다. 그러한 정책은 70년대 중남미를 대상으로 했던 것이었고, 당시 한국에는 적용하기에 부적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 시장경제 자유주의자들이 IMF에 ‘구조조정과 이자율을 기업과 시장에 맡기라’고 피를 토하며 외쳤던 소리에 김대중 정부나 IMF 모두 귀를 닫았다. 한마디로 소경이 소경을 이끌며 구렁텅이로 빠져 들었던 것이다. 낡은 사회주의 이론과 무지함으로 무장했던 국내 진보 학자들과 노조도 정부의 눈과 귀를 막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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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8-03-18 00:56:34
잘 읽었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