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이 아니라 문화시장 융성이 답이다
문화융성이 아니라 문화시장 융성이 답이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2.05 02: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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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주류 문화는 한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한 문화는 정부가 관치 주도로 융성시킬 수 없다. 문화란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과 공급하고자 하는 이들이 만나는 시장이 있어야 융성한다. 가장 좋은 문화정책은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최순실 게이트로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 정책은 ‘문화융성’이라는 이름부터 지독하리만큼 정부 개입 주도의 관치성향을 노정했다.

정책의 방향이 문화산업을 키운다는 경제적 측면에 방점을 찍었다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문화융성의 경로는 기업들이 문화시장에서 수요에 따라 자신들의 투자와 생산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은 철저하게 이해관계자들이 정부 프로젝트를 입안해서 국고 보조를 얻어내는 지대추구형 사업이었고, 기업들은 여기에 팔을 비틀려 돈만 대는 형태였음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사업에서 드러났다. 그러한 유치하고 졸속적인 정책으로 문화를 융성시킨다는 생각부터가 반문화적이다.  

문체부의 예산은 2013년 4조1048억 원에서 이듬해 4조4224억 원으로 늘었고, 2014년부터 매년 약 5000억 원씩 꾸준히 증가했다. 2017년 문체부 예산은 5조9104억 원이다. 문체부는 문화예산을 GDP 대비 2%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 나라의 문화가 정부 세금 지출로 융성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왜 문화부가 없는 미국의 문화산업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으며 또 글로벌 시장 점유율도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큰지 이해하기가 어렵다.2014년 국회 예산처의 보고서에 따르면 콘텐츠 산업 세계시장 점유율(2012년 기준)은 게임,  영화, 음악, 출판, 방송, 인터넷 등의 각 분야에서 미국이 세계 시장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음악의 경우 2012년 세계 시장 규모는 490억9000만 달러에 달하는데, 미국의 음악 산업이 차지하는 금액은 약 150억 달러임에 비해 프랑스는 2.3억 달러에 불과하다. 미국에 이어 일본(6.6억 달러), 독일(4.4억 달러),영국(4.3억 달러)과 비교해 보면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음악시장 규모 2.3억 달러라는 수치는 의아하다.

K-POP을 대표로 한류 열풍이 거세다지만, 한국음악 시장은 7000만 달러 수준으로 일본에 비해 1/10 수준을 간신히 넘기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가 세금으로 문화·예술을 전폭 지원하는 프랑스의 문화산업이 문화부가 없는 미국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는 점이지만, 일본보다 그 경쟁력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 모두 문화정책을 시장 중심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점 때문에 영국과 독일 역시, 2000년대부터 자국의 문화예술 정책을 정부 주도형에서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 지향적으로 전환했다. 영국의 ‘크리에이티브 브리튼(Creative Briton)’이나 독일의 ‘문화주식회사 독일’등이 그러한 개념이다.

문화경쟁력 1위 미국, 그러나 문화부가 없는 이유 

서구의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전개 양상에 따라 고유한 문화정책들을 펼쳐왔다. 특히 유럽 국가들의 경우 예술에 대한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 전통은 근대국가 시민정부로 그 거버넌스가 변화한 후에도 당연히 정부의 공공적 의무로 여겨졌다.

다만 이러한 관행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경우 내적으로는 고급예술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향유를 높인다는 정책적 목표 하에 ‘문화 민주화’라는 이념적 바탕으로 추진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베트남 반전운동으로 시작된 68혁명은 유럽 선진국들의 ‘문화 민주화’의 정책을 ‘문화 민주주의’로 바꿔 놓았는데, 이 정책이념의 바탕은 고급예술의 국가주의적 전파와 후원을 대중예술에도 적용하라는 것이었다.

일견 자유주의적 발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68혁명이 가져온 이념의 틀은 여전히 문화예술은 공공재이며, 따라서 국가는 보수주의적 고급예술 지원정책을 대중예술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일종의 ‘문화 복지’ 개념이었다.  

이로부터 문화정책의 양상들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영국의 ‘팔길이 원칙’과 프랑스의 ‘문화예술 종사자에 대한 복지’ 정책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다만, 미국의 경우 문화란 민간의 사적 활동이라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문화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이뤄지도록 자유방임하는 전통이 강했다.

그 결과, 미국에는 오늘에도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 민주주의’는 미국의 성공적인 문화시장과 문화의 경제적 효과에 자극받아 2000년대에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Creative Industry라는 ‘창조산업’으로 그 정책적 방향이 변화하게 됐다. 

선진국들의 문화정책은 보수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 민주화’에서 진보주의적 ‘문화 민주주의’로 변화하고, 현재는 시장 지향적 실용주의로 변화하는 추세에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의 문화정책은 정권의 특성에 따라 공론화 과정 없이 선심성 공약에 따라 이리저리 결정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일관된 목표나 성과에 대한 측정이 불가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정부의 문화정책은 문화를 사회 변혁의 도구로 삼는 특정한 이념 세력의 진지 구축전의 보급선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며, 여기에 우리 문화 당국이 외견적으로 표방하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의 원칙은 ‘무엇이 진정으로 국민과 국가에 善인가’라는 질문을 아예 지워버리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한 상황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월호 사건을 다룬 ‘다이빙 벨’ 상영을 둘러싸고 시민사회와 국민들 간에 갈등을 폭발시키기도 했다. 

국가의 문화정책은 크게 문화를 국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공공적 성격의 복지재로 보는 시각과 문화도 공급과 수요가 만나 시장에 등장하는 재화와 서비스라는 관점이 충돌한다.

전자의 경우 문화는 기회의 평등처럼 국민들에게 격차 없이 보급되어야 하기 때문에 문화 종사자들은 국가가 보조해야 하는 복지수혜 대상이 된다. 다만 이러한 경우 문화의 향유자인 소비자의 선택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데, 진보적 관점에서 이 문제는 일종의 배급주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 결과 국가가 세금으로 지원하는 문화적 서비스의 질적 차원은 논외가 되며, 문화 소비자라는 개념도 지워진다. 반면, 문화를 시장주의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문화는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그 수준과 내용이 결정되며 개인적 선호의 지출 문제이기에 국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러한 경우 문화가 그 나라의 정체성과 사회통합의 기능을 가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는 개인과 공동체라는 오래된 문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문화가 개인들의 연대를 높이고 이를 통해 사회통합에 기여함으로써 갈등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라도 주류문화의 확립은 필요하며 그러한 주류문화는 개인들이 사회에서 올바른 미덕을 함양하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만큼은 인정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누가 그러한 정책을 수립하고 자원을 동원하며 실행을 추동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문화전문 공무원? 그런 것은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국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부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정부가 아니라, 공무원이 하는 것이며 이때 문화 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문화적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자나 수요자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에 주류문화가 무엇이 될지를 결정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은 무엇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 공무원으로서는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길이 원칙을 일찍이 표방한 영국에서는 정부 관료가 아니라,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예술위원회, ACE가 실질적인 영국 예술정책의 결정자가 되어 왔다. 영국 ACE는 정부와 예술계 사이의 매개자로서 예술 지원에 관한 자율적 독립기구의 위상을 갖고 있다.             

‘누가 지원할 문화 예술의 내용을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독일의 경우, 연방내 자치주들의 문화주권으로 표방되어 있다. 독일 기본법 5조 3항 ‘예술과 학문, 연구와 교수는 자유이다’에 따라, 국가는 예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고 공공문화생활의 다원성을 장려한다. 

또한, 독일은 ‘문화국가’로서 협력적 문화 연방주의 원칙에 의거 문화예술정책의 수행을 지역의 관장 사항임을 명기하였고(기본법 30조) ‘분권화’, ‘보완성’과 ‘다원성’의 원칙을 고수한다. 16개 지방정부는 각 지역 행정에 맞게 독자적인 문화예술정책을 추진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

이처럼 영국은 정부에 대해 독립성을 갖는 예술위원회가, 독일은 문화연방주권에 따라 각 자치주가 지원할 문화의 대상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의 문화정책이 결정해야 하는 지원 대상의 문화는 누가 결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정부의 정책적 결정을 누가 해야 하느냐고 묻는 질문은 일견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정부정책의 결정은 담당 공무원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부를 ‘1.0정부’라고 부르며, 이에서 진화된 민관협력 거버넌스의 정부를 ‘2.0정부’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더 진화되어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정부를 ‘3.0정부’라고 부른다. 

박근혜 정부는 스스로 민간 주도 ‘3.0정부’를 선언해 왔으며, 집권 초반에 ‘문화융성국가’를 내세워 대통령 직속하에 ‘문화융성위원회’를 설치하고 8대 주요 사업 방향도 도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회식 정책결정은 여전히 문화 공급주의 내지는 설계주의에 입각한 것이어서 국가재원의 분배와 투입으로 인한 성과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 2012년 런던올림픽에 맞춰 개발된 런던 2층버스. 탑승자 편의와 디자인에서 전위적인 혁신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의 문화정책 목표는 ‘문화시장’ 확대여야 

2000년대 이후 독일, 영국, 일본, 미국 모두 정부의 문화정책은 ‘문화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이제 ‘창조산업’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문화의 가치 가운데 경제적 가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첫 스타트를 끊었던 독일 헬무트 콜(Helmut Kohl)은 1982년 10월 수상 취임식에서 “국가로부터 벗어나, 시장으로(weg von mehr Staat, hin zu mehr Markt)”를 역설하며, 국가의 조정 개입에서 벗어나 경제와 긴밀히 연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예술경영이 논의되었으며 운영의 독립성을 추구하고 민간 분야와의 파트너십이 중시되었다. 

문화부문에서 경제적 효과와 고용창출을 위해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에서 벗어나 민간 중심의 문화경영을 바탕으로 오락, 영화, 서적, 오페라, 교향악, 문화예술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산업이 육성되었다. 1996년 킨켈(Klaus Kinkel) 외무장관은 문화예술정책에 경영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하며 대외정책에서 독일을 경제력의 상징체로 표현하고자 “주식회사 독일(Unternehmen Deutschland)”이란 표어를 사용했다. 

그는 독일의 수출을 증진하고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로 문화예술정책을 인식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문화예술정책에서 독일의 정체성을 기업의 상표와 같이 새롭게 광고하는 방안들이 설계되었다. 즉, 문화예술정책은 산업이라는 차원에서 경제적 기능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교역 증진의 기능을 내포하고 있는 예술경영의 개념으로 확대된 것이다. 

영국은 1998년 신노동당 정권의 Creative Britain이라는 슬로건으로부터 문화예술의 시장지향적 산업화가 시작되었으며, IT와 예술이 융합된 산업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영국의 창조산업은 2008년부터 2014년 현재까지 동기간 영국의 경제 성장률보다 3배가 웃도는 성장률을 보였으며 7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영국의 이러한 창조산업의 성공은 미국의 Creative America(2000)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文化創意産業(2005) 등 후발국가에서도 이어졌다. 

영국과 독일의 창조산업의 특성은 시장, 그것도 글로벌 마켓을 지향한다는 점에 있는데, 이 정책의 기저에는 생각해 봐야 할 이론적 틀이 존재한다. 그것은 1776년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문화예술의 부가가치 생산성을 부정적으로 봤던 점이다. 아담 스미스는 예술과 종교 같은 분야는 그 생산된 부가가치가 저축을 통해 자본으로 축적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술과 종교는 한 나라에서 생산된 부에 의해 부양되어 소비되기 때문에 그 나라의 자원이 지나치게 이러한 부분에 투자되면 생산적 자본은 감소한다고 봤다. 아담 스미스의 관점을 차용한다면, 한 나라의 문화로 생산되는 부는 다른 나라의 생산물과 교환될 때 온전한 부가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즉 내수를 겨냥한 문화예술의 생산물은 그 나라의 부를 창출하지 못하며 저축되어 자본이 될 수 있는 어떤 생산물과 역외로부터 교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결국 한 국가의 문화적 경쟁력이 상품의 수출 경쟁력과 결합되어야 진정한 부를 창출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러한 점에서 기업들이 한국 문화의 국제적 위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적 목표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명확해진다. 정부는 문화를 공공재로 여겨서 민주적으로 배급하는 것이 정책의 목표가 아니라, 국가의 브랜드를 높이고 해외에 한국 문화의 우수함을 알려서 수출상품의 매력도를 높이는 것이 1차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기업의 한국 문화 융성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결국 문화의 경제적 가치를 위해 정부의 정책 과제는 기업에게 어떻게 한국 문화의 홍보에 참여하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느냐가 된다. 

사회통합을 원한다면 국가는 주류문화 확립에 투자해야 

문화는 경제적 가치 외에 사회적 가치로서 사회통합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따라서 정부의 문화정책은 대한민국 주류문화 확립에 정치적 결단성을 가져야 한다. 다만 이러한 부분은 정부 공무원들이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고 이로부터 민관협력의 거버넌스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상기에서 언급한 문제, 누가 지원의 내용을 결정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된다. 

이러한 부분의 결정은 모든 공공문화 정책에서 통용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대한민국 헌정적 가치에 위배되는 문화적 내용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어야 하며,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문화 콘텐츠도 공적 지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 담당 부처에는 지원의 내용을 최종 심의하는 독립된 민간위원회가 존재해야 한다.

동시에 프레임을 짜놓고 공모를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기본 방향만을 열어둔 채, 민간 문화단체나 시민들이 이에 접근해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즉 민간이 주도하고, 민간이 심의하는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되, 그 방향이 주류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열린 공론의 장을 문화 담당 부처는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문화관광체육부 내에 다양한 가치와 이념을 가진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시민포럼이 조직화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포럼을 통해 문화정책의 공공성 등에 대한 토론과 방향성 모색이 이뤄져야 하며, 여기에서 주장의 보편성에 기꺼이 복종하는 공감이 이뤄지고, 그러한 공감의 바탕에서 주류문화의 가치가 수렴되는 문화 콘텐츠가 발굴되고 지원되어야 한다.

공공성이란 다수의 주장에 의해 결정되는 내용이 아니라, 그 주장에 보편성과 일반성의 규범이 담지되어야 비로소 공공성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정책의 시민적 의견 수렴은 지나치게 특정 이념의 목소리에 끌려가는 경향이 있으며, 그 이유가 문화계에 다수의 의견이라는 점으로 변명되면 안 된다.

단 한 사람의 주장이라도 그 주장에 보편성의 규범이 있다면 다수는 그 한 사람의 주장을 경청하고 따라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공공의 원리가 된다. 그러한 원리가 통용되지 않기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터무니없는 다이빙벨 상영과 같은 문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가장 좋은 문화정책은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것 

문화는 삶의 총체적 양식이라는 주장과, 문화란 인간의 정신활동으로 이룩한 가치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이 아니라면, 우리는 문화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정신적 산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한 나라의 주류문화는 그 나라 국민들의 세계관과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국가가 문화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건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는 공공선(公共善)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의 행위는 자의적이어서는 안 되며 언제나 정당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정당성이란 실정법적 규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라는 정치질서가 만장일치로 동의한 주류적 가치를 포함한다. 즉 국가란 죽은 자들과 산 자, 그리고 태어날 자들을 포함한 국민들의 공적 계약의 산물이며, 그러한 국가는 헌정적 가치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고 있기에, 정부의 그 어떤 문화정책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좋은 문화정책이란, 국민 스스로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의 문화활동을 선택해 즐기는 것이며 국가는 여기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국가가 사회통합의 필요로, 또 국가의 브랜드를 통해서 교역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자 한다면 이는 그 목적하는 바에 맞는 수단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론의 장이 있어야 하며, 문화관광체육부라는 부처는 ‘무엇이 공공선에 이바지하는 문화인가’에 대한 열린 시민들의 토론장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정부란 그러한 문제로 고민해야 하는 존재이지, 그런 것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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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2016-12-05 17:43:07
아주 유용한 기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