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나치의 광장 민주주의를 어떻게 극복했나
독일은 나치의 광장 민주주의를 어떻게 극복했나
  • 박상봉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2.22 08:41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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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분단국 서독의 법치주의 보루 연방헌법재판소와 헌법수호청의 교훈

오스카 그뢰닝(95세), 나치 연루범죄가 드러나 2015년 4년 형을 선고받은 나치 부역자였다. 그는 아우슈비츠 나치 수용소 내 회계관리인으로 일하며 홀로코스트에 일조했던 인물이다. 12월 초 독일 연방대법원은 그뢰닝의 4년 형을 확정했다.

▲ 박상봉 독일통일정보연구소 대표·미래한국 편집위원

에파 모제스 코어(82세), 1944년 10세의 나이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생체실험을 비롯해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극적으로 생존한 할머니다. 가족은 모두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 직후 에파가 그뢰닝의 손을 잡는 사진이 언론에 게재되었다. 

나치 히틀러의 광장 

독일 법정은 단호했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따뜻했다. 비록 70여 년이 지났지만 나치 범죄행위에 대한 관용은 없다는 법정의 판결을 존중한다. 하지만 법 집행에는 관용을 보일 만큼 성숙해진 독일 민주주의도 부럽다. 죄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지만 죄인은 배려하는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나치 정권은 독일의 광장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최악의 작품이다. 1919년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최초로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고 복지제도를 갖춘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체제였다. 대통령제와 의회내각제의 혼합 형태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사민당의 대부 프리드리히 에버트였다. 에버트 총리는 1925년 임기 동안 공화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1929년 뉴욕 증시가 폭락하며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졌다. ‘검은 목요일’로 유발된 세계 경제 위기는 곧바로 독일 경제에 치명타를 날렸다. 해외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자는 급등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파산했고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쳤다. 산업생산이 급감했다. 철강생산은 한 해 65%나 급감하는 상황이었다. 사회복지비용의 급증했고 은행, 보험 등 금융기관이 도산했다. 대중은 분노와 좌절에 빠졌다. 

불법시위와 집회, 정치적 활동이 난무하며 의회 시스템마저 붕괴했다. 의회는 나치제국당과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히틀러의 등장이 예고되었다. 히틀러는 대중을 매료시켰고 대중은 히틀러에게서 희망을 봤다.

이성은 마비되었고 광장의 소리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유대인은 물론 장애인, 국적 없이 떠도는 집시족들이 광장의 박수 속에서 사라져갔다. 유대인 600만, 장애인 수십만 명, 100만의 집시족 들이 죽어나갔다. 

무엇보다도 고리대금업 등 장사에 능했던 유대인들이 광장의 먹잇감이 되었다.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센징을 살해하던 수법 그대로였다. 홀로코스트! 독일은 지금도 나치 시대 지식인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로부터 법치주의의 소중함을 배웠다. 이 교훈이 1949년 기본법에 담겨 있다. 기본법 20조는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과 함께 “국민은 선거를 통해 행정, 입법, 사법 등 삼권을 창출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정하고 있다. 국민이 권력을 삼권에 위임한 것이다. 

“조중동이 신문이면 우리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 

최근 광화문 광장에 대중이 몰려들고 있다. 광장에는 선동 문구가 넘쳐난다. “민족의 반역자 박근혜를 처단하라”며 단두대도 등장했다. “이석기를 석방하라”, “박근혜는 하야하라”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고등학생들도 등장했다. “박근혜를 물리치고 혁명 정부를 세우자”는 현수막이 들려 있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김무성, 이정현, 김기춘의 형상을 한 공을 만들어 밟고 걷어차며 기뻐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입을 강제로 벌려 사약을 먹게 하는 모습, 수의를 입은 대통령의 모습도 눈에 띈다. 광장의 반란이다. 

언론이 가관이다. 히틀러의 나팔수인 괴벨스를 뺨친다. 선전선동의 달인 괴벨스에게 대중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맞다. 깨어 있지 못한 대중은 권력의 밥이다. 

광우병 조작으로 이명박 정권을 무릎 꿇린 언론이 또 다시 그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편 TV는 광화문 시위를 생중계하다 시피하고 있다. 조중동은 1면 톱으로 “100만, 200만 촛불 민심”이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특종 경쟁을 하며 확인되지 않을 소문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라는 주최 측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는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최순실 작품이라고 해도 그대로 받아 적을 판이다. 

언론은 국제적으로도 망신을 떤다. 트럼프의 연설이라는 “여성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의 여성 대통령을 보라”는 코미디는 물론 “주한 미국대사관도 촛불 시위 때 소등했다”는 보도, 주한 미국대사관의 “최태민은 한국판 라스푸틴” 보도 모두 허위다. 미용 2000억, 정유라 박근혜 자녀설, 최순덕 성심여고 동창설 등등 막장 드라마 보다 재밌다. 한 독자는 “조중동이 신문이면 우리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라고 조롱하고 있다.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오바마의 기자회견 풍경은 더 가관이다. 우리 언론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개최국에 감사해 한국 기자들에게 우선권을 주고 7차례나 질문을 요청을 했지만 침묵만 흘렀다.

심지어 오바마는 통역이 있으니 한국어로 질문해도 좋다고 까지 했다. 그래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중국 기자가 나섰다. 오바마가 제지하자 한국 기자에게 질문권을 위임하란다. 치욕이다. 

이런 언론이 광우병 사태, 문창극 낙마, 사드 조작에 이어 최순실 조작에 나서고 있다. 살인범을 현장에서 잡아도 재판 전에는 처벌하지 못할진대 언론이 조작해낸 광장의 요구라며 대통령을 파면하려 한다. 인민재판이다. ‘카더라’ 언론, 기레기들의 반란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이라 해도 법적 절차에 따라 책임을 묻고 범죄행위가 있다면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하라는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 대중을 불러 모으는 일의 주체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문재인, 안철수, 박지원, 박원순, 이재명 등 야당 정치인들이 있다. 투쟁본부는 민노총의 주도 하에 노동자 연대, 민권연대, 범민련, 청년좌파,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53개 단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통진당 해산을 반대했던 단체와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단체도 포함되어 있다. 

투쟁본부가 조작한 100만, 200만 명의 진실은 무엇일까?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에서 남대문까지 면적이 대략 9만2000평방미터다. 여기에는 청계광장, 시청광장도 포함되어 있다. 넉넉하게 잡아 1평방미터에 3명이 들어간다 해도 그 숫자는 27만여 명에 불과하다. 미 국방부가 위성사진을 통해 집계해보니 11만3374명이다. 대한민국 언론은 이 숫자와 함께 그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 히틀러는 대중을 매료시켰고 대중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광장의 함성과 박수 속에서 유대인 600만 명고 장애인 수십만 명, 국적 없이 떠돌던 100만 명의 집시족들이 죽어갔다. 독일은 이렇게 홀로코스트로부터 법치주의의 소중함을 배웠다.

분단국의 운명 

“건전한 사회는 보수와 진보, 양날개로 날아야 한다.” 옳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분단된 나라에게는 ‘독’이다. 진보와 종북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 말은 종북세력의 방패막이요 온상이다. 통진당은 민주당을 숙주로 정치권에 입성했다. 통진당원이 더불어민주당의 도움으로 20대 국회에 무소속으로 진출한 것도 사실이다. 

서독과 베트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국이었다.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였으며 동독이나 월맹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하지만 독일은 서독의 주도 하에 자유민주통일을 이뤘고 베트남은 적화통일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분단국 베트남의 민주주의가 헌법을 수호할 의지와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서독의 차이다. 

베트남의 여린 민주주의는 헌법을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킬 만한 역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서독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헌재와 헌법수호청이 나섰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74년 서독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평화무드에 빠져 있었다.

안보는 뒷전이었고 ‘접근을 통한 변화’가 대동독정책의 주류였다. 이런 가운데 헌법수호청과 검찰은 총리실에서 암약하던 귄터 기욤을 체포했다. 브란트는 안보 무능을 인정하며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49년 독일 분단 직후 서독, 극우 및 극좌파 정당이 출범하며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특히 1949년 10월 2일 창당한 사회주의제국당(SRP)은 네오나치를 표방하며 나치의 영광을 재연하려 안간힘을 다했다. 제국당은 나치당원들을 영입하며 당시 자민당 당원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4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기도 했다. 히틀러 정권 때 청소년기를 겪었던 자들이었다. 

제국당의 불법은 헌법수호청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연방헌재는 1952년 사회주의제국당을 해산시켰다. 마찬가지로 헌법재판소는 1956년 독일공산당(KPD)에게 위헌 판결을 내리고 정당해산을 명령했다. 헌재는 2016년 이 시점에도 독일민족민주당(NPD)에 대해 위헌 여부를 심사하고 있다. 이러니 비록 좌파당이라는 정당이 등장해도 초법적, 반헌법적 활동을 절대로 하지 못한다. 

서독은 통일 전 동독과 6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1, 2차 정상회담은 1970년 브란트 총리 하에서 동독 에어푸르트와 서독 카셀에서 열렸다. 3차 정상회담은 슈미트 총리가 동베를린을 방문해 호네커 총서기를 만났고 4차 정상회담은 호네커가 본을 방문해 콜 총리와 개최한 회담이었다.

1~4차까지의 회담은 예외 없이 분단 이슈가 의제가 되었다. 국경지대에 설치한 기관단총 철거, 양독 시민들의 상호 방문 확대, 베를린-서독 간 동행협정, 노약자 및 만성질환자의 서독 이주, 정치범 석방, 재야인사들의 서독 이주, 청소년 상호 교류 및 방문, 저널리스트 상호국 주재, 방송 교류 등과 같은 이슈들이 합의되었다. 

5차 회담은 1989년 12월 19일 동독 급변사태 직후 콜 총리가 드레스덴을 방문하며 이뤄졌다. 당시 호네커가 당에서 축출되고 후임 크렌츠에 의해 임용된 모드로프 총리의 제안으로 드레스덴 연설 직후 성사되었다. 이 회담은 최초로 의제 속에 통일 문제가 포함된 회담이었다. 그리고 6차 회담은 동독 내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드메지어 총리와의 회담으로 그야말로 통일협상이었다. 

우리의 1차, 2차 정상회담이 ‘통일’을 의제로 다루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 ‘NLL’ 등 초헌법적 사안을 논의했던 것과 대비된다. 

에곤 바(Egon Bahr)의 추종자 

에곤 바는 동방정책의 설계자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핵심 브레인이다. 그는 동서독 이질적 체제 간 기능주의적 접근을 시도한 전략가이다. 에곤 바는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rung)를 모토로 내걸고 동독과의 관계 개선과 교류 협력을 강화해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했다. 동독의 호응도 대단했다.

하지만 헌법수호청이 고정간첩으로 암약하고 있던 귄터 기욤을 체포했다. 국민은 안보에 무능한 브란트 정권을 거부하게 되었고 결국 브란트는 1974년 총리직을 사퇴해야 했다. 에곤 바의 설계 도면에는 없었던 일이다. 

브란트의 후임에 같은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선출되었다. 1974년 선거에서 득표율 2위를 차지했던 사민당(SPD)이 1위인 기민련(CDU)을 제치고 제3당이었던 자민당(FDP)과 연정에 성공해 총리에 올랐다. 슈미트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이어갔지만 1978년 소련이 동독에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자 미국의 핵미사일 퍼싱 II를 서독에 배치하는 공세를 펼쳤다.

당시 유럽에는 평화운동이 대세였으며 서독에도 30만 명의 평화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에곤 바는 슈미트가 “동독을 협박하는 전쟁 상황”을 조장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99년 5월 17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도 슈미트의 결정은 “왜곡된 사고의 상징”(ein Symbol der Perversion des Denkens)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에곤 바의 실체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드러났다. 빌리 브란트는 장벽이 붕괴되던 날 발터 몸퍼(Walter Momper) 베를린 시장의 전화를 받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베를린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에곤 바는 언론의 질문에 당일 브란트와 동행했다고 답변을 했지만 거짓이었다. 

독일의 주요 일간지 디 벨트가 2014년 “Wo war Egon Bahr nach dem Fall der Berliner Mauer?”(에곤 바는 장벽 붕괴 직후 어디에 있었나?)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에곤 바가 1989년 인터뷰에서 “브란트와 함께 베를린행 비행 중”이었다고 답변했던 사실이 거짓말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브란트와 동행했던 사람들의 증언도 실렸다. 에곤 바가 베를린 장벽 붕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브란트를 배신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민당 내 극좌파인 오스카 라퐁텐 편에 붙어 통일에 반기를 들었다. 

몸퍼의 전화를 받은 브란트는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하며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Jetzt wachst zusammen, was zusammen gehort”(함께 태어난 것이 이제 함께 자라게 되었다)라는 명언은 그 때 남긴 것이다. 

김영희 중앙일보 기자는 에곤 바의 열렬한 추종자이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했을 때도 ‘핵동결과 평화협정의 교환’이 해답이라고 썼던 인물이다. 김 기자는 그의 책 <베를린 장벽의 서사>에서 에곤 바의 이런 행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언어 장벽 때문에 관련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거나 그의 성향으로 보아 이런 자료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책에는 에곤 바의 동방정책을 맹신하는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19대 국회 외통위 위원장을 지낸 나경원 의원도 에곤 바의 열렬한 팬이다. 나 의원은 ‘접근을 통한 변화’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며 2015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과 5.24 조치를 뛰어넘는 전면적인 경제협력을 해야”한다고 밝혔다.

과연 이들이 에곤 바의 이런 행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런 발언을 했는지 의아하다. 그리고 5차 핵실험과 다종의 미사일을 발사하며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지금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다. 에곤 바야말로 머리로는 통일을 원했지만 가슴으로는 동독에 깊은 애정을 갖은 인물이다. 

대한민국은 분단국이다. 주요 이슈들이 북한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헌법을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회복하는 일이 그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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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마라 2016-12-27 07:04:28
박상봉 씨가 이 시점에 첩자들에 대한 글 쓴 걸 보면, 현 정권이 뭔 짓을 꾸미는 중인 징조같다.

백남기 씨 유족에게 사과 대신 살인죄로 고소했단다. 보상금 때문이라 할 거다. 최근 한 탈북자 간첩 누명 씌워 유죄 줬다. 뭐가 겁나서 변호사 면접도 내내 거절해서 못만났대.

나도 종북은 질색이지만, 조만간 무고한 대권 후보나 핵심 인물을 잡아 종북으로 몰고, 위기 타개하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려는 거 아닌가 우려한다.

하지 마라 2016-12-23 16:32:24
지금 나라를 이 지경으로 위기에 빠뜨리 건, 좌빨이 아니라, 박통과 친박 놈들이다. 황교안은 촛불 든 주인인 국민들의 대행이 아니라, 박통 보좌, 대행 중이란다. 청문회서 대 기업 회장들을 피해자들 취급했다. 이들은 강요받은 게 아니라, 정경유착한 범죄자들이다. 병든 우파 정권에 돈 대주며, 소수 살찌는 체재를 유지하려고.

하지 마라 2016-12-23 16:31:05
온갖 종북 단체들, 성추행자 윤창중, 통진당 이석기 무리들이 지들 세상인 줄 알고 살판 났다. 하지만, 새누리당 하는 꼴들을 봐라. 박통은 경제가 엉망진창이고, 공무원들도 손 놓고 일 안해도, 남 몰라라 지 한 몸 청와대에 보존 중이고, 오리발로 개긴다. 빨갱이는 정부의 부패를 먹고 자란다.

하지 마라 2016-12-23 15:33:27
'정윤회 문건' 보도로 해임된 조한규 전 사장,'항명 사퇴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 사망, 문건 유출 혐의 위집어쓰고 자살한 최 경위 얘기 몰라 ? 조중동 세월호 기사 통제한 거 몰라 ? 인터넷 신문들이 이구동성으로 유신 때도 이런 통제없었다고 말하는 거 몰라 ? 현 정권 들추거나 까면 기자는 물론 국회 위원, 시장까지도 사찰, 고소 난무하는 거 몰라 ? 다이빙 벨은 봤니 ?

김종은 2016-12-23 00:18:34
그들이 종북 프레임을 포기한다면 나 또한 지지할 의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이 지향하는 공산주의를 (정확히 말하면 김씨세습왕조지만) 유지하고 있는 유일무일한 국가이니!!! 이번 정국은 대한민국 주사파30만과 간첩 5만명의 합작이다. 최순실이 문제가 아니라 검찰+언론+국회+노조가 개혁되어야할 대상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