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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과 제2의 IMF위기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l승인2017.01.10l수정2017.01.10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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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위기의 시대에는 징후가 등장한다. 그런 징후를 놓쳤던 임진왜란은 정유재란으로 이어졌고 IMF사태는 다시 제2의 경제위기로 닥칠 수 있다.

1597년은 정유년(丁酉年)이었다. 2017 정유년으로부터 420년 전이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정유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 제국과 협상이 결렬되자, 14만의 왜군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해 왔다.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 노량해전을 그린 병풍

전쟁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참혹했다. 전쟁 1년 만의 참화가 임진왜란 5년 간의 피해보다 컸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히데요시의 점령지 전략이 이전의 이주책과는 달리, 초토화 작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농경지의 3분의 1이 유실되고 조선 관군 7만여 명, 명군 3만여 명이 전사했다. 민간인 사망은 15만 명에 달했다. 왜군은 노인이든 부녀자든, 아이든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조선 민중들이 일본인들과는 달리, 점령자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는 점을 의식한 히데요시의 전략적 변경이었다.

하지만 조정과 신료들은 정유재란의 발발 이전 전쟁의 소강기에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정치는 붕당으로 분열될 대로 분열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그런 조정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첨예화된 때도 바로 이 시기였는데,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의 대패로 조선의 국운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렸다.

정유재란에 앞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도 이미 조선의 위기 상황은 예고되어 있었다. 조정은 훈구와 사림 간에 치열한 정쟁(政爭)에 놓여 있었고 붕당정치는 인재들의 등용을 가로막으며 조선의 국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오랜 평화의 세월은 국방에 대한 안일함과 타락을 가져왔다. 그 즈음 조선에서 3포 왜란과 사량진 왜란 등 여러 차례 왜구의 소란이 일어났음에도 조정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가 나름대로 왜구라는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 문제를 의논하는 비변사를 설치했다. 하지만 정작 비변사는 왜구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율곡 이이의 국방개혁안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선조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임진왜란과 IMF의 닮음꼴

20년 전인 1997년, 한국은 IMF구제금융사태를 맞았다. 대한민국 경제를 강타했던 IMF 금융위기를 왜군의 침략으로 본다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IMF사태와 놀라울 정도로 그 유사성을 갖고 있다. 안일한 세계화 대응과 누적된 한국 경제의 비효율, 그리고 구조개혁의 유보가 빚은 참사라는 점에서 그렇고, 이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던 재계의 목소리를 무시했던 정부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 1997년 IMF구제금융관리하에 들어가면서 전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다. / 연합

1997년 4월, 최종현 SK 회장은 “공무원 숫자를 현재의 10분의 1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해서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율곡 이이의 10만양병설이 있었다면, 97년 IMF사태가 오기 전, 재계를 대표했던 최종현 회장은 ‘90% 공무원 감축설’을 제기했던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누진 과세 폐지 △각종 사회보험의 민영화 △정치 다수결원칙의 재검토와 같은 개혁안을 주문했다. 한마디로 규제개혁으로 ‘작은 정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화를 돋웠고 SK는 세무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해 10월, 폐암으로 와병 중이던 최종현 회장은 산소 호흡기를 맨 채, 청와대를 예방했다. 가쁜 숨을 몰아쉰 최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을 긴급 제안했다. “비상조치를 늦추면 나라 경제가 큰일 난다”고 강조했다. 금리인하, 5년간 임금동결, 환율 인상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별 말이 없었다. 최 회장은 그해 11월 다시금 산소통을 매고 청와대를 재차 방문했다.

대통령은 경청하지 않았다. 그 후 1개월 후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정부가 규제개혁과 재정긴축, 개방화, 자유화의 경제개혁의 의지를 보였다면 IMF외환위기는 오지 않을 수 있었다. 위기는 한국 경제 기초 여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제 신인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는 와중에 먼저 개방화와 자유화를 추진했던 필리핀이 외환위기를 비켜간 것은 외국 투자자들에게 그만큼 신뢰를 줬기 때문이었다. 대마불사라는 재벌 기업들이 IMF사태 기간 중에 절반가량 쓰러졌고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통계청의 ‘98년2월고용동향보고’에 따르면 당시 실업자는 123만5000명이었다. 사상 최악의 사태였다. 은행권 금리가 25%대로 오르자 저축은행과 같은 제2금융권 금리는 30~40%에 달했다. 가계부채로 길거리에 나 앉은 가족들의 동반자살 이야기는 더 이상 충격적인 소식이 아니었다.

알짜 기업들이 흑자부도를 내면서 외국기업들에 헐값으로 넘어갔다. 공영방송 KBS는 그해 IMF특집으로 조흥은행의 파산과 대량해고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당시만 해도 공공기관으로 여겨졌던 시중은행의 파산은 국민들에게는 국가의 파산처럼 느껴졌다. 절망이 절망을 낳았다.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은 대한민국 IMF사태의 슬픈 상황을 설명하는 키워드였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순왜(順倭)라는 이상한 이름의 왜적도 등장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에 협력한 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기에 조선 정부의 무능과 부당한 대우, 차별과 학정에 반항한 평민들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던 이들이었으나 순왜들 가운데는 임진왜란 시기에 의병으로 활동하던 이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관존민비(官尊民卑) 조선사회에서 그런 의로운 백성들에게 돌아갈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왜군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물자를 공급하거나 심지어는 왜군에 합세해 조선 관군과 싸웠다.

자본유치를 ‘신자유주의’로 매도

사천해전에서 왜군 선단에서 조총을 쏘는 소총수 중에 조선인도 있었다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이들 순왜 중에는 더 대담한 이들도 있었다. 임진왜란 기에 왕도(王都) 한양이 왜군에 점령되자 이를 피해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병력을 모으기 위해 함경도로 갔으나 민가를 약탈하고 주민을 살해하는 행위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행태에 불만을 품은 국경인, 김수량, 이언우, 함인수, 정석수, 전언국이 조선 왕자 일행을 억류하고 살해한 관리들의 시신을 왜군에 넘겨 줬다. 그 대가로 이들은 회령지역을 통치하다가 암살당하거나 조선 군대의 개선(凱旋)으로 참수당하기도 했다. 임진, 정유 재란의 이러한 순왜 사건들은 20년 전 IMF사태를 맞은 대한민국의 기억 속에서 어떤 상황들을 끄집어낸다.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왜군들이었다. 기업들이 필사적으로 시장상황에 적응하고 외자를 유치하고 구조조정을 하는 것을 정치권과 노동계는 ‘신자유주의에 부역한다’는 말로 폄하했다. 그들은 기업의 시장논리를 반체제적, 반공동체적 악덕으로 간주했다.

▲ 1997년 IMF구제금융관리하에 들어가면서 전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다. / 연합

1999년 12월 13일자 한겨레신문의 헤드라인의 제목은 ‘신자유주의는 가장 무책임한 자본주의 형태’였다. 이튿날 제목은 ‘신자유주의 채찍에서 벗어나자’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기업들의 생존적 경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용어였다. 신자유주의는 1940년대 미국을 비롯해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 지나치게 규제와 통제 중심의 사회주의적 경제정책들이 범람하자, 그러한 정책들을 시장 지향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경제철학적 사고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왜곡해서 일컫는 말이었다. 일상적 경제활동 중에서 대형슈퍼마켓 영업제한이나 도서정가제, 단말기통신보조금 제한법과 같은 규제입법들을 기업들의 자율에 맡기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장 중심의 개혁은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의 고질적인 불경기를 극복하는 힘이었다. 그럼에도 진보의 정치권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노조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민영화, 세계화’라는 프레임만을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는 민영화나 세계화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원리를 중심으로 사고하자는 것이며, 그렇기에 공기업이 민간기업보다 더 높은 효율성을 달성하고 있다면 민영화를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오도된 신자유주의는 국제자본에 대해서도 조선침략 왜군과 같은 이미지를 부여했다. 좌파 정치권과 노조는 국제자본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데 아무런 주저함을 가지지 않았다. 1998년 매일경제신문은 5월 8일자 1면에서 ‘국제자본 아시아로 온다’라는 머리기사를 내면서 경제 활력 기대를 내비치더니 6월 22일에는 다시 1면 톱으로 ‘국제자본의 횡포와 한국’이라는 기사로 부정적인 논조를 쏟아냈다.

오늘날 모든 선진 국가들은 국제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정부가 발 벗고 나선다. 그 대표적인 나라는 역시 중국이며 중국은 사회주의를 여전히 국가 이념으로 고수하는 나라다. IMF기의 한국 지식인들은 마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의 국수적인 조선 유림들처럼 명(明)과 왜(倭)라는 외세의 정체성에 대해 한편으로는 사대(事大)로, 한편으로는 폄훼(貶毁)로 분열되어 있었다. 당연히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과 노동계는 국제자본을 유치하려는 기업들과 다국적기업들에 대해서 마치 왜군에 투항하고 그들에게 협조하는 순왜(順倭)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 1997년 IMF구제금융관리하에 들어가면서 전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다. / 연합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IMF기에 이들 국제자본과 다국적기업들은 또 다른 왜군, 즉 항왜(降倭)라 불리던 이들에 가까웠다. ‘항왜’란 순왜와는 달리, 왜군 중에 조선군의 편에 섰던 이들을 말했다. 이들은 조선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항왜는 전쟁 당시 조선군의 전력 향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병자호란 때 청군을 막는 데 활약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여여문(呂汝文), 김충선, 김성인, 요질기(要叱其), 염지(念之), 사고여무(沙古汝武), 첨지(僉知), 평구로(平仇老), 산여문(山如文), 노고여문, 기오질기, 오카모도 에치고(岡本越後), 마고토키로(孫時老), 노부토키로(延時老) 등과 같은 항왜의 귀화명 또는 차자(借字)명 등이 등장한다. 항왜 중 전(田)씨, 국(菊)씨, 심(沈)씨들은 오늘날 완전히 귀화된 한국인들의 조상이다.

이처럼 IMF사태기에 들어온 해외자본도 국내 자본과 동일한 경제효과를 가져왔다. 1998년 IMF기간 중에 LG그룹은 미 석유그룹 칼텍스로부터 5억 달러를 유치해 LG칼텍스를 통해 투자와 고용을 늘렸고 대우자동차는 GM과 투자 제휴를 맺었다.

국민은행이 골드만삭스로부터 5억달러를 유치하고 한빛금융이 국제자본시장에서 10억 달러를 유치하면서 우리 경제의 신인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국내 자본이든 국제자본이든, 자본투자의 증대는 고용을 늘리고 생산과 교역을 늘렸다. 다만 이런 사실을 깨닫는 데 대한민국은 오래 걸려야 했고, 사실 지금에도 온전히 깨닫고 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경제를 구할 영웅은 있는가

정유재란에서 가장 괄목했던 사건은 역시 이순신의 명량해전이었다.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완패했다.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함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가까스로 육지로 탈출했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21일 조정에서는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한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아뢰었던 그 역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어떻게 승리했는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그러나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은 하나 존재한다.

이순신의 명량대첩이 조선을 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함대의 국지적 승리였을 뿐, 예기치 못한 패배로 당황 속에 철수했던 왜의 수군은 이튿날 조선 판옥선보다 더 큰 아타카 배를 이끌고 재공격에 나서서 전라 우수영을 깨고 명량해협을 건너갔다. 이순신 함대는 그 싸움을 피했다. 이후의 역사는 한일 간에 각자 다른 해석으로 전개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 7년간의 전쟁을 끝낸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이었다.

전쟁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모두에게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조선에서는 양반제도가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명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 강고해졌고 이는 명·청 교체기에 소중화(小中華)를 부르짖다가 청의 정벌을 자초하는 병자호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명나라는 재정의 과다한 지출로 국력에 큰 손상을 입고 만주족 청에 복속되는 한 요인이 됐다. 일본은 막부가 교체되었고 조선에서 건너간 도자기 기술이 일본 문화의 또 다른 정수로 자리 잡았다.

420년이 지난 또 다른 정유년에 우리는 이 전쟁의 원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때도 되었다. 일본은 왜 조선정벌에 나섰던가. 그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새롭게 밝혀지는 배경에는 교역과 상업이 빚어낸 변화가 있다. 일본의 막부들은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존재였고 16세기에 이르면 상권들 간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과 교류를 단절한 명 제국, 그리고 일본과 교역을 줄여나갔던 조선이 일본의 내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동아시아 편입 욕구와 선진 문물을 수입해야 하는 지배 계층의 상황이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실제로 일본이 조선을 치면서 명 제국에 요구한 것은 통상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히데요시의 본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종전의 조건으로 중재자 명에게 ‘조선 3남도의 일본 편입’이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것이 협상을 위한 히데요시의 카드였는지, 아니면 진심이었는지 밝혀진 바 없으나 조선의 결사항전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침략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한중일간의 교역 부재 내지는 교역 감소가 일본으로서는 불만 요소였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교역이 전쟁을 줄이는 수단이라는 이치는 이 시대에도 적용되는 원리는 아니었을까.

420년 후의 정유년 2017,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지난 12월 18일, 통계청에 따르면 11월 15~29세 청년실업률은 전년 동월보다 0.1% 상승한 8.2%로, 2003년 같은 기간 8.2%를 기록한 뒤 동일한 수준으로 치솟았다. 11월 기준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8.8%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올해 들어 월별 청년실업률은 2월에 12.5%까지 올라 관련 통계가 집계된 이후 가장 높았고, 3월(11.8%), 4월(10.9%), 5월(9.7%), 9월(9.4%)에도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고학력 청년층의 실업률은 더 심각하다. 대졸 이상 청년실업률은 올해 1분기 10.7%로 관련 통계가 시작된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2분기(9.9%), 3분기(9.1%) 역대 최고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내년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2%에서 2.1%로 0.1% 하향 조정했다. 세계 경제 전망의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대내 정책의 경기부양 여력이 약화될 것을 감안한 전망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이달 초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2.4%로 전망했다. 이 모든 수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 탄핵심판과 정치 갈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우리는 2017 정유년에 420년 전의 정유재란과 같은 위기 상황을 맞을 것인가. 그 답은 현재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 모든 내우외환의 칠천량 해전의 상황에서 다시 성웅 이순신을 그려보게 된다. 국민에게 이순신처럼 아뢸 이는 없을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우리는 지금 그런 영웅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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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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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makmin 2017-01-20 13:29:37

    시진핑 중국에 삼궤구고두례(三&#36330;九叩頭禮)하는 날이 가깝네
    그리고 300년의 속국 생활의 재개되나이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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