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은 이념 정파 따라 선동 돌격대로 전락
한국 언론은 이념 정파 따라 선동 돌격대로 전락
  • 최창섭 서강대 명예교수
  • 승인 2017.04.11 14: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실을 전달할 수 있어야 바른 언론이다

순자(荀子)는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나 배를 뒤엎기도 한다’(수소이재주, 역소이복주(水(則)所以載舟, 亦(則)所以覆舟)고 갈파했지만 언론이 성난 물 노릇을 하는 것을 우리는 봤다.  대통령 탄핵은 언론이 기획하고 언론이 실행했다. 각 개별사의 의도가 정확히 무었이었는지는 의미가 없다. 결과적으로 언론은 관찰자, 전달자가 아니라 운동가적 당사자 역할을 했다.

언론은 우리 사회를 단합과 발전을 향한 힘을 규합시키기도 하나 동시에 사회를 뒤엎을 수도 있는 괴력을 가진 존재이다. ‘누가-어떻게-왜’라는 명제에 따라 위험천만한 분열과 파괴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지난 탄핵 정국은 그야말로 언론의 광란이었다.

▲ 3월 18일 공식 사임 의사를 밝힌 혹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의 Jtbc가 홍 전 회장의 정치를 돕기 위한 것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퀘도를 이탈한 언론의 대표적 케이스로 jtbc를 꼽는 이들이 많다 / 연합

온 나라가 시끄럽고 혼탁하다. 언론이 현 상황의 정치·경제·사회 의제(Agenda) 설정에 주 역할을 하고 있다. 검찰 몫도 하고 있는 듯하다. 정치판도 주무르고 있는 형국이다. 국회 탄핵의 주 메뉴판도 짜줬으니 말이다.

궤도 이탈한 한국언론의 ‘3F’ 현실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다수의 국민은 현실 이상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왕좌왕하며 언론이 전하는 내용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위임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분노의 마음을 표출하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색깔이 다른 다양한 매체가 무수한 채널을 동원해 형형색색의 형태로 매일같이 쏟아내는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fact)이고 어디까지가 소설(fiction)인지 국민을 우롱하고 기만(fake)하려는지 어지간한 촉감으로는 방향 가늠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것이 정통 뉴스보도이고 어디까지가 코미디이고 가십거리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일반 길거리 사람들(people on the street)은 남을 험담하는 가십유형에 익숙해 있고, 보통 수준의 사람들(people of average mind)은 일어난 사건 사고 및 사람들 소식에 관심을 보이고, 좀 생각이 깊은 사람들(people of great minds)은 보도된 내용을 되새김질하며 소화를 시킨다고들 한다. 과연 우리 대부분의 대중이 제대로 되새김질할 여유가 있을까.

현실적으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언론이 전한 뉴스 내용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단언적으로 하루 빨리 ‘하야’하든지 아니면 탄핵을 선택하라고 대통령을 압박하고, 국회를 압박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혐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정권 퇴진을 이미 목표처럼 정한 채 일방적으로 대다수 국민을 한 방향으로 몰이하고 있는 형국이 아니었던가?

결과적으로, 다수 언론은 우리 국민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언론을 이끌고 있는 다수 언론인의 목적이 무엇인지, 혼란을 부추기고자 하는 의도 뒤에 벌어질 가공할 미래현실을 누가 어떻게 수습해 나갈 것인지, ‘박근혜 대통령 죽이기’ 라는 현실을 넘어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가공할 상황에서 ‘post 박근혜’ 시대를 어떻게 국민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언론이 운동가적 당사자로 나서는 한국

지난 정국에서 언론은 심판자였고, 조작세력이었고, 선동자 역할을 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나선 무리를 일방적으로 정의의 세력으로 설정했고, 얼마의 숫자가 군집을 이뤘는가에 대해서는 무한대의 부풀리기와 미화로 일관했다. 각 언론사가 의도하는 목표를 군중 숫자에 묻어 정당화하는 전략을 동원했다.

결국 태극기 집회 참가 행사는 규모가 얼마나 커질수록 자신들의 의도를 방해하는 반동세력으로 몰았고, 촛불은 민주주의적 정의를 실천하는 십자군 행렬로 묘사했다. 더구나 겉으로 드러난 민심 뒤에 가려진 아니 언론의 입장으로서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을 법한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의 소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했다. 일반 시청자나 독자들은 어느 집계가 옳은 것인지, 사실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채로 여론 조작에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실 확인이 모두를 위한 기본 자료이어야 한다. 정치인이든 일반 국민이든 청와대 당사자이든 모두가 정확한 사실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를 헤쳐가야 하건만 대통령 탄핵은 누군가에 의해 사전 기획된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여론을 조작하고 압박하는 극도로 비정상적인 현상을 경험해야 했다. 여론이 파도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누군가 휘저은 물결을 여론이라고 위장한 것이다.

우리 미래는 모두의 것이다. 정치판을 이끌고 있는 소수 층의 것이 아니다. 함께 정확한 정보를 공유하며 더불어 슬기로운 내일을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 이 시대를 꿰뚫는 혜안으로 ‘사실 실종 시대’(post-fact society)라고 정의하고 있다.

오늘의 언론 현상이야말로 바로 사실 실종 시대를 입증이라도 해주고 있듯 왜곡, 오도, 호도, 과장, 편파, 일방적 질타 등으로 혹세무민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때는 그래도 우리 언론의 사실 보도라 할지라도 그게 과연 진실 보도인가 하며 질 높은 질타를 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 진실 보도는 까만 옛 얘기로 언제적 얘기인지 뒤로 한 채 그나마 언론의 기본이던 사실 보도도 사라진 온통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수준도 안 되는 흑색언론(black journalism)이 거짓과 선동을 당연한 듯 도배해가는 비참한 현실에 온통 물들어 있다고 본다.

‘바른 언론’은 바로 현실 상황에 대한 철저한 사회감시기능(Social Surveillance) 실현 여부를 점검하는 파수꾼(media watch) 역할에서부터 시작한다. 미디어는 마땅히 개인정의와 사회정의를 미디어 콘텐츠 속에 녹여 넣도록 격려하는 견인차 역할의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오늘의 언론 현실은 분명 바른 언론과는 거리가 먼 사실 왜곡과 수용자 체험의 식민화(colonization of experiences), 및 의사(擬似) 환경 조성 등을 통해 현실과 동떨어진 변질, 변색, 변음된 신화적인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혹평을 즐기고 있는 듯도 싶다.

아울러 미디어의 단골 고정 메뉴와도 같은 갈등, 섹스, 폭력, 고정관념, 단순화, 비정상성 등을 통해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탈(脫)신화(de-myth)와 탈식민화가 그 답이라 단언할 수도 있다.

언론의 사실 불감증, 사회에도 그대로 반영

거듭 주목할 현실은 바로 우리가 ‘사실 실종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3F’(fact vs faith vs fake) 연속선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이다. 진실 보도는 전설이 되어버린 지 오래고, 사실(fact)은 실종 중으로, 수용자 국민의 믿음(faith)까지 없어진 공황 상태에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진실 보도와 사실 보도는 이미 오래 전 실종되면서, 사실은 사라지고 ‘가짜’ 숭배(the cult of ‘fake’)가 판치는 시대에, 전문가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대신 가짜가 횡행하면서, 편견과 조작이라는 색안경 바이러스(virus) 속에 불신 풍조 만연한 꼼수의 시대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이다. 조직화된 소수의 사기와 조작이 판치는 틈에 분산된 다수의 침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메시지보다는 누가 메시지를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메시지와 메신저’의 대결 시대에 누가 승리자인가 하면 바로 내용(message)이 아닌 바이러스 전달자(색깔론자. messenger)가 득세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다수의 언론이 스스로 악성 바이러스 색깔론자로 자임하면서 언론의 정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비근한 예로, 한 메이저급 언론사 대표가 공공연하게 성급한 선정 보도와 확인되지도 않은 용의단계나 혐의 사실도 일단 크게 보도해놓고 보는 침소봉대와 만성적인 속보주의가 이 나라 저널리즘을 온통 오염시키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다는 현실. 사후에라도 잘못된 보도를 시정하려는 노력보다 ‘아니면 그만이지’ 식으로 팽대해 있는 언론가의 무책임 의식은 마땅히 단죄되어야 하건만 언론(사) 간의 상호 비평 총대를 누가 메려 하겠는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답은 역시 바로 언론인 스스로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언론민주 선진국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간단 명료하다. 첫째도 정확성(First, Accuracy) 둘째도 정확성(Second, Accuracy). 셋째도 정확성(Third, Accuracy)이다. 어떤 경우도 사실에 기초한 정확 보도가 생명이라고 유치원생 가르침처럼 명시하고 있다. 언론의 기본도 정립되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미래를 향한 언론의 정당한 역할 기대는 그저 뜬구름 잡기 식으로 요원할 뿐 아니겠는지.

역사는 되풀이된다 하지 않았든가.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대 거짓과 선동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던 군중 선동가(Demagogue)와 로마 멸망을 재촉시킨 소피스트(Sophists) 현대판이 곧 현란한 거짓을 사실로 둔갑시켜 대한민국 군중을 우롱하는 신생 ‘꼼수와 구라’들의 시대를 염려케 만든 지 오래이건만…

총체적인 바른 미디어를 향한 도전과 과제는 ‘single vision’에서 ‘multiple vision’으로, ‘tunnel view’에서 ‘wide angle vision’으로, 몰가치관에서 가치관 확립을 향해 ‘너덜리스트’의 ‘너절리즘’에서 휴머니즘으로, 배타에서 이웃과 함께 더불어 가는 융합을 향한 나눔(sharing)의 장(場)으로 대전환을 이뤄나가는 길이어야 한다.

동양 역사학의 비조인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이광(李廣) 장군을 평하면서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고 찬양했다.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밑에 자연스레 샛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달기에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들기 때문이다. 바른 언론의 꽃은…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