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이념편향 대한민국을 흔든다
문화계 이념편향 대한민국을 흔든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04.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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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회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문화권력의 본질을 탐구했다. 아비투스(habitus)란 특정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성향,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체계를 의미한다. 집단 내에 존재하는 동질적 특정과 집단 간에 존재하는 배타적 이질성으로 계급 구성원들의 문화적 행동 특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지식인과 예술인의 성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장(場)에서 계급적으로 형성된다. 그에게 사회란 구조물이 아니라 개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망이고,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지식인과 예술인은 알튀세르가 지적한 바처럼 ‘호명(呼名)’된다.

이렇듯, 한 문화예술인의 저작은 그 사회의 장(場) 안에서 결정된다. 지식사회학적 접근 방식에 의하면 순수한 개인의 창작물이란 없으며, 창작자의 의식은 그가 속한 여러 중층적 장들에 의한 반영물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문화의 다양성은 결국 사회적 이념과 가치 간에 충돌 점으로부터 운동성을 가진 헤게모니를 위해 경쟁하는 양상을 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문화의 정치성과 사회적 현실

좌파 지식인인 부르디외의 논지와 알튀세르의 호명론을 우파가 수용할 수 있다면 문화는 곧 정치성을 갖는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이때 정치성이란 다양성을 하나의 기획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이질성들 간에 대립관계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왜 문화적 다양성을 굳이 하나의 기획으로 만들려는 정치성이 필요한 것일까.

그렇게 되는 데는 그 사회가 놓여 있는 ‘구체적 현실’ 때문이다. 한 사회의 현실은 개인들이 갖는 목적과 처지의 개선 욕구로 인해 동력을 갖고 변화하려 든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문화인들 중에는 독립과 해방을 꿈꿨던 이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의지의 차원에서 그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민족주의 예술문화를 지향했다.

▲ 해방 후 좌·우간 갈등은 문화인들로 하여금 예술을 공산혁명의 도구화 하는데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 그 관성의 힘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문화역역을 좌파일색으로 만들고 있다. / 사진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홍위병들의 공연장면

반면 일체의 현실을 포기하고 도피하는 작품들도 등장했다. 해방 후 좌·우간의 갈등은 문학인들로 하여금 공산 혁명에 예술을 도구화하는 데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 그 관성의 힘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문화영역을 좌파일색으로 만들고 있다.

문화전쟁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행위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thing)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질서’로 파악했다. 이때 적(Enemy)이란 타자로서의 이질성을 띠는 약한 갈등으로부터 무력으로 대결해야 하는 극단적인 적대성까지를 포함한다.

‘문화전쟁’이란 바로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문화전쟁은 곧 정치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가치 투쟁의 양상이기도 하다. 문화계 종사자라면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문화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이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렇다’라는 존재론적인 문제다. 따라서 문화가 갖는 정치성으로부터 우리는 승자와 패자라는 결과적 현실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좋은 것(Good)인가’라는 판단이다.

이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를 위해 “ ‘올림푸스의 신들이 방탕하다’거나, ‘전쟁에 나선 장군들이 인간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시인들의 시구절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에서도 제기된다. 현명한 소크라테스가 시인들의 불경한 시를 검열하고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그가 파시스트여서가 아니라, 아테네가 처한 구체적 현실 때문이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본 것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좋은가’였다.

오늘날 ‘군대내 동성애 합법화’가 문화전쟁의 한 전선(戰線)이라면,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논쟁의 논거들의 옳고 그름보다는 군대내 동성애 합법화라는 결과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이어야 한다. 옳은 것(Right)이 반드시 그 결과로서도 ‘좋은 것(Good)’임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좌파일색의 한국 문화계 현실

“일반 국민은 보수와 진보가 50대50이지만 문화 쪽은 진보가 거의 98%까지 장악하고 있다.” 작가 이문열 씨는 2013년 <미래한국>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문열 씨가 말한 ‘진보’란 사실 문화계 ‘좌파’라고 해석된다.

이들은 지난 김대중 정권 시절, 정부의 각종 지원으로 마치 영화속 에일리언의 유충처럼 인큐베이팅돼 왔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 시절, 숙주의 신체를 뚫고 나오는 ‘체스트 버스터’라는 성체(成體)로 성장했다. 그 결과 문화 좌파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속 ‘괴물’처럼 오늘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 ‘괴물’ 봉준호 감독이 민노당 당원 이었다는 점은 사실 중요치 않다. 공전의 히트를 친 ‘웰컴투 동막골’, ‘JSA공동경비구역’과 같은 영화는 북한군에 대한 동정심에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들의 권력은 문화계에서 그야말로 ‘무소불위’하다. 2010년 보수적 코드의 조희문 영화진흥위원장을 이명박 정권의 문화관광부가 중도 해임했던 배경에는 좌파 문화권력이 있었다. 그 힘은 ‘박정희 미화’라는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한 편의 연극을 공공극장에서 퇴출시킨 사례로 이어진다.

민중극단의 연극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등 세 인물을 등장시켜 70년대 경제개발을 그린 작품이다. 2013년, KBS에서는 60~70년대 현대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정규 편성을 놓고 노조와 PD협회가 ‘박정희를 미화하려 한다’는 이유로 편성 저지 투쟁에 돌입하기도 했다.

아직 한 편의 내용도 확정되지 않은 기획안에 ‘박정희 미화’라는 딱지를 붙였던 노조는 ‘60,70년대의 현대사를 다루게 되면 자연히 박정희의 치적을 언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사실 KBS는 김대중 정권 시절 ‘그때를 아십니까’라는 현대사 시리즈를 방송했다. 당시 이 프로그램은 KBS내 현대사 기획반이라는 조직이 담당했고 대표적인 좌파 성향의 작가들과 PD들이 제작을 맡았다.

이렇듯 문화, 언론 전반에 좌파의 힘이 공고해지면서 문화관광부라는 정부 조직의 관료들도 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연극 ‘한강의 기적’의 공연불가에 대해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극장 측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을까.

좌파 정권이 키운 기형적 문화권력

이런 배경을 잘 설명해 주는 작가가 한 사람 있다. 바로 3권의 전교조 비판서를 낸 바 있는 정재학 씨다. 그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책을 구입하려 했지만 서점에서 책 주문마저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토로했다. 진열도 안할 뿐만 아니라 구입을 신청해도 출판사가 연락이 안 되거나 품절됐다고 한다는 것이다. 정재학 씨의 증언을 직접 소개하면 이렇다.

“서점의 좌익화는 출판업계와 서점, 서점과 서점들 간의 강력한 트러스트(trust)가 구축됐다는 증거입니다. 전교조 교사들의 비교조 교사에 대한 집단 왕따나 따돌림에서 알 수 있듯이 좌익 출판업자들 간의 담합에 동조하지 않은 출판사 혹은 서점에 불이익을 주는 따돌림이 있었다고 봐야죠. 그 결과 우리 대한민국의 서점엔 좌파인사의 책이 잘 팔리고 좌익 관련 서적이 주류를 이루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죠.”

정재학 씨의 이러한 증언은 그가 출판사와 서점들 관계자들로부터 들어 알게 된 것이다. 실제로 서점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나 자유주의, 또는 보수주의 시각을 담은 책들은 구경하기 어렵다.

보수 지식인들의 게으름 문제라고 볼 수만은 없다. 정부의 출판 지원과 같은 정책자금이 대부분 좌파 지식인들과 관계 있는 출판사들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2012년 청와대에서 작성됐다는 ‘문화계의 균형전략’이라는 한 보고서에 의해 폭로됐다.

이 보고서는 ‘과거 정권들이 좌파진영의 문화계에 치중했던 정책지원금을 끊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문화계와 정치권에 커다란 쟁점이 되기도 했다. 1차 출판시장이 좌파에게 점령당한 한국의 문화지형은 2차 지형인 영화와 방송에 그 에너지를 공급한다.

공전의 히트를 친 ‘웰컴투 동막골’, ‘JSA공동경비구역’과 같은 영화는 북한 인민군에 대한 동정심에 호소하는 내용이었고 ‘효자동 이발사’와 같은 영화는 보수 정치인들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했다.

‘괴물’ 봉준호 감독이 민노당 당원이었다는 점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자유보수진영에서 그러한 역량을 가진 문화 예술인들의 활동이 대단히 위축됐다는 사실이다. 능력이 없어서일까. 하지만 작가 이문열 씨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함축한다.

“문인들은 보수색(色)을 드러내는 즉시 불이익을 당한다.”

실제로 이문열 씨는 노무현 정권에서 그의 책들이 노사모 세력들에 의해 불타는 ‘책 장례식’을 당했다. 후배 문인들이 울음을 삼키며 그에게 “함께 갈 수 없어 죄송하다”고 말하며 연락을 끊었다는 증언은 그로서도 고백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창비 권력’이라고 불리는 백낙청의 좌파 문화권력은 이후 한국 현대문학을 폐쇄적이고 소아적 자기 분열로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렇듯 출판계가 좌파의 권력 중심으로 편제되면서 이 출판으로부터 가장 영향력을 많이 받는 방송계가 좌파 문화 중심으로 떠오르게 됐다. 바로 KBS를 비롯한 방송사의 언론노조가 창설된 1993년부터다.

KBS 방송노조는 민주화의 동력을 타고 공영방송사의 편성권과 인사권에까지 그 힘을 미쳤다. 그 결과 정통 다큐멘터리의 미학을 이어오던 KBS의 많은 PD들이 KBS를 떠났고 그 자리는 정치 PD들이 차지했다. 반미, 반자본 심지어는 종북의 색깔을 담은 방송 프로그램들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기에 꽃을 피웠다.

방송은 혁명의 도구였고 따라서 외부의 방송 작가들도 그러한 성향으로 충원돼 갔다. 1차 문화시장의 좌편향 출판서적들이 좌편향 방송물의 소스가 된 결과는 참혹했다.

균형을 잃은 정부, 문화의 창달자로서 공영방송의 타락

고품격 문화 다큐멘터리는 찬밥 신세로 전락했고 이념지향적 르포물과 시사보도물들이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미학을 파괴한 결과 한국의 방송 다큐멘터리는 세계 방송시장에 명함을 내밀지도 못할 만큼 질적 하락을 겪게 됐다.

일본 NHK가 세계 방송 다큐멘터리 시장에서 두각을 발휘할 때 3대 공영방송이라는 KBS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로 추락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저열화에는 문화관광부 관리들의 보신주의와 진보라는 껍데기 좌파에 포획된 야당 정치인들, 그리고 보수 정치인들의 무관심과 기회주의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불균형은 시정돼야 한다.

‘종말론’과 ‘지상천국론’의 좌파와 투쟁하는 우파의 문화진지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이 문화에 내포된 정치성의 본질과 그로 인한 헤게모니 투쟁의 불가피성을 살펴보고 한국 현실에서 이 양상이 어떠한지를 살펴봤다.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사실은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의 한 모습이 결코 아니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문화적 다양성은 결국 현실을 목적에 맞게 규정하려는 제 정파들 간에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일체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화의 정치성을 탈이념적, 탈정치적으로 추구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결국 헤게모니를 향한 문화권력 의지를 가진 집단에 대항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 자유·보수 문화인들은 이에 길항적 헤게모니를 창출해야 하는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게 된다.

그 방법론은 집단, 계급, 젠더, 민족, 생태와 같은 허구적, 전체주의적 문화운동에 맞서서 개인과 자유의 미학, 그리고 인문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 사료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에 바로 <국제시장>과 같은 성과가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갑수는 비록 국가주의 안의 한 개인이었지만, 그는 국가주의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부르주아적 가치를 수용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든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유·보수의 문화운동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을 내일’을 확신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렇기에 지상천국을 건설하려는 좌파의 문화운동이 가진 허구를 드러내야 한다. 이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현실은 ‘견딜 만한 현실’임을 대중들이 자각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기려 들지 않고, 지지 않는’ 문화운동이야말로 우파가 지향해야 할 미학적 태도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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